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08月18日「エリの家の罪 엘리의 집의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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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リの家の罪 엘리의 집의 죄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サムエル記上 2章11節~26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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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11エルカナはラマの家に帰った。幼子は祭司エリのもとにとどまって、主に仕えた。
12エリの息子はならず者で、主を知ろうとしなかった。
13この祭司たちは、人々に対して次のように行った。だれかがいけにえをささげていると、その肉を煮ている間に、祭司の下働きが三つまたの肉刺しを手にやって来て、
14釜や鍋であれ、鉢や皿であれ、そこに突き入れた。肉刺しが突き上げたものはすべて、祭司のものとした。彼らは、シロに詣でるイスラエルの人々すべてに対して、このように行った。
15そればかりでなく、人々が供え物の脂肪を燃やして煙にする前に、祭司の下働きがやって来て、いけにえをささげる人に言った。「祭司様のために焼く肉をよこしなさい。祭司は煮た肉は受け取らない。生でなければならない。」
16「いつものように脂肪をすっかり燃やして煙になってから、あなたの思いどおりに取ってください」と言っても、下働きは、「今、よこしなさい。さもなければ力ずくで取る」と答えるのであった。
17この下働きたちの罪は主に対する甚だ大きな罪であった。この人々が主への供え物を軽んじたからである。
18サムエルは、亜麻布のエフォドを着て、下働きとして主の御前に仕えていた。
19母は彼のために小さな上着を縫い、毎年、夫と一緒に年ごとのいけにえをささげに上って来るとき、それを届けた。
20エリはエルカナとその妻を祝福し、「主に願って得たこの子の代わりに、主があなたにこの妻による子供を授け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と言った。こうして彼らは家に帰った。
21主がハンナを顧みられたので、ハンナは身ごもり、息子を三人と娘を二人産んだ。少年サムエルは主のもとで成長した。
22エリは非常に年老いていた。息子たちがイスラエルの人々すべてに対して行っていることの一部始終、それに、臨在の幕屋の入り口で仕えている女たちとたびたび床を共にしていることも耳にして、
23彼らを諭した。「なぜそのようなことをするのだ。わたしはこの民のすべての者から、お前たちについて悪いうわさを聞かされている。
24息子らよ、それはいけない。主の民が触れ回り、わたしの耳にも入ったうわさはよくない。
25人が人に罪を犯しても、神が間に立ってくださる。だが、人が主に罪を犯したら、誰が執り成してくれよう。」しかし、彼らは父の声に耳を貸そうとしなかった。主は彼らの命を絶とうとしておられた。
26一方、少年サムエルはすくすくと育ち、主にも人々にも喜ばれる者となっ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サムエル記上 2章11節~26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そのころ、イスラエルには王がなく、それぞれ自分の目に正しいとすることを行っていた。」という御言葉は、暗黒の士師記の状況を象徴的に表している言葉でした。それぞれが自分の基準によって、したいことを勝手にするという最も悲惨な状況です。しかし、ハンナという人物は、これまで流れていた霊的な川の流れを全く逆にしてしまいました。つまり、不妊という困難な状況をめぐり、自分の目に正しいと思うことを行うのではなく、神さまに立ち帰り、「尋ね求める、ask for」という姿勢を示しましたのです。

ハンナの祈りを表している「尋ね求める、ヘブル語で、シャアル」という言葉こそ、サムエルの名前の由来にもなった言葉です。1:20をご覧ください。

“ハンナは身ごもり、月が満ちて男の子を産んだ。主に願って得た子供なので、その名をサムエル(その名は神)と名付けた。”

ところで、サムエルは決して、有名な家系から生まれてき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1章1節にサムエルの系図が列挙されていますが、列挙された人物の中で有名な人物は一人もいないというのがこの系図の最大のポイントです。サムエルはファンファーレが鳴るようにものすごい系図から生まれてきた訳ではなく、どこにでもいそうな、エフライムのエルカナとハンナという平凡な夫婦から生まれて来たのです。ただ特筆すべきことは祈りによって生まれてきたということでした。1:27~28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はこの子を授かるようにと祈り、主はわたしが願ったことをかなえてくださいました。わたしは、この子を主にゆだねます。この子は生涯、主にゆだねられた者です。」彼らはそこで主を礼拝した。”

