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いの創始者、憐み深い大祭司 구원의 창시자, 자비하신 대제사장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ヘブライ人への手紙 2章10節~18節
2:10というのは、多くの子らを栄光へと導くために、彼らの救いの創始者を数々の苦しみを通して完全な者とされたのは、万物の目標であり源である方に、ふさわしいことであったからです。
2:11事実、人を聖なる者となさる方も、聖なる者とされる人たちも、すべて一つの源から出ているのです。それで、イエスは彼らを兄弟と呼ぶことを恥としないで、
2:12「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わたしの兄弟たちに知らせ、/集会の中であなたを賛美します」と言い、
2:13また、/「わたしは神に信頼します」と言い、更にまた、/「ここに、わたしと、/神がわたしに与えてくださった子らがいます」と言われます。
2:14ところで、子らは血と肉を備えているので、イエスもまた同様に、これらのものを備えられました。それは、死をつかさどる者、つまり悪魔を御自分の死によって滅ぼし、
2:15死の恐怖のために一生涯、奴隷の状態にあった者たちを解放なさるためでした。
2:16確かに、イエスは天使たちを助けず、アブラハムの子孫を助けられるのです。
2:17それで、イエスは、神の御前において憐れみ深い、忠実な大祭司となって、民の罪を償うために、すべての点で兄弟たちと同じようにならねばならなかったのです。
2:18事実、御自身、試練を受けて苦しまれたからこそ、試練を受けている人たちを助け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ヘブライ人への手紙 2章10節~18節
구원의 창시자, 자비하신 대제사장
2025년 12월 21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히브리서2장 10~18절
서론
크리스마스 축하합니다. 크리스마스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탄하신 것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보통의 일이지만, 세상 일반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교회에서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 혹은 성경 말씀을 믿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들을 믿는 형제자매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도 매우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강탄을, 신학 용어로는 성육신 사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로고스로서, 즉 말씀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셨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취하시고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 성육신 사건은 히브리서에 따르면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한, 성육신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죽음」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오늘은 히브리서를 통해 함께 말씀의 은혜가 되었으면 합니다.
(1) 구원의 창시자
2:10 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이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는 것은, 예수님이 그때까지 불완전한 자였다거나 예수님께 죄가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율법 아래서 살고, 믿음에 의해 아버지의 마음을 따르며 실로 수많은 고난을 겪은 예수님의 생애란, 아담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걸음이자 율법을 완성하는 걸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적합한 일이었습니다.
10절의「창시자」라는 말에 주목하세요. 헬라어로 「아르케고스」입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 안에서 사도행전과 이 히브리서에만 나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창시자」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행 3:15절에는「생명의 주」, 5:31절에는 「임금과 구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래 뜻은 용사라든가 챔피언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이 서신을 읽은 독자는, 「아르케고스(용사)」라는 말을 읽고, 그리스 신화의 최강 영웅 헤라클레스를 연상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히브리서란 흩어진 유대인에게 쓰여진 서신인데, 그들은 헬라어를 하는 헬레니즘화된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독자인 그들에게 그리스 신화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신 제우스와 인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서 벗어난 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성장하여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마지막에는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 신들의 일원이 되었다는 신화입니다. 헤라클레스가 용사였던 것처럼 예수님도 용사였고,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운 그 전투를 방불케 하는 대표 전사였습니다. 예수님은 괴력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자신에 속한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기 위해 앞장서서 싸우셨습니다. 