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年04月30日「召しと選びを確かにせよ 부르심과 택하심에 굳게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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召しと選びを確かにせよ 부르심과 택하심에 굳게 서라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ペトロの手紙二 1章5節~11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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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1:5だから、あなたがたは、力を尽くして信仰には徳を、徳には知識を、
1:6知識には自制を、自制には忍耐を、忍耐には信心を、
1:7信心には兄弟愛を、兄弟愛には愛を加えなさい。
1:8これらのものが備わり、ますます豊かになるならば、あなたがたは怠惰で実を結ばない者とはならず、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
1:9これらを備えていない者は、視力を失っています。近くのものしか見えず、以前の罪が清められたことを忘れています。
1:10だから兄弟たち、召されていること、選ばれていることを確かなものとするように、いっそう努めなさい。これらのことを実践すれば、決して罪に陥りません。
1:11こうして、わたしたちの主、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の永遠の御国に確かに入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ペトロの手紙二 1章5節~11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聖書には、恵みによる神様の側の働きと同時に、私たち人間の側の努力についても強調して書かれています。一見すると召しと選びは、神の一方的な恵みなのか、それとも、人間の側の協力や人間の側の努力によって左右されるのか、聖書は二つのことを矛盾するかのように主張しているかのようです。一部の神学者たちは、この点について、聖書の二つの主張に折り合いを付けるため、色々な教説を作って来ましたが、本日はそのような教説については細かく触れません。私たち改革派教会は、ウェストミンスター信仰告白に立ち、神の召しと選びは変わることがない(聖徒の堅忍)という、立場に立っています。そのことを確認しつつ、それでは私たちが能動的に聖化していくよう努力するとは、一体どういう意味なのかについて、御言葉に耳を傾け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1】. 神の約束のゆえに

5節の冒頭に、「だから」という言葉がございます。この言葉は、前の言葉を受けて語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前の言葉というのは、4節の、「栄光と力ある業とによって、わたしたちに尊く素晴らしい約束が与えられている」ことです。さらに言えば、この「約束」とは、私たちの未来に起こることであり、最終的なゴールである、「神の本性に与らせていただくこと」、言い換えれば、「主イエスの似姿に変えられること」であります。これについては、先週の説教でお話し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この尊く素晴らしい約束が与えられている、「まさに、こういう訳ですから」と5節は始まり、8つの徳目が列挙され、力を尽くして、それらを加えなさいと、ペトロは勧めるのであります。私たちのこの地上における聖化の歩みは、単に神様から贈り物を受ける受動的な歩みだけではなく、私たち自身の能動的な歩みも同じように強調され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す。ペトロがこのように述べるのは、当時の偽りの教えに対抗するということが背景にあったと考えられます。この手紙の2章にも少し触れられていますが、当時、使徒たちが次々に殉教していく中で、偽りの教えによる「反(無)律法主義」的な雰囲気が蔓延していました。反律法主義とは何かと申しますと、文字通り律法を否定することであります。彼らの主張によれば、「律法とは旧約時代の低級な神から出ている教えである。」「新約時代に生かされている我々クリスチャンは、律法の下にいるのではなく、恵みの下にいるため、もはや、我々は律法を超越している、律法から自由なのだ」と言うのです。そして、倫理道徳に対し、放縦で、好き放題な態度を取るような人々が出てまいりました。このような偽りの教えは、霊と肉の二元論的な思想の温床ともなっていきました。心で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ていれば、この身体において何をしても構わないという教えです。この偽りの教えに対抗するために、ペトロは、キリスト者は自分自身の聖化について、もっと能動的に取り組ま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しているのです。5~8節まで、ご覧ください。

“だから、あなたがたは、力を尽くして信仰には徳を、徳には知識を、知識には自制を、自制には忍耐を、忍耐には信心を、信心には兄弟愛を、兄弟愛には愛を加えなさい。これらのものが備わり、ますます豊かになるならば、あなたがたは怠惰で実を結ばない者とはならず、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