27節を見ますとハンナが祈って尋ね求めた、その願いがかなえられたということで、「シャアル」という言葉が二回使われています。28節も二回使われていますが、直訳しますと、「この子によって民がヤハウェを求めるようにさせます」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この子は生涯、主の働きのために求められた者です。」ということです。この平凡な生まれのサムエルと比較されているのが、血統書付きのエリの息子たちホフニとピネハスでした。特にここでは、「幼子」とか「少年」とか、「下働き」と訳すことができるヘブライ語の「ナアル」という言葉によって修飾されていて、「主の下働き・サムエル」と、「祭司の下働き・ホフニとピネハス」という形で列挙されています。11節の「幼子」も13節の祭司の「下働き」も両方ともナアルです。このように「ナアル」という言葉は大変、幅広い意味をもっているのですが、日本語の少年、小僧とか、丁稚というような意味あいになります。主に仕える少年サムエルと、祭司エリの少年たちが交互に比較されているのです。12節を見ますと“エリの息子はならず者で、主を知ろうとはしなか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主に仕えていた少年と、祭司の少年たちの違いとは、主を知っていたのか、知らなかったのか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因みに「ならず者」という言葉は、「ベリアルの子供」という言葉でありました。これは、以前「堕落した女、つまり、ベリアルの娘」という言葉が1:16に出て来ました。つまり祭司エリは、神殿で祈っていたハンナの姿を堕落した女と勘違いしてしまい、自分の息子たちが、まさに、ならず者のふるまいをしていたのにも関わらず、それには一向に気づいていなかったのです。エリの霊的な鈍さに焦点が当てられています。13~14節には祭司の少年たちの罪が具体的に書かれています。ご覧ください。

“この祭司たちは、人々に対して次のように行った。だれかがいけにえをささげていると、その肉を煮ている間に、祭司の下働きが三つまたの肉刺しを手にやって来て、釜や鍋であれ、鉢や皿であれ、そこに突き入れた。肉刺しが突き上げたものはすべて、祭司のものとした。彼らは、シロに詣でるイスラエルの人々すべてに対して、このように行った。”

聖書に宮で奉仕する者たちの道具として「肉刺し」という言葉は出て来ますが、三またの肉刺しという言葉は、本日のこの箇所にしかでてきません。彼らが編み出した最強の肉刺しである可能性があります。祭司たちの生贄の取り分は、レビ記7:31によれば、胸と、ももであると規定されています。或いは、申命記18:3によれば、肩と頬と胃の部分と規定されています。しかし、シロにおいては律法の規定が正しく理解されておらず、通常、祭司は沸騰した鍋に、三またの熊手のような肉刺しをさっと入れて、引っかかった肉は、どこの箇所でも祭司の少年たちの取り分とされていたと書かれています。このようにして自分たちの好きな部位を、肩ロースであろうと、リブロースであろうと、サーロインであろうと、ヒレであろうと、モモであろうと、自分たちの好きな部位を、好き勝手に掬っていたのでした。

特にこの祭司の少年たちに関してさらに言うなら、彼らはゆでた肉ではなく、焼いた肉を好みました。ですからシロの礼拝者たちが、いけにえの脂肪は主への献げものとして焼き尽く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かろうじて知っていましたので、“いつものように脂肪をすっかり燃やして煙になってから、あなたの思いどおりに取ってください”と懇願しても、「今、よこしなさい。さもなければ力ずくで取る」と言いながら、ヤハウェの取り分が献げられる前に、生肉の状態で自分たちの取り分を要求し、あたかも「私が先でヤハウェはその後だ」と言わんばかりに傲慢不遜な態度を現わしていたのであります。17節には結論的に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ご覧ください。

“この下働きたちの罪は主に対する甚だ大きな罪であった。この人々が主への供え物を軽んじたからである。”

