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年03月24日「復活の時に与えられる霊の体(召天者記念礼拝説教) 부활의 때에 받는 영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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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活の時に与えられる霊の体(召天者記念礼拝説教) 부활의 때에 받는 영의 몸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コリントの信徒への手紙一 15章35節~49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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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15:39どの肉も同じ肉だというわけではなく、人間の肉、獣の肉、鳥の肉、魚の肉と、それぞれ違います。
15:40また、天上の体と地上の体があります。しかし、天上の体の輝きと地上の体の輝きとは異なっています。
15:41太陽の輝き、月の輝き、星の輝きがあって、それぞれ違いますし、星と星との間の輝きにも違いがあります。
15:42死者の復活もこれと同じです。蒔かれるときは朽ちるものでも、朽ちないものに復活し、
15:43蒔かれるときは卑しいものでも、輝かしいものに復活し、蒔かれるときには弱いものでも、力強いものに復活するのです。
15:44つまり、自然の命の体が蒔かれて、霊の体が復活するのです。自然の命の体があるのですから、霊の体もあるわけです。
15:45「最初の人アダムは命のある生き物となった」と書いてありますが、最後のアダムは命を与える霊となったのです。
15:46最初に霊の体があ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自然の命の体があり、次いで霊の体があるのです。
15:47最初の人は土ででき、地に属する者であり、第二の人は天に属する者です。
15:48土からできた者たちはすべて、土からできたその人に等しく、天に属する者たちはすべて、天に属するその人に等しいのです。
15:49わたしたちは、土からできたその人の似姿となっているように、天に属するその人の似姿にもなるので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コリントの信徒への手紙一 15章35節~49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私たちは、年に一度、3月の第四主日に共に集まり、召天者記念礼拝を献げています。召天者記念礼拝とは何か、これは皆様もご存じのように、天に召された私たちの教会の先輩や、或いは、血縁関係にあった親族を礼拝す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召天者お一人お一人を覚え、そして生前の交わりを振り返るための礼拝です。私たちは、これまで、身内に死や、親しい方の死に対面してきました。あるいは、これから対面する方もおられるでしょう。亡くなられたその過程において、亡くなられた時の状態において、それぞれ、様々な苦しみや悲しみをお持ちになっていると思います。特に肉親の死というのは、時がたっても、その傷は自分の力では癒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時間と共に霞んでわからなくなってくるものではなく、いつまでも鮮やかなまま、脳裏に残っ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が毎年こうして召天者を覚える理由、それは、死が全ての終わりではないからです。死んだらお終いではないからです。死というのは、一つの通過点に過ぎません。私たちは死によって、体と霊が一旦引き離されます。私たちの霊は天国でイエス様に結び合わされます。しかし、やがての日、主の再臨の日に、私たちは永遠の命に生きるため、復活の体が与えられるのです。この世で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そのまま引き継いで、やがての日に永遠に生きるための復活の体が与えられるのです。アイデンティティは消滅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たとえ死んだとしても過去の記憶が全てリセットさ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召天者を覚えることにより、私たちはやがて与えられる復活の体を切に待ち望むことができるのであります。

【1】. 裸の種から

コリントの手紙一15章において、パウロは復活の体について、蒔かれた種と実によって説明しています。種とその後に結ばれる実に注目するなら、蒔かれるものは、37節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ただの種粒」でございます。ギリシア語を直訳すると「裸の種」と書かれています。しかし、それが一旦土の中で解体し、死んだような状態になってから、その後瑞々しい若葉が芽を出し、花を咲かせ、やがて実を結ばせるのです。あの、黒ずんだ、見る姿もない一粒の種からは、想像もできないような姿です。これは神の業によるものです。続く39節以降は、パウロは、神の創造の力によって、自然界には様々な肉体があることを思い起こさせます。人間の肉体、獣の肉体、鳥の肉体、魚の肉体、それぞれ違いますね。地上には様々な生物が存在しており、多様性に富んでいます。まだ発見されていない不思議な生物もあるでしょう。これも神の業によるものです。続いて視点を宇宙へ向けさせ、天上の体の多様性にも触れていきます。地上の体と異なるのは、その輝き、栄光の違いであります。私たちは、神様のこのような多岐にわたる創造の御業に驚嘆させられるばかりです。やがて与えられる復活の体というのも、これと同じだと言うのです。「現在の私たちの体を観察することによって、後に与えられる復活の体を想像することなど出来な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復活を信じない人はこのように質問するでしょう。「教会は復活について大真面目に語っているが、それじゃ復活したときに、果たして何歳の姿で復活するというのか?健康も体力も充実していた二十歳ごろの姿に復活するとでも言うのか?ハハハッ」そのように質問することは愚かなことだとパウロは言っています。なぜなら、やがての日に、私たちは、考えも及ばないような、想像もできなかったような、そんな復活の体が与えられるからです。

