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つのパンと二匹の魚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ヨハネによる福音書 6章1節~15節
6:1その後、イエスはガリラヤ湖、すなわちティベリアス湖の向こう岸に渡られた。
6:2大勢の群衆が後を追った。イエスが病人たちになさったしるしを見たからである。
6:3イエスは山に登り、弟子たちと一緒にそこにお座りになった。
6:4ユダヤ人の祭りである過越祭が近づいていた。
6:5イエスは目を上げ、大勢の群衆が御自分の方へ来るのを見て、フィリポに、「この人たちに食べさせるには、どこでパンを買えばよいだろうか」と言われたが、
6:6こう言ったのはフィリポを試みるためであって、御自分では何をしようとしているか知っておられたのである。
6:7フィリポは、「めいめいが少しずつ食べるためにも、二百デナリオン分のパンでは足りないでしょう」と答えた。
6:8弟子の一人で、シモン・ペトロの兄弟アンデレが、イエスに言った。
6:9「ここに大麦のパン五つと魚二匹とを持っている少年がいます。けれども、こんなに大勢の人では、何の役にも立たないでしょう。」
6:10イエスは、「人々を座らせなさい」と言われた。そこには草がたくさん生えていた。男たちはそこに座ったが、その数はおよそ五千人であった。
6:11さて、イエスはパンを取り、感謝の祈りを唱えてから、座っている人々に分け与えられた。また、魚も同じようにして、欲しいだけ分け与えられた。
6:12人々が満腹したとき、イエスは弟子たちに、「少しも無駄にならないように、残ったパンの屑を集めなさい」と言われた。
6:13集めると、人々が五つの大麦パンを食べて、なお残ったパンの屑で、十二の籠がいっぱいになった。
6:14そこで、人々はイエスのなさったしるしを見て、「まさにこの人こそ、世に来られる預言者である」と言った。
6:15イエスは、人々が来て、自分を王にするために連れて行こうとしているのを知り、ひとりでまた山に退かれ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ヨハネによる福音書 6章1節~15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2025년 11월 9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요한복음 6장 1~15절
서론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사역에는 하나님의 영적 진리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오늘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은 옛날 광야에서 만나가 내리던 기적이 예표했던 것이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형태로 주어졌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구약성경에 예언된 모세와 같은 그 예언자가 오셨습니다. 오늘도 요한복음을 통해 함께 말씀의 은혜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1)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오늘 본문에서 나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은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제외하고 네 복음서가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는 기적은 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뿐입니다. 이는 처음 그 기적을 목격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사건이 그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충격적이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1~4절을 보십시오.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오늘 6장의 이야기 배경은 갈릴리입니다. 지난 5장의 이야기 배경은 유다의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세례 요한이 처형된 직후에 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베랴 호수는 1절에 설명된 대로 갈릴리 바다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시자, 큰 무리가 호숫가 길을 따라 뒤를 따라왔습니다. 2절에는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음이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표적」이라는 말이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무리는 예수님의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각자 기대에 부풀어 예수님을 따라왔다는 뜻입니다.「건너편」이 어디인지는 요한복음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벳새다라는 곳에서 배에서 내리시고 그 근처 산에 오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가복음 9:10). 그래서 어떤 주석서에는 예수님께서 여기서 제자들과 함께 오르셨던 산이 골란 고원의 어느 작은 언덕이 아니었을까 하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산에 오르셔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앉으시자, 많은 군중들도 모여들었다는 상황입니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워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을 잡아서 누룩을 넣지 않은 떡과 쓴 나물을 함께 먹고, 어린 양의 피로 하나님의 심판이 지나가게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시기는 일 년 중에서도 특히 해방의 기운이 고조되고 민족주의적 열정이 고양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2)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 드러나는 제자들의 무지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보니 큰 무리가 열광적으로 그분을 따라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5절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빌립에게 하신 예수님의 질문은「방법」'에 대한 질문일까요? 아니면「장소」에 대한 질문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여기서 「어디서 떡을 사야 하겠느냐」고 장소에 대해 질문하고 계십니다. 「어디서 사야 하는가」라는 이 관점이 오늘 본문에서 매우 중요해지지만,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6절을 보십시오.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큰 무리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줄 것인지, 그 해결책을 이미 스스로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시험을 주시기 위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빌립은 벳새다 출신이었기에 이 근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대답했습니다. 7절입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1데나리온은 하루 일한 임금에 해당합니다. 현대 화폐 가치로, 하루 일한 임금을 십 만 원으로 가정하면 2000만 원이 됩니다. 빌립은 이 큰 무리를 먹일 만큼 자신들이 부유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 제자 중 한 사람인 안드레가 대답했습니다. 9절입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도 빌립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부정적으로 대답합니다. 즉 빌립도 안드레도 이렇게 많은 군중을 먹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6절에는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빌립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시험한다는 말은 테스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련을 준다는 뜻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빌립이 낙제점이고 안드레가 간신히 합격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련을 통해 빌립과 안드레의 무지를 드러내고, 앞으로 행해질 표적으로 그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빌립과 안드레의 무지는 제자들 전체의 무지를 대표한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행하실 표적을 통해 잠들어 있는 제자들의 영의 눈을 깨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눈이 열리도록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3) 지상의 권세를 거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소년이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용하여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10~13절을 보십시오.