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年10月21日「神の家をきよめる 성전 정화」

問い合わせ

日本キリスト改革派 千間台教会のホームページへ戻る

神の家をきよめる 성전 정화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1章12節~17節

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21:12それから、イエスは神殿の境内に入り、そこで売り買いをしていた人々を皆追い出し、両替人の台や鳩を売る者の腰掛けを倒された。
21:13そして言われた。「こう書いてある。『わたしの家は、祈りの家と呼ばれるべきである。』/ところが、あなたたちは/それを強盗の巣にしている。」
21:14境内では目の見えない人や足の不自由な人たちがそばに寄って来たので、イエスはこれらの人々をいやされた。
21:15他方、祭司長たちや、律法学者たちは、イエスがなさった不思議な業を見、境内で子供たちまで叫んで、「ダビデの子にホサナ」と言うのを聞いて腹を立て、
21:16イエスに言った。「子供たちが何と言っているか、聞こえるか。」イエスは言われた。「聞こえる。あなたたちこそ、『幼子や乳飲み子の口に、あなたは賛美を歌わせた』という言葉をまだ読んだことがないのか。」
21:17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と別れ、都を出てベタニアに行き、そこにお泊まりになっ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1章12節~17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マタイ21:12-17

イエスさまはエルサレムに入城してから、直ちに神殿に向かわれ、境内に入られました。そこで、犠牲として捧げるための動物を売り買いしていた人々を全員追い出し、両替人の台や鳩を売る者の腰掛を倒されました。さらに“聖書にこう書いてある。『わたしの家は、祈りの家と呼ばれるべきである』/それを強盗の巣にしている。”と言われました。これは、いわゆる「宮きよめ」と呼ばれる事件です。これはもちろん、当時、礼拝が腐敗してしまったことに対するイエスさまの怒りであることは確かです。神殿内において、祭司たちに権力が集中してしまったことにより、祭司たちのやりたい放題にされてしまいました。しかし、この宮きよめには、それ以上の深い意味がありました。この事件が起こった場所は、境内の中でも特に異邦人の庭です。ここには、生贄に捧げる動物の市場がありました。市場がそこにあった理由として、各地から巡礼のため人々が神殿に上ってくるのですが、遠い道のりを、供え物の動物を携えてくるのが難しかったためです。通常、生贄として捧げられる動物は傷のない動物でなければ受け入れてもらえ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この市場で傷のないものとして検査済みの動物を買って、それを捧げたのです。また、当時外国に住むユダヤ人も多かったのですが、彼らは神殿に来て、神殿税を捧げ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この時ローマの貨幣で神殿税を納めることが出来ず、ユダヤのお金に両替して納めなけれならなかったのですが、この市場において、両替のサービスも行っていたのです。その際、1割のほどの手数料を乗せていたり、生贄の動物なども高価な金額で売られていたと、ある資料には記録されています。それでは、イエスさまの宮清めは、そのような悪徳な商人に対する行動だったのかと言うと、そうでもないようで、聖書を見ると、売り買いしていた人々全員を追い出したと書かれているのです。つまり、売っていた人だけにとどまらず、それを買ったり、両替のサービスを利用する人々全てが対象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この事件は、一般的な罪に対するイエスさまの怒りではなく、旧約時代に神殿を中心として行われていた礼拝儀式、つまり、神との会見の方法、それ自体の廃棄を宣言しようと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マラキ書とゼカリヤ書にこの「宮きよめ」が預言されているので、イエスさまのこの行いは、預言の成就であり、象徴的な標しでもある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マラキ書3:1-2をご覧ください。

“だが、彼の来る日に誰が身を支えうるか。彼の現れるとき、誰が耐えうるか。彼は精錬する者の火、洗う者の灰汁のようだ。彼は精錬する者、銀を清める者として座し/レビの子らを清め/金や銀のように彼らの汚れを除く。彼らが主に献げ物を/正しくささげる者となるためである。”

