キリストの真実によって義とされる 그리스도의 진리로 얻은 의로움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 2章15節~21節
【讃美歌277】
【主の祈り】
【信仰告白_ウェストミンスター小教理問答37~38】
問37 信仰者は死のとき、キリストからどのような恩恵を受けますか。
答 信仰者の霊魂は、彼らの死のとき完全に聖くされ、直ちに栄光に入り、信仰者の体は、なおキリストに結びつけられたまま、復活まで墓の中で休みます。
問38 信仰者は復活のとき、キリストからどのような恩恵を受けますか。
答 復活のとき、信仰者は、栄光の内によみがえらせられ、裁きの日に、公に承認され、無罪とされます。さらに、永久に、神を限りなく喜ぶことにおいて完全に祝福されます。
【献金】
【聖書朗読】
2:15わたしたちは生まれながらのユダヤ人であって、異邦人のような罪人ではありません。
2:16けれども、人は律法の実行ではなく、ただイエス・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ると知って、わたしたちもキリスト・イエスを信じました。これは、律法の実行ではなく、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義としていただくためでした。なぜなら、律法の実行によっては、だれ一人として義とされないからです。
2:17もしわたしたちが、キリストによって義とされるように努めながら、自分自身も罪人であるなら、キリストは罪に仕える者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うではない。
2:18もし自分で打ち壊したものを再び建てるとすれば、わたしは自分が違犯者であると証明することになります。
2:19わたしは神に対して生きるために、律法に対しては律法によって死んだのです。わたしは、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つけられています。
2:20生きているのは、もはやわたし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がわたしの内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わたしが今、肉において生きているのは、わたしを愛し、わたしのために身を献げられた神の子に対する信仰によるものです。
2:21わたしは、神の恵みを無にはしません。もし、人が律法のお陰で義とされるとすれば、それこそ、キリストの死は無意味になってしまいま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 2章15節~21節
그리스도의 진리로 얻은 의로움
2020년 5월 24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갈라디아서 2장 15절~21절
서론
초대 교회에서 이방인들에게 전도가 확대되자,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대립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립의 원인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 유대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유대교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민족주의적인 유대인들의 보복을 지나치게 두려워한 나머지, 그러한 왜곡된 복음을 가르치게 된 것이지만, 사실 그들 자신도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우월감을 가지고 이방인을 얕보는 습관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안디옥에서 바울과 베드로의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1) 율법과 다른 의의 길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진리
오늘의 본문인 2:15~21은 베드로에 대한 책망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실제로는 안디옥 교회의 일원이든, 예루살렘에서 온,「어떤 이들」이든, 혹은 이 서신의 독자이든, 모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그 뒤에 이어지는 3: 1절부터 4: 11절까지의 개요이며, 연결 고리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15~16절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통된 인식점을 바탕으로 논의를 시작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이든, 베드로든, 바나바든, 그들은 태생적으로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같은 죄인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즉 유대교의 옛 체계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16절에서 시편 143편 2절을 인용하고 있듯이, 율법을 행한다고 해서 누구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43편 1~2절은 다윗의 노래인데,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시편 143편
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다윗의 고백처럼 그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행할 수는 없습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죄를 지어, 인간 속에 원죄가 들어와 버린 이상, 모든 사람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며,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 대하여 율법은 이제 죄를 지적하는 거울의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길이 아니라, 사람에게 죄와 더러움, 타락을 가르치고, 위반에 대한 형벌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르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과는 다른「또 다른 의의 길」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의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모두 나를 증언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며, 구약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율법이 가리키는 바요, 율법의 완성이며, 율법의 끝이시면서 동시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복음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며, 의롭다 함을 얻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1~22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3장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처럼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점까지는 바울과 모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인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점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고 할 때 그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은「하나님의 의」이며, 즉 예수님께서 구원주로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이야말로 구원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이 의는 우리 안에 있는 의가 아니라,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오해해서는 안 될 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소유가 되어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지는 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로 돌아가서 2장 17~18절을 보십시오.
(2) 믿음으로 시작한 후, 행함(율법)으로 완성되는 것일까?
