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年11月04日「実を結べ 열매를 맺으라」

問い合わせ

日本キリスト改革派 千間台教会のホームページへ戻る

実を結べ 열매를 맺으라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1章18節~22節

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21:18朝早く、都に帰る途中、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
21:19道端にいちじくの木があるのを見て、近寄られたが、葉のほかは何もなかった。そこで、「今から後いつまでも、お前には実がならないように」と言われると、いちじくの木はたちまち枯れてしまった。
21:20弟子たちはこれを見て驚き、「なぜ、たちまち枯れてしまったのですか」と言った。
21:21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あなたがたも信仰を持ち、疑わないならば、いちじくの木に起こったようなことができるばかりでなく、この山に向かい、『立ち上がって、海に飛び込め』と言っても、そのとおりになる。
21:22信じて祈るならば、求めるものは何でも得られ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1章18節~22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マタイ21章18-22節

日本を象徴する花と言えば、皆さんもご存じのように桜でございます。オランダではチューリップ、韓国ではムクゲ、聖書の中でイスラエルを象徴するのは、ぶどうとイチジクです。当時、イスラエルにはイチジクの木がいたるところに生えており、イチジクからとれる実は、人々にとって重要な日常の糧でありました。イチジクは年に二度実を結びますが、「初なりのイチジク」は6~7月に実を結び、もっと大きな果実である「秋イチジク」は、8~9月に実を結びます。前回見てきましたように、主イエスは、過ぎ越しの祭りの期間に神殿に入られ、最初に、所謂「宮きよめ」と呼ばれる大きな騒動を起こされました。祭りの期間中は、都に巡礼に上ってくる人々で大変込み合いますので、巡礼者は、特にこの一週間に限り、大概エルサレムの外で宿泊場所を探しましたが、主イエスもベタニアで夜を過ごされ、翌日、また神殿へ出かけ、人々に御言葉を教えるために朝早くベタニアを出発しました。本日の聖書箇所に書かれている事件は、その道中の道端において起こりました。

一本のイチジクの木があったので主イエスが近寄られると、そのイチジクの木には、葉の他に、何もない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した。マルコによる福音書によれば、イエスさまは空腹を覚えられたために近寄ら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そのイチジクに対し、イエスさまは「今から後いつまでも、お前には実がならないように」と言われました。するとイチジクの木はたちまち枯れてしまったのです。弟子たちはこれを見て大変驚きました。過越しの祭りのこの時期は4月上旬ですから、6~7月に実を結ぶ「初なりのイチジク」の時期ではありません。なぜイエスさまはご自分が空腹だからといって不機嫌になられ、実がなる時期ではない、何の罪もない一本のイチジクの木に対し審判を下され、これほど苛酷な奇跡を行われたのでしょうか。私たちはこれまで、山上の説教を通して、或いは目の見えない人、耳の聞こえない人々の癒しを通して、罪人に対する「神の憐れみ」がどれほど大きいのかについて教えられて来ました。ダビデの子・メシアである主イエスは、私たちに仕えるために来られ、そして十字架上で、その愛を完全にお示しになるために来られたはずでした。そのようなイエスさまが、ご自分の空腹を満た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イチジクの木を呪うほどに機嫌を損ねたというのは、とてもありそうにないことです。本日の聖書の箇所は一体、私たちに何を教えようとされ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ある人々は、こう言います。21~22節に「信仰」について書かれているので、弟子たちに、どんなことでも信じるならば、その通りになるということを教えるために「イチジクを枯らすという否定的な奇跡」を起こされたと言います。従って大胆に自分の夢を思い描き、それを頑なに信じ続けるなら、どんなことであってもそれが叶えられると教えますが、果たしてそうでしょうか。この箇所は、マルコによる福音書を見るときに解釈の助けが与えられます。マルコ11:12~13と11:20をご覧ください。イチジクの木の話が二つに分割されていて、その間に宮きよめの話が挟み込まれています。ですからマルコによると、イチジクはすぐに枯れたのではなく、宮きよめを終えた翌日、同じ場所を通った時に枯れているということに気づきました。これは、イチジクの話も、宮きよめの話も同じ文脈にあるという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それでは、「宮きよめ」とは何を意味していたでしょうか。前回お話ししたように、宮きよめとは、高値で動物を売り付ける悪徳商人に対して、主の怒りが下さ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取引慣行それ自体に対し、つまり、イスラエルの律法と、供え物を捧げるという儀式的な礼拝形式そのものに対し、怒りを表されました。そして“わたしの家は祈りの家と呼ばれるべきである。ところが、あなたたちはそれを強盗の巣にしている”と言われたのです。その意味は、礼拝儀式、生贄の供え物、律法の表面的な行いによって神を礼拝するのではなく、神がお喜びのなるのは砕かれた魂であり、罪を心から悔い改め、主が善なるお方で慈しみ深いことを信じて御前に出ることを喜ばれます。ですから、「イチジクが実を結ぶ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は、どういうことかと言うと、イチジクが象徴しているイスラエルの人々において、実が結ばれてい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彼らには、確かに神を知る特権を与えられていました。特権として、律法が与えられ、神の民として契約のしるしである割礼が与えられ、神殿と、そこで生贄を捧げる儀式が与えられていました。しかし、それにも関わらず、メシアが来られ、神の国が近づいた時に、悔い改める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というのは、それらの特権によって神に近づくことが出来るのではなく、自分の罪を認め、それを心から悔い改め、恵みによってのみ、神に近づくことが出来るのです。イスラエルの民は、与えられた律法と特権の故に、神の民とされ、救いに与っていると勘違いをしてしまいました。救いとは、儀式そのものによって、或いは律法の行いによって得ら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恵みによって、信仰によって得られるのです。彼らはその点において大きな誤解をしていて、行いや、血統により頼み、表面的に繕うだけで、実を結ぶことが出来なかったのです。エレミヤ8:13とミカ書7:1には、実を結ぶことが出来ないご自分の民について神が嘆いておられる聖句がございます。

