バラバかキリストか 바라바인가 그리스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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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7章11節~26節
27:11さて、イエスは総督の前に立たれた。総督がイエスに、「お前がユダヤ人の王なのか」と尋問すると、イエスは、「それは、あなたが言っていることです」と言われた。
27:12祭司長たちや長老たちから訴えられている間、これには何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
27:13するとピラトは、「あのようにお前に不利な証言をしているのに、聞こえないのか」と言った。
27:14それでも、どんな訴えに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ので、総督は非常に不思議に思った。
27:15ところで、祭りの度ごとに、総督は民衆の希望する囚人を一人釈放することにしていた。
27:16そのころ、バラバ・イエスという評判の囚人がいた。
27:17ピラトは、人々が集まって来たときに言った。「どちらを釈放してほしいのか。バラバ・イエスか。それともメシアといわれるイエスか。」
27:18人々がイエスを引き渡したのは、ねたみのためだと分かっていたからである。
27:19一方、ピラトが裁判の席に着いているときに、妻から伝言があった。「あの正しい人に関係しないでください。その人のことで、わたしは昨夜、夢で随分苦しめられました。」
27:20しかし、祭司長たちや長老たちは、バラバを釈放して、イエスを死刑に処してもらうようにと群衆を説得した。
27:21そこで、総督が、「二人のうち、どちらを釈放してほしいのか」と言うと、人々は、「バラバを」と言った。
27:22ピラトが、「では、メシアといわれているイエスの方は、どうしたらよいか」と言うと、皆は、「十字架につけろ」と言った。
27:23ピラトは、「いったいどんな悪事を働いたというのか」と言ったが、群衆はますます激しく、「十字架につけろ」と叫び続けた。
27:24ピラトは、それ以上言っても無駄なばかりか、かえって騒動が起こりそうなのを見て、水を持って来させ、群衆の前で手を洗って言った。「この人の血について、わたしには責任がない。お前たちの問題だ。」
27:25民はこぞって答えた。「その血の責任は、我々と子孫にある。」
27:26そこで、ピラトはバラバを釈放し、イエスを鞭打ってから、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引き渡し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7章11節~26節
바라바인가 그리스도인가
2019년 7월21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7장 11절~26절
사도신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는 본디오 빌라도였을까요? 본디오 빌라도라고 하면, 성경 외의 다른 역사서를 보면 상당히 포악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 안에서는, 예를 들어 누가복음 13: 1절에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빌라도의 잔혹성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빌라도가 아무리 잔혹하였다고 해도,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는 본디오 빌라도가 아니라, 오히려 유대의 당국자들이었고, 더 나아가서 말하면, 언약의 백성인 자신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책임자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빌라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사법권이 주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이 마음대로 범죄자를 사형에 처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공범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역사에 그 이름이 새겨져 마땅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회의가 열려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총독인, 빌라도 앞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공식적인 재판을 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의 의원들은 새벽이 밝자마자 곧바로 예수님을 총독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가야바의 종교재판에서 예수님께서 유죄로 간주되어 붙잡히셨습니다만, 그때의 죄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현장이 26장 63~64절입니다. 성경을 열어보십시오.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가야바 앞에서 스스로에 대해 고백하셨습니다. 즉, 자신은 메시아(곧 이스라엘에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능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있다가, 곧 종말의 심판자로 다시 올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예수님은 신성모독의 현행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으셨고, 이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적용된 죄목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길 때, 그 죄목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표현을 「유대인의 왕」으로 바꿔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 훨씬 더 정치적인 뉘앙스가 내포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빌라도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유대인의 왕」을 자처하며, 로마의 지배를 뒤엎으려는 반체제 인물이라면 그는 좌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진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직접 심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심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은「네 말이 옳도다」라는 한마디뿐이어서, 형식상으로는 어느 정도 긍정하는 듯하면서도 매우 모호한 응답이었습니다. 그사이에도 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님께 여러 가지를 심하게 고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빌라도가「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침묵은 이사야 53: 7절의「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는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침묵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매우 이상하게 여기며, 바로 이 사람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으로 로마를 위협하는 인물도 아니며, 로마 법에 위배되는 죄를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7:15절~ 17절까지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빌라도는 유대인 무리에게 제안하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질문은 세 차례에 걸쳐 나옵니다만, 이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고,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죄수인 바라바· 예수와, 메시아라고 불리는 예수 가운데 어느 쪽을 풀어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라바」라는 이름은 아람어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의 병행 기록(일본어성경에는 예수·바라바라고 기록되어 있다)에 따르면, 「바라바·예수」는 반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죄로 잡힌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 전형적인 범죄자요, 죄인의 대표격인 「아버지의 아들·예수」와, 메시아라고 불리는 예수 가운데 어느 쪽을 석방할 것인가 묻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 점은, 빌라도가 예수님께 대해 더 이상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 수식어를 쓰지 않고,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는 종교적 수식어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정치적 위험성을 전혀 인정할 수 없어서, 단지 「유대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도라고 불려 온 자」라는 식으로, 종교적 수식어로 바꾼 것이겠지요.
