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人のおとめの譬え 열 처녀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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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5章1節~13節
1「そこで、天の国は次のようにたとえられる。十人のおとめがそれぞれともし火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て行く。
2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3愚かなおとめたちは、ともし火は持っていたが、油の用意をしていなかった。
4賢いおとめたちは、それぞれのともし火と一緒に、壺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5ところが、花婿の来るのが遅れたので、皆眠気がさして眠り込んでしまった。
6真夜中に『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7そこで、おとめたちは皆起きて、それぞれのともし火を整えた。
8愚かなおとめたちは、賢いおとめたちに言った。『油を分けてください。わたしたちのともし火は消えそうです。』
9賢いおとめたちは答えた。『分けてあげるほどはあ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来なさい。』
10愚かなおとめたちが買いに行っている間に、花婿が到着して、用意のできている五人は、花婿と一緒に婚宴の席に入り、戸が閉められた。
11その後で、ほかのおとめたちも来て、『御主人様、御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12しかし主人は、『はっきり言っておく。わたしはお前たちを知らない』と答えた。
13だ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は、その日、その時を知らないのだから。」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5章1節~13節
열 처녀의 비유
2019년 3월 17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25장 1~13절
서론
여기서는 종말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태도에 대해,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통해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이전에 마태복음 7장에서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의 비유와 매우 유사합니다. 잠시 떠올려 보십시오. 7: 21~27절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7장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
7장의 이 말씀에도 있듯이, 예수님께「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지혜로운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열 처녀 비유에서도 상황은 완전히 같습니다. 열 사람이 똑같이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맞이하고 있지만, 열 사람이 모두 주님의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가 되어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만 들어갈 수 있었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미련한 처녀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25장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룻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당시 유대인의 결혼식은 부모의 동의 아래 약혼한 지 약 1년 후에 거행되었습니다. 일본과 다른 점은 약혼 단계에서 법적으로 혼인 신고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식은 이미 법적으로 부부가 된 두 사람의 부부 생활 시작을 축하하는 기쁨의 잔치였습니다. 그 잔치는 신랑 집에서 여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신랑은 저녁이 되어 행렬을 지어 횃불을 밝히고 신부를 맞으러 나갔습니다. 신랑은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를 데리고, 북적이는 행렬을 통해 행사장에 도착하면, 신랑 신부를 혼인잔치의 자리에 안내하여, 성대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매우 후한 결혼식 잔치로서의 축하 행사가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이때를 기해 경사스러운 때를 축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신랑은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신랑의 오심을 기다리던 신부의 들러리인 열 처녀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즉, 열 처녀 중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부인「천상의 그리스도 교회」와 하나가 되어 승리의 교회와 일체로 묘사되지만, 나머지 미련한 다섯 처녀는 겉으로는 신자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거짓된 자, 위선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차이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슬기로운 처녀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 낮에 속한 자이며, 그릇에 기름을 담아 「준비되어 있던」 자였습니다. 반면, 어리석은 처녀는 영적으로 잠든 상태이며, 밤에 속한 자이며, 「준비되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즉, 양자의 차이는 둘 다 믿음을 고백했지만, 한쪽은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한 자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겉으로는 믿음을 고백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생각에 불과했으며, 이후 제멋대로 행동하는 가운데 사탄의 덫에 걸려 믿음이 행동이나 태도로 나타나지 않은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아마도 신자의 신앙생활에서 짧은 기간의 신앙에서 나오는 열정은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거기에 오랜 기간에 걸친 불굴의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 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등불을 잠시만 열정으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계속 밝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도 도중에 지쳐 좌절하지 않도록 오래 참아야 함을 경고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확실히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히 수동적이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쪽에서 끝까지 견뎌내야 할 불굴의 노력이 전혀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시련과 어려움과 유혹과 싸워 인내해야 하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100%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항상 깨어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이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99% + 인간 측의 노력 1%가 아닙니다. 계산식은 맞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 100% + 인간 측의 은혜에 대한 응답 100%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100% + 인간 측의 은혜에 대한 응답 100% = 구원 100%> 이어서 5절을 보십시오.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세
여기서는 슬기로운 처녀들도 미련한 처녀들처럼 똑같이 졸음이 와서 잠들어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론 부분인 13절의「그런즉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권면은 아무런 의미도, 설득력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5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부분의 해석은 신학자마다 다양하게 나뉩니다. 어떤 이는 신실한 자라도 세상의 사람들처럼 생활의 교만이나 허영을 추구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나태한 상태로 졸기도 한다고 해석합니다. 또 어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예상보다 너무 늦어 깜빡 잠들어 버릴 정도였음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이며, 「졸며 잘세」라는 말 자체에는 특별한 깊은 의미가 없다고 해석합니다. 칼뱅의 경우,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육신의 생을 다하고 죽어버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잠든다는 말로 자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칼뱅의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구원을 간절히 바라며, 죽어서 잠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쉬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6~9절을 보십시오.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신랑이 예상보다 늦게 오자, 모두 졸고 있던 한밤중에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외침을 들었습니다. 뜻밖의 시간에, 신랑이 온 것입니다. 다섯의 미련한 처녀들은 자신들이 가진 등불 기름이 거의 다 떨어질 것 같아 예비 기름을 가진 처녀들에게 「기름 좀 나눠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 요청을 부드럽게, 그리고 심술궂게 거절했습니다. 9절의 헬라어 분위기는「우리에게는 아마 나눠 줄 만큼 충분한 기름 양이 없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기름 파는 사람에게 가서 여러분 몫을 사 오세요, 그게 더 확실합니다.」라는 느낌입니다.
