キリストとの論争 그리스도와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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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1章23節~32節
23イエスが神殿の境内に入って教えておられると、祭司長や民の長老たちが近寄って来て言った。「何の権威でこのようなことをしているのか。だれがその権威を与えたのか。」
24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では、わたしも一つ尋ねる。それに答えるなら、わたしも、何の権威でこのようなことをするのか、あなたたちに言おう。
25ヨハネの洗礼はどこからのものだったか。天からのものか、それとも、人からのものか。」彼らは論じ合った。「『天からのものだ』と言えば、『では、なぜヨハネを信じなかったのか』と我々に言うだろう。
26『人からのものだ』と言えば、群衆が怖い。皆がヨハネを預言者と思っているから。」
27そこで、彼らはイエスに、「分からない」と答えた。すると、イエスも言われた。「それなら、何の権威でこのようなことをするのか、わたしも言うまい。」
28「ところで、あなたたちはどう思うか。ある人に息子が二人いたが、彼は兄のところへ行き、『子よ、今日、ぶどう園へ行って働きなさい』と言った。
29兄は『いやです』と答えたが、後で考え直して出かけた。
30弟のところへも行って、同じことを言うと、弟は『お父さん、承知しました』と答えたが、出かけなかった。
31この二人のうち、どちらが父親の望みどおりにしたか。」彼らが「兄の方です」と言うと、イエスは言われ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徴税人や娼婦たちの方が、あなたたちより先に神の国に入るだろう。
32なぜなら、ヨハネが来て義の道を示したのに、あなたたちは彼を信ぜず、徴税人や娼婦たちは信じたからだ。あなたたちはそれを見ても、後で考え直して彼を信じようとしなかっ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1章23節~32節
그리스도와의 논쟁
2018년 11월25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1장 23절~32절
예수님은, 유대인의 유월절 축제 기간 중,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셨습니다. 특히 무화과나무를 시들게 하신 날은, 화요일로 추정되는데, 이날은 매우 바쁘고 중요한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 시든 무화과나무를 지나치신 후, 예수님께서 성전 경내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계시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이 논쟁은 실로 25장 46절까지 이어지며, 다양한 주제로 끝없이 계속되지만, 특히 오늘 읽은 구절에서는 가장 첫 번째인「권위」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23절의 이어지는 부분을 보십시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하고 주 예수님께 추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이런 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면, 일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거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즉, 무리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인정받으시고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일, 그리고 아이들의 찬양을 받아들이신 일, 맹인과 저는 자들을 기적으로 고치신 일, 나아가 성전 정화를 통해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일 등 모든 일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 예수께 논쟁을 걸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아마도 산헤드린 의회의 구성원이라고 생각됩니다. 산헤드린 최고 의회는, 유대인의 종교적 중심이자 유대 사회 권력의 중추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유대교의 권위를 손에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정한 규정에 따르면, 당시 구약성경의 말씀과 조상들의 전승을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랍비가 세워졌습니다. 랍비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명의 임명된 랍비 앞에서 스승의 손으로 안수를 받아야만 비로소 랍비 자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사렛의 목수에 불과하고 그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 예수님께 대해, 「도대체 어디의 누가 너를 인정했느냐」고, 그 권한을 넘어선 행위에 대해 설명을 요구할 권리는 당연히 산헤드린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유대교를 관리할 책임을 지닌 그들에게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때쯤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나사렛 예수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지 은밀히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질문은, 순수하게 가르쳐 달라는 동기로 한 것이 아니라 매우 음험한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메시아의 권위로 이 일을 한다」거나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이다」라고 대답하기라도 한다면, 그 말끝을 잡아 신성 모독죄로 고소하려고 은밀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로 요한의 세례 권위에 대해 되물으셨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요한의 권위와 예수님의 권위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곧 예수님에 대한 태도이기도 했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는다면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이요, 요한을 거부한다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가늠하는 척도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의 야생꿀을 먹으며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설교하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요한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왔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주장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오직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증언한 것이었습니다. 그 증언은 하나님이 요한의 입을 통해「의의 길」을 제시하신 것이었습니다. 