빌라도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이 문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문제라는 것을 말입니다. 18절에 보면,「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는 의도로, 특히 전형적인 범죄자인 바라바·예수를 끌어내어 어느 쪽을 석방할지 물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 잔혹성으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던, 빌라도에게도 완전히 무죄한 사람을 법적으로 정죄하는 일은 너무 지나친 짓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빌라도의 아내가 전갈을 보내옵니다.「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을 「옳은 사람」, 곧 「의로운 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 꿈을 통해 계시를 주시는데, 이 경우에도 빌라도의 아내가 꾼 꿈을 통해, 예수님께서 의인이시며, 죄 없는 분이 재판을 받고 계심을 증명하시고, 그분을 옹호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대 지도층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는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했고, 무리는 지도자들의 말에 순종하게 됩니다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은 21절에, 세 번째 질문은 22절에 이어지는데, 마태복음 27:21~22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2절에서 세 번째 질문이 던져졌을 때, 유대인들 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매우 격렬하고 강한 말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사형 방법은 돌로 쳐서 죽이는 「석형」이었기 때문에, 만약 「석형에 처하라」라고 말했다면 이해는 되지만, 여기서는 로마인의 극형인 「십자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이 쓰는 극단히 잔혹한 형벌이어서, 로마 시민에게는 집행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처형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마도 유대인들이 이처럼 격렬하게 「십자가에」라고 외치는 모습 앞에서 불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아무 죄도 발견되지 않는 사람에게 십자가형을 요구하다니, 이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살해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가진 무리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어찜이냐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며 더욱 소리 질렀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이 질문은 누구에게나, 어떤 입장에서든 답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시며, 죄 없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무리는 점점 더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러 난동을 부리며 폭도화 해 갔습니다. 마태복음 27:24~25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손을 씻는」 행위는 「이 무죄한 사람을 사형에 넘기는 일에 대해서는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무리도 그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21: 6~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1장
6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꺽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7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이 말은 바로 전날 밤에 이스카리옷 유다가 은 삼십을 제사장들에게 돌려주며 후회할 때, 산헤드린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에게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라고 말한 것과 정확히 같은 말이었고, 그 말이 마치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 모양새였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그때 후회했지만, 무리는 오히려「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자청하였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광기와 맹목이 드러난 장면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예수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책임자가 과연 빌라도라기보다는, 산헤드린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그 지도자들에게 선동된 무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 마태는 25절에서,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건 무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자신이라고 고백하는 듯이 기록합니다. 마태는 이전까지는 「무리」와 「백성」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구분해 왔으나, 25절에서는 원래 「무리」라는 말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갑자기 「백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25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결국 「예수·바라바냐, 예수·그리스도냐」라는 두 사람 가운데 「바라바 쪽을 선택한다」고 외친 것은, 다름 아닌 자기들 자신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십자가를 묵상할 때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쥐어 끄는 슬픈 진실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이 진실을 잘못 이해해 왔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5절의 말을 오해하여, 그 구절을 반(反) 유대주의 사상의 근거로 삼았던 것입니다. 즉, 「성육신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죽인 것은 유대인들이니까, 그러면 기독교인은 유대인들을 박해해도 된다」고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반유대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역사 속에서 큰 비극을 낳아 왔습니다.
