わたしの心に適う者 내 기뻐하는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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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3章13節~17節
3:13そのとき、イエスが、ガリラヤからヨルダン川のヨハネのところへ来られた。彼から洗礼を受けるためである。
3:14ところが、ヨハネは、それを思いとどまらせようとして言った。「わたしこそ、あなたから洗礼を受けるべきなのに、あなたが、わたしのところへ来られたのですか。」
3:15しかし、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今は、止めないでほしい。正しいことをすべて行うのは、我々にふさわしいことです。」そこで、ヨハネはイエスの言われるとおりにした。
3:16イエスは洗礼を受けると、すぐ水の中から上がられた。そのとき、天がイエスに向かって開いた。イエスは、神の霊が鳩のように御自分の上に降って来るのを御覧になった。
3:17そのとき、「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言う声が、天から聞こえ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3章13節~17節
내 기뻐하는 자라
2025년4월 27일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3장 13~17절
서론
주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마을에서, 홀로 남쪽으로 내려가 계셨습니다. 목적지는 베다니라는 요단 강 유역이며, 거기서는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이 장소는,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드는 하구 부근에 위치해 있어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베다니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2~3일 정도 걸려서 이곳에 도착하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대인들은 세례자 요한이, 400년간의 하나님의 침묵을 깨고 역사 속에 등장한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 전역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을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긴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 긴 줄 속에 예수님도 계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나이는 대략 30세 정도였다고 누가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3:13~14를 보시기 바랍니다.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드디어 예수님의 차례가 되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실 때, 요한은 예수님께 대해 뭔가 짐작을 했는지 세례를 베푸는 것을 멈추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애초에 세례라는 의식은 율법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세례란 무엇인가 하면, 죄인인 이방인을 유대교로 개종시켜, 비록 피부색이 달라도, 눈동자 색이 달라도 율법을 믿는 유대인으로서, 앞으로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베푸는 의식이었습니다. 물론 이때, 요한은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다고 여겨지는 유대인, 즉 동족 이스라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 나라가 드디어 다가왔으니 너희는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우월감을 갖지 말고, 회개하고 새롭게 거듭나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다만 요한은 자기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 자기 뒤에 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분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심판을 가져다 주실 분이며, 그분의 오심이야말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를 위해 길을 예비하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11을 보시겠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메시아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가운데, 바로 지금, 요한의 눈앞에 메시아로 보이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이 세례 지원자 줄에 서 있었습니다. 요한은 몹시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도 예수님의 세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매우 난감해 했습니다.
조금 여담이지만, 3:11의 말씀은 요한의 회개의 세례와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 혹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 두 가지를 비교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가 더 낫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가 참된 세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된 이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대신하여 받게 된 것입니다. 간혹 요한의 세례보다 예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가 더 우월하다는 설교를 들을 때가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아세례든 성인세례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받은 세례와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똑같은 세례입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애초에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푸신 적은 없습니다), 처음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재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36~39).