ニコデモの夜訪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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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ヨハネによる福音書 2章23節~3章8節
2:23イエスは過越祭の間エルサレムにおられたが、そのなさったしるしを見て、多くの人がイエスの名を信じた。
2:24しかし、イエス御自身は彼らを信用されなかった。それは、すべての人のことを知っておられ、
2:25人間についてだれからも証ししてもらう必要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イエスは、何が人間の心の中にあるかをよく知っておられたのである。
3:1人間についてだれからも証ししてもらう必要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イエスは、何が人間の心の中にあるかをよく知っておられたのである。
3:2ある夜、イエスのもとに来て言った。「ラビ、わたしどもは、あなたが神のもとから来られた教師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神が共におられるのでなければ、あなたのなさるようなしるしを、だれも行う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す。」
3:3イエスは答えて言われ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人は、新たに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
3:4ニコデモは言った。「年をとった者が、どうして生まれることができましょう。もう一度母親の胎内に入って生まれ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3:5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だれでも水と霊とによって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
3:6肉から生まれたものは肉である。霊から生まれたものは霊である。
3:7肉から生まれたものは肉である。霊から生まれたものは霊である。
3:8風は思いのままに吹く。あなたはその音を聞いても、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かを知らない。霊から生まれた者も皆そのとおりであ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ヨハネによる福音書 2章23節~3章8節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
2025년 8월 3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요한복음 2장 23~3장 8절
서론
예수님의 이름은 순식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유월절 한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서 수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2:23절에는「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표적」이라는 단어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때처럼 비공개적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이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아마도 병을 고치시거나 악령을 쫓아내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24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매우 충격적인 말입니다. 왜냐하면 24절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의역된 말은 직역을 하면, 「믿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의탁하지 아니하셨다」에 쓰여진 헬라어는, 23절의 「믿다」라는 말과 완전히 같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쪽이 믿고 다른 쪽이 믿지 않으면, 당연히 인간 관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니, 예수님도 그들을 믿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게 보통이지 않나요? 예수님은 의외로 차가운 분이신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믿지 않으신 이유에 대해, 24절 후반부터 25절에「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 단서는, 3장에 이어지는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의 방문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도 요한복음을 통해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대표자 니고데모
니고데모라는 인물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적인 이름이 아닌, 헬라어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의미는「승리한 사람, 백성의 정복자」라는 뜻입니다. 매우 용감한 이름입니다. 그는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에는 대표적인 4개의 파당이 있었습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열심당입니다. 열심당에 대해 먼저 설명하자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도 열심당원이 있었습니다. 열심당은 간단히 말해, 무력을 통해 당시 로마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다윗 왕국 같은, 번영을 다시 되찾기를 꿈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세네파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열성적으로 연구하며 은둔 생활을 하며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사두개파는, 귀족층으로, 대제사장을 비롯해 성전 당국자들의 대부분이 사두개파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삼기보다 당시 지배층인 로마와 정치적으로 타협하며 유대인을 통치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 대중의 눈에는 사두개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세속화된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반면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율법의 계명뿐 아니라 율법외의 조상들의 전통까지도 꼼꼼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라는 이름은, 「분리하다」, 「구분하다」라는 어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로마의 문화로부터 분리되어 더러움과 부패로부터 멀어지며, 율법의 실천에 생명을 걸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바리새파는 항상 예수님의 적대자이며, 사람을 심판하는 차가운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군중으로부터 매우 존경받았습니다. 참고고 유대인의 최고 의회 산헤드린은, 총 71명의 엘리트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도 산헤드린 의원 중 한 명입니다. 따라서 니고데모는 말하자면, 국가의 최상위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VIP인 인물이 목수의 아들이라는 청년의 집을 밤에 방문했습니다. 왜 밤에 방문했을까요? 아마도 니고데모는 자신의 지위상 낮에 직접 만나는 것이 꺼려졌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밤에 몰래 방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밤에 찾아 온 국가의 최고위 인물을 어떻게 맞이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잘 오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밤의 비밀 회동을 환영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먼저 손님에게 차를 내어드려라”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고, 돌아갈 때 “의원님을 끝까지 배웅해라”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3:2~3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의 공손한 인사말에 대해 예수님은 갑지기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라는 말은 예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항상 앞부분에 붙는 표현입니다. 3장 5절에도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아멘, 아멘」으로 되어 있으며, 직역하자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가 됩니다. 예수님은 구도자 니고데모의 필요에 맞추어 주지 않고, 오히려 결론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냉담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니고데모는 2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니고데모는 여기서 2:23절에 묘사된, 표적을 보고 예수의 이름을 믿은, 많은 군중의 대표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신뢰하지 않으시고, 문전박대하는 것처럼 결론 부분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은 5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로 바뀐 만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천국에 들어가는 것, 또는 하나님의 통치를 맛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신학 용어로 「중생」이라고 불립니다(다른 교파에서는 「신생」). 즉, 성령에 의해, 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동기를 정확히 간파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지금까지 자신이 연구해 온 연장선상에 구원이나 행복,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꽤 좋은 노선을 가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려면,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을 끊고 거졀하셨습니다.
