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年07月23日「郷里の人々による拒絶 고향사람들로부터의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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郷里の人々による拒絶 고향사람들로부터의 거절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6章1節~6a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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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6:1イエスはそこを去って故郷にお帰りになったが、弟子たちも従った。
6:2安息日になったので、イエスは会堂で教え始められた。多くの人々はそれを聞いて、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のような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が授かった知恵と、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奇跡はいったい何か。
6:3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息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弟ではないか。姉妹たちは、ここで我々と一緒に住んでいるではないか。」このように、人々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6:4イエスは、「預言者が敬われないのは、自分の故郷、親戚や家族の間だけである」と言われた。
6:5そこでは、ごくわずかの病人に手を置いていやされただけで、そのほかは何も奇跡を行うことがおできにならなかった。
6:6aそして、人々の不信仰に驚かれ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6章1節~6a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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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ナザレのイエスとは一体何者なのか」、この質問はマルコによる福音書に貫いている大きなテーマでございます。この質問に対する正しい答えは、主イエスの弟子たちでさえ、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を通してでなければ、正しく理解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問いであります。マルコの福音書は、まさにこの問いについて、いろいろな角度から光を当ててくれています。マルコの福音書3:6では、安息日に病の癒しの奇跡をおこなった主イエスに対し、ファリサイ派の人々とヘロデ派の人々が、どのように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始めたと書かれています。暗雲の立ち込める一節であり、やがて、イエス様が受けるであろう受難が暗示されていました。しかし、そんな記述とは対照的に、主イエスは、ガリラヤ伝道において、数々の奇跡をなし、挙句の果てには死人を甦らせる奇跡までなされました。主イエスの一行は、一層脚光を浴びるようになります。そして、ガリラヤ湖の沿岸地域(おそらくカファルナウムと思われますが)を去り、一行は、イエス様の故郷、すなわちナザレの村に向かいました。ナザレと言えば、今でこそ、受胎告知教会があって、大変有名な観光スポットでありますが、当時はただの田舎です。また、弟子たちを引き連れて故郷に帰るというのは、一見すると、自分の故郷に帰って凱旋し「錦を飾る」ことになる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ます。私たちの身近の人でも、世界的な有名人ともなれば、それを歓迎し、喜ぶのは、何と言っても地元の人たちでありましょう。ところが、最も歓迎すべき地元の人々は、主イエスの教えと力ある業を歓迎せず、むしろ不快に思い、拒絶しました。これは一体なぜでしょうか。ここにおいても、やはり、主イエスが最終的に受けることになる、ご自身の受難について暗示されていると言えると思います。主イエスの受難と、死のモチーフが、一本の赤い糸としてマルコの福音書の中に繋がっているのを、私たちは見て取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1】. 自分は知っているという思いによって

それでは本文を見て行きましょう。1~2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そこを去って故郷にお帰りになったが、弟子たちも従った。安息日になったので、イエスは会堂で教え始められた。多くの人々はそれを聞いて、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のような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が授かった知恵と、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奇跡はいったい何か。”

主イエスは、安息日に会堂で教えられたとあります。当時、会堂は旧約聖書の教育の現場でありました。エルサレムにある神殿は、ユダヤ人の三大祝祭を祝うためにもちろん大切なものでありましたが、バビロン捕囚以降、民が散らされると、イスラエルの共同体の中に、大きな変化が現れたのです。その変化とは、ユダヤ教が、もはや一つの民族の宗教ではなく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イスラエル共同体とは、血統による一つの民族を指すのではなく、たとえ、異邦の国に散らされていても、たとえ、言語や、肌の色が異なっていても、旧約聖書の教えを受け入れるなら、イスラエル共同体として認められました。旧約聖書の教えを受け入れるなら、イスラエルなのです。そのような背景の中で、シナゴーグ(会堂)で献げられる礼拝は、聖書を解き明かし、祈りを捧げる大変重要な場所として機能していったのです。ですから、旧約時代から存在したシナゴーグは、まさに新約時代の教会の役割を果たしていた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また、安息日にイエス様が会堂で御言葉を解き明かすことができたというのは、イエス様がモーセの律法に対し、忠実なラビとして、受け入れられていたことを示しています。安息日であるこの日も、ナザレにある会堂で、ラビとして主イエスは、御言葉を教えられました。すると人々から驚きの声が挙がりました。「この人は、このような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が授かった知恵と、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奇跡はいったい何か。」主イエスを通して語られた知恵と、その手を通してなされた力ある業に人々は驚嘆し、心打たれたのです。そして、イエス様を喜んで受け入れたのかと思いきや、続く3節において、全く正反対の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3節をご覧ください。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息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弟ではないか。姉妹たちは、ここで我々と一緒に住んでいるではないか。」このように、人々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ナザレの人々は、第一に、イエス様の家族のことを、よく知っていると言いました。イエス様の家族といえば、以前、カファルナウムのペトロの家にまで、イエス様を引き取りに来た人々です。3:21と、3:32をご覧ください。