여기서 기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면, 이는 「불을 밝히기 위한 원동력의 공급」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를 성령으로 보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에게서 신자에게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으며, 교인들 사이에서 거래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여 구할 때에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다」라는 말은 대가를 치르고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짜로 가져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은사는 우리가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인내하며 섬기고, 겸손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은사 양을 자랑하거나, 받은 은혜나 은사를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와 은사는 그것으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1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사야 55장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그러므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이 부족했다는 것은, 믿음으로 값없이 살 수 있을 때 게을러서 그것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겨 어둠 속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가게가 닫히지 않는, 낮 시간 안에 기름을 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때를 따라 기름을 사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부족함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회개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때는 교회 생활과 믿음 생활에 힘쓰는 가운데, 바로 자유롭게 그리고 값없이 성령의 기름을 살 수 있는 때입니다. 구원이 말씀 안에서 제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값없이 받을 수 있는 시간을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이 오고나서는, 너무 늦습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노아의 방주에 수컷과 암컷 한 쌍의 동물들이 모두 실려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문이 닫힌 후 40일 밤낮의 홍수 심판이 시작된 것처럼, 슬기로운 처녀들이 잔치 자리에 들어가고 문이 닫힌 후에는 밖에 남겨진 자들에게는 더 이상 무서운 심판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때에「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외쳐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주님께서 대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이 세상 인생은 실제로 짧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인생이 엄청나게 길다고 오해하게 되어 조바심과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유혹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끌려가, 잠시만 등불이 타올랐다가 그 후에는 기름이 다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즉, 믿음과는 전혀 무관한 인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이시며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이 믿음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식에만 머문다면 사탄조차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행동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죄로 가득한 세상의 어둠 속에서 긴 여정을 떠나야 하며, 그곳에서 제자들의 마음속에 밝혀진 「등불」의 빛을 유지하고 세상을 비추어야 합니다. 당연히 등불은 기름 공급이 없으면 금방 꺼져 버립니다. 항상 기름을 공급하는 것, 이것이 제자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 교회의 2019년 표어 성경 구절(에베소서 6:18)에도 있듯이, 우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므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깨어 성령을 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도중에 좌절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아 등불을 밝히며, 이 세상 여정을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히 걸어가도록 합시다. 끝까지 인내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ここでは、終末を備える聖徒たちの態度について、賢い者と、愚かな者を通して譬えによって語られています。この譬えは、以前、マタイの福音書の7章で、岩の上に家を建てた賢い者の譬えとよく似ています。少し思い出してみましょう。7章21節~27節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皆、天の国に入るわけではない。わたしの天の父の御心を行う者だけが入るのである。