“わたしは彼らを集めようとしたがと/主は言われる。ぶどうの木にぶどうはなく/いちじくの木にいちじくはない。葉はしおれ、わたしが与えたものは/彼らから失われていた。”(エレミヤ8:13)

“悲しいかな/わたしは夏の果物を集める者のように/ぶどうの残りを摘む者のようになった。もはや、食べられるぶどうの実はなく/わたしの好む初なりのいちじくもない。” (ミカ書7:1)

従って、イエスさまがご覧になられた葉の茂ったイチジクの木とは、まさに、当時のユダヤ当局の人々・エルサレムの宗教指導者であるファリサイ人や律法学者たちによって代表されるイスラエルを表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というのは、通常イチジクというのは、実がなった後に葉が出てくるのであって、従って葉が茂っているということは、実を結んだ標しでもありました。イエスさまは、まだ4月には違いありませんが、葉が茂っている木をご覧になり、「おや」ということで、初なりの実があるかもしれないと思われて近づいたのでしょう。ところが、そのイチジクの木は、葉ばかり茂らせて肝心の実を結んでいなかったのです。あたかも口先だけで神様を敬うけれども、神の御子がこの世の来られた時に、激しく敵対し、拒絶し、悔い改めの実を結ばなかったのです。律法と生贄の儀式は、イエス・キリストを指し示すものであり、実体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が、肉を取られ、この世にお生まれになったということは、それらが成就され廃棄されたということを表す出来事でした。そして本来イスラエルの人々にもたらされた神の国の福音は、彼らがそれを拒絶することによって、異邦人に向かいました。ヘブル人の手紙9:1~10には旧約の儀式について詳しく書か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によって成就された事柄です。

“さて、最初の契約にも、礼拝の規定と地上の聖所とがありました。すなわち、第一の幕屋が設けられ、その中には燭台、机、そして供え物のパンが置かれていました。この幕屋が聖所と呼ばれるものです。また、第二の垂れ幕の後ろには、至聖所と呼ばれる幕屋がありました。そこには金の香壇と、すっかり金で覆われた契約の箱とがあって、この中には、マンナの入っている金の壺、芽を出したアロンの杖、契約の石板があり、また、箱の上では、栄光の姿のケルビムが償いの座を覆っていました。こういうことについては、今はいちいち語ることはできません。以上のものがこのように設けられると、祭司たちは礼拝を行うために、いつも第一の幕屋に入ります。しかし、第二の幕屋には年に一度、大祭司だけが入りますが、自分自身のためと民の過失のために献げる血を、必ず携えて行きます。このことによって聖霊は、第一の幕屋がなお存続しているかぎり、聖所への道はまだ開かれていないことを示しておられます。この幕屋とは、今という時の比喩です。すなわち、供え物といけにえが献げられても、礼拝をする者の良心を完全に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これらは、ただ食べ物や飲み物や種々の洗い清めに関するもので、改革の時まで課せられている肉の規定にすぎません。”