ここで、特に心に留めておきたいことは、私たちが8つの徳目を加えることによって、神の約束が与えられるのではなく、神の約束がまず先にあると言うことです。神の約束が先にあって、最終的にその約束通り、主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ようになる、キリストを完全に知る知識(エピグノーシス)へ導かれるということです。8つの徳目というのは、①信仰、②徳、③知識(グノーシス:8節のエピグノーシスとは区別されている)、④自制、⑤忍耐、⑥信心(敬虔)、⑦兄弟愛、⑧愛であります。古代ギリシアにおいて、家庭教師が子供たちに倫理的教訓を説明する時に、しばしば、このような徳目を列挙しながら教えられました。ギリシアの家庭教師を連想させるようなペトロの勧めですが、子供たちに対する倫理的教訓と異なる点は、何と言っても、自分自身でそのような徳目を身に付けなさいということではなく、既にイエス様の約束が与えられているから、ということに基づいているのであります。

【2】. キリストの徳のゆえに

さて、8つの徳目の二番目に「徳(ギリシア語でアレテー)」という言葉が出て来ます。この「徳:アレテー」という言葉は、当時の文献に非常にありふれた言葉でしたが、新約聖書にほとんど使用されない言葉です。その理由は、徳という言葉の日本語の使い方を思い起こせば、理解できると思います。「徳」とは、倫理的な功績を指しています。例えば「徳を積みなさい」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ね。この言葉には、「私たちが良い業の功績を立てることによって、何か良いことが巡ってくるに違いない、吉報が訪れるに違いない」という期待が含まれ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しかし、聖書には、徳を積んで救いが得られるとか、徳を積んで罪が償われるという思想は一切ございません。むしろ私たちは全的に堕落し、徳を積むことによって神を喜ばせること、神に栄光帰することが、一切できなくなったと教えています。それでは、なぜペトロは「徳」という言葉を使用したのでしょうか。ペトロが、手紙一と手紙二で「徳:アレテー」という言葉を使用していますが、それは、私たちが積んだ徳ではなく、イエス・キリストが積んだ功績について語っているのです。例えば1:3では、アレテーが、キリストの「力ある業」と翻訳されています。また、ペトロの手紙一2:9でもやはり、アレテーが、キリストの「力ある業」と翻訳されています。ペトロの手紙一2:9をご覧ください。

“しかし、あなたがたは、選ばれた民、王の系統を引く祭司、聖なる国民、神のものとなった民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を暗闇の中から驚くべき光の中へと招き入れてくださった方の力ある業を、あなたがたが広く伝えるためなのです。”

要するに、徳という言葉は、私たちが積むべき功績について語っているのではなく、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既に獲得して下さった功績についてペトロは語っているのです。従いまして、1:5から、列挙されている8つの徳目も全て、実は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既に獲得してくださったものであり、キリストに結ばれているキリスト者は、キリストの似姿に変えられるプロセスにおいて、自然と、このような8つの実を結ぶことが出来る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キリストこそ、信仰には徳を、徳には知識を、知識には自制を、自制には忍耐を、忍耐には信心を、信心には兄弟愛を、兄弟愛には愛を成就されたお方なのです。イエス様は、ぶどうの木であり、私たちはその木の枝として、イエス様の中に留まる時に、多くの実を結ぶ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イエス様こそ最高の善なる方、最高の倫理的なお方だからです。そして、イエス様がいなければ、弟子たちは何の実も結ぶ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ヨハネ15:5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その枝である。人がわたしにつながっており、わたしもその人につながっていれば、その人は豊かに実を結ぶ。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できないからである。”

