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が肉となった 말씀이 육신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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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ヨハネによる福音書 1章1節~18節
1:1初めに言があった。言は神と共にあった。言は神であった。
1:2この言は、初めに神と共にあった。
1:3万物は言によって成った。成ったもので、言によらずに成ったものは何一つなかった。
1:4言の内に命があった。命は人間を照らす光であった。
1:5光は暗闇の中で輝いている。暗闇は光を理解しなかった。
1:6神から遣わされた一人の人がいた。その名はヨハネである。
1:7彼は証しをするために来た。光について証しをするため、また、すべての人が彼によって信じるようになるためである。
1:8彼は光ではなく、光について証しをするために来た。
1:9その光は、まことの光で、世に来てすべての人を照らすのである。
1:10言は世にあった。世は言によって成ったが、世は言を認めなかった。
1:11言は、自分の民のところへ来たが、民は受け入れなかった。
1:12しかし、言は、自分を受け入れた人、その名を信じる人々には神の子となる資格を与えた。
1:13この人々は、血によってではなく、肉の欲によってではなく、人の欲によってでもなく、神によって生まれたのである。
1:14言は肉となって、わたしたちの間に宿られた。わたしたちはその栄光を見た。それは父の独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って、恵みと真理とに満ちていた。
1:15ヨハネは、この方について証しをし、声を張り上げて言った。「『わたしの後から来られる方は、わたしより優れている。わたしよりも先におられたからである』とわたしが言ったのは、この方のことである。」
1:16わたしたちは皆、この方の満ちあふれる豊かさの中から、恵みの上に、更に恵みを受けた。
1:17律法はモーセを通して与えられたが、恵みと真理は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現れたからである。
1:18いまだかつて、神を見た者はいない。父のふところにいる独り子である神、この方が神を示されたのであ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ヨハネによる福音書 1章1節~18節
말씀이 육신이 되어
2025년5월 25일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요한복음 1장 1~18절
서론
오늘부터 요한복음에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제가 성경을 처음으로 손에 들고, 네 복음서를 읽었을 때,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복음서는 요한복음이었습니다. 그때의 감동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는 공통점이 많고 겹치는 부분이 많아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부르지만, 네 번째 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스타일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쓰여진 것이 특징입니다. 이 복음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며, 저술 연대는 1세기 말경, AD 90년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네 복음서 중 가장 늦게 쓰여졌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 「구원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 복음서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통해 드러난 영광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 구성은 오늘 읽은 1~18절까지가 서문(프롤로그)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21장이 에필로그에 해당합니다. 본론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뉘는데요, 전반부는 1:19~12장까지, 후반부는 13~20장까지입니다. 저자 요한이 이 복음서 전체가 서문의 빛 속에서 읽혀지도록 의도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서문은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 왔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사람들은 질병과 악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 서문을 부적에 새겨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합니다.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서문을 기도문으로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병자를 위한 기도,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 혹은 미사의 마지막 기도문으로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서문 전체를 대충 개괄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아는 것
먼저 헬라어로「로고스(말씀을 뜻하는 헬라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고스는 헬라 철학에서 이미 신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로고스는 우주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일반 자연법칙」이라거나 「우주 정신」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즉, 헬라인들에게 로고스는 「이성적인 신」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유대인들에게 말씀은 히브리어로 「다바르」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하나님의 창조력」을 가진 행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잠언 8:22~30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22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물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 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물을 힘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이 잠언 말씀에서「내가」는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지혜」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지혜는, 창조의 힘이며 하나님의 강력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안에서 헬라인의 「신적 로고스」라는 개념과 유대인의 「다바르」이라는 개념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루어진 것 중에 말씀없이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 속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말씀은 바로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모두 예수님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길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그렇고, 개도 그렇고, 고양이도 그렇고, 새도, 나무들도 그렇고, 바위들도, 산들도 그렇고, 본래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은 1:4의 말씀처럼 사람을 비추는 빛이기도 했습니다. 이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어둠은, 빛에 대한 반대 세력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죽음의 세력이며, 말씀을 어긴 죄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생명과 빛」, 그리고 「죽음과 어둠」이 대비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로 인해 죄가 이 피조세계에 들어왔습니다. 