갈라디아서 2장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우리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내면에 더러운 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주의자들은, 의롭다 함이 믿음과 세례로 시작되어, 할례와 율법의 규범을 지키는 것으로 완성된다는 식으로 복음을 왜곡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유혹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존재합니다. 의롭다 함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사랑의 행위와 선한 행실로 완성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였을 텐데, 의롭다 함을 받았을 텐데, 처음에는 상태가 좋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안에 여전히 죄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경우, 세례를 통해 과거의 모든 죄는 용서받지만, (여전히 죄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후에 범한 죄에 대해서는 두 번째 구원 조치로서 고해, 즉 「용서의 성사」나 「고해성사」라고 불리는 예식을 마련했습니다. 사제에게 고해하고 고백함으로써 죄가 사해져 다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의롭게 되는 의롭다 함이 신비롭게 작용하여, 일상적인 윤리적 생활의 실제에서도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 한, 「자신의 의」가 되지 않는 한, 안심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자신들의 윤리적 기준으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지고, 즉 방종하게 사는 이교도들처럼 전락하는 것처럼 여겨져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에,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신 예수님을「죄의 조력자(봉사자)」라고 하는 비판을 무심코 내뱉은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애초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들어갈 때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것을 그만두고, 또한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겼을 텐데, 다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신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중요시하고, 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유대화시키려 하는 것은, 비록 율법 아래로 돌아왔다고 해도 한 번 율법을 깨뜨린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율법 위반자이며, 율법에 의해 죄로 정해진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관심사였던 「윤리적·도덕적 측면에서의 의롭다 함의 완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또한, 의롭다 함이 윤리적 행위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면, 의롭다 함은 도대체 어떻게 완성되는 것일까요?
(3) 의로움을 추구하는 삶
첫째, 갈라디아서 2 : 16절에서 바울이 사용한「의롭다 함」이라는 말은 법정 용어이며,「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선포되었다(과거형)」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재판관의 선고와 같은 법정적인 의미이므로, 이 문맥에서 「의롭다 선포되었다」는 말에는 윤리적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신비로운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죄인임에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기도 중에 「하나님, 저는 온전히 죄인입니다. 저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고 싶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찾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9~21을 보십시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의롭다 선포받는데, 이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율법에 따르면 죽어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것이 전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속전금이 모두 지불된 것입니다. 또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참여하여,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을 믿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의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의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롭다 함」이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의롭다 함을 경험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병든 자이면서 동시에 건강한 자이며,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요, 죄를 저지른 자이면서 동시에 무죄한 자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내적으로 볼 때 항상 죄인이지만, 외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항상 의롭다 인정받은 자들입니다. 반면, 위선자는 말씀(율법)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이 분명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의롭다 함을 간절히 구하지도 않고, 자신이 이미 「자신의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위선자의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당신의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장차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위선자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죄를 드러내는 율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위선자들은 내적으로는 항상 의로운 자들이지만, 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항상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은 믿음과는 전혀 무관하며, 자신을 죄인으로 정하는 율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공로에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위선자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며,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는 것입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다소 피로감을 느끼고 컨디션이 좀처럼 좋지 않지만, 의사의 「반드시 나을 것입니다」라는 약속을 믿고 의사의 처방에 따를 때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완전히 치유하실 때까지 그곳에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고와 약속」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에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평생에 걸쳐 「부디 도와주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며, 십자가의 예수님께로 돌아가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돌아가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롭다 하심을 요구하고, 희망하며, 기대하고, 기쁘게 확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약속하신 것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고, 자신의 사역으로서 완전히 성취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것을 맹세하시며 보증하셨기 때문입니다.