従いまして、心で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て、身体において放縦に走るということは、考えられないことです。むしろキリストに結ばれて、キリストの光に照らされれば、照らされるほど、私たちは自分の罪について霊の目が開かれて行くでしょう。これまでは、全く罪と思っていなかった些細なことが、今思えば、とんでもない罪を犯してしまったと、深い悔い改めに導かれるのです。キリスト者として聖化が進めば進むほど、自分が罪びとであることの自覚が与えられ、それと同時に聖霊による慰めと癒しをいただき、善き業、倫理的な行動へと駆り出されるのです。

【3】. イエス・キリストの永遠の御国

続いて9節をご覧ください。

“これらを備えていない者は、視力を失っています。近くのものしか見えず、以前の罪が清められたことを忘れています。”

ペトロは倫理的に聖化することを拒否する信者たちに、非常に乱暴な言葉遣いで非難しています。倫理的な成長のない信者とは、イエス様の光に対し、盲目的な状態であることであり、そして、近くのものしか見えない者たちだと言っています。「近くのものしか見えない」、「近視眼的な」という言葉は、別の意味として「意図的に目を閉ざす」、「意図的に瞬きをする」という意味があるようです。従ってここでは、意図的に目を閉ざし、キリストの光を取り除こうとする者たちと言えそうです。私たちはキリストの血による贖いという、大変高価な代価によって贖われました。イエス・キリストの血以外に、私たちの犯した罪を償うことのできるものはありません。どんなにお金や、富を積んでも、罪赦され、天国に入ることは叶いません。天国に入るということは、私たちの想像を絶するような、高い、高いハードルなのです。そのような莫大な代価が支払われたのなら、私たちもイエス・キリストに全てを献げ、自分自身を献身し、その恵みに応答するべきであります。神の国とは、私たちが努力して探し、神様に仕えることを通して取得しなければならない報いであり、天にある宝なのであります。この宝を得るために全ての努力を傾けるべきです。マタイ13:44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あります。

“天の国は次のようにたとえられる。畑に宝が隠されている。見つけた人は、そのまま隠しておき、喜びながら帰り、持ち物をすっかり売り払って、その畑を買う。”

本来、私たちの罪の代価は死であり、滅びでありました。しかし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代わりに十字架で死んでくださったがために私たちは命へと移されました。そうであるなら、私たちの情欲やむさぼりを十字架に釘付けにし、キリストの中で聖別された者として、すべての努力を注いで聖化の道を歩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こに、私たちが能動的に聖化に取り組ま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があるのです。続いて10節をご覧ください。

“だから兄弟たち、召されていること、選ばれていることを確かなものとするように、いっそう努めなさい。これらのことを実践すれば、決して罪に陥りません。”

10節にも「だから」という言葉が出て来ます。この言葉は、5節の「だから」とは違う言葉が用いられていますが、同じく、前の言葉を受けて語られています。キリストの功績である8つの徳目は、私たちがキリストに結合される時に結ばれる実である!「だから」それが豊かに結ばれるよう、いっそうキリストにしがみつき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召されていること、選ばれていることを確かなものとするように」とありますが、これは、神様に対して確かなものにすることではなく、私たち自身に対して確かなものとするようにという意味です。神様は既にご自身の民を、永遠において選び、時至って召し出すようにされました。この神のご計画に、いかなる人も変更を加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すから、「確かなものとする」とは、私たちの側において、実が結ばれることにより、神様の選びと召しに確信を持つように!神様の約束に確信を持つように!という意味でございます。続いて11節です。11節は聖書協会共同訳聖書の翻訳を印刷してきました。抜粋のプリントをご覧ください。

“こうして、私たちの主であり救い主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の永遠の御国に入る恵みが、あなたがたに豊かに与えられるのです。”