말라기 4:5-6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라는 질문에, 종교적 권위를 쥐고 있는 산헤드린으로서 답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선지자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을 깨는 듯, 세례 요한이 나타났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에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주 예수님의 질문에 서로 이러쿵저러쿵 논쟁하며, 결국 종교적 최고 권위자라 자칭하는 산헤드린이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이 논쟁하는 모습은, 군중의 여론을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만약 그들이, 요한의 권위가 하늘에서 온 것임을 분명히 인정해 버린다면, 왜 너희들은, 요한을 믿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주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분명히 증언했으니, 왜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만약 요한의 권위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군중의 반감을 사는 것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지도력이 약해질까 걱정되었고, 무엇보다 그들을 함부로 자극하여 폭동 등으로 발전해 버린다면, 로마 제국으로부터 자신들에게 맡겨진 자치권을 박탈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로마 군대를 한꺼번에 투입받아 진압당하고 나라가 완전히 멸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산헤드린 의원들은, 주 예수님의 날카로운 질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정으로 「모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에 관련된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기에 「알려고 하지 않고,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진실하게 서는 것을 포기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유보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이어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포도원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신약에서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오만하게 등을 돌렸으나, 후에 회개하여 포도원으로 가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한편, 맏아들은「아버지 가겠나이다라고 가볍게 받아들였지만, 포도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맏아들의 대답에 특히 주목해 보면, 새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아버지 가겠나이다」라고 쓰여 있지만, 「부르셨습니까, 주님? 저는 여기 있습니다」라는 뉘앙스입니다. 이는 히브리어에서 순종을 나타내는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저는 여기 있습니다. 보내 주십시오.」라는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두 형제 중,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신실한 아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둘째 아들이니이다」라고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올바르게 대답한 직후,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진정한 목적을 밝히십니다.
사실 이 비유는,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의미 없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거짓 가면을 벗겨 버리는 비유였습니다. 산헤드린 권력자들의 탐욕, 오만, 잔인함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겉모습을 꾸미고 경건함을 고수하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를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이 교회의 충실한 지도자인 양,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여념이 없는 척, 계속 연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가면을 벗겨 버리는 비유였던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에서는 드물게「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지금까지는 「하늘나라」로 표현되었지만, 여기서는 특히 「포도원에 가는 것」을 가리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임을 분명히 암시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녀들을 가리키고, 맏아들은 산헤드린 의원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 점을 지적받자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주 예수님의 입에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포도원에 가지 않았다」는 책망을 듣고, 평소 죄인이라 멸시하던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세리와 창녀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의 멍에를 오만하게 거부했고, 그 후에도 죄를 거듭하며, 돈을 사랑해 이방인을 따르고, 음행을 즐기며 타락해 갔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나타나자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증언하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간 저지르던 죄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즉, 한때 그들이 거부하고 내던졌던 그리스도의 멍에를, 되돌아와 묵묵히 메고 간 것입니다. 한편, 산헤드린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신성한 예배와 율법에 대한 열심을 내세워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고, 자신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자랑하지만, 주 예수님은 그들을 「입으로만 가볍게 대답하는 맏아들의 행동」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과 제물 바치는 일에만 신경 쓸 뿐,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가장 중요한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둘째 아들처럼 나중에 마음을 바꾸지도 않았고, 혹은 「나중에 마음을 바꾼 세리와 창녀들」의 본을 보고 회개하려 하지 않았으며, 포도원에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눈에는 세리와 창녀보다 더 불충실한 자들이며, 그들이 주장하는 「거짓된 위엄」을 완전히 박탈당한 자들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첫째로 드러나는 것은, 죄악이 깊어, 하나님의 의를 주장할 수 없고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함을 자각하는 사람에게는, 은혜에 대한 마음의 문이 열려 회개로 인도되지만, 자신이 옳다고,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며 권위와 권력 위에 안주하고, 위로부터 오는 은혜 따위는 필요 없으며 오히려 메시아의 도래를 위협으로 느끼는 사람에게는, 은혜의 문이 닫히고 회개로 인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믿으면서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날마다 회개하며, 죄의 본성이 뼈 속까지 완전히 스며든, 거친 짐승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멍에에 매여, 똑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길을 걷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주여, 우리 인생에 주님께서 개입해 주시고, 주님께서 모든 책임을 지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구해야 합니다.