우리 죄인들은 자기 죄를 직시하고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항상 희생양(스케이프고트)을 만들어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희생양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 자신들은 희생양과 구분해 놓고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고통도 느끼지 않으려는 태도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예를 들어, 우리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전신인 일본기독교회는 전쟁 중 탄압을 받은 측이었기에, 전쟁 책임은 당시의 군국주의에 있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회가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아온 역사는, 히데요시의「오인조」에서 시작되어 에도 시대를 거쳐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졌으며, 1873년(메이지 6년)에 기독교 금지 고지가 철거된 이후로는 오히려 탄압이 사라져 갔습니다. 당시 아직 기독교에 대한 이단 시선이 남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는 점차 사회에서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 책임은 군국주의에 있었다기보다는, 군국주의의 일익을 적극적으로 담당하며 전쟁을 부추겨 온 우리 일본기독교회와 일본기독교단에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떠올릴 때, 우리 가운데 누구 한 사람도, 빌라도나 당시 산헤드린, 혹은 이스라엘의 군중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바라바·예수를 선택하고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올려다볼 때마다 이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피가 바로 그처럼 참으로 슬픈 우리의 죄마저도 온전히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립시다.
使徒信条では、イエス・キリストは「ポンティオ・ピラトのもとに苦しみを受け、十字架につけられ、」という告白が出て来ます。イエス・キリストを十字架に付けたのは、はたしてポンティオ・ピラトだったのでしょうか。ポンティオ・ピラトと言えば、聖書以外の他の歴史書を見るとかなりの乱暴者であったようです。聖書の中では、例えばルカによる福音書13章1節には「ピラトがガリラヤ人の血を彼らのいけにえに混ぜた」と書いてありますが、これはピラトの残虐性のほんの一例にすぎません。しかし、ピラトがいくら残虐だったと言っても、マタイによる福音書を見る限り、イエス様を十字架に架けたのは、ポンティオ・ピラトではなく、むしろユダヤの当局者たちであり、もっと言えば、契約の民である自分たちこそ、イエス様を十字架に架けてしまったと読み取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イエス・キリストを十字架に架けた責任者は誰かと言えば、もちろんピラト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ます。当時、ローマの支配においてユダヤ人には司法権が与えられていませんでしたので、ユダヤ人が勝手に犯罪者を処刑に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からです。ピラトは間違いなく共犯者の一人であり、歴史にその名前が刻まれて相応しい人物であったと言えます。しかし事はそれほど単純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大祭司カイアファの屋敷で会議が持たれ、有罪判決が出ました。しかしユダヤの総督であるピラトの面前で、正式に国家権力による裁判を受ける必要があったために、サンヘドリンの議員たちは夜が明けるとすぐにイエス様を総督に引き渡しました。
ところで、カイアファの宗教裁判において、イエス様が有罪と見做され捉えられましたが、その罪状は何だったでしょうか。その現場が26章63~64節です。聖書をお開きください。
イエスは黙り続けておられた。大祭司は言った。「生ける神に誓って我々に答えよ。お前は神の子、メシアなのか。」
イエスは言われた。「それは、あなたが言ったことです。しかし、わたしは言っておく。あなたたちはやがて、/人の子が全能の神の右に座り、/天の雲に乗って来るのを見る。」
イエス様はカイアファに、ご自身について告白しました。つまり、ご自分はメシア(つまりイスラエルの油注がれた王)であって、神の御子として全能の神の右に座り、やがて終末の審判者として再臨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まさにその言葉によって、神聖冒涜の現行犯として有罪とされたのです。宗教的な意味において捉えられたのでした。ところが祭司長たちや長老たちは、イエスをピラトに引き渡す際、その罪状として「ユダヤ人の王」としました。彼らは意図的に「神の子メシア」を「ユダヤ人の王」にすり替えたと思われます。「ユダヤ人の王」とすれば、ずいぶんと政治的な響きが含蓄されるからです。