翻訳が改訂された箇所は、「イエス・キリストの永遠の御国に」私たちが入るのではなく、神様によって永遠の御国に入る恵みが、与えられるという点です。新しく出た聖書協会共同訳の翻訳の方が、ギリシア語の直訳に近いと言えるでしょう。この御言葉は、ステファノが殉教しながら経験した、天からのお迎えの場面を私たちに想起させ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ステファノは人々から石を投げつけられ死んでいく中で、幻を見ながら、次のように言いました。「ああ、天が開けて、人の子が神の右に立っておられるのが見える」(使徒7:56)。ステファノが天の都、イエス・キリストの永遠の御国に入れられたように、キリスト者は皆、死んだ後に、そこへ豊かに入れられ、勝利の冠が私たちの為に準備されているという驚くべき天からのお迎えを経験することになるのです。私たちは死後、直ちにキリストと共に御座に座り、キリストとの親しい交わりに入れられるのです。

【結論】

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贖われました。私たちはそれまで自分の力では一切、実を結ぶこともできない者たちでした。しかしキリストに結ばれて、キリストの獲得してくださった徳のゆえに、この地で実を豊かに結び、聖化される恵みに与らせていただいています。それだけでなく、最終的にイエス・キリストの永遠の御国に迎え入れられる驚くべき恵みを経験することになるのです。この恵みに感謝しながら、恐れおののきつつ、自分自身の救いを達成していく者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聖化に向けてあらゆる努力を惜しまず、信仰によってイエス様に献身していく、私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부르심과 택하심에 굳게 서라

2023년 4월 30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베드로 후서 1장 5-11절

서론

성경에는 은혜로 인해 하나님 편에서 하실 일과 동시에 우리들 인간 편에서 해야 할 노력에 관해서 강조하여 쓰여져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부르심과 택하심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인가 아니면 인간의 협력이나 인간의 노력에 의해 좌우되는가 성경은 두 가지를 모순되게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 점에 대해 성경의 두 주장을 절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주장을 만들어 왔지만 오늘은 그런 주장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 개혁파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과 선택은 변함이 없다 (성도의 견인)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능동적으로 성화해 나가도록 노력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 말씀에 귀 기울여 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1)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5절 첫머리에 「그러므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앞의 말을 받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앞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4절의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입니다. 나아가 이 「약속」이란 우리의 미래에 일어날 일이며 최종 골인 지점인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 바꿔 말하자면 「예수님의 형상으로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저번 주의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 주어져 있다는 「그러므로, 이런 까닭으로」로 5절은 시작하고 여덟 가지 덕목이 열거되고 힘을 다해 그것들을 더하라고 베드로는 권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에서의 성화를 향한 걸음은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수동적인 걸음걸이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능동적인 걸음걸이도 마찬가지로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시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이 서신서의 2장에도 잠깐 언급되어 있지만 당시 사도들이 차례차례 순교하는 가운데 거짓 가르침에 의한 「반 율법주의」적 분위기가 만연했습니다. 반율법주의가 무엇이냐면 말 그대로 율법을 부정하는 무율법주의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율법이란 구약시대의 낡은 하나님의 가르침이다」「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크리스쳔은 울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율법을 초월하고 있다. 울법으로부터 자유하다」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윤리도덕에 대해서 방종하며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가르침은 영과 육의 이원론적인 사상의 온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 몸으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거짓된 가르침에 맞서기 위해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의 성화에 대해 좀 더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5-8절까지 보시기 바랍니다.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여기에서 특히 마음에 두고 싶은 것은 우리가 여덟 가지 덕목을 더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고 최종적으로 그 약속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지식 (에피그노시스) 으로 인도된다는 것입니다. 여덟 가지 덕목이라고 하는 것은 ① 믿음 ② 덕 ③ 지식 (그노시스로 8절의 에피그노시와는 구별됨) ④ 자제 ⑤ 인내 ⑥ 경건 ⑦형제애 ⑧ 사랑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정교사가 아이들에게 윤리적 교훈을 설명할 때 종종 이러한 덕목을 열거하면서 가르쳤습니다. 그리스 가정교사를 연상케 하는 베드로의 권면인데 아이들에 대한 윤리적 교훈과 다른 점은 뭐니뭐니해도 자기 스스로 그런 덕목을 익히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덕으로 인하여