둘째, 주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말씀을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으로 완전히 동등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요한이 전한 말씀이, 곧 하나님의 복음이며,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않는다고 동등하게 취급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선지자로 보내졌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곧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부르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이웃을 섬기고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지의 여부는 우리의 책임이 아니지만, 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다음 주에는 크리스마스 전도지 또한 완성될 예정이니, 이를 활용하셔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イエスさまはユダヤ人の過越しの祭りの中で最後の1週間をお過ごしになりました。特にイチジクの木を枯らせた日は、火曜日と推定されますが、この日は大変忙しく、そして重要な日となりました。その日、枯れたイチジクの木を通り過ぎた後、イエスさまは神殿の境内に入られ人々に教えておられると、祭司長や民の長老たちが近寄って来て論争を持ちかけられました。この論争は実に25章46節までに渡り、様々な主題によって延々に続くことになりますが、特に、本日お読みした箇所においては一番最初の「権威」についての論争がなされました。23節の続きからご覧ください。“何の権威でこのようなことをしているのか。だれがその権威を与えたのか。”と主イエスに問い詰めています。彼らが言う「このようなこと」とは、何を指しているのかと言うと、一義的には「イエスさまが宮で教えていること」と考えられます。しかしその背景には、エルサレムに入城されてから、そこに至るまでに様々な出来事がありました。つまり、群衆に対し公然とご自分がメシアであることを受け入れられ、エルサレムに勝利の入城をされた事、そして子どもたちの賛美を受け入れられた事、目の見えない人、足の不自由な人を奇跡によって癒された事、さらには宮きよめによって商売人を追い出した事など、全てのことを含んでいたのでしょう。
主イエスに論争を仕掛けた祭司長と長老たちとは、恐らくサンヘドリン議会の構成員だと考えられます。サンヘドリン最高議会は、ユダヤ人の宗教の中心であり、ユダヤ社会の権力の中枢でもありました。彼らがまさにユダヤ教の権威をその手に握っていたのです。彼らが定めた規定によれば、当時、旧約聖書の御言葉と先祖たちの伝承を正しく教育するために、ラビが立てられました。ラビになるためには、最低三人の任職済みのラビの前で、恩師の手により按手を受けて初めてラビとしての資格が得られるのです。ナザレの大工に過ぎず、彼らによって認められていないイエスさまに対し、「一体どこの誰が、お前を認めたのか」と、その越権行為について説明を求める権利が当然サンヘドリンにはありました。そのようにすることは、ユダヤ教を管理する責任を持っている彼らにとって、当然のことだったと言えるでしょう。しかし、もう既に、この頃には、サンヘドリンの宗教指導者たちにおいて、ナザレ人イエスをどのようにして殺すことができるか、陰で相談されていました。イエスさまが彼らの既得権益を脅かしていたからです。従って、彼らの質問は純粋に教えてくださいという動機で質問をしているのではなく、大変陰険な質問でもあったのです。もし「メシアの権威によってこれらのことをしている」「それは父なる神によって与えられた権威である」とでも答えようものなら、その言葉尻を捉えて、神聖冒涜の罪に訴えてやろうとひそかに機会を狙ってい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一言、ヨハネの洗礼の権威について問い返されました。25-26節をご覧ください。
“ヨハネの洗礼はどこからのものだったか。天からのものか、それとも、人からのものか。」彼らは論じ合った。「『天からのものだ』と言えば、『では、なぜヨハネを信じなかったのか』と我々に言うだろう。『人からのものだ』と言えば、群衆が怖い。皆がヨハネを預言者と思っているから。」”
