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を生かす信仰 사람을 살리는 믿음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ヨハネによる福音書 4章43節~54節
4:43二日後、イエスはそこを出発して、ガリラヤへ行かれた。
4:44イエスは自ら、「預言者は自分の故郷では敬われないものだ」とはっきり言われたことがある。
4:45ガリラヤにお着きになると、ガリラヤの人たちはイエスを歓迎した。彼らも祭りに行ったので、そのときエルサレムでイエスがなさったことをすべて、見ていたからである。
4:46イエスは、再びガリラヤのカナに行かれた。そこは、前にイエスが水をぶどう酒に変えられた所である。さて、カファルナウムに王の役人がいて、その息子が病気であった。
4:47この人は、イエスがユダヤからガリラヤに来られたと聞き、イエスのもとに行き、カファルナウムまで下って来て息子をいやしてくださるように頼んだ。息子が死にかかっていたからである。
4:48イエスは役人に、「あなたがたは、しるしや不思議な業を見なければ、決して信じない」と言われた。
4:49役人は、「主よ、子供が死なないうちに、おいでください」と言った。
4:50イエスは言われた。「帰りなさい。あなたの息子は生きる。」その人は、イエスの言われた言葉を信じて帰って行った。
4:51ところが、下って行く途中、僕たちが迎えに来て、その子が生きていることを告げた。
4:52そこで、息子の病気が良くなった時刻を尋ねると、僕たちは、「きのうの午後一時に熱が下がりました」と言った。
4:53それは、イエスが「あなたの息子は生きる」と言われたのと同じ時刻であることを、この父親は知った。そして、彼もその家族もこぞって信じた。
4:54これは、イエスがユダヤからガリラヤに来てなされた、二回目のしるしであ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ヨハネによる福音書 4章43節~54節
사람을 살리는 믿음
2025년 9월 28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요한복음 4장 43~54절
서론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편으로는「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것은 사람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고 가르칩니다. 믿음이 과연 무엇이며,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떻게 인도해가는지를 염두에 두면서, 오늘도 요한복음을 통해 함께 말씀의 은혜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시험하는 불신앙
오늘 성경 구절의 시작 부분에「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거기」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곳은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이동하실 때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수가 성 동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고, 이후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서 이틀간 머무르셨습니다. 그때는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 메시아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그 수가 성을 떠나 갈릴리로 들어가려 하십니다. 4:3~4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시죠.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애초에, 사마리아를 지나가신 것은,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행하시고 요단 강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계셨는데, 바리새파 사람들의 정탐꾼이 올 것을 아시고 유다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기 때문이었습니다.「다시」라고 기록된 대로,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도 갈릴리의 가나에 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가나」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음에 걸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이란, 갈릴리 지역에 있는 나사렛입니다. 어릴 적 그곳에서 사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갈릴리에는 분명 많은 추억이 있었을 것입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더욱 애착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하는 고향에서 자신이 존경받지 못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분명히 전하신 것입니다. 이전에 갈릴리 가나의 결혼식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믿은 것은 봉사하던 제자들뿐이었습니다. 오늘은 갈릴리에서 행해지는 두 번째 표적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을까요? 갈릴리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4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언뜻 보면, 갈릴리 전도의 첫 단계는 순조로워 보입니다. 지난 축제 기간에 갈릴리 사람들도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에 방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들을 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 여기에는 아무것도 적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 적혀 있는 것으로 판단하면, 사람들의 온갖 병을 치유하셨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드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라는 이 말은 마11:5절의 글인데, 예수님 자신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이런 일을 자세히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의 마을에서도 같은 기적을 행해 주실 것이라고 가슴을 부풀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사람들의 이 환영은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예수님을 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기대하는 대로 기적을 행해 주는 한, 예수님을 받아들인다, 환영한다는 입장입니다. 보면 믿는다, 이해되면 믿는다, 고쳐주면 믿는다,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이란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요컨대 자신을 하나님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 두고 있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자신들의 가치 판단에 하나님을 적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라면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을 판별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신의 일부분에 대해 계시되는 사항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갈릴리 사람들의 이러한 믿음의 태도는 하나님을 자기들의 종처럼 만들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오만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위해 기적을 행해주는 마술사나 점쟁이 같은 존재로 받아들였던 것에 불과했습니다.