その日、メシアが来られる日、レビの子らを清め、献げ物を正しく捧げる者となる、とあります。つまり神に受け入れられる完全で正しい献げ物が捧げられるために、律法によって規定された献げ物の完成について書かれているのです。メシアが来てそのようなことをされる、それこそ、メシアの標し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次にゼカリヤ書14:22には、主の神殿にはもはや商人がいなくなると預言されています。御覧ください。

“エルサレムとユダの鍋もすべて万軍の主に聖別されたものとなり、いけにえをささげようとする者は皆やって来て、それを取り、それで肉を煮る。その日には、万軍の主の神殿にもはや商人はいなくなる。”

ですから、この宮きよめの深い意味とは律法を根拠とした旧約的な礼拝、つまり旧約的な神との会見を廃棄することを象徴的に表し、神殿から売り買いする人々を追放することによって、預言の成就を現しているのだと思われます。同時に「神殿よりも偉大なものがここにある(マタイ12:6で)」と言われたお言葉の通り、ご自身がメシアであることを宣言し、証言しているのです。ところで旧約の律法によって定められた礼拝儀式も勿論、神様が定めたものでありました。しかし、そのような礼拝儀式は、実体の影であり本質の予表にすぎなかったのです。メシアの到来によって、実体が現れて、完成さ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す。救いとは律法を守り行うことではなく、メシアであるイエスさま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救われるからです。このことは、実は旧約においても全く同じでした。イスラエルの民は、律法の行い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はなく、来たるべきメシアを待望するその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す。律法において、自分自身の罪が示されるだけなのです。しかしこのことを理解できなかった旧約の人々は律法の規定を守り行うことによって安心し、儀式を通して彼らの罪を覆い隠してしまい、祈りという礼拝の本質をかえって妨げていたのです。例えば、生贄の血が注がれる祭壇の角は、どのような罪も赦される安全地帯だと考えられていましたから、どのような悪事を働いても、神殿に入り祭壇の角に触れるなら、罰せられることはなく過ぎこされると考えていました。こうして神殿は強盗のすみかとなってしまいました。エレミヤ書7:4と、9-11ご覧ください。

“4主の神殿、主の神殿、主の神殿という、むなしい言葉に依り頼んではならない。”

“9盗み、殺し、姦淫し、偽って誓い、バアルに香をたき、知ることのなかった異教の神々に従いながら、10わたしの名によって呼ばれるこの神殿に来てわたしの前に立ち、『救われた』と言うのか。お前たちはあらゆる忌むべきことをしているではないか。11わたしの名によって呼ばれるこの神殿は、お前たちの目に強盗の巣窟と見えるのか。そのとおり。わたしにもそう見える、と主は言われる。”

神殿が強盗のすみかとなってしまったのは、イスラエルの民の不信仰が原因でありますが、肯定的に捉えようとするなら、神殿とか、礼拝儀式は、所詮、罪を隠ぺいするだけであり、強盗を生み出すだけに過ぎなかったのです。彼らは、神殿において決して神と出会うことはないし、神と交わりをもつこともありません。そのような神殿は必要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真の神殿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だけが律法に定められた礼拝儀式を終わらせ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救いとは、生贄の動物を捧げることによるのでも、律法を守り行うことによるのでもなく、ただ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によるのです。このことは、人間の側で持っているいかなる善なる行いや、身分や、資格など、一切救いの根拠に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と同時に、人間の側で持っているどんなに最悪な条件であっても、最も否定的な資格や身分であっても、神にから捨てられる根拠に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マタイの福音書に戻りますと、イエスさまが両替の台や鳩を売る者の腰掛を倒されたちょうどその時、イエスさまに近づいてきた人々がいました。一体誰でしょうか。14節をご覧ください。

“境内では目の見えない人や足の不自由な人たちがそばに寄って来たので、イエスはこれらの人々をいやされた。”