그 싸움의 상대는 누구냐 하면, 죄와 죽음의 권세이며 죄를 통해 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마귀입니다. 누가복음 11:21~22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1장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누가복음의 이 맥락에서 강한 자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악령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 강한 자, 즉 예수님이 이 저택을 덮쳐 마귀에게 승리하자 마귀가 믿었던 무장을 모두 빼앗기고 맙니다. 그리고 마귀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이 세상을,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2) 자비하신 대제사장
2:11절~13절은 건너뛰고 먼저 14절 이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있고, 게다가 그것은 대제사장에 의해 바쳐진 것이었다는 것이 적혀 있습니다. 2:14~15절을 보세요.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란, 곧 마귀를 멸하시는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왜 자신의 죽음으로 마귀를 멸하실 수 있었을까요? 원래 마귀란 타락한 천사입니다. 교만해지고 하나님께 대적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추방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 마귀가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마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 아래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가 있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마귀는 하나님께 호소하며「하나님, 인간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반역하고 있기 때문에 죽을 만합니다」라고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인 인간은, 자신의 죄 때문에 마귀의 지배 속에서 노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피와 살을 취하시고 온전한 인간으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에 맞서 무고한 분이 대신 십자가상에서 형벌을 받음으로써 당신 자신에 속한 자녀들의 죄를 속죄해 주셨습니다. 이로써 속죄된 자녀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속죄된 자녀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통과점이 되었고, 사후 그 영혼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죽음의 공포」라고 하면, 「아니, 나는 하나님 따위는 믿지 않지만, 죽음 따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회문제로 자살의 문제가 있지만 이 세상의 고뇌에서 해방되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 같은 건 두렵지 않다. 모든 것에 끝이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수긍이 갑니다. 하지만 정말 죽음의 공포 같은 것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비록 태연하게 죽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뒤 몸과 영혼이 분리된 사후세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사후에 음부로 내려올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께로 올려질 것인지,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죽음의 공포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졌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어서 16~17절을 보시겠습니다.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여기서는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호칭이 나옵니다. 그것은「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라는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아르켈라오스」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희생제물을 올리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바치고 스스로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진정한 속량 제물을 바칠 수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구약에 나오는 희생 제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결코 소나 양의 희생 그 자체에 의해 회유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나 양의 피, 그 자체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기능은 하나님과 백성을 중개하는 기능이기 때문에 거기서 요구되는 것은 죄를 범하는 백성과의 연대이며 일체감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반드시 백성들 가운데서 세워져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과 같은 피와 살을 갖게 된 것입니다. 18절을 보세요.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앞서 17절에도「자비하고」라는 말이 있었지만 죄인인 백성과 똑같은 고난을 겪지 않는다면 결코 죄인을 불쌍히 여길 수 없습니다. 시련 속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자격이란, 그 사람도 같은 시련을 겪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라도 그 사람이 시련을 받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마귀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호소했습니다. 욥기 1:9~11을 봐주세요.