(2)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
계속해서 46~4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가버나움에 살던 왕의 신하가, 가나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왕이란, 아마도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 헤로데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신하는 유대인 귀족 계급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면한 항구 도시입니다. 거기서 약 30km 정도의 거리를 말을 타고 왔는지, 걸어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위독한 상태에 있는 아들을 치유해 달라는 것입니다. 47절의 「청하되」라는 말에 주목하면,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 부탁하고 있는 상황이 전해집니다. 정신없이 필사적으로 계속 부탁하고, 기다릴수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정하게도, 이 신하에게 아주 냉엄한 말씀을 하십니다. 48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남자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도, 예수님은 그가 안고 있는 고통을 감싸는 배려심을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차가운 태도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태도는 가나의 혼인잔치 때도 볼 수 있었습니다. 친어머니인 마리아에게「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일과 뭔가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 뒤에는 무언가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너희들」과 주어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신하 개인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나 사람들 전반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경고하듯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차가운 말씀을 듣고도 신하는 여전히「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청했습니다. 언제 아들이 죽게 될지 모릅니다. 한시라도 빨리 가버나움의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겠다며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사실 남자의 이런 믿음은 성경 속에서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사로를 부활시켰을 때의 장면을 상기해 주셨으면 하는데, 예수님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도착하자 이미 나사로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11:3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수하시고 기도해주시거나 예수님이 직접 환부를 쓰다듬어 주시면 비로소 치유가 일어나는 그런 믿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런 사람들의 개념을 뒤집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50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네 아들이 살아 있다」는, 「네 아들은 지금 고쳐지고 있다」, 「네 아들은 지금 낫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신하의 아들은 만지시지도 않았고, 하물며 만나신 적도 없는데 지금 고쳐지고 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신하는 그 말을 믿고 일단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주변 사람들은 이 대화의 자초지종을 듣고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것은 제 상상입니다만, “하하하, 역시 그렇구나” “위독한 아이를 고치는 기적은, 과연 난이도가 높기 때문에, 잘 도망치기 어려웠구나” “결국, 그 신하는, 정중한 말투로 거절당했다는 것인가” 등 이라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요. 당사자인 그 자신도 반신반의하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내 아들은 나았을까?’ “나는 깜쪽같이 속은 것은 아닐까?” 그렇게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는 길을 서두르고 있는데 브레이킹 뉴스가 날아들었습니다. 집에 있는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하의 개운치 않았던 걱정은, 단번에 날아가 큰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큰 기쁨 속에서 신하는 종들에게 물었습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래서 아들은 언제부터 좋아졌느냐?” 종들은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제 오후 한 시」란 나사렛 예수님이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딱 들어맞는, 일치하는 시각이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울 정도의 정확함에 두려움마저 들었을 것입니다. 53절에「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래 그는 이미 믿고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을까요. 왜 여기서 새삼스럽게 「믿었다」라는 말이 나올까요?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시점에서의 그의 믿음이란 아직 반신반의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비정한 말씀, 아주 엄한 말씀, 즉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는 그 말씀은 바로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신하는 예수님에 대해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듯한 오만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그 분 앞에 엎드려 절하는 듯한 심정이 처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의 가족들도 예수님과 직접 만나지도 않았는데 말씀을 믿고 모두 믿음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3) 사람을 살리는 믿음
이번 표적에 의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사람은 신하와 신하의 가족뿐입니다. 사마리아에 있어서는 일절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진 것에 비해 두 번째 갈릴리 전도의 수확은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한 가지 밝혀진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란 결코 공간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개념을 뒤집는 것입니다.
그리고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에서는 사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표적이라든지 사인의 목적은,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그 끝에 있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럼 이번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쳤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아이보다 오히려 아버지가 하나님에 의해 연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죽음의 병에서 생명으로 회복시키실 수 있는, 그런 분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들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비롯하여 온 가족이 죄 속에 죽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말씀에 의해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메시아는 사람을 살리는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메시아와 연합된다면 우리는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피조세계인 만물은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인류 최초의 아담이 죄를 지어 버리면서, 인간과 피조물 전체는 타락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어 죽음의 지배 속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지배를 깨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그분의 뜻에 따라 피조물이 회복되고 다시 살아 나서 윤택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게 된 것입니다. 가나에서 두 번째 표적이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며, 믿음에 의해 예수님과 연합될 때, 살아있는 윤택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죽음의 지배를 깨뜨리는 복이 주어지는 것, 그것을 가리키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란,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이며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결론
오늘의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열심을 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 삶에 개입해 주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심으로써 비로소 믿음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걸어가면서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복된 길, 생명의 길로 걸어가는 자가 됩시다.
