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年04月23日「主イエスを知ること 예수를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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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イエスを知ること 예수를 아는 것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ペトロの手紙二 1章1節~4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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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1:1キリスト・イエスの僕であるパウロとテモテから、フィリピにいて、キリスト・イエスに結ばれているすべての聖なる者たち、ならびに監督たちと奉仕者たちへ。
1:2わたしたちの父である神と主イエス・キリストからの恵みと平和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1:3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い起こす度に、わたしの神に感謝し、
1:4あなたがた一同のために祈る度に、いつも喜びをもって祈っていま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ペトロの手紙二 1章1節~4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今朝から、私たちはペトロの手紙二に耳を傾け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ペトロの手紙一では、希望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したが、このペトロの手紙二では、知識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内容に入る前に、この手紙が書かれた執筆時期についてですが、学者によって様々な説があります。60年代後半という意見があれば、はたまた、90年後半という意見があり、はっきりとは分かりません。著者を誰に特定するのかによって、執筆時期の違いが出ているようです。使徒ペトロはAD.64年~68年の間に殉教しましたが、この手紙はペトロによってAD.60年代後半に書かれたものと、私は考えています。実は、この手紙は正典に含ませるかどうか、論争になった書簡であり、いわく付きの書簡とされていました。しかし、そのような論争に終止符が打たれます。397年のカルタゴ会議において、ペトロの手紙二を「正典に含ませる」ということが決められたのです。この時、ペトロの手紙二の著者が、ペトロではなく、他の人によって(例えばペトロの弟子によって)書かれたが、著者を偽った「偽典」として、正典に含ませるようにしようと、決定したのではありません。この手紙は、聖霊の導きの中でペトロ本人の手紙と認められ、新約正典27巻に認定されたのです。この手紙の著者は、手紙の中で自身が使徒ペトロであることを、冒頭で書いているだけでなく、その後も何度も自分がペトロであることを暗示させています(参照1:1, 14, 16-18, 3:15)。そのうちの一つを挙げますと、1:16~18です。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力に満ちた来臨を知らせるのに、わたしたちは巧みな作り話を用い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たちは、キリストの威光を目撃したのです。荘厳な栄光の中から、「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いうような声があって、主イエスは父である神から誉れと栄光をお受けになりました。わたしたちは、聖なる山にイエスといたとき、天から響いてきたこの声を聞いたのです。

大変、生々しい表現です。主イエスと生活を共にした、ペトロ本人にしか言及できないようなことに触れられています。もし、この手紙の著者がペトロではないなら、聖書そのものが、堂々と偽りを語っていることになってしまいます。397年のカルタゴ会議において、この書がペトロ本人の手紙であると認定し、正典に含ませたその決定を、私たちは重く受け止めながら、読み進め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

【1】. 主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

 さて、1~2節において、ペトロは挨拶を書いています。この挨拶の中に、ペトロがこの手紙で言わんとしていることが、凝縮され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1~2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キリストの僕であり、使徒であるシメオン・ペトロから、わたしたちの神と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の義によって、わたしたちと同じ尊い信仰を受けた人たちへ。神と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を知ることによって、恵みと平和が、あなたがたにますます豊かに与えられるように。

私たちキリスト者は、神であり、主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ことによって、救いに入れられます。「知ること」という言葉は、ギリシア語で「エピグノーシス(名詞)」という言葉が用いられています。「イエス・キリストくらい、世界史の教科書にも出ているし、誰でも知っているよ!」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が、聖書の言う「知ること(エピグノーシス)」という言葉は、そのような意味ではありません。その人の人格に影響を及ぼすように、「徹底的に知ること」、「完全に知ること」を意味します。それでは、神様のことを「徹底的に知ること」、「完全に知ること」、とは一体何なのか、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が、それは、神を知るその神知識が、信仰として実を結ばせることであります。神様を知り、その知識が信仰となるということです。さらに突っ込んで、それでは信仰とは一体何なのかと言うと、信仰とは、善き業を結ばせるものであります。ですから、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ことは、結局のところ、善き業という実を結ばせる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ことは、その人の人格に影響を及ぼす、そのような知識のことを言っているのです。従いまして、神様を知ることは、信仰の原点であり、救いの原点である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このキリストを知る、神知識ですが、実は、本来、人間に固有のものとして備えられたものでありました。ウェストミンスター小教理問答10には次のような問答があり、本来、神知識とは、神のかたちに創造された人間に固有なもの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抜粋のプリントをご覧ください。証拠聖句と共に印刷致しました。)