一方、少年サムエルは、エフォドを着て、表面的にはエリに従属してはいましたが霊的には主に仕え、祭司の働きを全うしていました。恐らく、サムエルはレビ人であったが故に祭司の働きしていたというよりかは、献身者として献げられたが故に祭司の職務を担っていたと考えられます。そして、サムエルをナジル人として献げたハンナとエルカナの家には、大変のどかで幸せな日々が訪れていました。彼らは毎年一度、生贄を捧げるためにシロに上り、その時に、ついでに、日々成長するサムエルのために新しい服も持って行きました。祭司エリは、エルカナとハンナを祝福して、次のような言葉をかけてくださいました(20節の御言葉です)。

“主に願って得たこの子の代わりに、主があなたにこの妻による子供を授け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エリの祝福の言葉の中の「主に願って得たこの子の代わりに、」とありますが、ここの「願って」という言葉がやはりサムエルの名の由来のことばである「シャアル」です。ハンナが、ヤハウェに願い求めて得た子どもを、さらにヤハウェの働きのために求められた者として献げました。「その代わりにハンナの子供を増し加えてくださるように」という祝福を受けたのです。祝福を受けて彼らは家に帰って行きました。すると主がハンナを顧みられたので、不妊の女であったハンナは身ごもり、息子を三人と、娘を二人に恵まれました。21節の最後に、「少年サムエルは主のもとで成長した。」とありますが、直訳しますと、「少年サムエルは、ヤハウェと共に成長した。」となります。ホフニとピネハスは主を知らなかったのに対して、サムエルは主と共に成長しているのです。このように、私たちキリスト者の子育てにおいても当てはまることですが、幼いころから、礼拝を通して、或いは祈りの応えを頂くことを通して、神を体験することが非常に重要であることが分かります。日々神との会話の中で、祈りの中で神を体験することこそ、ヤハウェと共に歩むことだと言えるでしょう。続いて、22~25節において、子供たちに主を体験させ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エリの家の失敗談に話が移ります。シロの宮には、契約の箱が置かれていて祭司たちの他にも、主に仕える人々多くいたと考えられますから、恐らく臨在の幕屋の入り口で仕えていた女たちもそのように奉仕に携わっていた人々であったと考えられます。ところが、エリの息子たちがこの女たちと床を共にしているという悪い噂が、エリの耳に入ってきたということです。結婚をする前から男女が床を共にすることは、律法で禁じられていました。エリは息子たちに教え諭します。23節~25節を御覧ください。

“彼らを諭した。「なぜそのようなことをするのだ。わたしはこの民のすべての者から、お前たちについて悪いうわさを聞かされている。息子らよ、それはいけない。主の民が触れ回り、わたしの耳にも入ったうわさはよくない。人が人に罪を犯しても、神が間に立ってくださる。だが、人が主に罪を犯したら、誰が執り成してくれよう。」しかし、彼らは父の声に耳を貸そうとしなかった。主は彼らの命を絶とうとしておられた。”

しかし息子たちは父の言葉に耳を貸そうとしませんでした。神への供え物さえ軽んじるくらいですから、父の諭す言葉も、当然のように無視してしまいました。このような者たちに対し、主は審判を下されることを決意されます。しかも25節のヘブル語のニュアンスでは、「彼らの命を絶つことを良しとした」「快く、喜んで、絶つことを決意した」と書かれています。26節においては再びサムエルに戻り、少年サムエルは、すくすくと育ち、主にも人々にも喜ばれる者となっていきました。以上、見て来ましたように、血統書付きの聖職者であるエリの子たちと、平凡な生まれであるサムエルの比較がずーとされてきました。エリの下で同じような環境に置かれ従属していましたが、その違いは霊的な意味において主を知っているのかどうか、主に仕えているかどうかということでした。礼拝に奉仕する聖職者が、主を知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は、結果的にエリの一族を破滅に向かわせる、大変恐ろしいことでした。それに対して、平信徒であるエルカナ一家の信仰が美しく描写されていて、そこには牧歌的な家族の幸いがありました。たとえ、ペニンナの嫌がらせや、祭司エリの人を傷つけるような軽率な言葉が逆境として迫って来ても、ハンナは、主との交わりを通して、今、自分が不妊であることには、必ずそこに秘められた神さまの意図とご計画があるに違いないと考えて、乗り越えていくことができました。そして結果的に、祈りによって不妊の女が子宝に恵まれるという祝福に与ることになりました。エルカナとハンナの家族こそ、主を知っている「主の民」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私たちの人生において、ヤハウェなる主を知ることこそ、幸いな人生を歩むことということ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私たちは主を知ることによってはじめて自分自身をも正しく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つまり主を知ることによって、主が私たちを創造された目的、主が私たちを愛しておられ、私たちに一人一人に使命と天職を与えておられる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そして困難な状況の中でも自然と祈りに導かれます。もし、主を知らなければ、自分自身を正しく知ることはありませんし、好き勝手なことをして、それが人生の幸いであると勘違いしてしまいます。しかし、実は、貪欲の霊に縛られているだけであり、罪の奴隷としてサタンに支配され、着実に滅びに向かっていると恐ろしい事実を看過してしまうのです。結果的には呪いと災いと死を刈り取る人生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