【序】
信仰とは何かという問いは聖書全巻を通して一つの主題として語られています。聖書は、一方で「信仰がなければ救われません」、「信仰を持ちなさい」、と勧めますが、他方で「信仰とは神の賜物」であり、「それは人間の業ではなく、神の業である」と教えます。信仰とは一体何であり、私たちの人生をどのように変化させ、どのように導いていくのかということを念頭に置きながら、本日もヨハネの福音書を通して共に御言葉の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1】. 神を試す不信仰
本日の聖書個所の冒頭に、「二日後、イエスはそこを出発して、ガリラヤへ行かれた」とありますが、「そこ」とはとはどこでしょうか。そことはサマリアのスカルの町を指しています。イエス様はユダヤ地方からガリラヤ地方に移動する際、サマリア地方をお通りになりました。そして、スカルの町の井戸でサマリアの女と出会い、その後、大勢のサマリア人と共にそこで二日間滞在されたのであります。その時は、何の奇跡もなされませんでしたが、サマリア人はイエス様のお言葉を信じ、イエス様を世の救い主、メシアとして受け入れたのであります。今、スカルの町を去って、ガリラヤに入ろうとされています。4:3-4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ご覧ください。
“ユダヤを去り、再びガリラヤへ行かれた。しかし、サマリアを通らねばならなかった。”
そもそも、サマリアをお通りになったのは、エルサレムで多くのしるしをなし、さらにヨルダン川沿いで多くの人々に洗礼を授けていたところ、ファリサイ派の人々による偵察が来ることが分かったので、ユダヤを去ってガリラヤに向かったためでありました。「再び」とありますように、実はイエス様は以前にもガリラヤのカナに行か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その「カナ」へ向かう道中、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気になることを言われました。「預言者は自分の故郷では敬われないものだ。」預言者とは、ご自身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イエス様の故郷とは、ガリラヤのナザレであります。幼少の頃そこで暮らしていたので、人々からナザレ人イエスと呼ばれていました。ガリラヤには、たくさんの思い出があ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故郷を懐かしく思い、一際愛着が湧いたはずです。しかし、その大好きなはずの故郷において、ご自身が敬われないであろうと弟子たちにはっきりと伝えたのです。以前、ガリラヤのカナの結婚式において、水をぶどう酒に変える第一のしるしを行わ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その時、イエス様を信じたのは奉仕をしていた弟子たちだけでありました。本日はガリラヤのカナにおいて行われる第二のしるしについて描かれています。今回こそは、多くの刈り取りを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ガリラヤに到着すると人々はイエス様を歓迎いたしました。45節をご覧ください。
“ガリラヤにお着きになると、ガリラヤの人たちはイエスを歓迎した。彼らも祭りに行ったので、そのときエルサレムでイエスがなさったことをすべて、見ていたからである。”
一見すると、ガリラヤ伝道の最初のステップは順調のように見えます。過越しの祭りの期間、ガリラヤの人々も巡礼のためエルサレムに訪れていました。その時、イエス様がエルサレムでなさったすべての御業を見ていたと思われます。どのような御業であるのかここには何も書かれていませんが、他の福音書に書かれていることから判断すると、人々のあらゆる病を癒されたということが想像されます。例えば、「目の見えない人は見え、足の不自由な人は歩き、重い皮膚病を患っている人は清くなり、耳の聞こえない人は聞こえ、死者は生き返り、貧しい人は福音を告げ知らされている。」この言葉は、マタイ福音書の11:5の記事ですが、イエス様ご自身が洗礼者ヨハネの弟子たちに向かって語られたお言葉です。ガリラヤの人々はこのような御業をつぶさに見ていたのでしょう。そして、今、自分たちの町でも同じような奇跡を行ってくださると胸を膨らませていたに違いありません。ところが、ガリラヤの人々のこの歓迎は、信仰とはかけ離れていることをイエス様は見抜かれていました。イエス様のご人格をメシアとして受け入れ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自分たちの期待通りに奇跡を行ってくれる限りにおいて、イエス様を受け入れる、歓迎するというスタンスであります。見れば信じる。理解すれば信じる。直してくれれば信じる。ガリラヤの人々の信仰とは、そのような信仰でありました。要するに、自分を神様より一段高いところに置いていて、神様を試している、自分たちの価値判断に神様を当てはめていると言えるでしょう。このような神様なら信じてやろうという態度です。しかし実際、私たちは神を見極めることなどできませんし、把握することもできません。ただ神がご自身のほんの一部分について啓示される事柄を受け入れるのみであります。従いましてガリラヤの人々のこのような信仰の態度は、神を自分たちの僕のようにしているため、実に傲慢な態度だと言えるのです。彼らはイエス様のことを、自分たちのために奇跡を行ってくれる魔術師や占い師のような存在として受け入れていたに過ぎなかったのです。