(2)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
니고데모는「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예수님께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5~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5절의 해석에 대해 신학자들 사이에서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세 가지 의견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물」이 세례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세례와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이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의 회심처럼 물의 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물」이라는 단어를 세례와 연결시키는 것은, 성경이 세례라는 예식에 부여한 것 이상으로 과도하게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물」이 임신부의 양수를 가리키며, 「물로 난다」라는 것은 즉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출생을 거쳐, 그 후에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이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만약 이 해석이 맞다면, 6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물에서 태어난 것은 물이다 성령으로 태어난 것은 성령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물이 정화의 상징이며 성령과 동의어라고 주장합니다(칼빈, 바빙크). 헬라어를 보면 「물과 성령」에는 모두 관사가 없습니다. 따라서「물과 성령」은 두 단어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물, 즉 성령에 의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 해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물, 즉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위로부터 은혜로 중생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공로를 쌓아도, 아무리 덕을 쌓아도, 성령에 의한 중생, 위로부터의 거듭남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생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그 질문에 대해 바울이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바울에 따르면 중생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자아에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우리의 죄의 속성을 지닌 몸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합니다. 이 죄에 치우치기 쉬운 이 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우리의 진정한 생명은 하늘로 올라가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 중생된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 자아와 함께 죽고, 중생된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진정한 기적적인 재탄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3:7~8절을 보시겠습니다.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 밤, 아마도 그들이 이야기하던 정원의 나무 잎이 작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바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푸뉴마πνεῦμα」라고 하며 이는 「영」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숨」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바람, 영, 숨의 세 가지 번역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바람처럼 자유롭게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숨결을, 새롭게 태어날 때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 일은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아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왜 그 사람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나 근거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며, 우리 쪽에는 그 이유나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람과 성령이 일으킨 결과뿐입니다. 바람은 분명히 존재하며, 나무 잎을 흔들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령에 의한 중생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중생된 사람들은, 상황에 좌지우지되지 아니하는 기쁨으로 마음이 채워지게 됩니다. 건강하든 아니든, 공부가 잘되든 아니든, 돈이 있든 없든, 그런 외부 상황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방식으로 진정한 기쁨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을 섬기고 형제자매를 섬기며 사랑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 「중생」이란 바로 이처럼 끝없이 위로부터 오는 은혜인 것입니다.