결론
첫째, 그리스도인에게 윤리와 도덕의 기초가 되는 것은 율법의 계명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스스로 기꺼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통해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의가 아니라,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적으로는 여전히 온전한 죄인이며, 스스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말씀대로 오직 의사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자신이 의롭다 함을 경험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며, 그리스도인은 의롭다 함을 요구하고, 바라며, 기대하고, 기쁨으로 확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序】
初代教会において異邦人に伝道が拡大していくと、ユダヤ人キリスト者と異邦人キリスト者の間に対立の兆しが見えてきました。この対立の原因を作ったのは、ユダヤ人キリスト者の中の、ユダヤ主義者たちの影響によるものと考えて間違いないでしょう。彼らは異邦人が救われるためには、ユダヤ化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説いていました。これは、エルサレムにおいてキリスト者ではない民族主義的なユダヤ人たちからの報復を恐れるあまりに、そのような歪曲した福音を教えてしまったのですが、実は、彼ら自身も、自分たちがユダヤ人であることに優越感を持ち、異邦人を見下すような習慣があ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そのような雰囲気の中で前回見ましたようにアンティオキアにおいてパウロとペトロの衝突が起こりました。
【1】. 律法とは異なる義の道(キリストの真実)が与えられた
本日の箇所である2:15~21は、ペトロに対するけん責の続きでありますが、実際はアンティオキア教会の一員であろうと、エルサレムから来た「ある人々」であろうと、或いはこの書簡の読者であろうと、全てのユダヤ人キリスト者に対してパウロは語っていると思われます。そして本日の箇所は、この後に続く3章1節から4章11節までの概要であり、連結点としての働きをもしています。最初にパウロは15~16節において、ユダヤ人キリスト者としての共通の認識点から議論を始めています。15~16節を御覧ください。
“わたしたちは生まれながらのユダヤ人であって、異邦人のような罪人ではありません。けれども、人は律法の実行ではなく、ただイエス・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ると知って、わたしたちもキリスト・イエスを信じました。これは、律法の実行ではなく、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義としていただくためでした。なぜなら、律法の実行によっては、だれ一人として義とされないからです。”
パウロであれ、ペトロであれ、バルナバであれ、自分たちは生まれながらのユダヤ人であって、異邦人のような罪人ではないが、しかしそれにも関わらず、人が救われるために、罪赦され義とされるために、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たということです。このことが何を意味するのかと言うなら、つまり、ユダヤ教の古い体系が十分でなかったこという告白でもありました。なぜなら、パウロが16節において詩篇143:2を引用しているように、律法の実行によっては誰一人義とされないからです。詩篇143:1~2はダビデの歌ですが、ダビデは次のように告白しています。聖書を御覧ください。
“主よ、わたしの祈りをお聞きください。嘆き祈る声に耳を傾けてください。あなたのまこと、恵みの御業によって/わたしに答えてください。あなたの僕を裁きにかけないでください。御前に正しいと認められる者は/命あるものの中にはいません。”
ダビデの告白のように誰一人、律法を完全に守り行うことは出来ません。人類の始祖であるアダムが罪を犯し、人間の中に原罪が入り込んでしまった以上、全ての人は異邦人と同じく罪人であり、義しいと認められる人は、誰一人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罪人に対して、律法はもはや罪を指摘する鏡の役割しかしないということです。律法は人を義とする道ではなく、人に対し罪や汚れや、堕落を教え、違反に対する刑罰と、神の聖さを教えるものに過ぎないということです。ところが、律法とは、異なる「別の義の道」が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福音であり、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打ち立てられた義であります。福音書のイエス様の御言葉で、律法と預言は全てわたしを証ししていると言われましたが、旧約聖書全体は、イエス・キリストにおいて啓示の絶頂に至るということでありまして、旧約聖書はキリストの中で成就し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従って次のように言う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
イエス様の人格は、律法の指し示すもの、律法の完成であり、律法の終わりであって、同時に恵みと真理が充満した福音であ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このイエス様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救われて、罪赦され、義とされるのです。ローマ3:21~22を御覧ください。
“ところが今や、律法とは関係なく、しかも律法と預言者によって立証されて、神の義が示されました。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り、信じる者すべてに与えられる神の義です。そこには何の差別もありません。”
このように、律法の規定を守ることによってではなく、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義とされるという所までは、パウロと、全てのユダヤ人キリスト者たちの共通認識でありました。しかし、ここで注意深く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イエス様を信じて救われるといった時に、その救いの根拠となるのは、「神の義」であり、即ちイエス様が救い主として成し遂げられた救済の御業こそが、救いの根拠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この義は、私たちの内側にある義ではなく、外側にある「神の義」です。ですから勘違いしてはならないことは、信仰によって神の義が私たちの所有となり、「私たちの義」となるということではなく、信仰によって義と見做されるということであって、私たちは依然として罪人に過ぎないということです。ガラテヤ書に戻り2:17~18節を御覧ください。
【2】. 信仰によって始められた後、行い(律法)によって完成されるのか?