幸いな人生とは、お金を儲けて財産を築くことでも、地位と名誉と名声が与えられことでも、健康が与えられ100歳まで長寿を全うすることでもありません。幸いな人生とは主を知ることであり、主に信頼し、祈りを通して、主と共にある平安と祝福を享受することであります。私たちの人生がハンナの家のような牧歌的な人生となるように求めていき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엘리의 집의 죄

2019년 8월 18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사무엘상 2장 11~26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은 암흑의 사사기 시대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각기 자신의 기준에 따라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가장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한나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흐르던 영적인 강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습니다. 즉 불임이라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해 내 눈에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묻고 구하는 ask for」 라는 자세를 보인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나타내는 「묻고 구하는」히브리어의 샤알이라고 하는 단어야말로 사무엘의 이름의 유래가 되기도 한 말입니다. 1장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그런데 사무엘은 결코 유명한 가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장 1절에 사무엘의 족보가 열거 되어 있는데 열거된 인물 중 유명한 인물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이 족보의 가장 큰 포인트입니다. 사무엘은 팡파레가 울리는 엄청난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을 법한 에브라임족속의 엘가나와 한나라는 평범한 부부에게서 태어난 것입니다. 다만 특별한 것은 기도를 통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1장 27,28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27절을 보면 한나가 묻고 구한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샤알」이라는 말이 두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28절에도 두 번 쓰였는데 직역을 하면 「이 아이에 의해 백성이 여호와께 묻고 구하게 하겠습니다」라는 거죠. 그리고 「이 아이는 평생 주님의 일을 위해 간구한 자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태생의 사무엘과 비교되고 있는 것이 혈통서가 딸린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였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어린아이」라든가 「소년」이라든가 「사환」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히브리어의 「나아르」라는 말에 의해 수식되고 있으며, 「주님의 사환 사무엘」과 「제사장의 사환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형태로 열거되어 있습니다. 11절의 「그 아이」도 13절의 「제사장의 사환」도 모두 「나아르」입니다. 이처럼 「나아르」라는 말은 매우 폭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일본어의 소년, 꼬마 스님이라든가 견습생이라는 뜻이 됩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사환 사무엘과 제사장 엘리의 사환들이 번갈아 비교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던 사환과 제사장의 사환들의 차이는 여호와를 알고 있었느냐, 몰랐느냐 하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행실이 나쁘다」라는 말은 「벨리알의 아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전에 악한 여자, 즉 「벨리알의 딸」이라는 말이 1장 16절에 나왔습니다. 즉 제사장 엘리는 성전에서 기도하던 한나의 모습을 악한 여자로 착각해 버렸고 자신의 아들들이 바로 행실이 나빴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엘리의 영적인 둔함에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13,14절에는 제사장의 소년들의 죄가 구체적으로 적혀 있습니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성경에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의 도구로 「세 살 갈고리」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만 세 살 갈고리라는 말은 오늘의 이 본문에서만 나옵니다. 그들이 고안해 낸 최강의 갈고리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제물의 몫은 레위기 7장 31,32절에 따르면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또는 신명기 18장 3절에 의하면 제물의 앞다리와 두 볼과 위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로에서는 율법의 규정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 보통 제사장은 끓는 냄비에 세 살 갈고리를 쓱 넣어서 걸린 고기는 어느 부위든지 제사장 사환들의 몫으로 여겼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부위를 목살이든 갈비살이든 등심이든 안심이든 뒷다리든 자기들이 좋아하는 부위를 마음대로 건져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 제사장의 사환들에 관해 더 말한다면 그들은 삶은 고기가 아니라 구운 고기를 더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실로의 예배자들이 제물의 기름은 여호와께 바치는 것으로 다 태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라고 간청해도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라며 여호와의 몫이 바쳐지기도 전에 날 것 상태에서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마치 “내가 먼저고 여호와는 그 뒤다”라는 듯이 오만불손한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17절에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한편 소년 사무엘은 세마포 에봇을 입고 표면적으로는 엘리에게 종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영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며 