“身内の人たちはイエスのことを聞いて取り押さえに来た。「あの男は気が変になっている」と言われていたからである。”

“大勢の人が、イエスの周りに座っていた。「御覧なさい。母上と兄弟姉妹がたが外であなたを捜しておられます」と知らされると、”

この時、イエス様の母と、兄弟姉妹がペトロの家まで、気が変になっていると言われた兄イエスを引き取りに来ました。その人々が母マリアであり、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であり、また姉妹たち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ヤコブとは、後に信仰を持ち、エルサレム教会の指導者となり、聖書のヤコブ書を書いた人物であり、ユダとは、後に信仰を持ち、聖書のユダ書を書いた人物だと一般的に言われています。後で立派な信仰を持つかもしれませんが、少なくともこの頃はまだ、イエス様のことを気が変になったと考えていたと思われます。ですから、家族からも信用されない男を、ナザレの人々は、どのように信じろと言うのかという事であります。第二に、イエス様の職業について、大工であることを、よく知っていると言いました。マタイによる福音書の並行記事を見ると、「この人は大工の息子ではないか」と書かれています。父ヨセフの仕事を継承したようです。大工という言葉は、ギリシア語で「テクトン」という言葉ですが、この言葉は広い意味を持っており、木材だけでなく、石、鉄などを扱う人の職業として、テクトン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ました。ある資料によると、ナザレ村の近くに、廃墟となったセフォリスの町があり、領主ヘロデ・アンティパスが、廃墟セフォリスの復興に取りかかったため、イエス様も、父ヨセフも、このセフォリスの町の復興の為に動員された職人であっただろうと主張されています。もしそうであるなら、おそらく、ナザレから多くの人々がセフォリスの復興に動員されたものと思われます。ラビになるために多くの特別な学びをしたというのならまだ理解できますが、ちょっと前まで自分たちと共に働いていた男から、一体どんな知恵が出てくるのかという事であります。第三に、マリアの息子であることを、よく知っていると言いました。この表現から、既に父ヨセフが死んでいることが推測されますが、たとえ父親が死んだとしても、その息子は、普通ユダヤにおいては、父の名前を用いて「〇〇の子」と言われるのが、一般的でした。マリアの名があえて用いられているのは、出生にまつわる疑惑があったということなのかもしれません。つまり、主イエスとは、マリアがまだヨセフと正式に結婚していなかった時の子どもであり、父親は誰なのかはっきりしないという疑惑です。そのような、どこの馬の骨とも知れない男から、我々が何を教えられるのかという事であります。これらの理由から、ナザレの人々は、イエス様を不快に思い、拒絶したのです。「私は知っている」という傲慢な態度が、救い主を拒絶するようにしてしまいました。御言葉に対し、「私は知っている、私には見える」という傲慢は禁物です。なぜなら、私たちはいくら聖書を熱心に読んでも、聖霊が私たちの霊の目を開いてくださらなければ、決して自らの力では、真理を悟ることは出来ないからです。ヨハネ9:39~41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がこの世に来たのは、裁くためである。こうして、見えない者は見えるようになり、見える者は見えないようになる。」イエスと一緒に居合わせた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これらのことを聞いて、「我々も見えないということか」と言った。イエスは言われた。「見えなかったのであれば、罪はなかったであろう。しかし、今、『見える』とあなたたちは言っている。だから、あなたたちの罪は残る。」”