【2】. アダムの似姿

15:44節で、パウロはこの復活の体について、「霊の体」であると言っています。この霊の体とは一体何なのでしょうか。それは、幽霊のような形のない、ふわふわしたものから出来てい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パウロが「霊の体」という言葉を使ったのは、現在の私たちの体、つまり、自然の体と対比させるためであります。15:42~44節をご覧ください。

“死者の復活もこれと同じです。蒔かれるときは朽ちるものでも、朽ちないものに復活し、蒔かれるときは卑しいものでも、輝かしいものに復活し、蒔かれるときには弱いものでも、力強いものに復活するのです。つまり、自然の命の体が蒔かれて、霊の体が復活するのです。自然の命の体があるのですから、霊の体もあるわけです。”

「自然の命の体」と「霊の体」この二つが対比されています。対比をしっかり把握するために、まず、私たちの現在の体、即ち、「自然の命の体」について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自然の命の体」という言葉は、どこから出てきたのでしょうか。「自然の」という言葉は、ギリシア語のプシュキコスψυχικόςという言葉です。英語のフィジカルという言葉の語源ではありますが、プシュキコスの名詞形はプシュケーψυχήという言葉で、プシュケーとは「魂」とか、「息」と訳されますから、本来フィジカルという英語は、「肉体の」という意味より、「魂を持った」、「息のある」という語源を持っていたことがわかります。私たちの現在の体は、このプシュキコスの体(魂をもった体、息のある体)ということですね。この言葉は、旧約聖書からの引用でありますが、45節の「」で括られている部分ですが、その引用元は創世記2:7の御言葉です。お開きいただける方はお開きください。

“主なる神は、土(アダマ)の塵で人(アダム)を形づくり、その鼻に命の息を吹き入れられた。人はこうして生きる者(息のある命、魂の命)となった。”

この、後半部分の「人はこうして生きる者となった」の引用でございます。ご覧のように、主なる神は土の塵で人を形づくり、そこに命の息を吹き入れられたとあります。「人はこうして生きる者となった(創2:7)」というのは、先ほど申しました「息のある命」となった。「魂の命」となったと直訳できる言葉です。アダムはこのようにして、「プシュケーの命」、「自然の命の体」になったということが書かれているのです。従いまして、「自然の命の体」というのは、アダムの状態、そのものを指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こちらのパネルをご覧ください。ここで重要なことは、私たちの地上の生というのが、アダムになぞらえて見つめていることです。私たち今生きている自然の命の体、これはまさにアダムになぞらえて見つめられている。この体は朽ちるものであり、卑しいものであり、弱いものであります。私たちはそのことを知っていますが、そのことは、私たちが年を重ねれば重ねるほど実感し、前にはできたことが、今では、もうできなくなったということを体験いたします。体力だけではありません。心の持ちよう、精神の状態も同じことが言えると思います。若いころは自分自身の可能性を信じていたけれど、年を重ねていくごとに、自分の限界を悟り、弱さを知り、変化や冒険を拒むようになるのです。パウロは、そのような脆弱な姿こそ、神が与えられた「自然の命の体」なのだと言うのです。ですからある意味で、私たちが、朽ちるもの、卑しいもの、弱いものとして生きることは、自然なことであり、神によって造られたままの姿を生きていると言えるのです。もちろん、弱さや、卑しさから来る、人間の罪という問題は、これは明らかに神様の御心に背く行為です。決して、罪を犯したときに、これが自然なのだ、神によって造られたありのままの姿を生きているのだと肯定することは出来ません。罪を神様のせいにしてしまうことは出来ませんが、少なくとも、人間は罪に陥る可能性を持った弱く、卑しいものとして造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どうしようもなく罪に陥ってしまう、そのような弱さを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3】. キリストの似姿

