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年01月14日「小さき者への寛容と配慮 작은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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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さき者への寛容と配慮 작은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9章38節~42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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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9:38ヨハネがイエスに言った。「先生、お名前を使って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者を見ましたが、わたしたちに従わないので、やめさせようとしました。」
9:39イエスは言われた。「やめさせてはならない。わたしの名を使って奇跡を行い、そのすぐ後で、わたしの悪口は言えまい。
9:40わたしたちに逆らわない者は、わたしたちの味方なのである。
9:41はっきり言っておく。キリストの弟子だという理由で、あなたがたに一杯の水を飲ませてくれる者は、必ずその報いを受ける。」
9:42「わたしを信じるこれらの小さな者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者は、大きな石臼を首に懸けられて、海に投げ込まれてしまう方がはるかによい。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9章38節~42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誰が一番大いなる者なのか」、この質問は私たちの生きる社会において、日々関心が持たれ、投げかけられている質問です。誰が一番大いなる者なのか、この命題を念頭に置いて私たちは、出世するよう努力を惜しまず、影響力のある地位を占めることに執着し、尊敬される地位を占めることに執着します。受験生であれば、評価され、試験に合格するように、全てを注いで努力します。この世において「大いなる者」こそ、権力と快適さを手に入れることができるからです。この世において「大いなる者」こそ、名誉と信頼を手にいれ、他人に影響を及ぼし、自らの意思を反映させることが出来るからです。恐らくこのことは、ほとんどの人が認めており、自明のこととなっていると思います。ところがイエス様は、神の国において、大いなる者とは、「すべての人の後になり、すべての人に仕える者になりなさい」と教えられました。本日は、そのイエス様の教えの延長であります。本日も与えられた御言葉から恵みに与っ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1】. 弟子としてのプライド(雷の子)

冒頭に、12弟子のヨハネがイエス様に報告しています。38節をご覧ください。

“ヨハネがイエスに言った。「先生、お名前を使って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者を見ましたが、わたしたちに従わないので、やめさせようとしました。」”

以前、弟子たちは悪霊を追い出す権能をイエス様から授けられたにもかかわらず、悪霊追い出しに失敗したという経緯がございました。弟子たちの無能力が暴露されてしまったのです。人々の前で弟子たちは、どんなに恥ずかしい思いをしたことでしょうか。それにさらに追い打ちをかけるかのように、今度は見知らぬある人が、勝手にイエス様のお名前を使って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というのです。

この、勝手に「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者」についてですが、この人は果たしてイエス様を信じていたのか、いなかったのか、色々と解釈がございます。この人はイエス様のことを信じていないが、ただ呪文のように唱えて、悪霊追い出しに成功したと解釈する人がいますが、そのように理解すると、イエス様が魔術師のようなお方になってしまいます。ですから、私はこの人がイエス様のことを信じていたのだと考えています。イエス様のお名前が語られた時に、この人を通してイエス・キリストが働いてくださったということですから、彼はイエス様を受け入れ、イエス様と人格的な交わりがあったに違いないと思うのです。彼は十二弟子に属しておらず、もっとに言えば十二弟子の周りに群がって形成された、さらに多くの弟子集団にも属していない人物であり、ヨハネが初めて出会った人物であったという事でしょう。例えて言うなら、有名な教会の主任牧師を想像してみてください。主任牧師が癒しのために祈りましたが、何も変化が起こりませんでした。「イタタタ…」。そこへ、まだ主任牧師に名前さえ覚えられていない、一人の信徒が来ました。そして、「主の御名によって命じる。悪霊を出て行け、病よ癒されよ!」と祈ったら、病人の病がケロッと癒され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です。主任牧師としては、面目もないわけです。