자, 여덟 가지 덕목 중 두 번째로 「덕 (그리스어로 아레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덕 : 아레테)」라고 하는 단어는 당시 문헌에서 매우 흔한 말이었지만 신약성경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덕이라는 말의 일본어 사용법을 상기하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덕」은 윤리적 공적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덕을 쌓아라”라는 말이 있죠. 이 말에는 “우리들이 좋은 업에 공적을 세우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것임에 틀림이 없다. 희소식이 찾아올 것이다”라는 기대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덕을 쌓고 구원을 얻는다거나 덕을 쌓아서 죄를 갚는다는 사상은 일절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덕을 쌓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베드로는 「덕」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베드로가 서신서 1과 서신서 2에서 「덕 : 아레테 」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우리들이 쌓아올린 공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쌓은 공적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1장 3절에서는 아레테가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이라고 번역되어져 있습니다. 또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서도 역시 아레테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을 참조하십시오.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컨대 덕이라는 말은 우리들이 쌓아야 할 공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획득해 주신 공적에 대해 베드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1장 5절부터 열거되어 잇는 여덟 가지 덕목들도 모두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획득해 주신 것이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여덟 가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믿음에는 덕을 덕에는 지식을 지식에는 자제를 자제에는 인내를 인내에는 경건을 경건에는 형제애를 형제애에는 사랑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나뭇가지로서 예수님 안에 머물 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이야말로 최고의 선한 분, 최고의 윤리적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없으면 제자들은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을 참조하십시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따라서 마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육신으로는 방종으로 달려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면 비출수록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영의 눈이 열려 갈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소한 것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죄를 저질러버렸다며 깊은 회개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화가 되어가면 되어 갈 수록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동시에 성령의 위로와 치유를 받으며 선한 행실, 윤리적인 행동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이어서 9절을 읽어 보시죠.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베드로는 윤리적으로 성화하기를 거부하는 신자들을 매우 거친 말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윤리적 성장이 없는 신자란 예수님의 빛에 대해 맹목적인 상태이며, 그리고 가까운 것만 보이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멀리 보지 못하고」가까운 것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근시안적인 이라는 말은 다른 뜻으로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다”, “의도적으로 눈을 깜빡이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고 그리스도의 빛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속죄라는 매우 비싼 대가로 속죄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이외에 우리가 저지른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나 부를 쌓아도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과 같은 높고 높은 장애물입니다. 그런 막대한 대가가 치러졌다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바치고 자기 자신을 헌신하며 그 은혜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노력하고 찾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통해서 취득할 수 있는 보수이자 하늘에 있는 보화입니다. 이 보화를 얻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본래 우리들의 죄의 대가는 죽음이고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별된 자로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성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능동적으로 성화에 임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어서 10절을 보시죠.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0절에도 「그러므로」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5절의 「그러므로」와는 다른 말이 쓰이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앞의 말을 받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적인 여덟 가지 덕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저절로 맺어지는 열매이다! 「그러므로」그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도록 더욱더 그리스도께 매달리고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에 대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 확실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자기의 백성을 영원 가운데서 택하시고 때가 이르러 부르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에 어떤 사람도 변경을 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하라」라는 것은 우리들 편에 열매가 맺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확신을 가지도록! 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11절입니다.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우리들이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경험한 하늘에서 마중나오는 장면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주지 않을까요? 스데반은 사람들로 부터 돌팔매질을 당해서 죽어가면서 환상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사도행전 7장 56절) 스데반이 하늘의 도성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모두 죽은 후에 그곳에 넉넉히 들어가고 승리의 관이 우리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는 놀라운 하늘로부터의 영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후에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자리에 앉아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속죄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그때까지 자신의 힘으로는 일절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가 획득해 주신 덕으로 인해서 이 땅에서 풍요롭게 열매를 맺고 성화되는 은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넉넉히 들어가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면서 두려워 하면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성화를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말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헌신해 나가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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