결론
오늘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니고데모는 구원을 구하고 진리를 구하며, 어둠에서 빛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구하는 방식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구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안타깝게도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첫 대화는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이 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니고데모의 마음에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 니고데모는 세 번 등장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로 갈수록 니고데모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7:50~51절을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두 번째 등장에서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9:38~4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9장
38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세 번째 등장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시체를,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정성스럽게 장사 지내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은혜인 성령에 의한 중생은 바로 바람과 같아서, 누가 중생의 은혜를 받았는지 눈에 보이는 형태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고, 그 열매를 봄으로써 중생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에게는 부족한 것이 많다고 느껴지더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상황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새로운 한 주간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序】
イエス様の名前はあっという間に知れ渡りました。それは、過越し祭の一週間の間、エルサレムで数多くの奇跡をなされたからです。2:23節には、「そのなさったしるしを見て、多くの人がイエスの名を信じた」とありますが、「しるし」という言葉は複数形になっています。カナの婚礼の時のように隠れて奇跡を行ったのではなく、今や大勢の人々の前で公に奇跡を行いました。恐らく病をいやされたり、悪霊を追い出したりされたのでしょう。人間の力では到底できるものではない奇跡だ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そのしるしを見て、多くの人々がイエス様の名を信じました。ところが、24節を見ますと、イエス様は、御自身の名を信じた彼らのことを信用なされなか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この言葉は大変ショッキングな言葉です。と言いますのは、24節の「信用する」というギリシャ語が、23節の「信じる」という言葉と全く同じ言葉であるからです。要するに、人々はイエス様を信じたのですが、イエス様の方は、彼らを信じなかったと書かれているのです。一方が信じてもう一方が信じなければ、当然ですが人間関係は成り立ちません。「人々がイエス様を信じたわけですから、イエス様も彼らを信じてあげてもいいじゃないですか?」と言いたくなるのです。「それが普通ですよね、イエス様って案外冷たい人なのかな?」と思ってしまうのです。イエス様が彼らを信用されなかった理由について、24節後半から25節に書かれています。「それは、すべての人のことを知っておられ、人間についてだれからも証ししてもらう必要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イエスは、何が人間の心の中にあるかをよく知っておられたのである。」
それでは一体、何が人間の心の中にあったというのでしょうか。その手がかりが、3章に続くニコデモの夜訪の物語に隠されているのです。本日もヨハネの福音書を通して共に御言葉の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1】. 代表者ニコデモ
ニコデモという人物はユダヤ人でありながら、ユダヤ的な名前ではなく、ギリシャ的な名前を持っていました。ニコデモ、この名前の意味は、「人々の勝利者、征服者」という意味です。大変勇敢な名前です。彼はファリサイ派だ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ユダヤには、代表的な4つの党派がありました。サドカイ派、ファリサイ派、エッセネ派、熱心党です。最初に熱心党とは、イエス様の十二弟子の中にも熱心党員がいました。熱心党とは、簡単に言えば、武力によって当時のローマによる支配を倒し、ダビデ王国のような隆盛を再び取り戻すことを夢見ていた人々です。エッセネ派とは、聖書に出てきませんが、御言葉を熱心に研究しながら、隠遁生活をして共同体を形成していました。サドカイ派とファリサイ派については少し細かく説明します。サドカイ派とは、貴族の人々であり、大祭司をはじめ、神殿当局者たちの大部分がサドカイ派に当たりました。彼らは神の御言葉を第一優先するより、当時の支配層であるローマに政治的に妥協しながらユダヤ人を治めようとしました。ですからユダヤ人の群衆の目には、サドカイ派は神の御言葉から離れ、世俗化している人々として映っていました。