さて、ヨハネは、イエス様に対し「わたしたちに従わないので、やめさせようとしました」と報告しています。「私たちに従わないので」とありますから、弟子たちのように、すべてを捨てて、主イエスに従っていないから、弟子たちのように、主イエスと寝食を共にし、御言葉を学んでいないから、やめさせようとし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この「私たちに従わないので」という言葉から、ヨハネの中に何か特権意識みたいなものがあるのではと勘繰ってしまいます。そこから出て来る妬みによって、この人にやめさせようとし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十二弟子のヨハネとは、一体どのような性格の持ち主だったのか、そのことを思い巡らすなら、彼は、あの四番目の福音書や、ヨハネの手紙、ヨハネの黙示録の著者ですから、誰よりも愛に満ちた弟子であり、誰よりも長寿を全うし、とても柔和な弟子であったに違いないと想像してしまいます。しかし、どうやら最初からそのような性格の持ち主ではなかったようです。ゼベダイの子であるヨハネは、その熱心さのゆえに、その一生懸命さのゆえに、兄のヤコブと共に弟子たちの中でも常に中心にいた人物でありました。変貌の山でイエス様が栄光のお姿に変えられた時にも、ペトロとヤコブとヨハネは一緒に同伴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十二弟子の中でも側近の一人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また、ヨハネの性格が熱心であり、気性が激しかったから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イエス様はヤコブとヨハネの兄弟に「雷の子ら(ボアネルゲス)」というニックネームを付けました(3:17)。恐らく、突然、頭に血が上り、かっとするようなところが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推測されます。ルカによる福音書を見ると、イエス様を歓迎しなかったサマリア人の態度を見て、ヨハネはイエス様に次のように進言しています。ルカ9:53~55をご覧ください。

“しかし、村人はイエスを歓迎しなかった。イエスがエルサレムを目指して進んでおられたからである。弟子のヤコブとヨハネはそれを見て、「主よ、お望みなら、天から火を降らせて、彼らを焼き滅ぼしましょうか」と言った。イエスは振り向いて二人を戒められた。”

この時、ヨハネは、サマリア人に対し「天から火を降らせ、焼き滅ぼしましょうか?」と言いました。サマリア人とは、昔、北イスラエルがアッシリア捕囚として連行され、北イスラエルの地に異邦人を移住させたのですが、その時、北イスラエルの地に残っていたユダヤ人と異邦人の混血として生まれたのがサマリア人です。血統を重んじるユダヤ人は、混血のサマリア人を極度に嫌い、軽蔑していました。ヨハネの進言は、サマリア人のことを、取るに足らない者とし、人として価値を認めていなかったという事だと思います。良く言えば、ヨハネはそれだけキリストの弟子としてのプライドを強く持っていたという事にもなりますが、いずれにしても聖霊によって変えられるまでは、ヨハネはその熱心さのゆえに、大変危険で、恐ろしい性格であったということが言えるのです。

【2】. 小さき者への寛容と配慮

ヨハネの報告を聞いて、イエス様は次のように言われました。39~40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言われた。「やめさせてはならない。わたしの名を使って奇跡を行い、そのすぐ後で、わたしの悪口は言えまい。わたしたちに逆らわない者は、わたしたちの味方なのである。”

39節の「やめさせてはならない。μὴ κωλύετε,」という言葉に注目しますと、ギリシア語の直訳では「禁じてはならない、妨げてはならない」となります。英語ではDo not forbidとなっています。従いまして、「自由にさせなさい、禁じてはならない、寛容になりなさい」という意味です。この言葉と同じ言葉が、ちょうどマルコ10:14にも出て来ます。ご覧ください。

“しかし、イエスはこれを見て憤り、弟子たちに言われた。「子供たちをわたしのところに来させなさい。妨げてはならない。神の国はこのような者たちのものである。”

子供たちがわたしのところに来るのを、「妨げてはならない」という言葉です。全く同じ言葉が使われています。イエス様は「禁じてはならない、自由にさせなさい、寛容になりなさい」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誰が一番大いなる者なのか」、頭がいっぱいになっていた弟子たちに対し、イエス様はご自身の名前によって行動した「幼い子供」を禁じたりしてはならないと言うのです。幼い子供の悪霊追い出しを、批判したり、拘束したり、排除してはならないと言うのです。イエス様を受け入れている、この小さき者を配慮しなさいと教えているのです。