聖霊の力によって、はじめて聖書の御言葉を正しく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が、「私は知っている、私には見える」という態度は、かえって命の御言葉から耳を塞いでしまうのです。イエス様のことをより深く知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アウェイではなくホームでの、地の利(アドバンテージ)が、ナザレの人々にとっては、むしろマイナスに働いてしまいました。「預言者が敬われないのは、自分の故郷、親戚や家族の間だけである」とイエス様が言われた通りです。

【2】. 自らの無能と汚れから

それでは、ナザレの人々の信仰と、先週、先々週、見てまいりました、出血の止まらない女や、会堂長ヤイロの信仰とは、何が異なるのでしょうか。出血の止まらない女と、会堂長ヤイロが、それだけイエス様について深く精通していたと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か。彼らが、より優れた信仰を持っていたと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出血の止まらない女も、会堂長ヤイロも、「ナザレのイエスとは一体何者なのか」、という問いに、必ずしも正確に知ってい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そして、彼らの信仰には問題があり、不適切なところもありました。しかし、「わたしの服に触れたのはだれか」というイエス様の質問に、震えながら進み出てひれ伏し、主の御前に告白して、イエス様の導きの中で、主イエスとの正しい関係へと導かれたのです。娘が死んだという知らせを聞いて、全ての望みが絶たれてしまったと思っても「恐れることはない。ただ信じなさい」と主イエスに励まされ、イエス様に手を引きずられるような仕方で、衝撃的な復活の奇跡を体験したのです。彼らは「私は知っている」「私には見える」という態度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むしろ、自らの汚れと、自らの無能に向き合いながら、自分の力では為す術もなく、全くの絶望の中で、なりふり構わず、藁をもつかむ思いで、イエス様にひれ伏したのです。その時、主イエスが手を差し伸べてくださり、御手にお委ねした時、主イエスとの交わりと励ましの中で、信仰の成長を体験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が主イエスについて、どんなに多くの知識を得たとしても、自らの無能と、自らの汚れと、自らの罪を認めて、御前にひれ伏す事がなければ、結局、イエス様につまずき、イエス様を拒絶してしまうのであります。続いて5-6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こでは、ごくわずかの病人に手を置いていやされただけで、そのほかは何も奇跡を行うことがおできにならなかった。そして、人々の不信仰に驚かれた。それから、イエスは付近の村を巡り歩いてお教えになった。”

ここには、イエス様がナザレにおいて、ごくわずかの奇跡以外は行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これは、いくら主イエスでも、人々の側で信仰がなければ、奇跡を行うことができない、といことで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信仰が一切見られなかったゲラサ地方において、悪霊に取りつかれた男に、悪霊追放の奇跡をなされ、また、ダマスコの途上で、復活された主イエスに対し、全くの不信仰の中で、パウロを奇跡的に回心させる奇跡を起こしたからです。ですからここで語られているのは、主イエスにも限界があるということではなく、主イエスの力ある業は、それを見聞きする人間の側に信仰がなければ意味がない、ということだと思われます。しかし、だからと言って、イエス様が求めておられるのは、完璧な信仰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先ほども言いましたように、自分の無能さと自分の汚れの中で、全く為す術もなく絶望的な状況の中で、なりふり構わず、藁をもつかむ思いで、イエス様にひれ伏すことだと思うのです。私たちがその道に一歩でも踏み出すなら、その歩みがどんなに不完全で、問題に満ちた、よろよろとしたものであっても、主イエスは私たちと共に歩んでくださり、私たちの、信仰とは呼べないつたない思いを受け止めて、その信仰を大事に育てて行ってくださるのだと思います。