つまり、簡単に要約しますと、聖所と至聖所の間には垂れ幕があって、大祭司だけが年に一度、生贄の血を携えて、至聖所の中に入ることが出来ましたが、垂れ幕によって聖所と至聖所が断絶さ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このような儀式は肉の規定にすぎず、礼拝者の良心まで完成に導く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この垂れ幕は、神の子羊である主イエスが十字架によって捧げられた時に、真っ二つに破られました。つまり旧約の律法、神殿と供え物の礼拝儀式は成就され廃棄され、新約の時代は真の大祭司であるイエスさまを通して神に近づき、神と会見す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の民とな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ということは、異邦人である私たち日本人にそれを適用するなら、私たちが救われるためには、決してユダヤ人化されてイエスさまに結び合わされ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律法を守り、生贄を捧げ、割礼を受けて、律法を守りながら、イエスさまを信じるのではありません。ユダヤ人であろうと、異邦人であろうと、誰であろうと、ただ、旧約聖書が指し示しているイエス・キリストを救い主として信じ、イエスさまによって神と和解され、イエスさま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のみ、契約の民となり、神との交わりが回復されるのです。新約の時代も、旧約の時代も恵みにより、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す。律法の行いにもよらず、生まれや、血統にもよらず、ただ上からの恵みによって、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す。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ことは、必然的に祈りへと導かれます。口先だけでなく、表面的ではない、真の信仰を持っている人は、自分のどんな功績をも神の御前に持っていく事はできませんから、ただ祈りへと導かれるのです。21章21~22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あなたがたも信仰を持ち、疑わないならば、いちじくの木に起こったようなことができるばかりでなく、この山に向かい、『立ち上がって、海に飛び込め』と言っても、そのとおりになる。信じて祈るならば、求めるものは何でも得られる。」”

21節でこの「この山に向かい…」という言葉は、以前マタイ17章20節にも出て来た言葉であって、これは「不可能のように思われる大きな障害を乗り越え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意味で使われる慣用句です。ですから、実際にイエスさまはオリーブ山を指して、それを死海に沈ませると言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もし「疑わないで、信仰をもつなら、不可能と思えるような障害が取り除かれるだろう」ということです。何を疑わないのかというと、私たちの神は、信実なるお方で、善いお方、慈しみ深いお方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神は善そのものであり、善いお方ですから、私たちの人生に対しても必ず良い、幸せなご計画を持っ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神は王として私たちの人生を支配し、統治してくださり、今、現実に私たちの前に存在する、どのような苦しみも、痛みも、思い煩いも、全てのことをご存じであられ、それらが神の許しの中で起こ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従って、それは必ず神の摂理の中で私たちに益となるために、私たちにとって良いこととなるために、神がお計らいくださ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が、そのように神の慈しみを疑わないなら、必ず神の御手を動かされ奇跡が起こ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神によって不可能と思えるような障害が取り除かれ、平坦になるのです。そして、そのような信仰を持っている者は、口先だけの、表面的な儀式や行いを通して神に近づこうとするのではなく、ただ恵みにより頼み、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祈りへと導かれるのです。使徒たちを中心にして、ペンテコステの後に形成された原始キリスト教会は、当初ユダヤ教の異端のように思われていましたが、彼らはただ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歩み、ユダヤ教の行っていた割礼や、生贄による礼拝儀式、律法の表面的な解釈をすべて廃棄させてしまいました。キリストの体である教会こそが神の神殿であり、信者一人ひとりが聖霊の内住する神殿であると信じて歩み始めたのです。まさにこの時、山が海に飛び込むような、不可能と思えるような大きな奇跡が起こり、目前にはだかる大きな障害物が取り除かれたのです。私たちの信仰の歩みの上にも、このような神の御業が起こされることを期待いたし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열매를 맺으라