目の見えない人や足の不自由な人たちは、当時の習慣で、境内の中には入れ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恐らく彼らは、異邦人の庭に入るのを拒まれたに違いありません。この慣習は、律法において去勢された宦官が主の会衆に加われなかったこと、また、祭司の既定として、祭司は去勢された人や、身体に傷のある者は、祭司にはなれないとレビ記21章17節に規定されているので、それらの教えが一般の礼拝する人々にまで拡大解釈されたと思われます。神さまには、傷のない、全き動物しか捧げ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健全な人しか神殿に近づけないと考えたのでしょう。イエスさまは近づいてきた彼らに対して「ここは境内の中だから、あなたたちは出て行きなさい」とは言われませんでした。暖かく迎え入れ、癒さ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他方、この癒しの奇跡を見た祭司長と律法学者たちは腹を立てました。15-16節をご覧ください。

“他方、祭司長たちや、律法学者たちは、イエスがなさった不思議な業を見、境内で子供たちまで叫んで、「ダビデの子にホサナ」と言うのを聞いて腹を立て、イエスに言った。「子供たちが何と言っているか、聞こえるか。」イエスは言われた。「聞こえる。あなたたちこそ、『幼子や乳飲み子の口に、あなたは賛美を歌わせた』という言葉をまだ読んだことがないのか。」”

神の御業である「不思議な業」を見た後に、祭司や律法学者が激怒したということは、明らかにそれが彼らの悪い考えから出てきていることを示しています。つまり、彼らの既得権益が侵されるという危険を感じたのでしょう。彼らは一旦手に入れた既得権を維持し続けようと、どんなことでもする用意がありました。ですから、素性も知れないナザレ人イエスが、群衆からメシアと歓迎されて認められていることは、とんでもないことだったのです。こうして群衆たちや子供たちが「ダビデの子にホサナ!」と真理を語る一方において、本来、自分たちこそメシアを証すべきユダヤの当局者たちは、神の救いの真理をひたすら覆い隠そうとしていのです。イエスさまの宮きよめの核心は、旧約の儀式を廃棄し、御自身が真の神殿として来られ、御自身を通して人は神と出会う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よって何が起こったのかと言うと、救いはただ、神の恵みによってのみ与えられるということ、私たちの持っている身分や立場、或いは、最高の能力や最善の資格などは、一切救われるための根拠に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同時に私たちが置かれている挫折、絶望、神に見捨てられたような呪われた状況、このような否定的な面も一切、救われない根拠にはなりえないということです。このことは、同時に選民であるイスラエルの民にも十字架による救いが必要であるということを意味します。彼らの選民と言う立場は決して、救いの条件にはならないのです。イエスさまはイスラエルの選民の意識の中にあった、傲慢な心や、肉的な優越感を廃棄されました。そのようなものによっては神にお会いす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す。しかし、実際、イエスさまを信じる私たちの信仰生活を見るときに、日々、信仰の勝利を体験しているでしょうか。ここが問題なのですが、私たちは、イエスさまを受け入れたはずなのに、その生活全般は、以前とは、さほど変化もなく、依然として、失敗者であり、敗北者であって勝利の体験があまりにも少ないように思えるのです。私自身もこれまでの人生振り返る時に、ほとんど失敗の連続でした。もしかしたら、皆さんの中で金銭的にも、社会的地位においても恵まれていて、職業も十分な保証が与えられて、それが安全装置のように働いていたという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が、仮にそのような人であっても、それではそれだけ幸いな日々を歩んできたのかと言うと、そうでもなかったと告白す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人間である以上、幸いで何の心配なく生きていける人というのはい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ですから信仰生活における失敗や敗北や葛藤や争いなどは常につきまとう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を取り囲む悪の勢力の前に、私たちの持っている信仰や私たちの道徳心はいつも不足していて、物足りないために、常に敗北者であるのです。しかし、このような苦しみは、キリストの中で決して無駄に終わるのではありません。1コリント15:55-58をご覧ください。