【2】. 見ないで信じる信仰
続いて46~47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再びガリラヤのカナに行かれた。そこは、前にイエスが水をぶどう酒に変えられた所である。さて、カファルナウムに王の役人がいて、その息子が病気であった。この人は、イエスがユダヤからガリラヤに来られたと聞き、イエスのもとに行き、カファルナウムまで下って来て息子をいやしてくださるように頼んだ。息子が死にかかっていたからである。”
カファルナウムに住んでいた王の役人が、カナにイエス様が来られたという情報を聞くと、早速イエス様のもとに訪ねてきました。王というのは、恐らくガリラヤ地方を治めていた領主ヘロデのことでしょう。従ってこの役人はユダヤ人の貴族階級である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彼はカファルナウムに住んでいました。ガリラヤ湖に面した港町です。そこから、約30キロほどの距離を、馬に乗ってやってきたのか、歩いて来たのか、よく分かりませんが、危篤状態にある息子を癒してほしいと言うのであります。47節の「頼んだ」という言葉に注目しますと、未完了形になっていますので、頼み続けている状況が伝わってきます。なりふり構わず必死に頼み続け、待ったなしの状況が伺えます。ところがイエス様は、非情にも、この役人に大変厳しい言葉を浴びせられました。48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役人に、「あなたがたは、しるしや不思議な業を見なければ、決して信じない」と言われた。”
男の切実な訴えを聞いても、イエス様は彼が抱えている苦しみに寄り添うような思いやりを示す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このイエス様の冷たい態度を皆さまはどのように思われるでしょうか。このような態度は、カナの結婚式の時にも見られました。実の母であるマリアに対して「婦人よ、わたしとどんなかかわりがあるのです。わたしの時はまだ来ていません。」と言われました。今回と何か共通点があるように見えます。恐らくイエス様のお言葉の背後には、何か深い意味が隠されているのでしょう。ただ、今回は「あなたがた」と主語が複数形となっているため、役人個人を指して言われているのではなく、カナの人々全般に対して言われているようです。彼らに対し警告するように語られ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イエス様の冷たい言葉を聞いても、役人は、なお叫んで言いました。「主よ、子供が死なないうちに、おいでください」。いつ息子が死んでしまうのか分かりません。一刻も早く、カファルナウムの自宅にイエス様をお連れしなければ、と必死に食らいつきました。実は、男のこのような信仰は、聖書の中で他の箇所にも見ることができます。例えばラザロを復活させた時の場面を思い起こしていただきたいのですが、イエス様がマルタとマリアの家に到着すると、既にラザロは息を引き取っていました。この時、マリアは次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ヨハネ11:32をご覧ください。
“マリアはイエスのおられる所に来て、イエスを見るなり足もとにひれ伏し、「主よ、もしここにいてくださいましたら、わたしの兄弟は死ななかったでしょうに」と言った。”
「あなたがいてくださったなら、弟ラザロは死ななかったのに」、と言っているのです。イエス様が按手して、祈ってくださったり、イエス様が直接患部を撫でてくださることによって、初めて癒しが起こる、そんな信仰であります。しかし、イエス様はそんな人々の概念を覆すようなことを言われました。50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言われた。「帰りなさい。あなたの息子は生きる。」その人は、イエスの言われた言葉を信じて帰って行った。”