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그 세례를 받으신 것을 좋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 활약했던 아볼로도 역시 요한의 세례만 받았습니다(사도행전 18:24~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신앙심이 깊었고, 말솜씨도 유창했습니다. 그렇다면 3:1의「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강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성령이 내주하게 되는데, 성령과 불의 세례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좀 벗어났지만, 예수님은 망설이는 요한에게「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세례를 베풀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도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왜 죄 없으신 분이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이 의로운 일일까요? 「의로운 일」은 헬라어로 「의(디카이오쉬네)」라는 단어 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 「의로움」은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모두..이루다」의 「이루다」는 헬라어 πληρόω(플레로오)로 「채우다」「완전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직역하면 「율법의 모든 의를 다 이루다」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의를 하나하나 성취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 질문은 잠시 유보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 내 기뻐하는 자라
이후,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신비한 사건은 예수님의 세례 자체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신비한 사건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주셔서 예수님을「왕적 메시아」로 세우신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왕적 메시아는 「고난의 종」으로서 죄인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이 취임할 때 관례적인 의식으로 기름을 붇는 의식을 통해 성별했습니다. 아론의 혈통의 제사장이 임직할 때, 반드시 기름을 부어 성별 했고, 사울 왕이나 다윗 왕도 역시 기름을 부어 성별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늘의 증거와 함께 성령의 부으심을, 기름 부으심에 비유하여 임직식을 거행하고 계십니다. 3장 16~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애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 위로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가르치신 적이 있으십니다.「비둘기」는 순결함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집니다. 또한 비둘기는 고대 세례에서 종종 신성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순종의 영, 성령이 부어질 때, 그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이 하늘의 말씀은 전반부는 구약의 시편 2편을 배경으로, 후반부는 이사야서 42장을 배경으로 읽어야 합니다. 먼저 전반부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인데, 「사랑하는」이라는 말에는 「유일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나의 외아들, 「독생자」라고 선언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배경이 되는 시편 2:6~7을 살펴보겠습니다.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편 2편은 왕의 즉위를 노래한 것인데, 여기서 즉위하는 왕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즉위식은 왕적 메시아의 즉위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떼려야 뗄 수 없는 특별한 부자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 예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독생자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후반부의「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2:1을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기뻐하는 자」라는 단어가 있습니다만, 이 단어가 마태 3:17의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라」와 같은 표현입니다. 이사야 42:1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내 아들」이라는 단어가 없고 「내 종」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사야 42장을 배경으로 읽으면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 영광을 버리고 율법 아래 사는 자로서, 고난의 종으로서 우리 죄인 편에 서신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신 그 의도는 바로 이 점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대표하여 참 이스라엘로서 아담이 이루지 못한 순종의 길을 완성하고, 의를 다 이루기 위해 죄인의 자리에 서도록 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유다 족속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셔서 율법 아래 놓이셨고,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30세가 되시고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편에 서서 죄인인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기 위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왕적 메시아이시며 동시에 주의 종인 예수님은 앞으로 3년 반의 공생애를 보내시며 복음을 전하고, 제자들을 훈련시키며, 병을 고치시고, 마귀의 역사를 멸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종으로서 순종하는 모든 사역을 보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인으로서「회개의 세례」를 받으시고 우리 죄인들에게 다가와 주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신 분,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왕이시며 동시에 우리를 구속하시는 유일한 중보자이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다 이루셨고, 죄와 죄악의 모든 대가를 십자가에서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이 분과 연합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 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왕이신 그분이 죄인인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신 사건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결론