ヨハネの権威とイエスさまの権威には密接に関連がありました。洗礼者ヨハネの対する人々の態度が、即ち、イエスさまに対する態度でもありました。ヨハネに耳を傾けるなら、イエスさまのもとに来る。ヨハネを拒絶するなら、イエスさまを拒絶するということです。ヨハネとは、神に対する人間の応答の、バロメーター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洗礼者ヨハネとは、ラクダの毛衣を着て、腰に皮の帯を締め、いなごと野密を食べながら荒れ野で、人々に悔い改めを説き、悔い改めのバプテスマを授けていた人物でした。神はメシアの先駆者としてヨハネをこの世に遣わされました。彼は主の道を備えるために来たということ以外には、他のどのような主張も前面に出しませんでした。彼の生涯とは、キリストが神の独り子であるということを証言しただけです。その証言は、神がヨハネの口を通して「義の道」を提示されたのです。マラキ書3:23-24節の預言の成就として、神がお遣わしくださったのです。人々はみな、ヨハネを神の預言者だと思っていました。「洗礼者ヨハネの権威は、一体どこから出たのか」、宗教上の権威を握るサンヘドリンとして、これに答えるのは当然の義務でした。預言者マラキ以降、400年間イスラエルには預言者現れませんでした。しかし神の沈黙を破るかのように、洗礼者ヨハネが現れました。もしかしたら、この時代に神が遣わした預言者なのかもしれないのす。ところが、祭司長と長老たちは主イエスの質問に対し、互いに、あーでもない、こーでもないと論じ合いながら、結局、宗教的最高権威者と自称するサンヘドリンが「わかりません」と結論を出しました。彼らの論じ合うその姿は、群衆の世論を恐れながら、自分たちの身の安全を第一に考えていました。つまり、もし、彼らがヨハネの権威が天からだとはっきり認めてしまうなら、なぜ、あなた方はヨハネを信じ、悔い改めて洗礼を受けなかったのですか、となってしまいます。さらに、洗礼者ヨハネは主イエスをメシアであると明白に証言していましたから、なぜ、彼の証言を受け入れなかったのです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しまいます。それでは、逆に、もしヨハネの権威が人からだと言えばどうでしょうか。群衆の反感を買うのは避けられません。自分たちの指導力が弱まる心配がありましたし、何より、彼らを下手に刺激してしまい、暴動などに発展してしまったなら、ローマ帝国から自分たちに任されている自治権をはく奪されたり、最悪の場合は、ローマの軍隊を一気に送り込まれて、鎮圧され、国が完全に滅ぼされかねないのです。そういう訳で、サンヘドリンの議員たちは主イエスの鋭い質問に対し「私たちにはわかりません」と答えました。本当に「わからない」のではなく、自分たちの利害や安全にかかわる問題に触れるため、「分かろうとしない、結論を出したくない」ということでした。彼らは、神の御前に真実に立つことを放棄し、結論を出すことを保留しました。するとイエスさまも“それなら、何の権威でこのようなことをするのか、わたしも言うまい”と言われ、次に一つのたとえ話をされました。28-30節をご覧ください。
“ところで、あなたたちはどう思うか。ある人に息子が二人いたが、彼は兄のところへ行き、『子よ、今日、ぶどう園へ行って働きなさい』と言った。兄は『いやです』と答えたが、後で考え直して出かけた。弟のところへも行って、同じことを言うと、弟は『お父さん、承知しました』と答えたが、出かけなかった。”
この譬えの中で、父とは神さまです。ぶどう園とは、旧約における、「イスラエル」であり、新約においては「教会」です。もっと言えば、ぶどう園とは神の国を指しています。兄は、神の国で働きなさいという父の言葉に、最初は傲慢不遜に背を向けたものの、後で悔い改めてぶどう園に行き、父の言葉に従順しました。一方、弟は「はい主よ、承知しました」と気軽に引き受けたものの、ぶどう園に行きませんでした。父の言葉に不従順だったのです。弟の返事に特に注目しますと、新共同訳聖書では「お父さん承知しました。」と書かれていますが、「呼ばれましたか、主よ。わたしはここにいます」というニュアンスです。これはヘブライ語において従順を現す返事です。神が召してくだされば、私はここにいます。お遣わしください。という姿勢です。それでは実際に二人の兄弟の内、父親の望み通り行った、信実な息子はどちらだったでしょうか。彼らは「兄のほうです」と正しく答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祭司長と長老たちが正しく答えた直後に、イエスさまはこの譬えの本当の狙いを明かされます。
実は、この譬えは、彼らからこれ以上、自分たちが神の使者であるという意味のない振る舞いをさせないように、偽りの仮面をはがしてしまうような譬えでした。サンヘドリンの権力者たちの貪欲、傲慢、残忍性は、皆が知る所ではありましたが、彼らは表面を繕い、敬虔深さを堅持し続けようとしていました。彼らは、主イエスを攻撃することによって、自分たちが教会の忠実な指導者であるかのように、教会の秩序を維持することに余念がないように演じ続けていたのです。その化けの皮をはがしてしまうような譬えだったのであります。31節をご覧ください。