かの日には、大勢の者がわたしに、『主よ、主よ、わたしたちは御名によって預言し、御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御名によって奇跡をいろいろ行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と言うであろう。
そのとき、わたしはきっぱりとこう言おう。『あなたたちのことは全然知らない。不法を働く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去れ。』」
「そこで、わたしのこれらの言葉を聞いて行う者は皆、岩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賢い人に似ている。
雨が降り、川があふれ、風が吹いてその家を襲っても、倒れなかった。岩を土台としていたからである。
わたしのこれらの言葉を聞くだけで行わない者は皆、砂の上に家を建てた愚かな人に似ている。
雨が降り、川があふれ、風が吹いてその家に襲いかかると、倒れて、その倒れ方がひどかった。」
7章のこの御言葉にもありますように、イエスさま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皆、天国に入るわけではなく、御言葉を聞いてそれを実践する、賢い者だけが天国に入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のです。
本日の十人の乙女の譬えにおいても、状況は全く同じです。十人が同じように花婿であるキリストの再臨を待ち迎えていますが、十人が全員、主の祝宴に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く、用意ができていた賢い乙女たちだけが入ることができて、用意ができていなかった愚かな乙女たちは入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1~4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こで、天の国は次のようにたとえられる。十人のおとめがそれぞれともし火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て行く。
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愚かなおとめたちは、ともし火は持っていたが、油の用意をしていなかった。
賢いおとめたちは、それぞれのともし火と一緒に、壺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当時のユダヤの婚礼は、両親の同意の下で婚約してから約一年後に挙げられました。日本と異なる点は婚約の段階で法的には籍が入れ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婚礼とは、すでに法的には夫婦となっていたお二人の、夫婦生活が始まることをお祝いする喜びの祝宴でした。その祝宴は花婿の家で開かれるのが普通で、花婿は夕方になってから行列を作り、松明を灯して花嫁を迎えにいきます。花婿は、花嫁とそして花嫁の付き添い人を連れて、にぎやかな行列によって会場に到着すると、新郎新婦を婚宴の席に導いて、盛大な祝宴が持たれました。大変気前の良い披露宴としての祝宴が七日の間、持たれました。一同はこの時とばかりに、めでたい時を祝うのです。
それで、この譬えの中では花婿とはキリストを表しています。花婿の来臨を待っていた花嫁の付添人である十人の乙女たちとは、キリスト者のことです。つまり、十人の乙女の内、賢い5人の乙女は、花嫁である「天上のキリスト教会」と一体として、勝利の教会と一体として描かれていますが、残りの愚かな5人の乙女は、表面においては信者に見えて、実は偽る者、偽善者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れでは、賢い乙女と愚かな乙女の違いはどこにあったのかと言いますと、賢い乙女とは、霊的に目覚めていて、昼に属する者であり、壺に油を入れて、「用意されていた」者でした。一方、愚かな乙女とは、霊的に眠っている状態であり、夜に属している者であり、「用意されていなかった」者でした。つまり、両者の違いとは、両者は同じく信仰を告白しましたが、一方は最後まで、信仰によって耐え忍んだ者たちであり、もう一方は表面的に信仰を告白したものの、それは一時の思いであって、その後、気ままに行動する中でサタンの罠にかかり、信仰が、行動や態度として現れなかった者たちのことです。
イエスさまがこのような譬えを弟子たちに語られた理由とは、おそらく、信者の信仰生活において、短い期間の信仰から出てくる情熱は、そこに長期間に渡る不屈の努力が伴わない限り、それ自体では十分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指摘しているのだと思われます。松明を一時だけ情熱によって灯すのではなく、長く灯し続け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イエスさまはここでも、途中で枯渇して挫折することのないように、長く忍耐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警告していると考えられます。確かに救いは100%神の恵みよって成し遂げられますが、それでは、私たちは全くの受け身であって、何もしなくてもいいのかというと、そう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の側において、最後まで耐え忍ぶべき不屈の努力は、一切ないのかというと、そうではなく、私たちも試練と困難と誘惑と戦い忍耐するべきであり、主の再臨を用意することにおいて努力を惜しまず、100%最善を尽く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常に目覚めている中で、神への全き献身が、恵みの応答として求められるのです。救いは、神の恵み99%+人間の側の努力1%ではありませんが、計算式は合いませんが、神の恵み100%+人間の側の恵みの応答100%なのです。<神の恵み100%+人間の側の恵みの応答100%=救い100%>続いて5節をご覧ください。
ところが、花婿の来るのが遅れたので、皆眠気がさして眠り込んでしまった。
ここでは、賢いおともめも、愚かな乙女も同じ様に眠気がさして眠ってしま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ということは、結論部分である13節の「だ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イエス様の勧めは、何の意味も、説得力もないように見えてしまいます。それでは5節をどのように解釈したらいいのかということですが、ここの解釈は神学者によって色々と別れます。ある人は、信実な者でも、世の人々と同じように、生活のおごりや、虚栄を求め、無駄に時間を過ごし、怠惰な状態でうとうとすることもあると解釈します。ある人は、キリストの再臨が、予想以上に、思わず眠り込んでしまうほど遅かったということを示すための表現にすぎず、「眠り込んでしまった」という言葉自体には、そこに特に深い意味はないと解釈します。カルヴァンの場合、キリストが来られる前に肉体の生を全うして、死んでしまうことを念頭にして話していると解釈します。というのは、聖書で死ぬことを眠るという言葉でよく表現されているからです。カルヴァンの解釈に立つなら、キリスト者はこの世において絶えず、救いを待望し、そして死んで眠りについて、キリストの中で休んでいる間にあっても、私たちの救いを待望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続いて6~9節をご覧ください。