問:神は人間をどのように創造されましたか。

答:神は人間を、知識と義と聖において御自身のかたちにしたがい、被造物に対する支配権を有する者として、男性と女性に創造されました。

ここには、神は人間を、知識と義と聖において、ご自身のかたちに従って創造さ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ところが、人間の祖先であるアダムが罪を犯し、堕落し、人間の知性を暗くしたために、人は神との交わりが絶たれてしまったのです。罪によって、神のかたちがゆがめられ、特に、神を知る知識が腐敗されてしまったのです。罪びとの救いとは、この腐敗してしまった知識を回復することでありますが、もはや人間自らの力では、これを回復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神の恵みによらなければ回復することが出来ないのであります。私たちが聖霊によって新しく生まれることを、「神の光に照らされる」とか、「聖霊の照明を受けて霊的な目が開かれる」というような表現をすることがありますね。神の光に照らされること、聖霊の照明を受けて霊的な目が開かれること、これこそ、罪びとの暗くなった知性に、神知識が恵みによって与えられたことを示すものであります。神を知ることとは、全面的に暗くなり、根本的に腐敗された、神に対する知性が、恵みによって回復され、実際に霊的な目が開かれるような、或いは神の光によって照らされるようなことなのであります。

この、神知識を、さらに、さらに、深めて行くことが大切です。私たちの日々の信仰生活の営みを通して、或いは神様との交わりを通して、イエス様をさらに知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私たちは、ともすると、聖書を開いて、聖書の御言葉を実生活に適用しようと、一生懸命になること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確かに、御言葉を実生活に適用することは大切でありますが、御言葉の適用、それ自体が目的となってはなりません。ここが大変重要なポイントですが、御言葉を適用すること、それ自体が目的ではなく、神様を知ること、主イエスを知ること、そのことこそ最も大切なことなのです。神であり、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さらに、さらに知って行くこと、ここにこそ、私たちの信仰生活の目的があるのです。1ヨハネ3:2をご覧ください。

愛する者たち、わたしたちは、今既に神の子ですが、自分がどのようになるかは、まだ示されていません。しかし、御子が現れるとき、御子に似た者となる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ます。なぜなら、そのとき御子をありのままに見るからです。

先ほど、神様を知ることは、信仰の原点であり、救いの原点であると言いましたが、同時に神様を知ることは、信仰生活の目的であり、最終的なゴールでもあります。主イエスを知ることは、イエス様との関係の中で日々育まれるものであり、最終的には主イエスをありのままに見て、そして主イエスの似姿に変えられるのです。

【2】. 神の本性にあずからせていただく

 続いて3~4節は、2節の言葉を別の言葉で言い換えています。ここでも、イエス様を知ることが鍵となります。最初に3節をご覧ください。

主イエスは、御自分の持つ神の力によって、命と信心とにかかわるすべてのものを、わたしたちに与えてくださいました。それは、わたしたちを御自身の栄光と力ある業とで召し出してくださった方を認識させることによるのです。

3節の終わりに「召し出してくださった方を認識させること」とありますが、ここも「エピグノーシス」という言葉が用いられています。「徹底的に知ることを通して」、「完全に知ることを通して」、という意味です。それでは、誰を知るのか、私たちが知る対象は一体誰なのかということですが、「ご自身の栄光と力ある業とで召してくださった方」であるイエス様のことです。ご自身の栄光と力ある業とは、イエス様の十字架と復活の御業を指していると思います。十字架と復活の御業、その贖いの御業によって、私たちを召し出してくださった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ことです。その方を知ることによって、命と信心とにかかわる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るのです。言い換えれば、永遠の命も、そして信仰さえも、神からの賜物であるということが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救いは、神の一方的な恵みによるものであり、私たちの行いによ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して、私たちがイエス様を信じ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されるのも、神の恵みであるということを覚えてください。続いて4節です。

この栄光と力ある業とによって、わたしたちは尊くすばらしい約束を与えられていま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これらによって、情欲に染まったこの世の退廃を免れ、神の本性にあずからせていただくようになるためです。