そのような「自然の命の体」を生きている私たちが、やがて、「霊の体」を与えられる時が来ると、パウロは語ります。「自然の命の体」プシュキコスψυχικόςに対して、「霊の」とは、プニュマティコスπνευματικόςという言葉です。名詞形はプニューマπνεῦμαです。このプニューマとは、人間の霊を指しているのではなく、聖霊を指しています。従って、プニュマティコスとは、「聖霊に属する」ですとか、「聖霊に支配された」体という意味になります。やがて与えられる霊の体、天上の体とは「聖霊に属する体」とは、朽ちないものであり、輝かしいものであり、力あるものです。しかし、そう言われても、少し抽象的で、イメージがわきませんね。「霊の体」について聖書が私たちにはっきり示しているのが、45節後半の「最後のアダム」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でございます。復活されたイエス様の体について言っているのですが、パウロは、私たちのやがて与えられる体を復活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になぞらえて見つめているのです。復活後のイエス様を見た人たちはたくさんいました。イエス様はまず、マリアに現れ、十二使徒の前に現れ、その後500人以上の兄弟たちの前に同時に現れてくださいました。きちんと姿形を持ち、ものを食べることのできる体でした。手には十字架に打ち付けられた傷跡も残っていました。しかし同時に、その復活の体は閉ざされた部屋の中に自由に行き来することができる体でもあります。イエス様は復活の体でしばらくの間、ご自身を現わされましたが、40日の間地上に現れて、その後、天に昇られました。天に挙げられた後、イエス様を見た人はい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パウロでございます。パウロはダマスコの途上で復活の主にお会いしました。そのお姿は、使徒言行録26:13に書かれている通り「太陽よりも明るく輝いていた」とあります。その輝きは、パウロが見ることが許された程度でしたから、おそらく、パウロに合わせて、より輝きを落とした姿であっただろうと考えられます。いずれにしても聖書が全人類を、アダムとキリストという二人の代表者によって捉えている見方、この見方は非常に重要だと思います。最初の人、アダムが罪を犯し、堕落してしまったので、アダムから生まれた全人類に、死と罪の力が入り込んでしまいました。しかし、第二のアダムであり、最後のアダム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が、父なる神への信仰と全き従順によって、死と罪の力に勝利され、復活なさいました。その復活は、私たちキリスト者の初穂として復活です。イエス様に結合されている人々は、やがての日に復活して、この「霊の体」を与えられるのであります。

【結論】

この世における、私たちの地上の営みは、少しずつ朽ちない、輝かしい、力強い者になっていく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自然の命の体」を持っているものとして、朽ちていくもの、卑しいもの、弱いものとして歩んで行きます。誰もが老いを経験し、誰もが、悲しみと、病と、死を体験します。老いとは、私たちの通らなければならないプロセスであり、死も、私たちの通らなければならないプロセスです。しかし、死んで、土の中で解体したような状態になってから、キリストにある者たちは、イエス様が獲得された霊の体に、やがての日に復活させられるのです。朽ちないもの、輝かしいもの、力あるものとして、これまで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失うことなく、永遠の命を生きる者とされるのです。そのことに希望を持ちつつ、私たちは、今、この世で福音宣教に励む者として歩ま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부활의 때에 받는 영의 몸

2024년 3월24일 센겐다이 교회 소천자 기념예배설교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

서론

우리는 일년에 한 번, 3월 넷째 주에 함께 모여 소천자 기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소천자 기념예배란 무엇인가, 이것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늘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교회의 선배나, 혹은 혈연관계에 있던 친족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천자 한 분 한 분을 기억하고, 생전의 교제를 회고하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족과 가까운 분의 죽음을 대면해 왔습니다. 또는 앞으로 대면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돌아가신 그 과정에서, 돌아가실 때의 상황에서, 각각 여러 가지 고통과 슬픔을 가지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육친의 죽음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그 상처는 자신의 힘으로는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져 알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선명한 채로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매년 이렇게 소천자를 기억하는 이유, 그것은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통과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인해, 몸과 영이 일단 분리됩니다. 우리의 영은 천국에서 예수님께 연합됩니다. 그러나 이윽고 그 날, 주님의 재림의 날에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부활의 몸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지닌채, 이윽고 영원한 삶을 위한 부활의 몸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설령 죽었다고 해도 과거의 기억이 모두 리셋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천자를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이윽고 주어질 부활의 몸을 간절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1) 벌거 벗은 씨앗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의 몸에 대해서, 뿌려진 씨앗과 열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앗과 그 뒤에 맺히는 열매에 주목한다면, 뿌려지는 것은 37절에 적혀 있는 것처럼, 그냥 씨앗의 「알맹이 뿐」입니다. 헬라어를 직역하면 「벌거벗은 씨앗」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단 흙 속에서 해체되고, 죽은 듯한 상태가 되고 나서, 그 후 싱싱한 새잎이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이윽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저 거무스름한, 볼 것도 없은 한 알의 씨앗을 본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39절 이후에는,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따라 자연계에는 다양한 육체가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 각기 다르죠. 지상에는 다양한 생물이 존재하고 있어 다양성이 풍부합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신기한 생물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입니다. 이어서 시점을 하늘로 향하게 해, 천상의 몸의 다양성도 살펴 갑니다. 지상의 몸과 다른 것은, 그 빛, 영광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다방면에 걸친 창조의 역사에 경탄할 뿐입니다. 이윽고 주어지는 부활의 몸이라는 것도, 이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 몸을 관찰해 본다면, 나중에 주어지는 부활의 몸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교회는 부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면 부활할 때, 과연 몇 살의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말인가? 건강도 체력도 충분했던 스무 살 무렵의 모습으로 부활한다고 하는 것일까? 하하하!” 그렇게 질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윽고 그 날, 우리는 생각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은, 상상도 못했던, 그런 부활의 몸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2) 아담을 닮은 모습

