わたしたちのために呪いとなって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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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 3章7節~14節
3:7だから、信仰によって生きる人々こそ、アブラハムの子であるとわきまえなさい。
3:8聖書は、神が異邦人を信仰によって義となさることを見越して、「あなたのゆえに異邦人は皆祝福される」という福音をアブラハムに予告しました。
3:9それで、信仰によって生きる人々は、信仰の人アブラハムと共に祝福されています。
3:10律法の実行に頼る者はだれでも、呪われています。「律法の書に書かれているすべての事を絶えず守らない者は皆、呪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3:11律法によってはだれも神の御前で義とされないことは、明らかです。なぜなら、「正しい者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からです。
3:12律法は、信仰をよりどころとしていません。「律法の定めを果たす者は、その定めによって生きる」のです。
3:13キリストは、わたしたちのために呪いとなって、わたしたちを律法の呪いから贖い出してくださいました。「木にかけられた者は皆呪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3:14それは、アブラハムに与えられた祝福が、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異邦人に及ぶためであり、また、わたしたちが、約束された“霊”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ためでし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 3章7節~14節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어
2020년 6월 7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갈라디아서 3장 7절~14절
서론
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서 성령에 의해 시작된 수많은 기적과 이적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일방적인 믿음의 수용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밝힌 후,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더욱 논증해 나갑니다. 당시 복음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세운 회당에서 선포되었고,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에 익숙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신약 교회에서는 구약 성경만이 본문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바울은 구약 성경을 통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점으로 바울은 율법이 명하는 도덕적인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구원을 위한 공로로 여기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율법 그 자체는 거룩하고 선한 것이지만,「어떤 사람이라도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둘러싸고 바울과 유대교의 전통적인 랍비적 해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랍비들의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방인 같은 죄인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율법을 모두 지킬 수도 있다는 전제에 서 있습니다. 일본인이 자신들의 조상이나 천황의 혈통을 미화하고 영웅시하듯이, 랍비들도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미화하고 영웅시했습니다. 랍비들이 자랑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은 당시 아직 율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열 가지 시련에서 공적을 세워(랍비 아빈(Abin)과 랍비 아하(Aha) 등 아모라임[설교자들]에 따르면) 율법을 모두 완수했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받았다고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열 가지 공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랍비마다 이해가 다르지만, 열 번째 공적은 「제단에서 이삭을 바치는 대신 숫양을 바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만장일치로 동의했습니다. 그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과 혈연 관계에 있는 자신들은, 의인 아브라함 덕분에 의롭다 인정받고 있다고 의심 없이 믿었던 것입니다. 랍비들에게는 결코 율법 속에 분명히 기록된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에 시선이 머무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들의 눈에는, 그 약속이 가려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자신들에게 어떤 행위를 명하셨는지, 그리고 무엇을 금하셨는지에 대해서만 읽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열성적인 바리새파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왜 율법에 대한 그러한 편견을 떨쳐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바울에게 임하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의 눈을 열어 주시고 복음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주어졌다고 생각됩니다. 즉 율법이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단순한 행위의 규범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에 의한 선택과 구원의 이야기이며, 그 선택과 구원은 유대 민족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갈라디아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던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므로, 「철저한 유대교도」는 아니었고, 일단, 그들 나름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고백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는 불가능하더라도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가능했다는 자부심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놓지 않고 굳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자신들 안에 스며든 랍비적 전통적 해석을 떨쳐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자신들은 율법을 모두 지키고 행할 수는 없지만, 아브라함의 공로에 의지하려고 생각했고, 그 결과 할례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종종 「실제로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인가?」라고 논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할례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표징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확증하는 「할례」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1)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그러한 갈라디아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과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바울은「여러분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 생각으로 되돌아가지 말고, 온전히 그리스도의 의에, 믿음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야말로 아브라함과 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며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3: 7~9절을 보십시오.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구원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의지하는 사람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 창세기 12: 3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 한가운데에, 이미 이방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복음이 미리 드러나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할례를 받고 일단 유대인이 되어야 비로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아버지가 아니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모든 이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자의 아버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2) 율법에 대한 유대교의 전통적 해석에 대한 정정
10~12절은 아마도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했던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들의 해석을 바로잡고 있는 부분으로 보입니다. 3:10절을 보십시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것은 신명기 27:26절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실제로 비교해 봅시다. 신명기 27: 26절을 보십시오.