“もしわたしたちが、キリストによって義とされるように努めながら、自分自身も罪人であるなら、キリストは罪に仕える者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うではない。もし自分で打ち壊したものを再び建てるとすれば、わたしは自分が違犯者であると証明することになります。”
私たちの体験からも分かりますように、キリスト者は、キリストによって義とされるように努めながらも、依然として自分の内面に汚らわしい罪があることに気づかされます。ですから、ユダヤ主義者たちは、義認というのは、信仰と洗礼によって開始して、割礼と、律法の規範を守ることによって完成されるというように福音を歪曲してしまいました。これと同じような誘惑は現代の私たちにもあります。義認は信仰によって開始し、愛の業によって、善き行いによって完成するという考え方です。このように考えてしまうのは分からないでもありません。それは、キリストを信じて受け入れたはずなのに、義認とされたはずなのに、最初は調子が良かったのですが、しばらくして私の内に依然として罪の残滓が残っていることが判明し、そのことを受け入れることが出来ないからでしょう。カトリック教会の場合、洗礼によって過去の全ての罪は許されますが、(依然として罪の残滓が残っているために)、洗礼を受けた後に犯してしまった罪については、第二の救済措置として懺悔、つまり、「ゆるしの秘跡」とか「告解」と呼ばれる礼典を作り出しました。司祭に懺悔して告白することによって罪赦され、再び義とされるという教えです。つまり、神によって義とされる義認が、神秘的に作用して、日々の倫理的生活の実際においても自分のものにならない限り、「自分の義」にならない限り、安心できない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す。特に当時のユダヤ人にとっては律法が、自分たちの倫理的規準として機能していましたので、その律法から解放されて自由になるということは、ユダヤ人と異邦人の区別がなくなり、即ち放縦に暮らしている異教徒たちのように成り下がることのように思われて、どうしても納得がいかず、律法から解放させたイエス様のことを「罪の助成者(奉仕者)」であるというような批判を、ついつい言ってしま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しかし、そもそもユダヤ人キリスト者は信仰に入る際に、律法の業に頼ることをやめ、そして、自分の行いに頼ることをやめ、キリストにすべてを委ねたはずなのに、再び、律法を守ることを自分を支える支柱として重要視し、それどころか異邦人をユダヤ化させようとすることは、たとえ律法の下に戻ってきたと言っても、一度律法を壊したことには変わりないために、律法の違反者であって、律法によって罪に定められるとパウロは言っているのです。それでは、彼らの関心の的であった、「倫理的・道徳面における、義認の完成について」は、どのように考えればいいのでしょうか。また、義認が倫理的行いよって完成されるのではないとしたら、義認とは、一体どのようにして完成されるのでしょうか。
【3】. 義認を追求する人生
第一にガラテヤ書2:16においてパウロの使用している「義認」という言葉は、法廷用語であり“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義としていただく”という箇所は「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義と宣告された(過去形)」という意味になります。これは裁判官の発令のような、法廷的な意味であるために、ここでの文脈においては、「義と宣告された」という言葉に、倫理的に変化をもたらすような神秘的な意味は含まれていないと解釈す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つまり、キリスト者は依然として罪人に変わりない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いつも、キリスト者は祈りの中で「神よ、私は全くの罪人です。私はあなたの戒めを守りたいと思っていますが、それを実行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わたしは自分の望む善は行わず、望まない悪を行っています。どうか助けてください。」と告白するのです。そしてキリスト者はキリストにおいて、キリストの中から義を探すのです。ガラテヤ書2:19~21を御覧ください。
“わたしは神に対して生きるために、律法に対しては律法によって死んだのです。わたしは、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つけられています。生きているのは、もはやわたし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がわたしの内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わたしが今、肉において生きているのは、わたしを愛し、わたしのために身を献げられた神の子に対する信仰によるものです。わたしは、神の恵みを無にはしません。もし、人が律法のお陰で義とされるとすれば、それこそ、キリストの死は無意味になってしまいます。”