毎年、年が明けて、定期会員総会が開催される時期になりますと、せんげん台伝道所の昨年度の一年間の統計資料を作成いたします。それを中会にも報告いたします。「私たちは、今年何名伝道した。」「私たちの教会は、会員数が何名だ。」このような統計の数字は、教会の実態を把握する上で必要ですが、本当に大切なことは、教会が小さき者を大切にできたのか、小さき者のうめき声を聞き逃さず、きちんと対応できたのか、そのことだと私は思います。「誰が一番大いなる者なのか」という価値観にあまりにも縛られてしまうと、あの教会は何名の会員数になった。この教会は何名の会員数になったと、互いに比較し合いながら、牧師たちでさえ振り回されてしまいます。そんな時は、イエス様がなぜ、徴税人や罪人や遊女たちと食事をし、交わりをされたのか黙想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うのです。「徴税人や罪人や遊女たち」、彼らは社会的に小さき者、取るに足らない者たちでした。もし、自分たちが大いなる立場、高い立場を占めようとし、人々を従わせることだけを考えるなら、自然とそのような小さき者、取るに足らない者たちに目が行かなくなるでしょう。この世がまさにそうだからであります。しかし、教会はこの世の価値観に振り回されてはなりません。この世の価値観に追従してはならないのです。教会はイエス様から恵みを頂き、社会において小さき者とされた人に、一番小さな人に、役員・伝道所委員はじめ、全ての会員が、一生懸命仕えるべきであります。教会とはイエス・キリストの身体であり、一つの共同体、一つの有機体であるからです。イエス様が無限の価値を持っておられ、絶対的な価値を持っておられるように、イエス様の身体であるお一人お一人も、無限で、絶対的な価値があるのです。マルコ9:41~42節をご覧ください。

“はっきり言っておく。キリストの弟子だという理由で、あなたがたに一杯の水を飲ませてくれる者は、必ずその報いを受ける。」「わたしを信じるこれらの小さな者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者は、大きな石臼を首に懸けられて、海に投げ込まれてしまう方がはるかによい。”

「はっきり言っておく」という言葉は、ギリシア語で「アーメン」という言葉です。つまり必ずこのことは起こるとイエス様がご自身によって、保証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また、41節の「キリストの弟子だという理由で」という箇所ですが、ここに「弟子」という言葉はありません。(英語や韓国語の聖書、或いは新しく出た聖書教会共同訳には、きちんと翻訳されていますが)、キリストの弟子ではなく「キリストのもの」「キリストに属するもの」という意味です。従いまして、キリストに属する小さき者に、一杯の水を飲ませてくれることを、イエス様は、自分自身に一杯の水を飲ませてくれることと同等視し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水一杯を飲ませること、これは大変些細なことかもしれませんが、そのことをイエス様はご自身にされたこととして覚えられ、その報いを約束してくださるのです。同じように、キリストに属する小さき者をつまずかせること、これは、イエス様ご自身から信仰を奪い取る行為として同等視しておられます。小さき者をつまずかせること、排除することは、私たちの間に起こりがちで、些細なことと考えるかもしれませんが、そのことをイエス様はご自身にされたこととして大変悲しまれるのです。なぜなら、お一人お一人がイエス様に結び合わされているからです。そして、これらのことから分かるのは、私たちの日々の信仰生活において、神の国のために大きな犠牲を払い、兄弟姉妹の誰もが認めるような立派な働きと功績を残すこと、そのことが求められているのではなく、日々の営みの中でほんの些細なこと、ほんの小さなこと、すなわち、小さき者たちに仕えることこそ、大切であるとイエス様は教えておられるのです。その際、自分が大いなる者として(上から目線で)仕えるのではく、自分の意見が正しいと確信して仕え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のような状態では、仕えているようでも、いらだちを覚え、実際、された方はおせっかいのように感じるからであります。謙遜になり、自らを恥じ入り、自らを低い状態に置いて、小さき者たちを「自由にさせること、寛容になること」が、とても大事であるとイエス様は言われるのです。