「あなたの息子は生きる」とは、「あなたの息子は今、直っている」「あなたの息子は今、良くなっている」という意味です。イエス様は役人の息子に触れてもいないし、ましてや会ったこともないのに、今、直っていると宣言されたのです。役人はその言葉を信じて、ひとまず自分の家に帰って行きましたが、周りの人々は、この会話の一部始終を聞いてどのように思ったでしょうか。これは私の想像ですけれども、「ははーん。やはり、そうか。」「危篤の子どもを直す奇跡は、さすがに難易度が高いので、うまく逃げやがったな」「結局、あの役人は、丁重な言い方で断られたということか。」などと判断し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当人である彼自身も、半信半疑で家に向かっていたのだと思います。「本当に息子は直ったのだろうか?」「自分はまんまと騙されたのではないか?」そのようにして、カファルナウムへの帰り路を急いでいると、ブレイキングニュースが飛び込んできました。家の僕たちが迎えに来て、危篤であった子どもが直ったと言うのです。役人のもやもやとした心配は、一気に吹き飛び、大きな喜びに変えられました。大きな喜びの中で、役人は僕たちに問いました。「良かった、良かった、それで息子はいつ頃から良くなったんだね?」僕たちは「きのうの午後一時に熱が下がりました」と言いました。この言葉を聞いて、彼はドキッとしたに違いありません。なぜなら、「きのうの午後一時」とは、ナザレのイエスが「あなたの息子は生きる」と言われたのとドンピシャで一致する時刻だったからです。見事なほどの正確さに恐れさえ抱いたことでしょう。53節に、「彼もその家族もこぞって信じた」とありますが、そもそも、彼は既に信じていたからこそ、自宅に戻ったのでは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なぜ、ここで改めて「信じた」という言葉が出てくるのでしょうか。これは、イエス様から御言葉をいただいた時点での、彼の信仰とはまだ、半信半疑であったということを意味し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そして、今思い返すと、あの、非情なお言葉、大変厳しいお言葉、即ち「あなたがたは、しるしや不思議な業を見なければ、決して信じない」というあのお言葉は、まさに自分の信仰の状況を正確に言い表しておられたと言うことに気づかされたのです。役人は、イエス様に対し畏敬の念を抱かずにはおられなくなり、そして何より自分自身が神を試すような傲慢さを持っていたことに深く悔い改めさせられました。そしてイエス様をメシアとして受け入れたのでありました。その御前にひれ伏すような思いに初めてなったのであります。彼の家族たちもイエス様と直接会ってもいないのに、御言葉を信じ、こぞって信仰に入れられたのでありました。
【3】. 人を生かす信仰
今回のしるしによって、イエス様をメシアとして信じた人は、役人と役人の家族だけであります。サマリアにおいては、一切奇跡を行われなかったのに、多くの人々が信仰に入れられたことと比較して、二度目となるガリラヤ伝道の収穫はほんのわずかでありました。しかし、今回の出来事で一つ明らかにされたことは、イエス様の御言葉とは、決して空間的に制限されない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それは人々の概念を覆すものであります。
そして、しるしというのは、英語ではサインとなっていますが、しるしとかサインの目的は、それが指し示している、その先にあるものを明らかにさせることであります。では、今回のしるしが指し示しているものとは何なのでしょうか。それは、イエス・キリストこそ人を生かす命の源であると言うことであります。単に、役人の子どもの病気を治したということだけではありません。今回は子供よりも、むしろ父親が神様によって取り扱われているのであります。その方のお言葉によって、死の病から命へと回復させられる、そのようなお方であるということを悟ったのです。その方のお言葉によって、子供だけでない。お父さんを初め、家族全員がこぞって罪の中に死んでいたにも拘わらず、生きるものとされたのであります。そのことを悟ったのです。メシアは人を生かす権能をお持ちである、このメシアと結ばれるなら私たちは生かされるのであります。被造世界である万物は言葉によって成りました。しかし、人類の最初の人アダムが罪を犯してしまい、人間と被造物全体は堕落してしまいました。神との交わり断たれ、死の支配の中に入れられてしまいました。しかし、その死の支配を打ち破り、その方の言葉によって、その方の意志によって、被造物が回復され、再び生きた瑞々しい神様との交わりが回復さ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ります。カナにおける二回目のしるしとは、イエス・キリストこと命の源であり、信仰によってイエス様と結び合わされる時に、生きた瑞々しい神様との交わりが回復され、死の支配を打ち破る幸いが与えられること、そのことを指し示す出来事であったのであります。そして、その信仰とは私たちの努力や、私たちの業なのではなく、むしろ神様の一方的な賜物であり、神様の業なのであります。
【結論】
本日の内容をまとめます。信仰とは私たちが神を調べ上げ、神を判断して、一生懸命になって信心に至るのではなく、神が言葉によって、私たちの人生に介入してくださり、命の源である主イエス・キリストを啓示してくださることにより、初めて信仰へ導かれるのです。私たちは今、御言葉の前に遜り謙遜に歩みつつ、聖書を愛し、神が備えられた幸いな道、命の道に歩む者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