제사장의 직무를 완수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무엘이 레위인이었기 때문에 제사장의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헌신자로서 바쳐졌기 때문에 제사장의 직무를 맡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친 한나와 엘가나의 집에는 매우 편안하고 행복한 나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매년 한 번씩 제물을 바치기 위해 실로로 올라갈 때마다 성장하는 사무엘을 위해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가져갔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엘가나와 한나를 축복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엘리의 축복의 말 중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간구하여」라는 말이 역시 사무엘의 이름의 유래가 된 「샤알」입니다. 한나가 여호와께 소원을 빌며 얻은 아이를 여호와의 일을 위해 구한 자로 바쳤습니다.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축복을 받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한나를 돌보셨기 때문에 불임의 여인이었던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습니다. 21절의 마지막에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라고 쓰여 있는데 직역하면 「소년 사무엘은 여호와와 함께 성장했다」가 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 반면 사무엘은 여호와와 함께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양육에 있어서도 사실이지만 어릴 때부터 예배를 통해서 혹은 기도의 응답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과의 대화 속애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여호와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22~25절에 있어서 자녀들에게 여호와를 체험시키지 못한 엘리의 집의 실패담으로 이야기가 넘어갑니다. 실로의 성전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어서 제사장들 외에도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아마도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도 그렇게 봉사에 종사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이 이 여자들과 동침하였다는 나쁜 소문이 엘리의 귀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기 전부터 남녀가 동침하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을 가르치고 타이릅니다. 23~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 내 아들들아 그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하지만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 바치는 제물조차 가볍게 여길 정도니 아버지가 타이르는 말도 당연하다는 듯이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을 심판을 내리실 것을 뜻하셨습니다. 게다가「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라는 25절의 말씀은 히브리어의 뉘앙스에서는「그들을 죽음을 선하다고 여기셨다」라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 26절에는 다시 사무엘로 돌아와 소년 사무엘은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습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혈통서를 첨부한 성직자인 엘리의 아이들과 평범한 태생인 사무엘의 비교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엘리 밑에서 비슷한 환경에 놓여 종속되어 있었는데, 그 차이점은 영적인 의미에서 여호와를 아느냐, 여호와를 섬기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에 봉사하는 성직자가 여호와를 몰랐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엘리의 일족을 파멸로 향하게 하는 매우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반면 평신도인 엘가나 일가의 믿음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목가적인 가족의 행복이 있엇습니다. 비록 브닌나의 괴롭힘이나 제사장 엘리의 상처를 주는 경솔한 말이 역경으로 다가온다 하더라도 한나는 여호와와의 교제를 통해 지금 자신이 불임인 것에는 반드시 거기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기도를 통해 불임인 여자가 자식을 얻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엘가나와 한나의 가족이야말로 여호와를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복된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비로소 우리 자신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앎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명과 천직을 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기도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를 모르면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알 수 없고 마음대로 하다가 그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탐욕의 영혼에 얽매여 있을 뿐 죄의 노예로 사탄에게 지배 당하고 착실히 멸망을 향해 가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간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저주와 재앙과 죽음을 거두는 삶이 되고 맙니다.

복된 삶이라는 것은 돈을 벌어 재산을 쌓는 것도, 지위와 명예와 명성이 주어지는 것도 건강이 주어져 100세까지 장수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된 삶이란 여호와를 아는 것이며 주님을 신뢰하고 기도를 통해 주님과 함께하는 평안과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한나의 집과 같은 목가적인 삶이 되도록 간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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