15장 44절에서, 바울은 이 부활의 몸에 대해, 「신령한 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신령한 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령과 같은 형태가 없는, 둥둥 떠다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신령한 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현재 우리 몸, 즉, 「육의 몸」과 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15장 42~4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육의 몸」과 「신령한 몸」 이 두가지가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현재 몸, 즉 「육의 몸」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육의 몸」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육」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푸스키코스ψυχικός」라는 말입니다. 영어의 「피지컬」이라는 말의 어원이기는 하지만, 푸스키코스의 명사형은 「프쉬케」라는 말로, 프쉬케란 「영혼」이라든가, 「숨」이라고 번역되기 때문에 본래 피지컬이라는 영어는, 「육」이라는 의미보다 「영혼을 가졌다」, 「숨이 있다」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 몸은 이 푸스키코스의 몸(영혼을 가진 몸, 숨이 있는 몸)이라는 것이네요.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것인데, 45절의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라는 부분인데, 그 출처는 창세기 2장 7절의 말씀입니다. 펼쳐 주실 분은 성경을 펼쳐 주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아다마)으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뒷부분의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의 인용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주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합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장 7절)」는 앞에서 말씀드린 「숨이 있는 생령」이 되었다. 「영혼의 생명」이 되었다고 직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담은 이렇게 해서 「프쉬케의 생명」,「육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아담의 상태, 그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쪽의 패널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지상의 삶이라는 것이 아담에게 겹쳐져서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육의 몸」, 이 몸은 썩는 것이요, 비천한 것이요, 연약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 일은 우리가 해를 거듭할수록 실감하고, 전에는 할 수 있었던 일이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체력뿐만이 아닙니다. 마음가짐이나, 정신의 상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었을 때는 자신의 가능성을 믿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연약함을 알고, 변화나 모험을 거부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취약한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육의 몸」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썩는 몸, 비천한 몸, 연약한 몸으로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그대로의 모습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연약함이나 비천함에서 오는, 인간의 죄에 관한 문제는,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마음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결코, 죄를 지었을 때,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진 그대로의 모습을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긍정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은 죄에 빠질 가능성을 가진 연약하고, 비천한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죄에 빠져버리는 그런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

그런 「육의 몸」으로 살고 있는 우리가, 이윽고 「신령한 몸」을 부여받을 때가 올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육의 몸」 「푸스키코스ψυχικός」에 대해 「신령한」이란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ός」라는 말입니다. 명사형은 「프뉴마πνεῦμα」입니다. 이 프뉴마란, 인간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프뉴마티코스란 「성령에 속한다」거나 「성령에게 지배당한 몸」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윽고 주어지는 신령한 몸, 천상의 몸이란, 「성령에 속한 몸」이란, 썩지 않는 것이며, 찬란하고 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들어도 조금 추상적이고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신령한 몸」에 대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45절 후반의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바울은 우리에게 이윽고 주어지는 몸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겹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 후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열두 사도 앞에 나타나셨고, 그 후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 앞에 동시에 나타나 주셨습니다. 제대로 된 모습을 가지시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이었습니다. 손에는 십자가에 박힌 상처자국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부활의 몸은 닫힌 방 안으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몸으로 잠시 동안, 자신을 드러냈는데 사십 일 동안 지상에 나타나셨고, 그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에 올라사신 후 예수님을 본 사람이 있을까요?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모습은, 사도행전 26장 13절에 적혀 있는 대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빛은, 바울이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정도였기 때문에, 아마도 바울에게 맞춰서 더 빛을 떨어뜨린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성경이 전 인류를,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두 대표자에 빗대어 붙잡은 시각, 이 시각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아담에게서 태어난 온 인류에게, 죽음과 죄의 힘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이자,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완전한 순종으로, 죽음과 죄의 힘에 승리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첫 이삭인 부활입니다. 예수님께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윽고 부활하여, 이 신령한 몸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이 세상에서, 우리의 지상에서의 삶은, 조금씩 썩지 않고 빛나며 강력한 자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몸」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썩어 가는 자, 비천한 자, 연약한 자로 걸어갑니다. 누구나 늙음을 경험하고, 누구나 슬픔과 병과 죽음을 체험합니다. 늙는다는 것은 우리가 지나가야 하는 과정이고 죽음도 우리가 지나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죽고 흙 속에서 해체한 듯한 상태가 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이 획득하신 「신령한 몸」으로 이윽고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몸, 찬란한 몸, 힘 있는 몸으로서, 지금까지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 일에 희망을 가지면서,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복음선교에 힘쓰는 자로 걸어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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