一方でファリサイ派とは、御言葉をよく研究し、律法の掟や、律法以外の先祖の言い伝えまで几帳面に守っていました。ファリサイという名前は、分離する、区別するという語源に由来しています。彼らは文字通り、ローマの文化から分離し、汚れや腐敗から分離しながら、律法の実践に命を懸けていた訳です。聖書を読んでいるとファリサイ派とは常にイエス様の敵対者であり、人を裁く冷たい人々というイメージを持つかもしれませんが、実際は群衆から大変尊敬されていました。因みにユダヤの最高議会サンヘドリンは、総勢71人のエリートによって構成されているのですが、サドカイ派の人々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によって占められていました。ニコデモもサンヘドリンの議員の一人です。ですからニコデモは、言ってみれば国の第一級の人物だった訳です。そんなVIPである人物が、大工の息子である青年の下に夜、訪問しました。なぜ、夜に訪問したのでしょうか。もしかしたらニコデモは自分の立場上、昼間に直接会うことは憚れると考えたのかもしれません。人目を気にしながら夜、お忍びで訪問したということです。
さて、イエス様は夜にやって来た国の第一級人物をどのようにお迎えしたでしょうか。イエス様は、「ようこそ来られました」と言いながら夜の密会を歓迎した訳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ペトロに「とりあえず、お客様にお茶でも出しなさい」とは言いませんでしたし、帰り際に、「先生を最後までお見送りなさい」などとも言いませんでした。3:2~3をご覧ください。
“ある夜、イエスのもとに来て言った。「ラビ、わたしどもは、あなたが神のもとから来られた教師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神が共におられるのでなければ、あなたのなさるようなしるしを、だれも行う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す。」イエスは答えて言われ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人は、新たに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
ニコデモの恭しい挨拶の言葉に対し、イエス様はいきなり「はっきり言っておく」と言われたのです。「はっきり言っておく」という言葉は、イエス様が大事なことを言われる時に、冒頭についてくる言葉です。3章5節にも出てきます。ヘブライ語では、「アーメン、アーメン」となっていて直訳すれば、「まことにまことに私はあなたに言っておく」となります。イエス様は求道者ニコデモのニーズに寄り添うことはせず、むしろ突き放すように結論だけを語りました。言わば「塩対応」と言ってもいいでしょう。イエス様は、ニコデモの心の中にあるものを知っておられました。ニコデモは、2節で「神が共におられるのでなければ、あなたのなさるようなしるしを、だれも行うことはできないから」と言っています。つまりニコデモはここで、2:23に描かれている、しるしを見てイエスの名を信じた多くの群衆の代表として描かれているのです。イエス様はそのような信仰を信用されず、門前払いするかのようにして結論部分だけを語られました。「神の国を見る」とは、5節において、「神の国に入る」という言葉に言い換えられていますので、神の国に入る、天国に入る、或いは神の支配を味わうという意味だと思います。「新たに生まれる」とは、神学用語で「再生」と呼ばれます(他派では「新生」)。つまり、聖霊によって上から生まれ変わるようにされることです。イエス様はニコデモの動機を正確に見抜いておられました。ニコデモはこれまで自分が研鑽してきた延長線上に救いであったり、幸福であったり、真理があると考えていたのでしょう。ニコデモは、自分はなかなかいい線行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自覚があ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その上で、神の国に至るには、あと何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イエス様に尋ねているのです。そんなニコデモに対し、イエス様はガツンと頭越しに突き放されたのであります。
【2】. 水と霊による再生
ニコデモは、イエス様に問い返します。「年をとった者が、どうして生まれることができましょう。もう一度母親の胎内に入って生まれ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するとイエス様は次のように言われました。5~6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だれでも水と霊とによって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肉から生まれたものは肉である。霊から生まれたものは霊である。”
この5節の解釈をめぐっては、神学者たちの間で意見の相違が生じています。「水と霊とによって生まれる」とは、一体どういう意味なのでしょうか。三つの意見をご紹介させていただきます。ある人々は水とは、洗礼のことを指していると主張します。即ち、「洗礼と聖霊によって生まれなければ」という風に理解します。しかし、実際、パウロの回心のように水の洗礼を受ける前に、聖霊によって新しく生まれ変わることが聖書に報告されています。ですから、水という言葉を洗礼に結びつけることは、洗礼という礼典に聖書が与えている以上に、過度に優先順位を与えているようにも見えます。
また、ある人々は水とは、妊婦の羊水のことを指していて、水から生まれるとは、つまり自然的に生まれ出ることを指していると主張します。ですから「自然的な出生を経て、その後、聖霊によって生まれなければ」という風に理解します。もしこの解釈が正しければ、6節のイエス様の言葉は「水から生まれたものは水である。霊から生まれたものは霊である」と言うのが理にかなっていると思われます。