신명기 27장
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명기의 이 구절만 보면, 율법을 지키고 행하면 의롭다 함을 얻고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겠네요. 하지만 이 말씀 어디에도 의나 축복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객관적으로,「이 율법의 말씀을 ‘모두’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율법에 의지하는 모든 사람은 저주 아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저주 아래에 있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전통적인 해석에 수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 12절을 보십시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레위기 18: 5절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만, 앞서와 마찬가지로 레위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율법을 지키고 실천함으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으므로, 율법의 실천을 장려하면서 생명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러한 전통적인 해석에 정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8: 5절을 살펴보십시오.
레위기 18장
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확실히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행한다면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란 공로로, 보상으로 주어지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바울의 해석은「공로로서의 생명」, 「보상으로서의 생명」임을 강조하며, 그 생명은 오히려 「믿음으로 얻는 생명」, 「은혜로 주어지는 생명」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에서 선을 긋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에 의지한다면, 공로로서의 생명, 보상으로 주어지는 생명을 기대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만약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는 경우에는, 그 반대로 그 보상으로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12절은 10절과 마찬가지로, 율법에 의지하는 모든 사람은「저주 아래 있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속량
사람은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율법과는 다른 또 다른 의의 길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의 길이며,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서 구원을 위해 주신 유일한 이름입니다. 갈라디아서 3: 13~14절을 보십시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로괸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3절에 「속량하셨으니 (과거형)」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설명하기 위해 신명기 21:23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1:18~23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신명기 21장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여기서「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한 탓에 돌로 쳐 죽임을 당하고 나무에 매달린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임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이와 완전히 똑같은 상황이 등장합니다. 즉, 방탕한 아들이 방탕한 생활에 빠져 술을 마시고, 부모의 유산을 물처럼 탕진해 버린 뒤, 어느 날 종으로라도 고용해 달라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이 방탕한 아들을 공동체에서 악을 제거하기 위해 돌로 쳐서 나무에 매달기는커녕, 잔치를 베풀어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축하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구약의 하나님이 엄격하신 분이셨는데, 신약이 되면서 느슨하고 타협하는 하나님으로 변질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탕자가 용서받고, 저주에서 해방되어, 아들로 받아들여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탕자를 대신하여 처형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탕자를 대신하여 저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대리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생애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죄를 씻어 주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그 피를 통해 우리를 사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려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죄가 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인에게서 나셔서 율법 아래에 두신 것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의가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의,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 온 인류에게 죄와 더러움이 전가된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그 사명을 이루심으로써 죄와 저주가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와 지혜와 거룩함과 구원과 영생이 믿는 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육신으로 태어난 전 인류의 시조(머리)이지만,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태어난 믿는 자들의 첫 열매(머리)가 되셨습니다. 대속을 통해 아무런 공로 없이, 무상으로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그것은 너무나 방대한 선물이라서, 좀 너무 관대하지 않은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해지도록 더더욱 나쁜 일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점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믿지만, 역시 어느 정도는 우리 쪽의 의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자신의 의를 주장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 철저한 유대교도이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이든,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의에 의지하고 있는 한, 여전히 율법 아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결론
사람은 결코 율법을 모두 지키고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다윗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인, 아무런 행함이 없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율법과는 다른 또 하나의 의의 길이 마련되어야만 했습니다. 다른 의의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의 사역이며,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에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보상으로, 공로로 주어지는 의를 포기하며,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으며, 생명으로 옮겨져, 예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축복들은 우리 밖에 있으며, 우리는 이 세상에 있어 그것들을 경험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이미 주어진 것으로 믿고 살아가게 됩니다.