피조물 전체는, 지금도 죄로 인해 신음하는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피조세계는 결코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라, 실은 죄로 인해 부패한 세상이며, 어둠의 세계라고 요한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이 빛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시합니다. 1:10~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 세상은 분명히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나 세상은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11절은 그 사실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은,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에게로 오셨지만 유대인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인이 자기 집에 돌아왔지만 집 사람들은 주인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세주가 왔지만 구원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빛과 어둠의 대립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의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본래의 관계로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어떤 사람들이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에 적용하면 우리 교회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들도, 예수님을 맏아들로 삼으신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로열패밀리에 들어가는 것, 쉽게 말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져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혈통에 의한 것도 아니고, 육체의 욕심에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에 의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즉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놀라운 구속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천사로서도 아니었습니다.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헬라 사상에 물들어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유한하고 결국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인간이 타고난 나약함을 상징힙니다. 그래서 로고스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취하셨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님의 성탄절 사건은 바로 로고스 하나님이 육신을 취하신「성육신」사건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예수님 안에서 서로 결합하였습니다. 그 영광을 직접 목격한 자로서 요한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로고스께서 우리의 비천한 혈육에 참여하셔서 모든 면에서 인간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빌 2:6)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비록 육신을 따라 선조들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그는 여전히 만물 위에 계시고 제자들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동방 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받아 마침내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예수님께 경배를 올렸습니다. 또한 풍랑이 몰아치는 호수에서 제자들이 배를 젓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배에 다가오셔서 물에 빠질뻔한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올라타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놀랍게도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또한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면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다윗의 자손이지만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십니다. 비록 이 땅에 계셨지만,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셨습니다. 말하자면, 신성의 충만함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라는 것은 바로 그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14의「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의 헬라어를 보면 「스케노오:장막을 치다(하나님 앞에서 임재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샤칸:장막을 치다, 머무르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헬라어입니다. 이 단어는 매우 드문 단어로 신약성경 안에서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는 나오지 않습니다. 보통 「살다」나「거하다」라는 동사는 「메노」라는 헬라어를 사용하는데, 요한은 굳이 「스케노오」를 사용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성막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처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마치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거하시는 것 같은 그런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은 구속이, 무궁무진한 은혜임을 나타냅니다. 참고로 「은혜」라는 단어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많이 쓰이는 단어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1장의 이 서문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옛날, 구원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시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 은혜와 진리 그 자체로 백성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아직 한 번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을 직접 뵙기를 원했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33:18~20을 보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33장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주님은 모세의 소원을 거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똑바로 보고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초월하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이처럼 결코 넘을 수 없는 단절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어 하나님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서 계신 분이시며, 아버지의 품에 안긴 독생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아들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과 마주하고 교제가 회복되어 아버지의 품에 안긴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아들의 구속사역은 이처럼 무궁무진한 은혜인 것입니다.