욥기 1장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게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사탄은, 만약 욥이 고난 속에 놓이게 된다면 분명 하나님을 향하여 욕하고 죄를 지을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힘들어할 때, 하나님께 충실하는 것과 자기 자신도 힘들어질 때 여전히 하나님께 충실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비참한 생애에 직접 참여하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고 하나님깨 충실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겪은 아픔으로 인해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하고 모욕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그야말로 우리 안의 대제사장임을 증명하셨고, 예수님은 바로 우리 삶 속에서 우리 싸움의 시련 속에서 후미에서 지켜주신 것입니다.
(3) 형제로 여겨지는 복
예수님의 성육신에는 용사로서 자신의 백성의 대표 전사가 되는 것, 한편으로 긍휼이 많은 대제사장으로서 죄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참된 속죄 제물로 바쳐지는 것, 후미가 되는 것, 이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두 가지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전히 이루어졌고, 그 결과 속죄된 백성들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입되어 영광으로 인도된 것입니다. 방금 건너뛴 11~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2장
11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제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랍비와 제자라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형제자매라는 가족관계에 들어갔음을 선언해 주시고 계십니다. 구약성경 시편 22편을 여십시오. 시편 22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죠. 이 외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고백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22편 22절에서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22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시편 22편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지금까지의 고난과 고통의 외침에서 일전하여 감사의 말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싸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부활로 인해 그동안 낮아지셨던 것에서 높이 끌어올려졌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회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하르」,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교회 안에서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증명하고 교회 안에서 당신을 찬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2장 13절의 부분도 이사야서 8:17~18에서 인용되는데, 여기서는 구약성서를 펼쳐 볼텐데, 여기 역시 우리 영이 사후 하나님 곁으로 끌어올려진 상황을 상기시킵니다. 승리하신 예수님이 아버지의 오른쪽 자리에 앉으시고, 자신에게 속한 백성의 속죄에 대해「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예수님을 맏형으로 둔 형제자매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니 얼마나 큰 은혜일까요.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주신 영광은 이처럼 풍요롭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결론
오늘의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이유는 십자가의 죽음이 용사로서의 대표 전사의 승리였고,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대제사장이 바칠 수 있는 참된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구원의 용사는 우리에 앞서 율법을 완전히 성취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비하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에까지 함께 하여 주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맡아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여겨졌고, 아버지 하나님을 우러러 예수님을 맏형으로 둔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입되어 영광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성탄절 성육신 사건이란,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序】