真夜中に『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そこで、おとめたちは皆起きて、それぞれのともし火を整えた。
愚かなおとめたちは、賢いおとめたちに言った。『油を分けてください。わたしたちのともし火は消えそうです。』
賢いおとめたちは答えた。『分けてあげるほどはあ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来なさい。』
花婿の来臨が予想以上に遅くなり、皆がうとうととしている中、真夜中になって、「花婿が来た。迎えに出なさい」という叫び声を聞きました。時ならぬ時に花婿が来たのです。5人の愚かな乙女たちは、自分の持っているともし火の油がほとんどなくなりそうなのを見て、予備の油を持っていた乙女たちに「油を少し分けてください」とお願いしました。賢い乙女たちは、その要請をやんわりと、そして、意地悪に断りました。9節のギリシャ語の雰囲気は、「私には多分、おすそ分けできるほどの十分な油の量はないと思います。むしろ、油を売る者のところに行って、自分たちの分を買っておいでなさい、その方が確実です。」という感じです。
ここで油とは一体何を指しているのかということですが、これは、「火を灯すための原動力の供給」であることには違いありません。これを聖霊と捉えたり、あるいは神の恵みと捉えたりすることができるかと思います。そうであるなら、聖霊は、神の恵みは信者から信者へと分け与えられ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の賜物は決して金では買えませんし、教会員の間で取引することもできません。直接、神に祈り求めることによってのみ与えられるのです。ここで「買う」という言葉は代価を払って得るという意味ではなく、ただで持っていきなさいという意味です。そして神によって提供された賜物は、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でしか受け取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そして、神の賜物によって私たちはキリストの体なる教会をたて上げるために忍耐強く仕え、へりくだり奉仕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誰も自分の賜物の量を誇ったり、いただいた恵みや賜物を見せびらかしたり、自慢する人はいません。恵みや賜物は、それをもって教会に仕えるために神さまから与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
イザヤ書55:1を口語訳聖書でお読みします。
「さあ、かわいている者は/みな水にきたれ。金のない者もきたれ。来て買い求めて食べよ。あなたがたは来て、金を出さずに、ただでぶどう酒と乳とを買い求めよ。
ですから、愚かな乙女が油が不足したということは、信仰によってただで買うことができるときに、怠けてそれを得ようとし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世の楽しみに心を奪われ、暗闇の中を眠り込んでいたのです。店の閉まらない昼間の内に、油を買求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かし、彼女たちは、時にかなって油を買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に、その不足に気づいた時にはもうすでに時遅しということで、悔い改めたのが遅すぎました。今、この時は教会生活と信仰生活を励む中において、まさに自由にそして、ただで聖霊の油を買うことができる時です。救いが御言葉において提供されているのにも関わらず、それをただで受け取る事のできる時間をそのまま見過ごしてしまってはなりません。私たちは今こそ、聖霊と神の恵みを求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終わりの日が来てからでは、遅すぎるのです。10~12節をご覧ください。
愚かなおとめたちが買いに行っている間に、花婿が到着して、用意のできている五人は、花婿と一緒に婚宴の席に入り、戸が閉められた。
その後で、ほかのおとめたちも来て、『御主人様、御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しかし主人は、『はっきり言っておく。わたしはお前たちを知らない』と答えた。
ノアの箱舟に、雄と雌のつがいの動物がすべて入れられて、最後に戸が閉められてから、40日40夜の洪水の裁きが始まったように、賢い乙女たちが祝宴の席に入り、戸が閉められた後には、外に残されたものにとっては、もはや恐ろしい裁きしか残されていません。その時に『御主人様、御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叫んでも、『はっきり言っておく。わたしはお前たちを知らない』と主は答えられるでしょう。
私たちのこの世の人生は、実際短いものです。しかし、絶えずともし火が消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と言われると、私たちは人生が途方もなく大変長いものと勘違いしてしまい、焦り、不安に感じてしまいます。そして世に誘惑され、暗闇に引きずられ、一時だけともし火が燃え上がったものの、その後は油が枯れそうになることももしかしたらあるかもしれません。つまり、信仰とは全く関係のない人生を送ってしまうこともあるかもしれません。大切なことは、イエスさまが私たちの救い主であり、十字架によって私たちの罪を贖ってくださっ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この信仰というのは単なる知識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知識だけに留まるならサタンでさえ、そのことを認めているからです。信仰とは神の御言葉に対する従順と行動が伴うものです。キリストの弟子たちは、罪に満ちた、世の暗闇の中で、長い旅路を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ず、そこで弟子たちの心の中にともされた「ともし火」の光りを維持し、世を照らし続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当然ですが、ともし火は油の供給がなければ、すぐに燃え尽きてしまいます。常に油を供給しつづけること、これが弟子たちのこの世にある生き方なのです。私たちの2019年の標語聖句(エペソ6:18)にもありますように、私たちはその日、その時を知らないので、絶えず祈りつつ、目を覚まして、聖霊を求め続けてまいりましょう。途中で挫折することのないように、神の恵みの供給を受けて、ともし火を照らしつつ、この世の旅路を一歩一歩確かに歩ま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最後まで耐え忍ぶ者は救われ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