오늘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자리에 내려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하나하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가 기름부으심을 받은 것은, 왕적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중보자로서, 고난의 종으로서 우리 죄인의 편에 서서 죄인인 우리와 유대관계를 맺고, 연대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분으로 인해, 우리의 죄의 속죄와 회복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분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주어졌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분께 감사와 기쁨의 예배를 드리며, 이분께 모든 것을 드리는 자로 살아갑시다.
【序】
主イエスはガリラヤ地方のナザレの村から、一人で南に下っていました。目指すは、ベタニアという町のヨルダン川流域であり、そこでは洗礼者ヨハネが洗礼を授けていました。この場所は、ヨルダン川が死海に流れ込む河口付近に位置しておりまして、ガリラヤのナザレから、ベタニアまでの道のりは直線距離で約100キロほどです。恐らくイエス様は二、三日かけてこの場所にたどり着いたと思われます。ユダヤの人々は、洗礼者ヨハネが、空白の中間時代を経てやって来た神の預言者であることを固く信じていましたので、ユダヤの全土から悔い改めの洗礼を受けるために、ヨハネのもとにやってまいりました。人々は長い列をなして、自分の順番が回ってくるのを待っていたことでしょう。その長い列の中に、イエス様もおられました。この時、イエス様はおよそ30歳くらいであったとルカによる福音書には書かれています。
【1】. 悔い改めの洗礼を受けるイエス様
3:13~14をご覧ください。
“そのとき、イエスが、ガリラヤからヨルダン川のヨハネのところへ来られた。彼から洗礼を受けるためである。ところが、ヨハネは、それを思いとどまらせようとして言った。「わたしこそ、あなたから洗礼を受けるべきなのに、あなたが、わたしのところへ来られたのですか。」”
いよいよ、イエス様の順番になり、ヨハネから洗礼を受けようとした時に、ヨハネはイエス様について何か察したのでしょうか、洗礼を授けるのを止めさせようとしました。そして、むしろ「わたしこそ、あなたから洗礼を受けるべきなのに、あなたがわたしのところへ来られたのですか。」と言っています。これは一体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そもそも洗礼という儀式は、律法には一切出てきません。洗礼とは何かと言いますと、罪人である異邦人をユダヤ教に改宗させて、今後はたとえ肌の色が違っても、たとえ目の色が違っても、律法を信じるユダヤ人として、信仰共同体の一員として、生きることを決心した人に授ける儀式でありました。もちろんこの時、ヨハネは、異邦人に対し洗礼を授けていた訳ではありません。清いとされているユダヤ人に対し、同胞のイスラエルに対し、洗礼を授けていたのです。これはつまり、神の国がいよいよ近づいてきたので、あなた方は自分の罪を告白し、神の赦しをいただき、神の国に入れられるよう準備しなさいという意味で、洗礼を授けていたと思われます。自分たちがアブラハムの子孫だということで優越感を持つことなく、悔い改めて新しく生まれ変わりなさいと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ただ、ヨハネは、自分の後にさらに優れた方が来られるということも知っていました。そして、自分にはそのお方の履物をお脱がせする値打ちもないことも知っていました。そのお方こそ、まさにイスラエルに救いをもたらし、神の国と裁きをもたらしてくださるお方であり、そのお方の到来こそ、決定的な意味を持っていることを知っていたのです。ですからヨハネは、自分はメシアのための道備えをする者に過ぎないということを、よくよく理解していました。彼は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3:11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は、悔い改めに導くために、あなたたちに水で洗礼を授けているが、わたしの後から来る方は、わたしよりも優れておられる。わたしは、その履物をお脱がせする値打ちもない。その方は、聖霊と火であなたたちに洗礼をお授けになる。”
メシアのための道備えをしている中、今、まさに、ヨハネの目の前にメシアと思しき人物が現れたのであります。なんと、その方が洗礼志願者の列に並んでいたのです。ヨハネは大変、困惑したに違いありません。そしてヨハネだけではなく、今日多くの神学者たちもイエス様の洗礼をどのように解釈すればいいのか、大変困惑いたしました。
少し余談になりますが、3:11のみ言葉は、ヨハネの悔い改めの洗礼と、一方でイエスの御名による洗礼或いは、父・子・聖霊の名による洗礼の二つが比べられていて、イエスの御名による洗礼の方が優れている、イエスの御名による洗礼が真の洗礼だと言っているのではないことに注意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私たちが受けた父・子・聖霊の名による洗礼というのは、三位一体の教理が確立した以降にイエスの御名による洗礼に代わって授けられるようになったものです。時々、ヨハネの洗礼よりイエスの御名による洗礼の方が勝っているという説教を聞くことがありますが、決してそう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は幼児洗礼であれ、成人洗礼であれ、父・子・聖霊の名によって洗礼を受けていますね。私たちが受けた洗礼と、洗礼者ヨハネの悔い改めの洗礼は、全く同じものであります。その理由として、弟子たちが、イエスの御名による洗礼を授けていたのですが(そもそもイエス様ご自身が直接洗礼を授けたことはありません)、当初、洗礼者ヨハネの弟子だったアンデレやゼベダイの子ヨハネが、イエス様の弟子になった時、再洗礼を受けることはなかったからです(ヨハネ1:36~39)。イエス様は、洗礼者ヨハネの洗礼をもって、良しとされたのであります。また、初代教会で活躍していたアポロもやはり、ヨハネの洗礼しか受けていませんでした(使徒18:24~25)。それにも拘わらず大変信仰に篤く、語る言葉も雄弁でありました。そうしますと、3:11の「その方がお授けになる聖霊と火の洗礼」とは、一体何なのか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が、これは、イエスの御名による洗礼のことではなく、五旬節に起こった聖霊降臨のことを指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キリスト者には、必ず聖霊が内住するようになりますが、聖霊と火の洗礼とは、聖霊の内住のことを言っているのです。