【序】
ガラテヤの諸教会において聖霊によって始められた数々の不思議と奇跡が、律法の行いによってではなく、一方的な信仰の聞き取り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ことをパウロは明らかにした後に、律法の行いにより頼むことの愚かさについてさらに旧約聖書を引用しながら論証していきます。当時、福音は散らされたユダヤ人が建設した会堂において語られ、ガラテヤの人々が慣れ親しんでいたかどうかに関係なく、新約の教会においては、旧約聖書だけがテキストとして与えられていましたので、パウロは旧約聖書を通して論証しています。最初に明らかにしておく点としてパウロは、律法に命じられている道徳的な行いを否定しているのではなく、律法の行いを救いのための功績と考えることを否定していました。律法それ自体は聖なるものであり、善いものですが、「いかなる人であっても、律法によっては義とされない」ということです。この点をめぐり、パウロとユダヤ教の伝統的なラビ的解釈の間に、大きな差がありました。ラビたちの伝統的解釈によれば、イスラエルは異邦人のような罪人ではないし、場合によっては律法を全て守ることも出来るという前提に立っています。日本人が自分たちの先祖や天皇の血統を美化し英雄視するように、ラビたちも自分たちの先祖アブラハムを美化し英雄視していました。ラビたちの誇る父、アブラハムとは、当時まだ律法がなかったにもかかわらず、十種類の試練において功績を立てて(ラビ・アビンAbinとラビ・アハAhaなどのAmoraim[演説家たち]によると)、律法を全て全うしたために義とされたと認識されていました。十種類の功績とは具体的に何を指しているのか、ラビごとに理解が異なりますが、10番目の功績は、「祭壇でイサクを捧げる代わりに雄羊を捧げたこと」として全員一致していました。その偉大な父祖アブラハムと血縁関係にある自分たちは、義人アブラハムのために義とされていると信じて疑わなかったのです。ラビたちには、決して、律法の中に確かに記されている神の恵みの約束について、目が止ま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というより、彼らの目には隠されて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神は自分たちに律法を通して、どのような行いを命じているのか、そして何を禁じているのか、ということばかりを読み取っていました。それでは、熱心なファリサイ派のユダヤ人であるパウロは、なぜ律法に対するそのような偏見を拭い去ることが出来たのでしょうか。恐らくパウロに臨んだ復活のイエス様がパウロの目を開いて下さり、福音を啓示してくださったために、律法に対する新しい解釈が与えられたと思われます。即ち律法とは、十字架のイエス・キリストを指し示すものであり、単なる行いの規範書ではなく、イエス・キリストを中心とした、神による選びと贖いの物語であって、その選びと贖いはユダヤ民族を超えて、全ての民族に開かれた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を悟ったのです。このような観点から考えるなら、ガラテヤの人々を惑わしてたユダヤ主義的キリスト者とは、イエス様をメシアとして受け入れていますので、「バリバリのユダヤ教徒」ではなく、一応、彼らなりに「律法の行いによっては義とされることは出来ない」ということを告白した人たちであったと言えるでしょう。しかしユダヤ主義者たちは、自分たちには不可能であっても、偉大な父アブラハムには可能であったという自負心を相変わらずに心のどこかに手放すことはなく固く握りしめていました。どうしても自分たちの中にしみ込んだラビ的伝統的な解釈を拭い去る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そのために、自分たちは律法をすべて守り行うことは出来ないけれど、アブラハムの功績にすがりつこうと考えて、その結果、割礼にあれほど執着したと考えられます。彼らは、しばしば「実際に、誰がアブラハムの子孫なのだろうか?」と議論していました。そして割礼こそアブラハムの子孫であることのしるしであると考え、神とアブラハムの間の交わされた契約を確証する「割礼」にすがりついていたのです。
【1】. 誰がアブラハムの子孫なのか
そのようなガラテヤ人を惑わしているユダヤ主義者とガラテヤの兄弟たちに対して、パウロは、「あなた方は行いによっては義とされないことを知ってイエス様を受け入れたのでしょう。古い考えに逆戻りしないで、完全にキリストの義に、信仰によって依り頼む人々こそ、アブラハムと霊的な関係を持つことが出来るのではないですか」と福音を想起させています。3:7~9節を御覧ください。
“だから、信仰によって生きる人々こそ、アブラハムの子であるとわきまえなさい。聖書は、神が異邦人を信仰によって義となさることを見越して、「あなたのゆえに異邦人は皆祝福される」という福音をアブラハムに予告しました。それで、信仰によって生きる人々は、信仰の人アブラハムと共に祝福されています。”