【結論】

「誰が一番大いなる者なのか」、この価値観の問題点について、イエス様の御言葉から教えを頂きました。私たちは、イエス様のゆえに、すべての人の後になり、すべての人に仕える者として歩んでいくことを決心致します。しかし一度、二度、聖霊によって悟りが与えられたからといっても、この問題が解決され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の罪の性質によって、傲慢な思いが出て来て常に葛藤が生じ、私たちの地上において肉の幕屋を抜け出すまで、この戦いは継続していくからであります。だからこそ、私たちは、徹底的に、教会全体が一人ひとりを大切にする価値観、小さき者を大切にする価値観を共有し、小さき者のうめき声を聞き逃さず、きちんと対応できるような共同体を目指して歩ませていただくことを決心したいと思うのです。一つひとつの小さなことを神さまは決して忘れずに覚えてくださるからです。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작은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

2024년 1월 14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마가복음 9장 38~42절

서론

“누가 가장 큰 자인가”이 질문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매일 관심을 갖고 던지는 질문입니다. 누가 가장 큰 자인지 이 명제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출세하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데 집착하며 존경받는 자리를 차지하는 데 집착합니다. 수험생이라면 평가받고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쏟아붓고 노력합니다. 이 세상에서 「큰 사람」이야말로 권력과 안락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큰 사람」이야말로 명예와 신뢰를 얻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뜻을 반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어 자명한 일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란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은 그 예수님의 가르침의 연장입니다. 오늘도 주어진 말씀에서 은혜를 얻고자 합니다.

(1) 제자로서의 자존심(우레의 아들)

서두에서 제자 요한이 예수님께 보고하고 있습니다. 3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이전에 제자들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예수님께로부터 부여 받았음에도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데 실패한 바 있습니다. 제자들의 무능력이 폭로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제자들은 얼마나 창피했을까요? 거기에 더 몰아 붙이듯 이번에는 낯선 어떤 사람이 멋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멋대로 「귀신을 내쫓는 자」에 대해서인데, 이 사람은 과연 예수님을 믿었는지 믿지 않았는지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그냥 주문처럼 외워서 악령 몰아내기에 성공했다고 해석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이해하면 예수님이 마술사 같은 분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이 사람을 통해 예수님이 역사 해 주셨다고 하니 그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열두 제자 주위에 몰려 형성된 더 많은 제자 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이며 요한이 처음 만난 인물이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유명한 교회의 담임 목사를 상상해 보세요. 담임 목사가 치유를 위해 기도했지만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야야…”거기에 아직 담임목사에게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은 한 명의 성도가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은 나갈지어다, 병이 치유될지어다!”라고 기도하자 아픈 사람의 병이 씻은듯이 치유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에게 있어서는 체면이 말이 아닌 상황인 것입니다.

자, 요한은 예수님께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라고 되어 있으니까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 예수를 따르지 않았으니 제자들처럼 주 예수와 숙식을 같이하고 말씀을 배우지 않았으니 그만두게 하려는 것이겠지요. 이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라는 말에서 요한 안에 뭔가 특권의식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짐작하게 됩니다. 거기서 나오는 질투 때문에 그 사람에게 그만두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요? 제자 요한은 도대체 어떤 성격의 소유자였는가를 생각한다면 그는 그 네 번째 복음서나 요한서신, 요한계시록의 저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사랑이 넘치는 제자였고 누구보다 장수했으며 매우 온화한 제자였음이 틀림없다고 상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처음부터 그런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세배대의 아들 요한은 그 열성 때문에, 그 열심 때문에 형 야고보과 함께 제자들 중에서도 항상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변화 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었을 때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동반하였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도 측근 중 한명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요함의 성품이 열정적이고 천성이 과격해서일까요. 예수님은 야고보과 요한의 형제에게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마가복음 3장 17절). 아마도 갑자기 머리에 피가 솟구쳐 욱하는 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은 사마리아인들의 태도를 보고 요한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진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53~55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들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이때 요한은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이란 옛날에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 포로로 끌려가서 북이스라엘 땅에 이방인을 이주시켰는데, 그때 북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로 태어난 것이 사마리아인입니다. 혈통을 중시하는 유대인은 혼혈인 사마리아인을 극도로 싫어하고 경멸했습니다. 요한의 진언은 사마리아인을 하찮은 자로 여기고 사람으로서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게 말하면 요한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자존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도 되지만, 어쨌든 성령에 의해 변화될 때까지는 요한은 그 열성 때문에 매우 위험하고 무서운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작은 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