결론
오늘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세계는, 본래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세상은 빛이신 하나님을 적대시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구속의 역사인데, 구약 시대에는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허락된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직접 하나님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은혜 위에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사건입니다. 성자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하나님을 직접 계시하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증인인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序】
本日からヨハネによる福音書に耳を傾け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わたしが聖書を初めて手にして四つの福音書を読んでみたとき、最も感動したのがヨハネによる福音書でありました。その時の感動を今でもはっきりと覚えています。マタイ、マルコ、ルカの三つの福音書は共通する点が多く、重なる記述が多いため、この三つを共観福音書と呼んでいますが、四番目の福音書には、共観福音書とは異なるスタイルや、異なる視点を持って書かれているのが特徴です。この福音書の著者は使徒ヨハネであり、執筆年代は1世紀末ごろ、AD 90年代だと言われています。四つの福音書の中では最も遅く執筆されました。
ヨハネの福音書の中で「救いとは、神を知ること」として定義されていますが、この福音書は、まさに神の子イエスを通して現された栄光について、証言している書であるという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全体の構成は、本日お読みした1~18節までが、序文(プロローグ)にあたります。そして最後の21章がエピローグにあたります。本論は大きく二つの段落に分けられまして、前半が1:19~12章まで、後半が13章~20章までです。著者ヨハネが、この福音書全体を序文の光の中で読まれることを意図していることは明らかでありますが、この序文は、教会の中で非常に重要視されてきました。例えば、中世の人々は病気や悪霊から自分を守るために、この序文をお守りに刻んで首にかけて歩いたりしたそうです。また、ローマカトリック教会では、祈りとしてこの序文を朗読しました。病人のためにささげる祈り、洗礼を受けた人々のためにささげる祈り、或いはミサの最後の祈りとして、であります。本日は、序文全体を大雑把に概観し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1】. 神を知ること
最初に言、ギリシャ語で「ロゴス」について語られています。当時ロゴスとは、ギリシャ哲学において、神的概念として既に受け入れられていました。ギリシャ人にとってロゴスとは、宇宙の統一を維持する「一般的自然法則」ですとか、「宇宙精神」として認識されていました。つまり、ギリシャ人にとってロゴスとは理性的な神であった訳です。一方、ユダヤ人にとって言とは、ヘブライ語でダバルですが、それは神の知恵、神の創造力を持った行為として受け入れられていました。創世記1章を見ますと、初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言葉によって全被造物が創造されたという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また、箴言8:22-30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あります(新改訳2017)。ご覧ください。
“主は、ご自分の働きのはじめに、そのみわざの最初にわたしを得ておられた。わたしは大昔に、初めに、大地の始まりの前に、立てられていた。まだ深淵もなく、水のみなぎる源もなかったとき、わたしは生み出された。山が立てられる前に、丘より先に、わたしは生み出された。主がまだ地も野原も、世界の最初のちりも造っておられなかったときに。主が天を堅く立てられたとき、わたしはそこにいた。主が深淵の面に円を描かれたとき、上の方に大空を固め、深淵の源を堅く定められたとき、海にその境界を置き、その水が主の仰せを超えないようにし、地の基を定められたとき、わたしは神の傍らで、これを組み立てる者であった。わたしは毎日喜び、いつも御前で楽しんでいた。”
この箴言の御言葉で「わたし」というのは、人格を持った神の「知恵」として理解されてきました。ユダヤ人にとって知恵とは、創造の力であり、神の力強い行為であった訳です。ですから、ヨハネの福音書の中において、ギリシャ人の「神的ロゴス」という概念と、ユダヤ人の「ダバル」という概念が、互いに結び合わされていると考えることが出来るのであります。