実際、ピラトにとっては、イスラエルの宗教的な問題については全く興味が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ユダヤ人の王として、ローマの支配の転覆を企てている敵対分子だということになると、黙っているわけにはいかなくなります。ピラトは真相を突き止めるためにイエス様に尋問しました。「お前はユダヤ人の王なのか」
しかし、この尋問に対しイエス様の返事は、「それは、あなたが言っていることです。」という返事だけで、一応、肯定しているものの、とても曖昧な返事でした。その間、イエス様はユダヤの当局者たちにさんざん訴えられているのに関わらず、イエス様は何もお答えになりませんでした。ピラトは言います。「あのようにお前に不利な証言をしているのに、聞こえないのか」しかし、イエス様は一切お答えになりませんでした。イエス様の沈黙は、イザヤ53:7の「彼は口を開かなかった。屠り場に引かれる小羊のように/毛を刈る者の前に物を言わない羊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かった。」という苦難の僕をおもいださせるような沈黙でした。ピラトは大変、不思議に思いました。そして薄々と、この男は政治的、社会的に威嚇になるような人物でもなければ、ローマの法律に違反する罪を一切見出すこともできないと察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27章15~17節を御覧ください。
ところで、祭りの度ごとに、総督は民衆の希望する囚人を一人釈放することにしていた。
そのころ、バラバ・イエスという評判の囚人がいた。
ピラトは、人々が集まって来たときに言った。「どちらを釈放してほしいのか。バラバ・イエスか。それともメシアといわれるイエスか。」
ピラトは、ユダヤ人の群衆に対して提案して質問をします。三度質問がなされますが、第一回目の質問です。それは、「過ぎ越しの祭というおめでたい日なので、一人を恩赦として釈放することができるが、どっちのイエスを釈放しようか」ということです。当時「イエス」と言う名はありふれた名前でした。誰もが知っている有名な囚人、バラバ・イエスと、メシアと呼ばれるイエスとどっちにしようかということです。皮肉ですが、バラバとは、アラム語で「父の子」という意味です。並行記事のマルコによる福音書によればバラバ・イエスは、暴動を扇動し人殺しをしたという罪で捉えられたと書いてあります。つまり、この典型的な罪人であり、罪人の代表選手である「父の子・イエス」と、メシアと呼ばれるイエスとどっちを釈放しようかということです。この時点でピラトはイエス様に対し「ユダヤ人の王」という政治的な修飾語を使わないで、「メシアと呼ばれるイエス」という宗教的な修飾語に代えているところに注意してください。つまり政治的危険性を全く認められないために「ユダヤ人によってメシアと呼ばれている」という修飾語に代えたのでしょう。
ピラトははっきり悟っていました。この問題は政治的問題ではなく、ユダヤ人の宗教的な問題だということです。18節には、はっきり「人々がイエスを引き渡したのは、ねたみのためだと分かっていたからである。」と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
ですから、ピラトはイエスを釈放するために、わざわざ典型的な罪人であるバラバ・イエスを選んできて、どっちを釈放しようかと尋ねているのです。いくらその残虐性で名高いピラトであっても、さすがに完全に無実の人を裁くことなどできませんでした。
ここで突然ですが、ピラトの妻から伝言が飛び込んできました。「あの正しい人に関係しないでください。その人のことで、わたしは昨夜、夢で随分苦しめられました。」というのです。ここでピラトの妻は、イエス様のことを「正しい人」、つまり「義人」であると語っています。
聖書の中で神はたびたび、夢を通して啓示を与えられますが、神はピラトの妻の夢を通して、イエス様が義人であるということを証明され、罪のないお方が裁かれているということを証明し弁護しておられるのです。
しかし、ピラトの努力にも関わらず、ユダヤの指導的立場である祭司長たちや長老たちは、群衆に、バラバを釈放し、イエスを死刑に処してもらうようにと説得し、群衆は指導者の言うことに聞き従いました。ピラトの二回目が21節、三回目の質問が22節と続きます。21、22節を御覧ください。
そこで、総督が、「二人のうち、どちらを釈放してほしいのか」と言うと、人々は、「バラバを」と言った。
ピラトが、「では、メシアといわれているイエスの方は、どうしたらよいか」と言うと、皆は、「十字架につけろ」と言った。
22節において三度目の質問がなされた時、ユダヤ人の口から「十字架につけろ」という言葉が出て来ます。大変激しい言葉です。ユダヤ人の死刑の方法は石打であって、「石打にしろ」と言うならまだ分かりますが、「十字架につけろ」と言っているのです。十字架刑はローマ人による極刑であって、その残酷さの故にローマ市民に対しては執行されませんでした。
ピラトは恐らくユダヤ人の激しい叫び声を前にして不安になったことでしょう。「何の罪も見いだせない男に十字架刑とは、自分たちの言っていることを分かっているのだろうか。」それで、ピラトは「殺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十戒を持っている群衆に、もう一度確認します。「(この人が)いったいどんな悪事を働いたというのか」しかし、群衆はピラトの質問には答えることができず、ただただ、「十字架につけろ」と、ますます声を大にして叫び続けるだけでした。