“この二人のうち、どちらが父親の望みどおりにしたか。」彼らが「兄の方です」と言うと、イエスは言われ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徴税人や娼婦たちの方が、あなたたちより先に神の国に入るだろう。”
ここでマタイによる福音書では、珍しく「神の国」と言う言葉が使われています。これまでは「天の国」と表現されますが、ここでは特に「ぶどう園に行くこと」を指して、それが神の国に入ることだとはっきり暗示するために使われていると思われます。そしてイエスさまは譬えの中の兄とは、徴税人や娼婦たちの事を指していて、弟とはサンヘドリンの議員たちを指していることを明らかにしました。このことを指摘されて、祭司長、長老たちは、ショックを受けたことでしょう。なぜなら、彼らは、神に従順であると自認していたけれども、主イエスの口から、自分たちは「神の国に入らなかった」「ぶどう園に行かなかった」と叱責され、普段から罪人と蔑視していた徴税人や娼婦たちが、むしろ神の国に入って行ったということを聞かされたからです。初め、徴税人や娼婦たちは、自分たちに示された神の律法の頸木を傲慢に拒絶し、その後も罪を悉く重ね、お金を愛して異邦人に従ったり、不品行を楽しみ堕落していきました。しかし、洗礼者ヨハネが現れてから、彼らは悔い改めました。そしてヨハネが証言するキリストについていき、それまで犯していた罪にもはや固執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つまり、一度彼らが拒絶し、払いのけたキリストの頸木を、立ち帰り黙って担って行ったのです。一方、サンヘドリンの人々はどうでしょうか。彼らは、自分たちの捧げる神聖な礼拝と律法に対する熱心さを前面にひけらかし、自分たちの義を主張し、自分たちがいかに卓越しているのかを主張しますが、主イエスは、彼らを、「口先だけの弟の行動」に譬えているのです。彼らは、表面的な儀式やいけにえの供え物ばかりに気を配るだけで、葉ばかりのイチジクの木のように、肝心の悔い改めの実を結ぶ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32節をご覧ください。
“なぜなら、ヨハネが来て義の道を示したのに、あなたたちは彼を信ぜず、徴税人や娼婦たちは信じたからだ。あなたたちはそれを見ても、後で考え直して彼を信じようとしなかった。”
祭司長、長老たちは兄のように、後から心を変えることもなく、或いは、「後から心を変えた徴税人や娼婦」たちの模範を見て、悔い改めようとはしないで、ぶどう園に行こうとはしませんでした。従って神の目からは、徴税人や娼婦より不忠実な者であり、彼らが主張している、「偽りの威厳」を完全にはく奪しているのです。
この譬えを通して第一に見えてくるのは、罪深さの故に、神の義を主張することができず、自分には神の恵みがどうしても必要だと自覚する人には、恵みに対し心の門が開かれて、悔い改めに導かれますが、自分は正しいと、神の義を主張し、権威と権力の上にあぐらをかき、上からの恵みなど必要なく、かえってメシアの到来に脅威を感じている人には、恵みの門が閉ざされ、悔い改めに導かれることがない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上からの恵みを信じつつ、祈りを通して神の憐れみと神の恵みを求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の御前に罪を告白し、日々悔い改め、罪の性質が骨身にまで完全にしみついた荒々しい家畜ではありますが、キリストの頸木に繋がれて、まっすぐに神の祝福の道を歩ませてくださいと祈るべきです。私たちの人生を神様にお委ねいたします。主よ私たちの人生に主が介入してくださり、主が全責任をおとりになってくださいと祈り求めていくべきです。
第二に、主イエスは、洗礼者ヨハネの言葉を神の招きの言葉として全く同等に捉えました。ヨハネによって語られた言葉が即ち神の福音であり、もし彼の言葉に耳を傾けないのならイエスさまのみ言葉も信じないと、同等に取り扱われました。今の時代、私たちキリスト者がこの世に預言者として遣わされています。私たちの言葉が即ち神の国の招きの言葉なのです。ですから時が良くても悪くても福音を宣べ伝え、隣人に仕え、主を証しすべきです。人々が福音を受け入れるのかどうかは、私たちの責任ではありませんが、宣べ伝えることは私たちの責任です。来週にはクリスマスのチラシも出来上がりますので、どうぞ、それをお用いくださり、近所の人々に福音を語ってまいり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