【結論】

「ナザレのイエスとは一体何者なのか」。この問いについて、マルコの福音書は、まだ沈黙していますが、本日の箇所で、そのお方の来臨は、救いと裁きの両方に関連しているということを見て取ることができました。「見えない者は見えるようになり、見える者は見えないよう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様は、ごくわずかな「見えない者」に対して、手を置いて、いやしをなされ、「見えると言い張る者たち」には奇跡をなされませんでした。神の国は、自分の力や才能で入ることはできません。この世で、どんなに力や才能に恵まれたとしても、ナザレの人々にとって、地の利が、むしろ神の国に入るのに、マイナスとなってしまったように、人々が羨むような力と恵まれた才能が、むしろ、マイナスとして作用することもあるのです。神の国は、知恵ある者や賢い者には隠され、幼子のような者に現わされ、この世とは、全く逆転の現象が起こるからです。そのような中で神様は、私たちを召して下さり、ご自身との交わりに入れてくださり、私たちといつも共にいて、導いていってくださることに、心からの感謝と讃美をささげる者たちでありたいと願います。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고향사람들로부터의 거절

2023년 7월 23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마가복음 6장 1~6a절

서론

「나사렛 예수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물음은 마가복음서에 담겨 있는 큰 주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옳바른 답은 주 예수의 제자들조차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가 아니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물음입니다. 마가복음서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6절에서는 안식일에 병 고침의 기적을 베푸신 주 예수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 것인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먹구름이 끼는 구절이자 곧 예수님께서 받으실 수난이 암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술과는 대조적으로 주 예수님은 갈릴리 전도에 있어 수많은 기적을 이루셨고, 급기야는 죽은 자를 되살리는 기적까지 이루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일행은 더욱더 각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 연안 지역 (아마 가버나움으로 생각되지만)을 떠나 일행은 예수님의 고향, 즉 나사렛 마을로 향했습니다. 나사렛이라고 하면 지금이야말로 수태고지교회가 있어서 매우 유명한 관광명소이지만 당시는 그냥 시골이었습니다. 또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 자신의 고향에 금의환양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의 가까운 사람이라도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면 그것을 환영하고 기뻐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같은 고향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환영해야 할 고향 사람들은 주 예수의 가르침과 권능있는 사역을 환영하지 않고 오히려 불쾌하게 여기며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여기에서도 역시 주 예수께서 최종적으로 받게 될 자신의 수난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모티브가 한 가닥 붉은 실로 마가복음 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자신은 알고 있다는 생각에 의해

자, 그럼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주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당시 회당은 구약성경 교육의 현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유대인의 3대 축제를 축하하기 위해 물론 중요했지만 바빌론 포로 이후 백성들이 흩어지자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큰 변화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 변화란 유대교가 더 이상 한 민족의 종교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혈통에 의한 하나의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이방 국가에 흩어져 있더라도, 비록 언어와 피부색이 다르더라도 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이스라엘 공동체로 인정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시나고그(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성경을 풀어 기도를 드리는 매우 중요한 장소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구약시대에서 존재했던 시나고그는 그야말로 신약시대의 교회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을 풀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랍비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줍니다. 안식일인 이날도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랍비로서 주 예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로부터 놀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주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혜와 그 손을 통해 이루어진 권능의 역사에 사람들은 경탄하고 감동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기쁘게 받아들이나 했더니 이어지는 3절에서는 정반대의 것이 적혀 있습니다. 3절을 보시죠.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 사람들은 첫째, 예수님의 가족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가족이라고 하면 예전에 가버나움의 베드로의 집까지 예수님을 붙들러 온 사람들입니다. 3장 21절과 3장 32절을 참고하시겠습니다.