クリスマス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クリスマスとは、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がご降誕されたことをお祝いする日であります。これは私たちキリスト者にとって普通のことでありますけれども、世間一般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この世の人々は、クリスマスに教会で御子のご降誕をお祝いすること、或いは、聖書の御言葉を信じることを恥ずかしい事だと感じています。ですから今日、御子を信じる兄弟姉妹と共に礼拝を捧げることができるのは、私にとっても大変うれしいことであります。
神の御子であるイエス様のご降誕のことを神学用語では、受肉の出来事と言います。神の御子はロゴスとして、即ち御言葉として、父なる神と共に天におられましたが、今から約2000年前に、私たちと同じ肉と血をお取りになって、人としてお生まれになりました。この受肉の出来事は、ヘブライ人の手紙によると、人々のために十字架で死なれるための受肉であったと語っています。つまり最初から「死」を目指すものであったと語っています。これは一体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本日はヘブライ人への手紙を通して共に御言葉の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1】. 救いの創始者
2:10節をご覧ください。
“というのは、多くの子らを栄光へと導くために、彼らの救いの創始者を数々の苦しみを通して完全な者とされたのは、万物の目標であり源である方に、ふさわしいことであったからです。”
「数々の苦しみを通して完全な者とされた」とは、何もイエス様がそれまで不完全な者であったとか、イエス様に罪があった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数々の苦しみを通して完全な者とされた」とは、人として律法の下で歩まれ、信仰によって御父の御心に従い、実に数々の苦しみを経たイエス様のご生涯とは、アダムが成し遂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神に対する従順の歩みであり、律法を全うする歩み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神にとってふさわしいことでありました。
10節の「創始者(韓国語では主)」という言葉に注目してください。ギリシア語で「アルケゴス」です。この言葉は、新約聖書の中で使徒言行録と、このヘブライ人の手紙にしか出てきません。ヘブライ人の手紙では、「創始者」と翻訳されていますが、使徒言行録(3:15、5:31)では、「導き手(新共同訳)」とか、「君(新改訳)、(韓国語では王)」と翻訳されています。もともとの意味は、勇者ですとかチャンピオンという意味です。
恐らくこの手紙を読んだ読者は、「アルケゴス(勇者)」、という言葉を読んで、ギリシャ神話の最強の英雄、ヘラクレスを連想したのではないかと言われています。と言いますのは、まず、ヘブライ人の手紙とは、散らされユダヤ人に書かれた手紙ですが、彼らはギリシャ語を話す、ヘレニズム化されたユダヤ人であったからです。読者である彼らにとってギリシャ神話は、大変聞き慣れたものでありました。神ゼウスと人間の女との間に生まれてきたヘラクレスは、生まれてきた時から、人間離れした怪力を持っていました。ヘラクレスは、成長し、数々の試練を乗り越え、最後には死んで天に昇り、神々の一員になったという神話であります。ヘラクレスが勇者であったように、イエス様も勇者であり、あたかもダビデがゴリアトと戦ったあの戦闘を彷彿させるような代表戦士でありました。イエス様は怪力の持ち主ではありませんが、御自身に属する子らを栄光に導くために先頭に立って戦ったのであります。その戦いの相手とは誰かと言いますと、罪と死の権勢であり、罪を通してこの世を支配しようとする悪魔であります。ルカによる福音書11:21~22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イエス様のお言葉です。
“強い人が武装して自分の屋敷を守っているときには、その持ち物は安全である。しかし、もっと強い者が襲って来てこの人に勝つと、頼みの武具をすべて奪い取り、分捕り品を分配する。”
ルカ福音書のこの文脈では、強い人というのは、悪魔です。悪魔は、悪霊たちを従えています。ところがそこへもっと強い者、即ちイエス様がこの屋敷を襲って悪魔に勝利すると、悪魔から頼みの武具がすべて奪われてしまいます。そして悪魔が実行支配していたこの世を、霊的に神の国に変えてくださるのです。
【2】. 憐み深い大祭司
2:11節~13節はスキップしまして、先に14節以降を見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ここでは、イエス様の十字架の死について焦点が当てられており、しかもそれは、大祭司による捧げものであったという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2:14~15節をご覧ください。
“ところで、子らは血と肉を備えているので、イエスもまた同様に、これらのものを備えられました。それは、死をつかさどる者、つまり悪魔を御自分の死によって滅ぼし、死の恐怖のために一生涯、奴隷の状態にあった者たちを解放なさるためでした。”
イエス様の十字架の死とは、悪魔の働きを滅ぼすもの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なぜご自身の死によって悪魔の働きを滅ぼすことが出来たのでしょうか。そもそも悪魔とは、堕落した天使であります。傲慢になり、神に敵対したため、天から追放され、地に落とされました。悪魔が人間を支配し、人間を神の最後の審判へと道連れできるのは、人間が罪を犯したからであります。このことから分かるのは、悪魔とて、神の絶対的な法の下で、自らの影響力を行使しているに過ぎない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人間に罪があり、神の御前に立ち得る者ではないために、悪魔は神に訴えて、「神様、人間どもも、自分と同じように恵みを受ける資格はありません。あなた様に反逆しているため死に値します」と告訴しているのです。こうして、罪人である人間は、自らの罪ゆえに、悪魔の支配の中で、奴隷となっているのです。しかし、神の御子イエス様が血と肉を取られ、完全な人間としてこの世に現れました。そして、死の権勢に立ち向かい、罪のないお方が、代わりに十字架上で刑罰を受けられることによって、御自身に属する子らの罪を贖ってくださったのです。これにより贖われた子らは死の恐怖から解放されました。贖われた子らにとって、死とは永遠の命への通過点となり、死後、その魂は直ちにイエス・キリストの御許に引き上げ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もしかしたら「死の恐怖」などと言いますと、「いやいや、私は神なんか信じていないが、死なんて鼻っから恐れていないよ」と言う人もいるかもしれません。社会問題として、自殺の問題がありますが、この世の苦悩から解放されようとして、自ら命を絶つ人もいるくらいです。ある人が、「死なんて怖くない。すべてのものに終わりがあるのは、厳しいことだけど、それは自然なことだ」と考えるのも頷けます。しかし、本当に死の恐怖などないと言い切れるでしょうか。たとえ、平然と死ぬことが出来たとしても、それだけでは死の恐怖から解放されているとは言えません。なぜなら死んだ後、身体と魂が分離された死後の世界が確かにあるからです。死後、陰府に降るのか、或いはキリストの御許に引き上げられるのか、これは大変大きな違いです。この問題が解決されなければ、死の恐怖から、真に自由になったとは決して言えないのであります。続いて16~17節をご覧ください。