요한의 보고를 듣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9,4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39절의 「금하지 말라 μὴ κωλύετε,」라고 하는 단어에 주목해보면 헬라어 직역에는 「방해해서는 안 된다」입니다. 영어로는 Do not forbid 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롭게 하라, 금지해서는 안 된다, 관용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과 똑같은 말이 마침 마가복음 10장 14절에도 나옵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입니다. 완전히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해서는 안 된다, 자유롭게 하라, 관용하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가 제일 큰 자인가?」로 머리가 꽉 찼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을 의탁하여 행동한 「작은 자」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가 더러운 귀신을 내쫓는 사역을, 비판하거나 구속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 작은 자를 배려하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매년 새해가 밝아 정기회원총회개최되는 시기가 되면, 센겐다이교회의 작년도의 일년간의 결산자료를 작성합니다. 그것을 노회에도 보고 합니다. “우리는 이번 년도에는 몇명을 전도했다”, “우리 교회는 회원수가 몇명이다”이러한 통계의 수치는 교회의 실태를 파악하는데에 필요한데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가 작은 자를 소중히 여겼는지 작은 자의 신음소리를 놓치지 않고 잘 대응했는지 그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가 가장 큰 자인가라는 가치관에 너무 얽매여 버리면 그 교회는 몇 명의 회원 수가 되었다, 이 교회는 몇 명의 회원 수가 되었다고 서로 비교하면서 목사들조차 휘둘리게 됩니다. 그럴 때는 예수님이 왜 징세인이나 죄인이나 창녀들과 식사를 하고 교제를 하셨는지 묵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징세인이나 죄인이나 창녀들」 그들은 사회적으로 작은 자, 하찮은 자들이었습니다. 만약 자신들이 큰 자리,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고 사람들이 따라오게 하는 것만 생각한다면 자연히 그런 작은 자, 하찮은 자들에게 눈길이 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을 추종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사회에서 작은 자로 여겨진 사람을, 가장 작은 자를 교회 임원을 비롯한 모든 성도가 열심히 섬겨야 합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계시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계시듯이 예수님의 몸인 한 분 한 분도 무한하고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41,42절을 참조하십시오.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진실로 이르노니」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멘」이라는 단어 입니다. 즉 반드시 이 일은 일어날 것이라고 예수님에 의해 보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41절에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는 부분인데 헬라어 성경에는 「제자」라는 말은 없습니다(영어나 한국어 성경, 혹은 새로 나온 성경교회공동역에는 제대로 번역되어 있지만 일본어 성경 신공동역에는 제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속하는 작은 자에게 물 한그릇이라도 주는 것을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물 한그릇을 주는 것과 동등시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 한그릇을 주는 것, 이것은 매우 사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 일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한 것으로 기억하시고 그 보답을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속하는 작은 자를 방해해서 실족하게 하는 것, 배제하는 일은 우리 사이에 일어나기 쉽고 사소한 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일을 예수님은 자신에게 하신 일로 매우 슬퍼하십니다. 왜냐하면 한 분 한 분이 예수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일상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큰 희생을 치르고 형제자매 모두가 인정하는 훌륭한 일과 업적을 남기는 것, 그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소한 것, 작은 것, 즉 작은 자를 섬기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봉사할 때 자신이 큰 자라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우월감을 가지고 섬기거나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섬겨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하는 봉사는 섬긴다고는 해도 조바심으로 인해 그 섬김을 받는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참견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지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스스로를 낮은 상태에 두고 작은 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 관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결론

「누가 가장 큰 자인가?」이 가치관의 문제점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모든 사람의 뒤에 서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로 걸어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성령에 의해 깨달음이 주어진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죄성에 따라 교만한 마음이 생겨 늘 갈등이 생기고 우리가 땅에서 육의 장막을 벗어날 때까지 이 싸움을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하게 교회 전체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을 공유하고 작은 자의 신음소리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공동체를 목표로 걸어가기로 결심하고 싶습니다. 하나 하나의 작은 것들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기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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