また、ある人々は水とは、清めの象徴であり、聖霊と同義語であると主張します(カルヴァン、バーフィンク)。ギリシア語を見ますと、水と霊には両方とも冠詞がついていません。ですから「水と霊」とは、二つの言葉が完全に分離されているのではなく、「水、即ち霊によって」と訳すことも可能です。私もこの解釈が正しいと思っています。誰でも、水、即ち聖霊によって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上から恵みによって再生され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あります。この世において、どんなに功労を積んできても、どんなに徳を積んできても、聖霊による再生、上からの再生が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れでは再生とは一体何なのでしょうか。その質問についてパウロが分かりやすく説明しています。コロサイ書3:3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は死んだのであって、あなたがたの命は、キリストと共に神の内に隠されているのです。”
パウロによれば再生とは、キリストと共に古い自分に死に、キリストの復活の命に与ることとして定義されています。私たちの罪の属性を持つ体は、依然として生きているように見えますが、聖書は、実は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葬られたと言うのです。この罪に偏りやすいこの体は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とパウロは言うのです。そしてもっと驚かされることは、私たちの本当の命は、天に昇られたキリストと共に神の内に隠されていると言うのです。これは言わば神秘と言ってもいいでしょう。救われた人、再生された人というのは、この世の人々と全く同じように生きているように見えますが、実は違う次元で生き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古い自分に死に、再生した命が神の内に隠されているからです。これはまさに奇跡的な生まれ変わりと言っていいでしょう。この奇跡が皆さまの人生において起こったのです。ヨハネの福音書に戻りまして3:7~8節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は新たに生まれねばならない』とあなたに言ったことに、驚いてはならない。風は思いのままに吹く。あなたはその音を聞いても、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かを知らない。霊から生まれた者も皆そのとおりである。」”
この夜、恐らく彼らが語りあっていた庭の木の葉が、ささやかな風になびいていたのでしょう。風という言葉は、ギリシア語でプニューマπνεῦμα という言葉ですが、これは「霊」と訳されたり、「息」と訳されたりもします。風と霊と息の三つの翻訳があるのです。神の聖霊は風のように自由に働き、神の息吹を生まれ変わる時に吹き込んでくださるのです。その働きは私たちの肉眼では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風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のか分かりませんが、聖霊によって新たに生まれた者も、なぜその人が新しく生まれることができたのか、その理由やその根拠を突き止め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あります。それは一方的な神の恵みであって、私たちの側に、その理由や根拠はないからです。私たちが知ることが出来るのは、風と聖霊が起こした結果だけであります。風は確かに存在していて、木の葉を揺らしているというのは事実ですね。聖霊による再生もいつ、どのようにして、起こされたのか私たちには分かりませんが、再生された人々は、状況に左右されることのない喜びで心が満たさ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健康であろうとなかろうと。勉強がうまくできようとなかろうと。お金があろうとなかろうと。そんな外部の状況と関係なく誰にも奪われることのない仕方で真の喜びに満たされ、神に仕え、兄弟姉妹に仕え、愛の人としての人生を送るようになるのです。新たに生まれ変わること、「再生」とは、このようにどこまでも上からの恵みなのであります。
【結論】
本日の内容をまとめます。ニコデモは、救いを求め、真理を求め、暗闇から光であられるイエス様の下にやって来ました。しかし、ニコデモの求め方とは、大部分のユダヤ人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主が願われる仕方ではなく、御心から逸れた形で求めていました。こうして、残念ながらニコデモとイエス様の最初の対話は不毛の結果となりますが、この時、イエス様の御言葉を通してニコデモの心に信仰の種を植えつけてくださったのだと思います。と言いますのは、ヨハネ福音書にニコデモは三度登場しますが、二度目、三度目と、回を重ねるごとにニコデモのイエス様に対する態度が変わっていくからであります。7:50~51をご覧ください。
“彼らの中の一人で、以前イエスを訪ねたことのあるニコデモが言った。「我々の律法によれば、まず本人から事情を聞き、何をしたかを確かめたうえでなければ、判決を下してはならないことになっているではないか。」”
二度目の登場では、ニコデモはイエス様を擁護しています。続いて19:38~40をご覧ください。
“その後、イエスの弟子でありながら、ユダヤ人たちを恐れて、そのことを隠していたアリマタヤ出身のヨセフが、イエスの遺体を取り降ろしたいと、ピラトに願い出た。ピラトが許したので、ヨセフは行って遺体を取り降ろした。そこへ、かつてある夜、イエスのもとに来たことのあるニコデモも、没薬と沈香を混ぜた物を百リトラばかり持って来た。彼らはイエスの遺体を受け取り、ユダヤ人の埋葬の習慣に従い、香料を添えて亜麻布で包んだ。”
三度目の登場では、十字架に掛けられたイエス様のご遺体をアリマタヤのヨセフと一緒に丁重に葬っています。ニコデモは、もはや人目を一切気にせずに、キリストの弟子として行動しているのです。上からの恵みである聖霊による再生とは、まさに風のようであり、誰が再生の恵みに与ったのか、目に見える形で確認することは出来ません。しかし、その結果を見ることにより、その実を見ることにより、再生されたかどうかが分かるのです。私たちは、キリストと共に神の中で新しい人生を送っています。たとえ世の人々と比べて自分には足りないものが多いと感じたとしても、キリストと共に神の中で状況に左右されることのない喜びで満たされています。この新しい人生を許してくださった神様に感謝しつつ、新しい一週間も御言葉と共に歩まれることを願い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