話が脱線してしまいましたが、イエス様は、ためらっているヨハネに対し「今は、止めないでほしい。正しいことをすべて行うのは、我々にふさわしいことです。」と語り、洗礼を施すように要求されました。この言葉にも不可解な点があります。なぜ、罪のないお方が悔い改めの洗礼を受けることが正しいのでしょうか。「正しいこと」とは、ギリシア語で「義(ディカイオシュネ)」という言葉です。神様の目から「義」、「義しさ」とは、律法を守り行うことですね。また、「すべて行う」の「行う」とは、ギリシア語のπληρόω(プレロー)で、「成就する」とか「満たす」という意味です。ですから、ここの個所は直訳しますと、「律法の義をすべて成就する」という意味になります。イエス様は「律法の義を一つ一つ成就していくのは、我々にふさわしいことです。」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これは、一体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この疑問は、少し保留にしておき先に進んでいきたいと思います。
【2】. わたしの心に適う者
この後、イエス様が洗礼を受けられた時に起こった神秘的な出来事は、イエス様の洗礼そのものに神様の特別なご計画と意味が隠されていたということが明らかにされました。結論から言いますと、その神秘的な出来事は、父なる神がイエス様に聖霊を注がれ、イエス様を「王的メシア」として任職されたことを現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と同時に、王的メシアとは「苦難の僕」であって、罪人の罪をすべてご自身に負われるということも現していたのです。
古代イスラエルにおいて、王や祭司が任職する時に、慣例的な儀式として油注ぎを行って聖別しました。アロンの血統の祭司が任職する際には、必ず油が注がれ聖別されましたし、サウル王や、ダビデ王も、やはり油を注がれ聖別されました。今、イエス様は公的な生涯を始めるにあたって、天からの証言と共に、聖霊の注ぎを、油注ぎに見立てて、任職式が行われているのです。3:16~17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洗礼を受けると、すぐ水の中から上がられた。そのとき、天がイエスに向かって開いた。イエスは、神の霊が鳩のように御自分の上に降って来るのを御覧になった。そのとき、「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言う声が、天から聞こえた。”
イエス様が洗礼を受けられて水の中から上がられると、聖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るのをご覧になられました。イエス様はある時、弟子たちに鳩のように素直になりなさい (10:16)と教えられたことがあります。「鳩」というのは、素直さを象徴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また、鳩は古代世界において、しばしば神性の象徴でもありました。従順の霊、聖霊が注がれると、その時、天からの語りかけがありました。「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この天からの語りかけは、前半部分は旧約聖書の詩編2編を背景として読み、後半部分はイザヤ書42章を背景として読むべきであります。まず前半部分の「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という語りかけですが、「愛する」という言葉には、「唯一の」という意味も含まれています。ですから、父なる神は、これはわたしの唯一の子である、「一人子」だと宣言していると理解することもできます。それではその背景になっている詩2:6~7を調べてみましょう。
“「聖なる山シオンで/わたしは自ら、王を即位させた。」主の定められたところに従ってわたしは述べよう。主はわたしに告げられた。「お前はわたしの子/今日、わたしはお前を生んだ。”
詩編2編は王の即位を歌ったものですが、ここで即位する王とはまさに神の子であることが分かります。ですからイエス様の任職式とは王的メシアの任職式であることがわかります。また、このみ言葉から、父なる神と子なるイエス様との切っても切れない特別な親子関係を見て取ることができます。御父にとって御子イエスは、愛してやまない一人子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次に後半部分の「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いう語りかけです。イザヤ書42:1を調べてみましょう。
“見よ、わたしの僕、わたしが支える者を。わたしが選び、喜び迎える者を。彼の上にわたしの霊は置かれ/彼は国々の裁きを導き出す。”
「喜び迎える者」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が、この言葉がマタイ3:17の「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同じ表現になっています。このイザヤ書42:1において、特に注目すべき点は「わたしの子」という言葉がなく、「わたしの僕」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ることです。新共同訳の小見出しにも「主の僕の召命」とありますね。イザヤ書42章を背景にして読むと、「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いう言葉は、イエス様が神の御子としてではなく、その栄光を放棄され、律法の下に生きる者として、苦難の僕として、私たち罪人の側に立たれるということを読み取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ですから、イエス様が洗礼者ヨハネに「律法の義を一つ一つ成就していくのは、我々にふさわしいことだ。」とおっしゃったその意図は、まさにこの点にあっ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イエス様は罪人を代表し、真のイスラエルとして、アダムがなすことが出来なかった従順の道を全うし、義をすべて成就するために、罪人の場所に降りてこられるようにして、この世に遣わ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預言者たちの預言に従って、ユダ族のダビデの子孫としてお生まれになり、律法の下にご自身を置かれ、生まれて8日目には割礼を受けられました。そして30歳になられ、今、公的生涯を歩み始めるにあたって、罪がないにも拘わらず、罪人の側に立たれ、罪人である私たちに見本を見せるかのようにして、洗礼者ヨハネから「悔い改めの洗礼」を受けられたのであります。
父なる神はご自身の愛してやまない一人子をお与えになるほどにこの世を愛され、救いの御業を成し遂げようとされました。王的メシアであり、同時に主の僕であるイエス様は、これから三年半の公生涯を送り、福音を宣べ伝え、弟子たちを訓練し、病をいやし、悪魔の働きを滅ぼされ、十字架の死を遂げられることでしょう。その僕の従順な働きをすべて見通して、父なる神は「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あります。
罪人として「悔い改めの洗礼」をお受けになり、私たち罪人に寄り添ってくださり、私たちと一つになってくださったお方、イエス様は、まさに私たちの王であり、同時に私たちを贖ってくださる唯一の仲保者であると結論づけ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イエス様は罪人に代わって、神の全ての律法を成就なされ、罪と咎の全ての代価を十字架上で負われました。私たちはこのお方に結合されて、神との関係が回復され、この方にあって神との交わりの中に生きることが許さ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従いまして、イエス様の洗礼の出来事とは、王であられるお方が、罪人である私たちと絆を結んでくださり、私たちと一つになってくださった出来事として結論づけ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結論】
本日の内容をまとめます。罪のない神の御子がなぜ、悔い改めの洗礼を受ける必要があったのか。それは、イエス様が罪人の場所に降りてこられ、罪人として私たちの代わりに律法の一つ一つの義を満たしていくためでありました。神の愛してやまない一人子が油注がれたのは、王的メシア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することと同時に、仲保者として、苦難の僕として、私たち罪人の側に立ってくださり、罪人である私たちと絆を結び、連帯関係に入ってくださり、私たちを神の子とするためであったのです。私たちはこの方にあって、罪の贖いと、回復の道が開かれました。この方にあって、神の子としての身分が与えられ、神さまとの交わりが回復されました。私たちはこの方に感謝と喜びの礼拝を捧げ、この方に全てを捧げていく者として歩ま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