ここでは、アブラハムがただ神に依り頼むことによって救われたのと同じように、信仰に依り頼む人こそアブラハムの子孫であると語られています。ところで8節において創世記12:3の御言葉を引用していますが、パウロは神とアブラハムとの約束のただ中に、既に異邦人が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るという福音が、前もって示されていることを指摘しています。ですから、異邦人が割礼を受けて一旦ユダヤ人となって初めて義とされるのではなく、ただ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従ってアブラハムとは、ユダヤ人の父なのではなく、ユダヤ人も異邦人も関係なく、ただ信仰によって神の恵みを受け入れた全ての者の父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アブラハムは割礼を受けた者の父ではなく、聖霊によって心の割礼を受けた者の父なのであります。
【2】. 律法に対するユダヤ教の伝統的解釈への訂正
10~12節は、恐らくパウロが、ユダヤ主義者たちが自分たちの考えを主張するのに引用した聖句をそのまま引用しながら、彼らの解釈を訂正しているところであると考えられます。3:10節を御覧ください。
“律法の実行に頼る者はだれでも、呪われています。「律法の書に書かれているすべての事を絶えず守らない者は皆、呪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これは、申命記27:26からの引用ですが、実際に見比べてみましょう。申命記27:26を御覧ください。
“「この律法の言葉を守り行わない者は呪われる。」民は皆、「アーメン」と言わねばならない。”
この申命記の記事だけを見ると、律法を守り行えば義とされ、祝福されるように考えてしまいそうですね。しかしこの御言葉の中にはどこにも義について、祝福について語られていません。ただ、客観的に、「この律法の御言葉を“すべて”守り行わない者は呪われる」ということを示しているだけ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実際には律法を全て守り行うことが出来る人は一人もいませんから、律法に依り頼む全ての人は呪いの中に閉じ込められるのです。従ってパウロは「呪いに閉じ込められる」ということを強調しながら、伝統的解釈に訂正を迫っています。続いて、3:12節を御覧ください。
“律法は、信仰をよりどころとしていません。「律法の定めを果たす者は、その定めによって生きる」のです。”
これは、レビ記18:5からの引用ですが、これも先ほどと同じようにレビ記の記事を見ると、律法を守り行うことによって命を得ることができるので、律法の行いを奨励しつつ、命への道を教えていると考えてしまいそうですが、そのような伝統的解釈に訂正を迫っています。レビ18:5を御覧ください。
“わたしの掟と法とを守りなさい。これらを行う人はそれによって命を得ることができる。わたしは主である。”
確かに律法を完全に守り行えば、命を得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しかし、その命とは、功績として、報いとして与えられる命を指しています。従って、パウロの解釈は「功績としての命」、「報いとしての命」であることを強調しつつ、その命とは、むしろ、「信仰によって得られる命」、「恵みによって与えられる命」とは一切関係ないということで一線を引いているわけです。もし、律法により頼むならば、功績としての命、報いとしての命に期待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して、もし、律法をすべて守ることが出来ない場合は、その反対にその報いとして、呪いの下に置かれてしまうのです。このようにして12節は10節と同じ様に、律法に依り頼む全ての人は「呪いの中に閉じ込められる」ということを強調しているのです。
【3】. キリストの贖い
人間は、義とされるために、神の祝福に与るために、律法とは異なる別の義の道が、必要となりました。それ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成し遂げられた救済の道であり、キリストは天下において、救いのために与えられた唯一の名であります。ガラテヤ書3:13~14節を御覧ください。
“キリストは、わたしたちのために呪いとなって、わたしたちを律法の呪いから贖い出してくださいました。「木にかけられた者は皆呪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それは、アブラハムに与えられた祝福が、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異邦人に及ぶためであり、また、わたしたちが、約束された“霊”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ためでした。”
13節で「贖い出してくださいました(過去形)」とありますが、これは、イエス様の十字架を指しています。イエス様の十字架がどのような意味だったのかを説明するために、申命記21:23を引用していますが、申命記21:18~23を御覧いただけますでしょうか。