“確かに、イエスは天使たちを助けず、アブラハムの子孫を助けられるのです。それで、イエスは、神の御前において憐れみ深い、忠実な大祭司となって、民の罪を償うために、すべての点で兄弟たちと同じようにならねばならなかったのです。”
ここでは、イエス様に対する新たな呼称が出てまいります。それは憐み深い、忠実な「大祭司」という言葉です。ギリシア語では「アルキエレウス」です。大祭司とは神と民の間に立って、犠牲の供え物を捧げる役割を担いました。イエス様は罪のないご自身の身体を十字架に捧げ、御自ら、犠牲の供え物となられました。それにより神への真のなだめの供え物を捧げることが出来たのです。と言うのは、旧約に出てくる犠牲の捧げものは、全てイエス・キリストを予表するものであり、神は、決して牛や羊の犠牲それ自体によって宥められる訳ではないからです。牛や羊の血、そのものを求めていた訳ではなかったからです。そして、大祭司の働きは神と民を仲介する働きでありますから、そこで求められるのは、罪を犯す民との連帯であり、一体感です。ですから大祭司は、必ず民の中から立てられる必要がありました。イエス様も同じように神の民と同じ血と肉を持たれたのであります。18節をご覧ください。
“事実、御自身、試練を受けて苦しまれたからこそ、試練を受けている人たちを助け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先ほどの17節にも「憐み深い」という言葉がありましたが、罪人である民と全く同じ苦難を味わうことがなければ、決して罪人を憐れむことなど出来ません。試練の中にある人々を助けることが出来る資格とは、その人も同じような試練を受け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どんなに神様に敬虔な信仰の持ち主であっても、その人が試練を受けていなければ、それは他人に何の影響も及ぼすことは出来ないと言うことです。ヨブ記の中で、悪魔は神様に対し次のように訴えました。ヨブ記1:9~11をご覧ください。
“サタンは答えた。「ヨブが、利益もないのに神を敬うでしょうか。あなたは彼とその一族、全財産を守っておられるではありませんか。彼の手の業をすべて祝福なさいます。お陰で、彼の家畜はその地に溢れるほどです。ひとつこの辺で、御手を伸ばして彼の財産に触れてごらんなさい。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ちがいありません。」”
悪魔は、もしヨブが苦難の中に置かれるなら、きっとあなたを呪い、罪を犯すに違いないと言っています。他人が苦しんでいる時に神様に忠実であることと、自分自身も苦しんでいる時に、なお神様に忠実であり続けることは全く別問題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罪人の悲惨な生涯にダイレクトに参与されました。それでも、神を呪うことなどせず、神に忠実に歩み続けられました。ですから、イエス様が体験された痛みによって、イエス様が人々から拒絶され、侮辱され、十字架に付けられたことによって、彼こそ私たちの中の大祭司であることを証明され、イエス様はまさに、私たちの人生の中で、私たちの戦いの試練の中で、しんがりとして守ってくださったのです。
【3】. 兄弟とされる祝福
イエス様の受肉には勇者として御自身の民の代表戦士になること、一方で憐み深い大祭司として罪人に寄り添い、真のなだめの供え物として捧げられること、しんがりとなること、この二つの意味があったと考えられます。この二つが十字架に死によって完全に成し遂げられ、その結果、贖われた民が、神の家族として迎え入れられ、栄光に導き入れられるという事態が起こったのであります。先ほどスキップしました11~13節をご覧ください。
“事実、人を聖なる者となさる方も、聖なる者とされる人たちも、すべて一つの源から出ているのです。それで、イエスは彼らを兄弟と呼ぶことを恥としないで、「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わたしの兄弟たちに知らせ、/集会の中であなたを賛美します」と言い、また、/「わたしは神に信頼します」と言い、更にまた、/「ここに、わたしと、/神がわたしに与えてくださった子らがいます」と言われます。”
イエス様は、弟子たちを兄弟たちと呼ぶことを恥とされませんでした。もはや、ラビと弟子という上下関係ではなく、兄弟姉妹という家族の関係に入られたことを宣言してくださっています。かぎ括弧の部分は旧約聖書の引用です。開ける方は旧約聖書の詩編22編をお開きください(852ページ)。詩編22編は、「わが神、わが神 なぜ私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か」という言葉で始まっていますね。この叫びは、イエス様が十字架に掛けられた時に告白した言葉でもあります。ところが22編23節で、がらりと雰囲気が変わっています。23節をお読みします。
“わたしは兄弟たちに御名を語り伝え/集会の中であなたを賛美します。”
これまでの苦難と苦痛の叫びから、一転して感謝の言葉になっています。イエス様は戦いに勝利したため、復活によってこれまで低められたところから、高く引き上げられたことが暗示されているのです。また、「集会」という言葉は、ヘブライ語で「カーハール」、ギリシア語で「エクレシア」という言葉が使用されていますので、この個所は「教会の中であなたを賛美します」と読み取ることが出来ます。イエス様は兄弟たちに父なる神を証しされ、教会の中であなたを賛美しますと語られているのです。同じ様に2章13節のかぎ括弧の箇所もイザヤ書8:17~18からの引用でありますが、ここでは旧約聖書を開くことを割愛させていただきますが、ここも、やはり私たちの霊が死後、御許に引き上げられた状況を想起させます。勝利されたイエス様が、御父の右の座に着座され、御自身に属する民の贖いについて「ここに、わたしと、神がわたしに与えてくださった子らがいます。」そう語っているのです。神の家族として、イエス様を長兄とする兄弟姉妹の関係に入れられるとは、どれほど大きな恵みでしょうか。受肉されたイエス様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栄光とは、このように豊かで恵み深いものなのであります。
【結論】
本日の内容をまとめます。イエス様が死なれるためにこの世に受肉された理由とは、十字架の死が、勇者としての代表戦士の勝利であり、また、同時に神の怒りをなだめるために、大祭司が捧げることができる真の捧げものであったからです。私たちの救いの勇者は、私たちに先立ち、律法を完全に成就してくださいました。それだけではなく、憐み深い大祭司は私たちの弱さにまで遜り、寄り添ってくださり、私たちが受けるべき刑罰を代わりに担ってくださいました。それによって死の恐怖から解放され、自由とされ、父なる神を仰ぎ、イエス様を長兄とする神の家族に迎え入れられ、栄光に入れられたのであります。クリスマスの受肉の出来事とは、そのような目的をもっていたことを覚えつつ、私たちはイエス様に信頼し、イエス様を心から賛美し、礼拝する者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