2018년 11월4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1장 18절~22절

일본을 상징하는 꽃이라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벚꽃입니다.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한국에서는 무궁화,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은, 포도와 무화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무화과나무가 곳곳에 자라고 있었으며, 무화과에서 얻는 열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상의 양식이었습니다. 무화과는 일 년에 두 번 열매를 맺는데,「첫 무화과」는 6~7월에 열매를 맺고, 더 큰 열매인「가을 무화과」는 8~9월에 열매를 맺습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바와 같이, 주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먼저 소위 「성전 정화」라 불리는 큰 소동을 일으키셨습니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성지로 순례를 오는 사람들로 매우 혼잡했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특히 이 일주일에 한해, 대체로 예루살렘 밖에서 숙소를 찾았습니다. 주 예수님도 베다니에서 밤을 보내시고, 다음 날 다시 성전으로 가셔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이른 아침 베다니를 출발하셨습니다. 오늘 성경 구절에 기록된 사건은 그 길목 길가에서 일어났습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주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니 그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보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시장하셔서 가까이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무화과나무는 즉시 말라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이를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유월절이 있는 이 시기는 4월 상순이니, 6~7월에 열매를 맺는「첫 무화과」의 수확의 시기가 아닙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이 시장하시다는 이유로 불쾌해하시며, 열매를 맺을 시기도 아닌, 아무 죄도 없는,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이토록 가혹한 기적을 행하셨을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산상수훈을 통해, 혹은 눈먼 사람, 귀먹은 사람들의 치유를 통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 배워 왔습니다. 다윗의 자손, 메시아이신 주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러 오셨고, 십자가 위에서 그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러 오셨어야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신의 시장함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할 만큼, 기분이 상하셨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성경 구절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21~22절에 「믿음」에 대해 기록되어 있으므로,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믿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하는 부정적인 기적」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대담하게 자신의 꿈을 그려내고, 그것을 완고하게 믿어만 간다면, 어떤 일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 구절은 마가복음을 볼 때 해석의 도움이 됩니다. 마가복음 11:12~13과 11:20을 보십시오.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그 사이에 성전 정화 이야기가 끼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에 따르면, 무화과나무는 즉시 시들지 않았고, 성전 정화를 마친 다음 날 같은 곳을 지나갈 때 시든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무화과 이야기와 성전 정화 이야기가 같은 맥락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성전 정화」는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성전 정화는 고가로 동물을 팔아넘기는 부도덕한 상인들에게 주님의 분노가 내린 것이 아닙니다. 거래 관행 그 자체에, 즉 이스라엘의 율법과 제물을 드리는 의식적인 예배 형식 그 자체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의미는 예배 의식, 희생 제물, 율법의 겉치레 행위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상한 마음이며,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이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임을 믿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는 것은,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는 확실히 하나님을 아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특권으로서 율법이 주어졌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의 표징인 할례가 주어졌으며, 성전과 그곳에서 제물을 드리는 의식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가 오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졌을 때, 그들은 회개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특권들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회개하며, 오직 은혜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어진 율법과 특권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구원에 참여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말았습니다. 구원은 의식 그 자체나 율법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점에서 큰 오해를 하고 있었으며, 행위나 혈통에 의지하고 겉으로만 꾸미기에 바빠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 8:13과 미가 7:1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기 백성에 대해 하나님이 탄식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8장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미가 7장

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신,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바로 당시 유대 당국자들, 즉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무화과는, 열매가 맺힌 후에 잎이 나오기 때문에, 잎이 무성한 것은, 열매를 맺었다는 표시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4월이었을 테지만, 잎이 무성한 나무를 보시고「어라」 하시며 첫 열매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고 가까이 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하게 하고 정작 열매를 맺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격렬히 대적하고 거절하며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율법과 희생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그것들이 성취되고 폐기되었음을 나타내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그들이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이방인에게로 향했습니다. 히브리서 9:1-10에는 구약의 의식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내용입니다.

히브리서9장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사오가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즉, 간단히 요약하자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있어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휘장 때문에 성소와 지성소가 단절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육체의 규정일 뿐, 예배자의 양심까지 온전하게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휘장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드려지셨을 때, 둘로 갈라졌습니다. 즉 구약의 율법, 성전과 제물의 예배 의식은, 성취되어 폐기되었고, 신약의 시대에는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방인인 우리 일본인에게, 이를 적용한다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결코 유대화되어 예수님과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산 제물을 드리며,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오직 구약성경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며,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언약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도 구약 시대도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에 의하지도 않고, 태어나거나 혈통에 의하지도 않으며, 오직 위로부터 오는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도로 이끕니다. 입술뿐 아니라, 겉치레로만 하는 것이 아닌,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어떤 공로도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져갈 수 없기에, 오직 기도로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1장 21~22절을 보십시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21절에서 이 「이 산더러」라는 말은 이전 마태복음 17장 20절에도 나온 말로, 「불가능해 보이는 큰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 관용구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을 가리켜, 그것을 사해에 가라앉히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의심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면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가 제거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며 선하신 분,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며 선하신 분이시기에, 우리 인생에 대해서도 반드시 좋고 행복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으로서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며, 지금 현실적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도, 아픔도, 근심도,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며, 그것들이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우리에게 좋은 일이 되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자비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여,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물이 제거되고 평탄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가진 자는, 입술만의 겉치레 의식이나 행위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 하지 않고, 오직 은혜에 의지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기도로 인도될 것입니다. 사도들을 중심으로 오순절 후에 형성된 원시 기독교 교회는, 처음에는 유대교의 이단처럼 여겨졌지만,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걸으며, 유대교가 행하던 할례나, 희생 제물을 통한 예배 의식, 율법의 겉핥기식 해석을 모두 폐기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성전이며,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이라고 믿고 걸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때,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지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큰 기적이 일어나, 눈앞에 가로막힌 큰 장애물이 제거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걸음 위에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합시다.

関連する説教を探す関連する説教を探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