“ある人にわがままで、反抗する息子があり、父の言うことも母の言うことも聞かず、戒めても聞き従わないならば、両親は彼を取り押さえ、その地域の城門にいる町の長老のもとに突き出して、町の長老に、「わたしたちのこの息子はわがままで、反抗し、わたしたちの言うことを聞きません。放蕩にふけり、大酒飲みです」と言いなさい。町の住民は皆で石を投げつけて彼を殺す。あなたはこうして、あなたの中から悪を取り除かねばならない。全イスラエルはこのことを聞いて、恐れを抱くであろう。ある人が死刑に当たる罪を犯して処刑され、あなたがその人を木にかけるならば、死体を木にかけたまま夜を過ごすことなく、必ずその日のうちに埋めねばならない。木にかけられた者は、神に呪われたものだからである。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が嗣業として与えられる土地を汚してはならない。”
ここで、「わがままで、反抗する息子」は、放蕩にふけり、大酒飲みのために、石打ちで殺され、木にかけられるならば、この人は神に呪われた者であるということを現わしていました。ところが福音書においてイエス様のたとえ話の中で、全くこれと同じような状況が出て来ます。即ち、放蕩息子が放蕩にふけり、大酒を飲んで、親の相続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い切ってしまい、ある日、奴隷として雇ってもらうために再び家に帰って来ましたが、父親は、この放蕩息子を共同体から悪を取り除くために石打ちにして木に掛けるどころか、祝宴を開いて息子が戻ってきたことを喜び祝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これらのことは、旧約の神さまが厳しいお方であったのに、新約になって、ゆるゆるの妥協する神さまに変質された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放蕩息子が赦され、呪いから解放され、子として迎え入れられたのは、イエス・キリストが放蕩息子の代わりに処刑され、十字架にかけられ、放蕩息子の代わりに呪いとなられたからであります。ここにおいてイエス様が、信じる者の為に、代理贖罪の供え物となられたということが暗示されています。キリストは、そのご生涯を、神と人間の仲保者として、罪を清める大祭司としての職務を全うされました。ですから自ら進んで十字架に架けられ、ご自身を生贄として捧げられることにより、その血潮によって私たちを買い取られ、わたしたちを神に献げて、すべての罪から清めてくださったのです。つまり、キリストが罪となったことは、私たちをして、神の義となるようにするためでありました。キリストが女から生まれて律法の下に置かれたことは、私たちをして、律法の呪いから贖って私たちをして神の子とするためでありました。このように私たちが義とされる根拠は、キリストの義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の中にある義ではなく、私たちの外にある義、神の義であります。アダムが罪を犯し全人類に罪と汚れが転嫁されたように、全く同じような仕方によってキリストがその職務を成就され罪と呪いがキリストに転嫁され、キリストの義と、知恵と、聖さと、救済と、永遠の命が、信者に転嫁されるのです。アダムは、肉から生まれてきた全人類の始祖(頭)でありますが、キリストは霊によって生まれてきた信じる者の初穂(頭)となられたのです。代理贖罪によって何の働きもないのに、無償で、これらの「キリストにある祝福」が与えられました。私たちのものがキリストのものとなり、キリストのものが私たちのものとされましたのです。こんなことを言うと、それはあまりにも膨大な贈り物のために、ちょっと気前が良すぎるのではないか、もしそれが本当なら、キリストの恵みが増し加わるよう、もっともっと悪いことをしたらいいではないかと非難がでてきたほどであります。どうしてもその点に躓いてしまうために、キリストがメシアであることは信じるが、やはり、多少なりとも我々の側の義が必要なの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で、自分の義を主張してしまうのです。結局、イエス様を信じないバリバリのユダヤ教徒であろうと、イエス様を信じているユダヤ主義者たちであろうと、キリストの義ではなく、自分の義により頼んでいる限り、依然として律法の下に、呪いの下に置かれているのです。
【結論】
人は、決して律法をすべて守り行い、命を得ることはできません。アブラハムであろうとモーセであろうとダビデであろうと同じことです。罪びとが、何の働きもない者が、義とされて、神の全ての祝福に与るために、律法とは異なるもう一つ、別の義の道が、備え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別の義の道と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成し遂げられた救済の業であり、十字架上において完全に成就されました。私たちは、「自分の義」により頼むことを放棄し、報いとして、功績として与えられる義を放棄し、ひらすらキリストによって打ち立てられた「神の義」を信じ、イエス・キリストに信頼することによって罪赦され、義とされ、命に移され、イエス様の全ての祝福に与る者とされるのです。それらの祝福は私たちの外にあり、私たちはこの世にあって、それらを経験することも出来ず、知ることもできませんが、既に与えられているものとして信じて歩ませていただく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