栄光と力ある業とによって、私たちに与えられている、尊く素晴らしい約束とは何でしょうか。その約束とは、4節にありますように「情欲に染まったこの世の退廃を免れ、神の本性にあずからせていただくようになる」と、書かれています。これは一体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私は最初これを見て、少し驚きました。将来、私たちが死んだ後に、私たちが神や仏になるとか、生きている者のご先祖として神格化される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はありませんが、アダムとエバが罪を犯す前の状態、つまり神のかたちに創造されたその時の状態に回復されるということでもありません。抜粋のプリントの図1をご覧ください。アダムとエバが創造された状態とは、罪を犯すことも罪を犯さないこともできる中立な状態、フラットな状態でありました。言い換えれば、罪を犯すことのできない、永遠の命には、まだ至ってい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罪を犯す前のアダムにおいて、神様のご計画はまだ、完成されていませんでした。神様の最終的なご計画とは、やがて、ご自身の民を、傷も染みもなく、非のうちどころのない者として、完全な状態に、完成させることであります。フラットな状態ではなく、罪を犯すことのできない状態へと、もう一段階高めることでありました。第二のアダムであり、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その御業を成し遂げて下さった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神でありながら、人となられ、律法の下に歩まれました。そして私たちの代わりに十字架上で罪の刑罰を受けて下さった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代わりに全ての律法を従順に守ってくださり、完全な知識、完全な義、完全な聖を、私たちのために獲得して下さったのです。それはアダムが獲得することのできなかったものでありました。ですから、神の本性の与らせていただくとは、このキリストの獲得してくださった益に、与らせていただくことを意味します。この約束が私たちに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どれほど素晴らしいことでしょうか。エフェソ4:13に次のような御言葉がございます。

ついには、わたしたちは皆、神の子に対する信仰と知識において一つのものとなり、成熟した人間になり、キリストの満ちあふれる豊かさになるまで成長するのです。

先週、宇都宮教会の金田先生が天に召されたという連絡を受けました。金田先生は、大変へりくだった先生であり、心から尊敬する牧師でありますが、同時に神学校の同期であり、私の大の友人であり、苦しい時、辛い時に互いに励まし合い、助け合った仲でもありました。連絡を受けた時、私は、事実を事実として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ず、しばらくパニックに陥りました。しかし、今では、金田先生の霊は神様の御許に引き上げられ、信仰と知識において成熟し、キリストの満ち溢れる豊かさに成長したということを信じています。そして、やがての日に、キリストの復活のように、復活の体が与えられ、新しい天と新しい地で永遠に生きることを信じています。それは、もちろん天に召された金田先生だけではなく、私たちキリスト者、皆が、そのような豊かさに至る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私たちには、この約束が与えられているので、これをしっかり握りしめ、この世で命が与えられている限り、たとえ試練や困難の中に置かれても、主イエス・キリストを、さらに、さらに、知っていく歩みへと勤しんでいくことが出来るのだと思います。

【結論】

 栄光と力ある業とによって、私たちを召し出してくださったお方が、どのように素晴らしい方なのか、その栄光がどれくらいのものであり、その力がどれくらいのものであるのか、私たちはまだ、その全貌の内を全く知らされていないと言っても言い過ぎではないでしょう。そのお方のすばらしさを、もっと、もっと知って行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願いつつ、そしてその方の約束に期待しつつ、胸を膨らませて、歩んでいく私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たいと願う者です。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예수를 아는 것

2023년 4월 23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서론

오늘 아침부터 우리는 베드로후서에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희망에 대해서 쓰여져 있었습니다만, 이 베드로후서에서는 지식에 대해 쓰여져 있습니다.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이 편지가 쓰인 집필 시기에 대해서 학자마다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AD 60년대 후반이라는 의견이 있기도 하고 혹은 90년대 후반이라는 의견도 있어서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저자를 누구로 특정하느냐에 따라 집필 시기의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64년~68년 사이에 순교했는데, 이 서신서는 베드로에 의해 60년대 후반에 쓰여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이 서신서는 정경에 포함시킬지의 여부가 논란이 된 서한으로 의혹의 서신서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논쟁에 종지부가 찍힙니다.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베드로후서를 “정경에 포함 시킨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후서의 서신서의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예를 들어 베드로의 제자에 의해서) 쓰여졌지만「정경」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 서신서는 성령의 인도 가운데 베드로 본인의 서신서로 인정받아 신약정경 27권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이 서신서의 저자는 서신에서 자신이 사도 베드로임을 서두에 썼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자신이 베드로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참조 1장 1절, 14절, 16-18, 3장 15절) 그 중 하나를 꼽자면 1장 16~18입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굉장히 생생한 표현입니다. 주 예수님과 생활을 함께 한 베드로 본인 밖에는 언급할 수 없는 것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서신서의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라면 성경 자체가 당당하게 거짓을 말하고 있는 셈이 되고 맙니다.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이 서신서가 베드로 본인의 편지임을 인정하고 정경에 포함시킨 그 결정을 우리는 무겁게 받아들이면서 읽어 나가고자 합니다.