キリスト者は信仰によってのみ、神様から義と宣告されるのですが、なぜなら、信仰によってキリストの義が転嫁されるからです。私たちは聖なる律法によれば、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罪人でありました。そのために信仰によって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付けられて死にました。これが転嫁であります。十字架上において贖い金が全て支払われたのです。また、信仰によってキリストと共に復活に与り、もはや、生きているのは私ではなく、キリストが私の中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あり、キリストの義が転嫁されることを信じて神と共に生きるのです。つまり、キリスト者の義は自分の内にはなく、ひたすら神の義の中に、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の中にあるということです。ということは、「義認」とは神様が御覧になられる時に「義しい」として見做されるということであって、キリスト者はこの世において自分が義とされたことを経験することも出来ず、知ることもできない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ですからキリスト者はこの地上においては、病気にかかった者であると同時に、元気な者であり、罪人であると同時に義人であり、過ちのある者であると同時に、無罪な者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聖徒は内的に見るなら、常に罪人でありますが、外的には、神様が御覧になられる時には、常に義とされた者たちなのです。一方、偽善者は御言葉(律法)に照らした時に、明らかに自分が罪人でありながら、自分を罪人と認定することなく、そして義とされることを切に祈り求めるのでもなく、自分が既に「自分の義」を所有していると信じています。従って偽善者の祈りは次のようになります。「私はあなたの戒めを守ることが出来ますし、将来必ず行うことでしょう。」偽善者のこのような考え方は、罪を示す律法をそのまま受け入れることをしないで、即ち、神の御言葉を偽りとし、神を偽り者としている行為なのです。従って、偽善者においては内的には常に義しい者たちでありますが、彼らは外的には、神が御覧になる時に常に罪人なのです。なぜなら、彼らの考えは信仰とは全く関係がなく、自分を罪に定める律法をそのまま受け入れることをせず、自らの功労に頼りながら、神に対して自分を誇るからです。言い換えるなら、偽善者は自分の人生を、自分自身の関心のために生きて、そしてその目的のために神を利用しようとするのであります。
病気に煩った人は多少の倦怠感があり、体調が中々すぐれないけれど、医者の「必ず良くなるでしょう」という約束を信じて、医者の処方に従う時、元気を回復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同じように、キリスト者は、事実上、罪人ではありますが、神が完全に治療する時までに、そこから救い出すという「神の宣告と約束」を信じ、御言葉に従順するために義人とされるのです。したがって、信仰の人は、生涯を通して「どうか助けてください」という祈りを捧げながら、十字架のイエス様に立ち帰り、私たちを愛されたその愛に立ち帰りながら、信仰によって義認を追求する人生となるのです。キリスト者は自分の義認を要求し、希望し、期待し、喜んで確信する人生を送ることになります。そして、神さまはご自身が約束されたことを決して放棄することはされず、ご自身の御業として完全に成就してくださるのです。なぜなら神はご自身の民に、ご自分の名にかけてそのことを誓われて、保証されたからです。
【結論】
第一に、キリスト者にとって倫理・道徳の基礎となるのは何かと言えば、律法による戒めではなく、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り、自ら進んで、ご自身を十字架に明け渡されたイエス様の愛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この十字架から流れ出る愛によって、道徳的な歩みを踏み出すことが出来るのです。第二に、私たちは、私たちの内側にある義ではなく、外側にある「キリストの義」が根拠となって、救われるということです。従って内的には依然として全き罪人であり、自分には何も誇るものはないのですが、御言葉の通りに、ただ医者であられるイエス様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義と見做されるのです。従ってこの世において自分が義とされたことを経験することも出来ず、知ることもできませんが、神はご自身の御業を決して放棄することはされず、ご自身が約束されたことを必ず果たされることを信じながら、キリスト者は義とされることを要求し、希望し、期待し、喜んで確信する人生を送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