“死よ、お前の勝利はどこにあるのか。死よ、お前のとげはどこにあるのか。」死のとげは罪であり、罪の力は律法です。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わたしたちに勝利を賜る神に、感謝しよう。わたしの愛する兄弟たち、こういうわけですから、動かされないようにしっかり立ち、主の業に常に励みなさい。主に結ばれているならば自分たちの苦労が決して無駄にならないことを、あなたがたは知っているはずです。”

ですから、私たちが信仰生活において勝利したいと思うときに、自分の側の行いを根拠として旧約時代の祭司長たちや律法学者たちのように、規定通り神殿で生贄を捧げようと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自分の持っているローマのコインをユダヤのコインに両替して神の御前に出ようとして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真の神殿はまさにイエス・キリストだからです。イエス・キリストの下に来るなら、私たちに勝利を与えてくださるのです。私たちが死ぬときに直ちに私たちの霊はイエスさまのもとへ引き上げられ、イエスさまの再臨の日に私たちの体は甦るのです。死の権勢に対する勝利とは、もはや私たちは旧約の律法の下には置かれ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さまは、両替人の台や売り買いする人々の腰掛を倒されました。イエスさまご自身が旧約の律法を成就させ、完成させ、廃棄されたのです。律法の下にないということは、私たちの側の根拠のよって救われ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ただキリストの恵み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す。ですから、イエスさまの下に来るものは、誰であっても、イエスさまの血潮によって聖められ、律法を全うしたものとして義と認められ、救われて、終わりの日に裁かれることはなく、白い服を着せ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ことに希望を置いて歩んでまいり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성전 정화

2018년 10월21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1장 12절~17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곧바로 성전으로 가셔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제물로 바칠 동물을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쫓아내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물론 이는 당시 예배가 타락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임이 분명합니다.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제사장들이 마음대로 행하는 바람에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 정화에는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성전 경내 중에서도 특히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제물로 바칠 동물을 거래하는 시장이 있었습니다. 시장이 그곳에 있었던 이유는, 각지에서 순례를 위해 사람들이 성전에 올라오지만, 먼 길을 제물로 바칠 동물을 지고 오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은, 상처 없는 동물이어야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이 시장에서 상처 없는 것으로 검사를 마친 동물을 사서 그것을 바쳤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도 많았는데, 그들은 성전에 와서 성전세를 바쳐야 했습니다. 이때 로마 화폐로 성전세를 낼 수 없어 유대 화폐로 환전하여 내야 했는데, 이 시장에서 환전 서비스도 제공했습니다. 그때 약 10%의 수수료를 붙이거나, 제물로 바칠 동물들도 비싼 값에 팔렸다고 어떤 자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팔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거나 환전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 모두가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일반적인 죄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가 아니라, 구약 시대에 성전을 중심으로 행해지던 예배 의식, 즉 하나님과의 만남의 방식 그 자체의 폐기를 선언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말라기서와 스가랴서에 이 「성전 정화」가 예언되어 있기에, 예수님의 이 행위는 예언의 성취이자 상징적인 표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라기3:2-3을 보십시오.

말라기 3장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그 날, 메시아가 오시는 날,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여 바치는 예물을 바르게 드리는 자가 되리라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완전하고 바른 예물이 드려지기 위해 율법으로 규정된 예물의 완성에 대해 기록된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그러한 일을 행하시는 것, 바로 그것이 메시아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스가랴14:21에는 주님의 성전에는 더 이상 장사하는 자가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스가랴 14장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이 성전 정화의 깊은 의미는, 율법을 근거로 한 구약적인 예배, 즉 구약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폐기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성전에서 사고파는 사람들을 쫓아냄으로써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동시에「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태복음 12:6)」라고 하신 말씀대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언하고 증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으로 정해진 예배 의식도 물론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 의식은, 실체의 그림자이며 본질의 예표에 불과했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으로 실체가 나타나 완성되어야만 했습니다. 구원은,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사실 구약에서도 전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자신 자신의 죄가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한 구약의 사람들은, 율법의 규정을 지키고 행함으로써 안심하고, 의식을 통해 그들의 죄를 가려 버리며, 기도라는 예배의 본질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제단 모퉁이는, 어떤 죄도 용서받는 안전지대라고 여겨졌기에,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성전에 들어가 제단 모퉁이만 만지면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성전은,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예레미야서 7:4절과 9-11절을 보십시오.