成ったもので言葉によらず成ったものは一つもありません。この言葉の内に命がありました。言葉はまさに創造主であり、命の根源でありました。ですから、被造物はすべてイエス様と関係があっ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イエス様の御手によって創造されたからです。私たち一人ひとりもそうですが、犬や、猫や、鳥もそうですし、木々や、岩々や、山々でさえ、本来すべての被造物がイエス様と関係を持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また、命とは、1:4節に言われているように、人を照らす光でもありました。この光は、暗闇の中で輝いていますが、暗闇は光を理解することが出来ません。これはどういうことかと言いますと、暗闇とは、光に対する反対勢力の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具体的に言えば、死の力であり、御言葉に違反した罪の状態を指し示しています。ですから「命と光」、そして「死と暗闇」が対比されているわけですね。アダムとエバによって罪がこの被造世界に入り込んできました。被造物全体は、今も罪のために呻いている状態にあると言えます。この被造世界とは、決して中立な状態というのではなく、実は罪によって腐敗した世界であり、暗闇の世界であるとヨハネは主張しているのです。つまり、この世はサタンの支配下にあ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光がこの世にやってきても、世はこの光を理解しようとせず、むしろ敵対しようとするのです。1:10、11節をご覧ください。
“言は世にあった。世は言によって成ったが、世は言を認めなかった。言は、自分の民のところへ来たが、民は受け入れなかった。”
この世は、明らかに言によって創造されたのに、世は言葉を拒絶しました。11節はそのことを分かりやすく説明しています。言は、御自身の民である、ユダヤ人たちの下にやって来ましたが、ユダヤ人たちは言を受け入れませんでした。言い方を変えれば、主人が自分の家に戻ってきたのに家の人は、主人であるイエス様を受け入れようとし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救い主が来たのに、救いを得ようとはしなかった。光と闇の対立がいかに深刻であるのかが理解できると思います。
【2】. 言が肉となった
さて、イエス様がこの世に来られた目的とは、罪の中にあるご自身の被造物を贖い出すためであります。神と被造物との関係を、本来の関係に回復する為であります。そのために、ある人々が起こされました。イエス様の弟子たちです。言葉を受け入れ、そして神を知る人々として起こされました。今日に当てはめて言えば、私たち教会のことです。彼らには神の子となる権能が与えられました。神の子となるとは、イエス・キリストが神の独り子であられる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を受け入れる者たちも、イエス様を長子とした神の家族に受け入れられるという意味です。ロイヤルファミリーに入れられること、平たく言えば天国に入れられるという意味です。このように神の家族に入れられて、新しい人として生まれ変われるのは、血統によるのではなく、肉の欲によるのでもなく、人の欲によるのでもない、ただ神によってなされることだと使徒ヨハネは語っています。つまり救いは、専ら神の御業であるということが、ここで語られているのです。神の子であるイエス様が、このような素晴らしい贖いの働きを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に来られたのは、幻として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天使としてでもありませんでした。肉を取られ人間としてこの世に来られました。1:14節をご覧ください。
“言は肉となって、わたしたちの間に宿られた。わたしたちはその栄光を見た。それは父の独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って、恵みと真理とに満ちていた。”
神が肉をお取りになって正真正銘の人間としてこの世に来られたということは、ギリシャ思想に染まっていた当時の人々には、決して受け入れることのできない事柄でした。なぜなら肉とは、有限であり、やがて朽ちてゆくものであります。肉とは、人間が持つ生まれつきの弱さを象徴しています。ですから、ロゴスなる神が、肉を取られたなどとは、どうしても受け入れる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しかし、使徒ヨハネは、イエス・キリストの出生とは、イエス様のクリスマスの出来事とは、まさにロゴスなる神が肉を取られた「受肉」の事件であったとはっきりと語るのです。神と人間は、イエス様の中で互いに結合いたしました。その栄光を直接目撃した者たちとしてヨハネは、「わたしたちはその栄光を見た」と、告白しているのです。
【3】. わたしたちの間に宿られた