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계절은 봄이었기에 그곳에는 풀이 푸르르게 무성했습니다. 땅에 엎드려 식사를 하기에는 적당한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남자만 5천 명이었다고 하니, 여자와 아이까지 합치면 만 명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식사 준비는 다 되었지만, 만 명을 먹일 중요한 식량은 어디에 있을까요? 제자들과 사람들의 시선은 저절로 예수님께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떡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물고기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원대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자 사람들은 먹고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14절입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선지자라는 말에 정관사가 붙어 있으므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선지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신명기에 예언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말합니다. 신명기 18:15절을 보십시오.
신명기 18장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같은 예언자, 곧 오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라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민족주의적 열정이 고조되어 그 일에 박차를 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동기를 살펴보면, 자신들이 먹고 만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매일 먹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런 동기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군중이 바라는 메시아란, 배고픔을 채워 주시고 일상생활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자신들의 먹거리를 위한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정치적인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군중의 기대를 끊고 홀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기대하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금 전 예수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실 이 「어디서」라는 말은 요한복음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2장에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복음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2장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이 최상의 포도주가 과연 어디에서 왔는지가 저자 요한에 의해 묻히고 있습니다. 연회장이 알고 있던 것은 이 물이 정결을 위한 돌항아리에서 나왔다는 사실뿐이었고, 하나님에 의해 포도주로 변한 것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디서」라는 이 말에는 인간 측의 무지가 드러나 있습니다. 이어서 산헤드린 의원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8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3장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헬라어로 바람은 「프뉴마」이며, 영이나 숨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영은 원하는 대로 불지만, 사람은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어디서」라는 말이 예수님에 의해 질문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이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어서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한 부분입니다. 4:11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4장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사마리아 여인은 그 생수를 대체 어디서 얻겠냐고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수를 주시고,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주시지만,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세 구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어디서」라는 질문에 대해 밝혀진 것은, 인간 측에서는 「'어디서」라는 질문의 답을 제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영적 무지가 「'어디서」라는 질문에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신 것은 제자들의 영적인 일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요한복음 6:31~32에는 결론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니,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31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너희가 먹고 배부르게 된 떡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보이지 않는「참 떡」으로 여러분을 채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나타나신 바로 그, 곧 자신이 하늘로부터 온 「참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군중을 비롯해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떡」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무지를 드러낸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기억으로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비로소 그때 예수님의 질문 의도와 이사야서의 예언 말씀이 연결되어 제자들에게 이해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 55장 1~3절을 보십시오.
이사야 55장
1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네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네게로 나아와 들으로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배불리시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시나, 참 떡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나아오면, 돈을 내지 않고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참 떡을 받고 포도주와 젖과 좋은 음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결론
오늘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하늘의 은혜에 대해 전혀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시대에는 만나를 통해, 예수님의 시대에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하늘의 은혜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가 넘쳐흐르게 되고, 곡식과 포도주와 젖으로 채워져 그 풍요를 누리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시며, 예수님만이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답이시며, 예수님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십니다.