예레미야 7장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를 신들을 따르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서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 때문이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성전이나 예배 의식은, 결국 죄를 은폐할 뿐이며 강도들을 양산하는 데 그쳤을 뿐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결코 하나님을 만나지도, 하나님과 교제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성전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에 정해진 예배 의식을 끝낼 수 있습니다. 구원은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도,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것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이루어집니다. 이는 인간이 가진 어떤 선한 행위나 신분, 자격 등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인간이 가진 아무리 최악의 조건이라도, 가장 부정적인 자격이나 신분이라도 하나님께서 버리실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께서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을 바로 그때,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체 누구였을까요? 14절을 보십시오.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맹인이나 저는 자들은, 당시 관습상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그들은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했을 것입니다. 이 관습은 율법에서 거세된 환관이 주님의 회중에 참여할 수 없었던 점, 또한 레위기 21장 17절에 제사장의 규정으로 거세된 자나 몸에 상처가 있는 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르침이 일반 예배자들에게까지 확대 해석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는 흠이 없는, 온전한 동물만 드릴 수 있듯이, 온전한 사람만이 성전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가온 그들에게 「여기는 성전 경내이니 너희는 나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뜻하게 맞아들이시고 치유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이 치유의 기적을 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분노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서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하나님의 기적인「이상한 일」을 본 후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노했다는 것은 분명히 그것이 그들의 악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그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위험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일단 손에 넣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분도 알 수 없는 나사렛 사람 예수가 무리에게 메시아로 환영받고 인정받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무리들과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진리를 외치는 한편, 본래 자신들이야말로 메시아를 증언해야 할 유대 지도자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가리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의 핵심은, 구약의 의식을 폐기하고, 그분 자신이 참 성전으로 오셔서, 그분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무엇이 일어났는가 하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 우리가 가진 신분이나 지위, 혹은 최고의 능력이나 최선의 자격 등은 결코 구원받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 동시에 우리가 처한 좌절과 절망, 하나님께 버림받은 듯한 저주받은 상황, 이러한 부정적인 면들도 결코 구원받지 못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입장은,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선택 백성의 의식 속에 있던 교만한 마음이나 육적인 우월감을 폐기하셨습니다. 그런 것들로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살펴볼 때, 매일 신앙의 승리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활 전반은 이전과 별다른 변화 없이 여전히 실패자이며 패배자로서 승리의 경험이 너무나 적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저 자신도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볼 때, 거의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금전적으로도, 사회적 지위에서도 축복받아 직업도 충분한 보장이 주어져 그것이 안전장치처럼 작용했던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설령 그런 사람이라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만큼 행복한 나날을 걸어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았다고 고백하지 않을까요? 인간인 이상, 행복하고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 속에서의 실패나 패배, 갈등이나 다툼 등은 항상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악의 세력 앞에서, 우리가 가진 신앙이나 우리의 도덕심은 항상 부족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패배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헛되이 끝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55-58을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5장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고자 할 때, 자기 쪽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처럼, 규정대로 성전에서 제물을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로마의 동전을 유대 동전으로 환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나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아래로 나아온다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가 죽을 때, 즉시 우리의 영은 예수님께로 끌어올려지고,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우리의 몸은 부활할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에 대한 승리는, 우리가 더 이상 구약의 율법 아래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율법을 성취하시고 완성하시고 폐기하신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 쪽의 근거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아래 오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게 되어 율법을 온전히 이룬 자로 의롭다 인정받고 구원받아 마지막 날 심판을 받지 않으며 흰 옷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 희망을 두고 걸어가도록 합시다.

関連する説教を探す関連する説教を探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