(1)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다

자, 1,2절에서 베드로는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인사 중에 베드로가 이 서신서에서 말하고 싶은 것이 응축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시며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구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에피그노시스」라는 명사가 쓰여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정도는 세계사의 교과서에도 나와 있고 누구라도 알고 있어요!”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아는 것 (에피그노시스)」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인격에 영향을 미칠만큼 “철저하게 아는 것”, “완전히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철저하게 아는 것”, “완전하게 아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얘기가 되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믿음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지식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더 깊게 파고 들어서, 그러면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면 선한 행동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의 원점이자 구원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그리스도를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사실은 본래 인간에게 고유한 것으로 갖추어진 것이었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10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는데 본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인간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10 문: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되 자기의 형상대로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시어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은 인간을 지식과 의와 거룩함에서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조상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하고 인간의 지성을 어둡게 하는 바람에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특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패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죄인의 구원은 이 부패해버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회복하는 것 입니다만, 더 이상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서는 회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빛에 비춰진다”거나 “성령의 조명을 받아 영적인 눈이 열린다”는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죠. “하나님의 빛에 비춰지는 것”이라든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죄로 인해 어두워진 지성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이 은혜로 주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면적으로 어두워지고 근본적으로 부패된 하나님에 대한 지성이 은혜를 받음으로 회복되고, 실제로 영적인 눈이 뜨이는 것 같거나 또는 하나님의 빛에 의해 비춰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욱 깊게 알아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믿음생활의 태도를 통해서 혹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을 더욱 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성경을 펴서 성경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려고 열심을 낼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말씀의 적용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기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인데요. 말씀을 적용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 주 예수를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알아가는 것, 여기에야 말로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아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의 원점이자 구원의 원점이라고 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생활의 목적이자 최종적인 골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를 아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날마다 자라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주 예수님을 참모습 그대로 보고 그리고 주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2)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이어서 3,4절은 2절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을 아는 것이 열쇠입니다. 먼저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3절 끝부분에 「부르신 이를 앎으로」라고 쓰여있습니다만 여기도 「에피그노시스」라는 말이 사용되어져 있습니다. “철저하게 아는 것을 통해서”, “완전하게 아는 것을 통해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아느냐, 우리들이 아는 대상은 도대체 누구냐 하는 건데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자신의 영광과 덕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 그 속죄의 역사로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 분을 아는 것에 의해서 생명과 믿음에 관계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도, 그리고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한 것이지 우리의 선한 행실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무엇일까요? 그 약속이란 4절에 있듯이「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라고 쓰여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저는 처음에 이 부분을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장차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가 신이나 부처가 된다거나 살아있는 자의 조상으로 신격화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의 상태,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그때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상태란 죄를 지을 수도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중립적인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해 죄를 지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 전 아담에게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최종 계획은 곧 자신의 백성을 상처도 없고 더러움도 없이 흠잡을 데 없는 자로서 온전한 상태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라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한 단계 더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아담이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 역사를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셨고 율법 아래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신에 십자가 위에서 죄의 형벌을 받으신 것 뿐만이 아니라 우리 대신에 모든 율법에 순종하시고 지키시고 완전한 지식, 완전한 의, 완전한 거룩을 우리를 위해 획득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획득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 그리스도가 획득한 역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에베소 4장 13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저번 주 우쯔노미야 교회의 카네다 목사님이 소천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카네다 목사님은 매우 겸손한 목사님시며 진심으로 존경하는 목사님이기도 했지만 일본그리스도개혁파 신학교의 동기이자 저의 소중한 벗이며 힘들 때, 괴로울 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던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마간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카네다 목사님의 영은 하나님의 품으로 끌어올려져 믿음과 지식에서 성숙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부활의 몸이 주어지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물론 하늘로 불리움을 받은 카네다 목사님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그런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 약속을 굳게 붙잡고 이 세상에서 생명이 주어져 있는 한 비록 시련과 어려움 속에 놓여져 있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알아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영광과 덕에 의한 역사에 의해서 우리를 부르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 영광이 어느 정도인지 그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아직 그 전모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더욱 더 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그분의 약속을 기대하며 설레이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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