【序】
イエス様がなされた奇跡の御業には、神の霊的真理が明らかにされています。ヨハネの福音書では「しるし」という言葉が用いられていますが、本日の五つのパンと二匹の魚の奇跡とは、昔、荒れ野でマナが降る奇跡が予表していたものが、イエス様において完全な形で与えられたということを指し示していると考えられます。今や、旧約聖書に預言されたモーセのような、あの預言者が来られたのであります。本日もヨハネによる福音書を通して、共に御言葉の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1】. 過越祭が近づく中で
本日の箇所で出てまいりました、五つのパンと二匹の魚の奇跡は、四つの福音書すべてに記録されています。イエス様の十字架と復活の出来事を除いて、四つの福音書が共通して記録している奇跡というのは、この五つのパンと二匹の魚の奇跡だけであります。このことは、最初にその奇跡を目撃したキリスト者たちにおいて、その出来事が彼らの心の中でどれほど衝撃的で、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たのかということを示しています。1~4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の後、イエスはガリラヤ湖、すなわちティベリアス湖の向こう岸に渡られた。大勢の群衆が後を追った。イエスが病人たちになさったしるしを見たからである。イエスは山に登り、弟子たちと一緒にそこにお座りになった。ユダヤ人の祭りである過越祭が近づいていた。”
本日の6章の話の舞台はガリラヤです。前回の5章の話の舞台はユダヤのエルサレムでありました。この間、どれくらいの月日が経過したのかは分かりませんが、他の福音書を見ますと、洗礼者ヨハネが死刑された直後に、この五つのパンと二匹の魚の奇跡がなさ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ティベリアス湖とは1節に説明されているようにガリラヤ湖のことであります。イエス様はガリラヤ湖の向こう岸に渡られると、大勢の群衆が湖の陸のへり伝いに沿って、後を追いかけて来ました。2節には、「病人たちになさったしるしを見たから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が、「しるし」という言葉が複数形になっています。すなわち、群衆はイエス様の数々の癒しの奇跡をその目で見たため、それぞれ期待に胸を膨らませながらイエス様の後を追いかけて来たの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向こう岸」とはどこなのか、ヨハネの福音書には具体的に書かれていませんが、他の福音書を見ますと、ベトサイダという場所で舟から降りられ、その付近の山に昇ら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ルカ9:10)。ですからある注解書には、イエス様がここで弟子たちと登られた山とは、ゴラン高原の、ある小高い丘ではないかと書かれていました。山に登られ、イエス様が弟子たちと一緒にそこにお座りになると、大勢の群衆も集まって来たという状況です。時は過越祭が近づいていた頃でありました。過越祭とは、小羊を屠り、酵母を入れないパンと苦菜を一緒に食べ、子羊の血によって神の裁きが過ぎ越されたことをお祝いする祭りです。この時期は一年の中でも特に、解放の機運が高まり民族主義的な情熱が高揚する、そんな時期でもありました。
【2】. フィリポとアンデレを通して明らかにされる弟子たちの無知
さて、イエス様が目を上げると多くの群衆が熱狂的にご自身に従って来るのをご覧になりました。そこでフィリポに言われます。5節です。「この人たちを食べさせるには、どこでパンを買えばいいだろうか」このイエス様の質問について、私たちはきちんと調べ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こでフィリポに対してなされたイエス様の質問は、「方法」について質問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或いは「場所」について質問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どちらだと思いますでしょうか。イエス様はここで、「どこでパンを買えばいいだろうか」と、場所について質問しています。「どこで買うのか」この視点が、本日の箇所で大変重要になってまいりますが、それについては後で説明させていただきます。先に進みまして、6節をご覧ください。
“こう言ったのはフィリポを試みるためであって、御自分では何をしようとしているか知っておられたのである。”