3장 21절

예수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3장 32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미쳤다는 말을 듣는 형 예수를 붙들러 가버나움의 집까지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머니 마리아였고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며 또 자매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나중에 신앙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성경 야고보서를 쓴 인물이고 유다도 나중에 신앙을 가지고 성경 유다서를 쓴 인물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중에는 훌륭한 믿음을 가졌지만 적어도 이때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로부터도 신용받지 못하는 남자를 나사렛 사람들이 어떻게 믿으라고 하는 것인가라는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직업에 대해서 목수라는 것을 잘 안다도 했습니다. 마태복음의 병행기사를 보면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요셉의 일을 계승한 것 같습니다. 목수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테크톤」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 목재뿐만 아니라 돌, 철 등을 다루는 사람의 직업으로 테크톤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한 자료에 따르면 나사렛 마을 근처에 폐허가 된 세포리스 마을이 있고 영주 헤롯 안티파스가 폐허 세포리스를 재건하기 위해 나섰기 때문에 예수님과 아버지 요셉도 이 세포리스 마을의 부흥을 위해 동원된 장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도 나사렛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포리스 재건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랍비가 되기 위해 많은 학문을 쌓았다면 이해가 되지만 얼마전까지 자신들과 함께 일했던 남자에게서 도대체 어떤 지혜가 나온다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표현을 보면 이미 아버지 요셉이 죽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설령 아버지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 아들은 보통 유대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하여 「〇〇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이 굳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출생에 관련된 의혹이 있었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즉 주 예수란 마리아가 아직 요셉과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을 때의 자녀이며 아버지는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는 의혹입니다. 그런 어디서 굴러먹던 말뼈다귀인지도 모르는 남자에게서 우리가 무슨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쾌하게 여기고 거절한 것입니다. 「나는 알고 있다」라고 하는 오만한 태도가 구원자를 거절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나는 알고 있다, 나에게는 보인다」는 오만은 금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읽어도 성령께서 우리 영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41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9장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비로서 성경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데 「나는 알고 있다, 나에게는 보인다」는 태도는 오히려 생명의 말씀에 귀를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는 같은 고향사람으로서의 어드밴티지가 나사렛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하고 말았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2) 자신의 무능과 부정함으로부터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들의 신앙과 지난 주와 지지난주에 살펴보았던 혈루병을 앓던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신앙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출혈이 멈추지 않는 여자와 회당장 야이로가 그만큼 예수님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출혈이 멈추지 않던 여자도 회당장 야이로도 「나사렛 예수가 도대체 누구냐」는 물음에 꼭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에는 문제가 있고 부적절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떨며 나아가 엎드려 주님 앞에서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 예수와의 바른 관계로 인도된 것입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믿으라」고 주 예수님께 격려를 받고 예수님의 손에 이끌리는 듯한 방식으로 충격적인 부활의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나는 알고 있다, 내게는 보인다”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부정함과 스스로의 무능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고 완전한 절망 가운데 막무가내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엎드린 것입니다. 그때 주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주시고 그 손에 맡기고 의지할 때 주 예수님과의 교제와 격려 가운데 믿음의 성장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예수에 대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얻었더라도 스스로의 무능과 자신의 부정함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 앞에 엎드리는 일이 없다면 결국 예수님께 실족하여 예수님을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5,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여기에는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아주 적은 기적 외에는 행할 수 없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주 예수라도 사람들 쪽에서 믿음이 없으면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일절 볼 수 없었던 거라사 지방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남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고 또 다메섹 도상에서는 부활하신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불신앙 속에서 바울을 기적적으로 회심시키는 기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 예수께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권능을 보고도 그것을 보고 듣는 인간 쪽에 믿음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완벽한 믿음은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자신의 무능함과 부정함 속에서 전혀 어쩔 수 없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엎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 길로 한 발짝이라도 내 딛는다면 그 걸음이 아무리 불완전하고 문제가 가득하고 비틀거릴지라도 주 예수님게서는 우리와 함께 걸어주시고 우리의 믿음이라고 부를 수 없는 허망한 마음조차도 받아들여 그 믿음을 소중히 키워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론

「나사렛 예수는 도대체 누구인가?」이 물음에 대해 마가복음서는 아직 침묵하고 있지만 오늘의 부분에서 그분의 오심은 구원과 심판 모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적은 소수의「보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안수하여 병을 고치시고 「보인다고 우기는 자들」에게는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힘과 재능을 타고 났다 하더라도 나사렛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어드밴티지가 오히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데 마이너스가 되어버린 것처럼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힘과 복된 재능이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혜로운 자나 똑똑한 자에게는 감추어지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에게 나타나고, 이 세상과는 완전히 역전의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자신과의 교제에 넣어주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하여 주시며 인도하여 주심에 마음으로부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자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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