神のかたちであり、神の栄光の輝きであるロゴスは、私たちの醜い血肉に参与され、すべての面において人間と同じくなられました。彼は神の真のかたち(フィリ2:6)でありながら、ご自分を無にし、僕の形を取られました。しかし、たとえ、肉に従って先祖たちから出てきたとしても、彼は依然として万物の上におられ、弟子たちから礼拝され、賛美される神でもあられます。と言いますのは、東方の博士たちは、星に導かれ、ついにイエス様を発見するとイエス様を礼拝しました。また、嵐の湖の中で弟子たちが舟を漕いでいると、イエス様が水の上を歩いて舟に近づいてこられ、おぼれそうなったペトロと共に舟に乗り込んでこられました。その時、弟子たちは、なんとイエス様を礼拝しました。さらに、トマスは復活されたイエス様と対面し「わが主、わが神」と告白しました。イエス様はたとえダビデの子孫であっても、同時にダビデの主であられます。たとえこの地上で過ごされたとしても、イエス様は天に属するものでありました。言ってみれば、神性の満ちあふれる充満が、肉としてのイエス様の内に留まっていたのであります。「わたしたちはその栄光を見た」というのは、そのことを言っているのです。
そして、1:14節の「わたしたちの間に宿られた」という言葉にも注目してください。この個所のギリシア語を見ますと、「スケネオー:テントを張る(神に対して:臨在する)」という言葉が使用されています。この言葉はヘブライ語の「シャカン:テントを張る、留まる」という言葉に由来する、ギリシャ語です。これは大変珍しい言葉でありまして、新約聖書の中では、ヨハネの福音書と黙示録の中にして出てきません。普通、「住む」とか「住まう」という動詞は「メノー」というギリシャ語が使われますが、ヨハネはあえてスケネオーを用いているのです。旧約の聖徒たちが、昼は雲の柱、夜は火の柱として幕屋に臨在する、神の栄光を見たように、神の言が、自分たちの間に、あたかも雲の柱として、火の柱として宿っているかのような、そのような栄光を見たと使徒ヨハネは証言しているのです。続いて16節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たちは皆、この方の満ちあふれる豊かさの中から、恵みの上に、更に恵みを受けた。”
「恵みの上に、更に恵みを受けた」とは、言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贖いが、無尽蔵な恵みであるということを表しています。因みに「恵み」という言葉は、共観福音書では多く用いられる言葉ですが、ヨハネの福音書の中では、1章のこの序文の中でしか使用されていません。ですから、ここでいかにイエス様にある贖いの御業が、大きな恵みであるのかというということが強調され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
昔、贖い主モーセは、イスラエルの民をエジプトの奴隷状態から解放し、モーセを通して神の言葉である律法を与えられました。民は律法を通して神を知るようにされました。しかし、第二の贖い主であるイエス様は、御自身の民を罪の奴隷から解放し、御自身が神の御言葉そのものとして、恵みと真理そのものとして、民の前に現れてくださいました。いまだかつて、神を見た者は、誰もいません。モーセでさえ、御顔の栄光を直接拝することを願いましたが、その願いは叶わず神様の後ろ姿だけを拝むことを許されただけでありました。調べてみましょう。出エジプト記33: 18~20をご覧ください。
“モーセが、「どうか、あなたの栄光をお示しください」と言うと、主は言われた。「わたしはあなたの前にすべてのわたしの善い賜物を通らせ、あなたの前に主という名を宣言する。わたしは恵もうとする者を恵み、憐れもうとする者を憐れむ。」また言われた。「あなたはわたしの顔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人はわたしを見て、なお生きてい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ある。」”
主はモーセの願いを断られました。その理由は、被造物である人間がまともに神様を見て、なお生きながえることは不可能だからです。我々から超越された神様と、人間との間には、このように決して超えられない断絶が存在しているのです。しかし、神様は御子を通して、ご自身を明らかにされました。そして御子を通して、人は神様との交わりが回復され、神を知ることが許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なぜなら、御子は神と向き合って立っておられる方であり、父のふところにいる独り子であられるからです。この御子にあって、私たちも神様と向き合い、交わりが回復され、父のふところにいる神の家族として受け入れられるのであります。御子の贖いの御業とは、このように無尽蔵な恵みなのであります。
【結論】
本日の内容をまとめます。言葉によって創造された被造世界は、本来、イエス様との関係を持っていました。ところが罪がこの世に入ってきたため、世は光である神に敵対するよう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再び、神との交わりが回復され、神を知るようになることこそ、贖いの御業でありますが、旧約の時代には律法が与えられました。律法を通して神を知るようになることが許されたのです。新約の時代には言葉であるイエス様が肉を取られ、直接神を啓示してくださいました。恵みの上に、更に恵みを受けたとは、神の御子イエス様が肉を取られた出来事であります。御子イエスが私たちの間に宿られ、神を直接啓示してくださった出来事であります。私たちは、イエス様との交わりを通して神を知る者となりました。神の栄光の目撃者である神の子として、イエス様を世に証ししていく者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