イエス様はこれほどの大群衆に対し、どこでパンを買って与えるのか、その解決策を既にご自身は持っておられました。しかし、あえて試練を与えるために質問をしているのです。フィリポはベトサイダ出身でしたから、この辺りの勝手についてよく知って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彼は頭の中でそろばんをはじきながら答えました。7節です。「めいめいが少しずつ食べるためにも、二百デナリオン分のパンでは足りないでしょう」1デナリオンとは、一日働いた賃金に相当します。現代の金額で、仮に一日働いた分の賃金を一万円としますと、200万円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フィリポをこの大群衆を食べさせるほど、自分たちは豊かではな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続いて弟子の一人であるアンデレが答えました。8節です。“ここに大麦のパン五つと魚二匹とを持っている少年がいます。けれども、こんなに大勢の人では、何の役にも立たないでしょう。”
アンデレもフィリポと同じように「こんなに大勢の人では、何の役にも立たない」と否定的に答えています。つまりフィリポもアンデレもこれほど多くの群衆を食べさせるには到底不可能であ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6節には「フィリポを試みるため」と書かれていました。これは、フィリポの信仰をテストするためというような意味合いではありません。試みるという言葉は、テストするという意味ではなく試練を与えるという風にご理解ください。フィリポは落第点で、アンデレはかろうじて及第点だということ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試練を通して、フィリポとアンデレの無知を明らかにし、これからなされるしるしによって彼らの目を開かせるためであると考えられます。従いまして、フィリピやアンデレの無知は、弟子たち全員の無知を代表していると解釈すべきです。イエス様はこれからなされるしるしによって眠っている弟子たちの霊の目を目覚めさせ、イエス・キリストに対する信仰の目が開かれるように仕向けているのです。
【3】. 地上の権勢を拒否されるイエス様
イエス様は少年が持っていた五つのパンと二匹の魚を用いて奇跡を起こされました。10~13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人々を座らせなさい」と言われた。そこには草がたくさん生えていた。男たちはそこに座ったが、その数はおよそ五千人であった。さて、イエスはパンを取り、感謝の祈りを唱えてから、座っている人々に分け与えられた。また、魚も同じようにして、欲しいだけ分け与えられた。人々が満腹したとき、イエスは弟子たちに、「少しも無駄にならないように、残ったパンの屑を集めなさい」と言われた。集めると、人々が五つの大麦パンを食べて、なお残ったパンの屑で、十二の籠がいっぱいになった。”
季節は春ですから、その場所には草が青々と茂っていました。地面に伏して食事を取るのに、程よい感じだったと思われます。男だけで5千人いたということですから、女・子供を合わせると一万人以上はいたでしょう。いざ食事の準備は整いましたが、一万人を食べさせる肝心の食糧はどこにあるのでしょうか。弟子たちと人々の視線は、自ずとイエス様に集まっていたと思われます。そんな中、イエス様はパンを取り感謝の祈りを唱えてから、座っている人々にパンを分け与えられました。魚も同じように、欲しいだけ分け与えられました。イエス様は奇跡を起こされ、人々は食べて満たされたのです。食べて満腹になった人々は、互いに言い合いました。14節です。「まさにこの人こそ、世に来られる預言者である」。預言者という言葉には定冠詞がついていますので、「世に来るべき、あの預言者である」と言っていることになります。「あの預言者」とは誰のことを指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そうです。申命記に預言されたモーセのような預言者のことです。申命記18:15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の神、主はあなたの中から、あなたの同胞の中から、わたしのような預言者を立てられる。あなたたちは彼に聞き従わねばならない。”
イスラエルの民はモーセのような預言者を、すなわち来るべきメシアを待ち望んでいました。イエス様こそ、そのメシアであると思い、イエス様を捉え、王に祭り上げようとしたのです。過越祭が近づいていたため、民族主義的な情熱の高まりが、そのことに拍車をかけたのかもしれません。彼らの動機について調べてみるなら、自分たちが食べて満足したからということです。「ごっつあんです。毎日、食べられたらいいな。」そんな動機から、イエス様をメシアにしようとしたのです。群衆が望んでいるメシアとは、空腹を満たしてくださり、日々の生活の苦しみから解放してくださる、自分たちの食のためのメシアでありました。そのような政治的なメシアを望んでいたのです。ところがイエス様はそんな群衆の期待を断ち切り、一人でまた山に退かれて行かれました。私は、あなた方の期待する政治的なメシアではないと主張されているのです。
ここで、私たちは、先ほどのイエス様の質問に振り返ってみたいと思います。イエス様は、「どこでパンを買えばいいだろうか」と質問されました。実はこの「どこで」という言葉は、ヨハネの福音書に一貫しているテーマでもあると言うことが出来ます。例えば、ヨハネ2章において水をぶどう酒に変える奇跡が記録されていますが、この福音書の著者は、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2:9をご覧ください。