「(この人が)いったいどんな悪事を働いたというのか」という質問は、どこの誰であっても答え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ことでしょう。イエス様は義人であり、罪のないお方だったからです。
群衆はいよいよ手の付けようがない状態になり、暴徒化していきました。24~25節を御覧ください。
ピラトは、それ以上言っても無駄なばかりか、かえって騒動が起こりそうなのを見て、水を持って来させ、群衆の前で手を洗って言った。「この人の血について、わたしには責任がない。お前たちの問題だ。」
民はこぞって答えた。「その血の責任は、我々と子孫にある。」
手を洗うという行為は、「この無実の人を死刑にするということについて私には関係ない」ということを象徴的に表しています。群衆はその行為が意味することを知らないはずはありませんでした。例えば申命記21:6~8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
死体に最も近い町の長老たちは皆、川で首を折られた雌牛の上で手を洗い、
証言して言わねばならない。「我々の手はこの流血事件とかかわりがなく、目は何も見ていません。
主よ、あなたが救い出された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の罪を贖い、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のうちに罪なき者の血を流した罪をとどめないでください。」こうして、彼らの血を流した罪は贖われる。
ピラトは手を洗って言いました。「この人の血について、わたしには責任がない。お前たちの問題だ」。この言葉は、ちょうど昨晩、イスカリオテのユダに対し、サンヘドリンの祭司長たちや長老たちが「我々の知ったことではない。お前の問題だ」と言い放った言葉と同じであり、ブーメランのように帰ってきたのです。イスカリオテのユダは、その時、後悔しましたが、群衆はむしろ喜んで自分たちが血の責任をとるから十字架刑を執行してほしいと、申し出ました。恐ろしい狂気に満たされていたのです。
このように見て来ますと、イエス・キリストを十字架に付けた責任者はポンティオ・ピラトというよりもむしろ、サンヘドリンの祭司長たちや長老たちであり、そして指導者たちに扇動された群衆たちであったと言えるでしょう。しかし、著者であるマタイは25節において神の子イエスを十字架に架けたのは、群衆ではなく、むしろ神の民である自分たちであると告白しています。マタイは、それまで、「群衆」という言葉と「民」という言葉を注意深く区別していたのですが、25節において群衆という言葉が入るべきところに突然、契約の民の「民」という言葉を使われているのが分かります。25節を御覧ください。
民はこぞって答えた。「その血の責任は、我々と子孫にある。」
結局「イエス・バラバか、イエス・キリストか」という二者択一において、「バラバの方を」と叫んだのは他でもなく、自分たち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このことこそ十字架を瞑想する時に常に私たちの心をとらえる悲しい事実であります。しかし、人類の歴史はその事実について誤って理解してきました。25節の言葉を勘違いして、それを反ユダヤ主義的思想の根拠としたのです。つまり、受肉された神である御子イエス様を殺したのはユダヤ人であって、従ってキリスト者はユダヤ人を迫害するのは当然のことだと勘違いしてしまいました。反ユダヤ主義は全世界的に拡大し、歴史を通して大変な悲劇を招いてきてしまいました。
私たち罪びとは、自分自身の罪を認めることができないために、とかくスケープゴートを作りたがるのです。スケープゴートに全ての罪を帰せて、自分たちをスケープゴートから分離させて、一切心を痛めないという態度です。これは例えば、私たち改革派教会の歴史についても当てはまります。
わたしたちの前身である日本基督教会は、戦時中、弾圧を受けた側であって、戦争責任は当時の軍国主義にあるというふうに理解しがちです。しかし実際、キリスト教会が国から弾圧を受けてきた歴史というのは、秀吉による五人組から始まり、江戸時代を経て明治にかけてであって、1873年(明治6年)にキリシタン禁制の高札が撤去された以降は、むしろ弾圧はなくなっていきました。当時まだキリスト教に対する邪宗観が残っていたとしても、キリスト教は徐々に社会において市民権を得るようになっていったと理解すべきです。そして戦争責任は軍国主義にあったというより、軍国主義の一翼を積極的に担い、戦争をあおってきた私たち日本基督教会と日本基督教団にあったと言うべきでしょう。私たちにこそ責任があるのです。
聖書には、「あなたたちの中で罪を犯したことのない者が、まず、この女に石を投げなさい。」という御言葉があります。私たちの中の一体誰が、ピラトに対し、或いは当時のサンヘドリンに対し、或いはイスラエルの群衆に対して石を投げつけ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バラバ・イエスを選択し、栄光の主を十字架につけたのはまさに、この、私たち自身では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私たちはイエス様の十字架を仰ぐ度にそのことを思い起こすべきであり、また、イエス様の血潮はそのような悲しい罪をも完全に赦し清めてくださることを覚えて感謝を捧げてまいり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