“世話役はぶどう酒に変わった水の味見をした。このぶどう酒がどこから来たのか、水をくんだ召し使いたちは知っていたが、世話役は知らなかった…”
この極上のぶどう酒が果たしてどこから来たのかが著者ヨハネによって問われています。世話役が知っていたのはこの水が、清めのための水がめから来ていたことは知っていましたが、神によってぶどう酒に変えられたことは知る由もありませんでした。「どこから」この言葉には、人間の側の無知が暴かれているのであります。続いてサンヘドリンの議員であるニコデモが夜、イエス様を訪問した時のことです。イエス様はニコデモに次のように言われました。3:8をご覧ください。
“風は思いのままに吹く。あなたはその音を聞いても、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かを知らない。…”
皆様もご存じのように、ギリシャ語で風とは「プニューマ」であり、霊とか、息とも訳される言葉です。従いまして「霊は思いのままに吹くけれども、人には、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かを知らない」と語っているのです。ここでもどこからという言葉が、イエス様によって問われています。神から送られる聖霊は、目には見えません。それがどこから来るのか誰も知らないのです。続いてシカルの井戸において、サマリアの女が、イエス様に質問した個所です。4:11をご覧ください。
“女は言った。「主よ、あなたはくむ物をお持ちでないし、井戸は深いのです。どこからその生きた水を手にお入れになるのですか。”
サマリアの女は、その生きた水を一体どこから汲まれるのでしょうかと質問しています。神から生ける水が与えられ、神から永遠の命が与えられますが、人はそれを見ることが出来ません。この三つの聖句に共通している「どこから」という問いに対して、明らかにされていることは、人間の側において、「どこから」という問いの答えを提示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言うことです。人間の霊的無知が「どこから」という問いに対し一貫して現れ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イエス様が弟子たちに「どこでパンを買えばいいだろうか」という質問は、弟子たちの霊的な事柄に対する無知を露わにさせるためであり、そして弟子たちのイエス様に対する信仰の目を開かせるためであったと考えられるのです。ヨハネ6:31~32には、結論的な内容が書かれていますので、開いてみましょう。
“わたしたちの先祖は、荒れ野でマンナを食べました。『天からのパンを彼らに与えて食べさせ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モーセが天からのパンをあなたがたに与えたのではなく、わたしの父が天からのまことのパンをお与えになる。”
イエス様はここで、あなた方が食べて満たされたパンではなく、神からの見えない「まことのパン」によってあなた方を満たしてあげよう。目に見えない神が、人となって現れた私こそ、天からのまことのパンなのだとおしゃっているのです。
群衆を初め、弟子たちさえも、イエス様の言われる「まことのパン」について理解することは出来ませんでした。しかし、弟子たちの無知を露わにした「どこでパンを買えばいいだろうか」というイエス様の質問は、弟子たちの心の中に記憶として残り続けたのであります。そして、イエス様が十字架によって死なれ、復活されたことによって始めて、あの時のイエス様の質問の意図と、イザヤ書の預言の御言葉が結び合わされ、弟子たちに理解されたのだと思います。イザヤ55章1~3節をご覧ください。
“渇きを覚えている者は皆、水のところに来るがよい。銀を持たない者も来るがよい。穀物を求めて、食べよ。来て、銀を払うことなく穀物を求め/価を払うことなく、ぶどう酒と乳を得よ。なぜ、糧にならぬもののために銀を量って払い/飢えを満たさぬもののために労するのか。わたしに聞き従えば/良いものを食べることができる。あなたたちの魂はその豊かさを楽しむであろう。耳を傾けて聞き、わたしのもとに来るがよい。聞き従って、魂に命を得よ。わたしはあなたたちととこしえの契約を結ぶ。ダビデに約束した真実の慈しみのゆえに。”
イエス・キリストは、人々を肉的に満腹させる政治的メシアではありませんが、まことのパンを与えてくださる神ご自身であられ、イエス様を信じ、イエス様のもとへ来るなら、金を払うことなく、代価を払うことなく、まことのパンを受け取り、ぶどう酒と乳と良い食べ物を受け取ることが出来るのであります。
【結論】
本日の内容をまとめます。私たちは、イエス様を通して与えられる天からの恵みに対して全く無知な者たちであります。しかし、神様はモーセの時代にはマンナを通して、イエス様の時代には、五つのパンと二匹の魚を通して、天からの恵みがどのようなものであるのかを、示してくださいました。イエス様を信じるなら、生きた水が溢れ出すようになり、穀物やぶどう酒や乳で満たされ、その豊かさを楽しむ者とされるのです。イエス様だけが真理であり、イエス様だけが困難で厳しい現実の中で生きるための答えであり、イエス様だけが、命に至る道なのであり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