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年03月12日「すでにといまだ 이미 그러나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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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3:12わたしは、既にそれを得たというわけではなく、既に完全な者となっているわけでもありません。何とかして捕らえようと努めているのです。自分がキリスト・イエスに捕ら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
3:13兄弟たち、わたし自身は既に捕らえたとは思っていません。なすべきことはただ一つ、後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全身を向けつつ、
3:14神が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上へ召して、お与えになる賞を得る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ひたすら走ることです。
3:15だから、わたしたちの中で完全な者はだれでも、このように考えるべきです。しかし、あなたがたに何か別の考えがあるなら、神はそのことをも明らかにしてくださいま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 3章12節~15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神の国の成就において、「すでに」と「いまだ」という大切な教理があります。赤ちゃんのお産を想像して下さればと思いますが、最初に、病院で妊娠したということが宣告されてから始まります。小さな生命がお母さんの身体の中に宿りました。しかし、その生命は胎の中に隠されていて、赤ちゃんの顔つきや、体つきをまだ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十月十日を経て、母親の産みの苦しみを経て、初めて赤ちゃんは、この世に生まれて来ます。「すでに」と「いまだ」の教理もこれと似ていると思います。神の国がすでに到来しており、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救われました。イエス・キリストの贖罪は完全であり、それに何も付け加えることはありません。私たちの命は、イエス・キリストの中にすでに息づいているのです。しかし、同時に、神の国はいまだ、完成には至っておらず、聖化というプロセスを経て、初めて、神の国の完成、救いの完成に至るのです。聖化というプロセスを経て、初めて、キリストに似た者として、栄光に輝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本日も私たちは、フィリピ書の御言葉から恵みに与っ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1】. 完全な者

最初に、パウロは本日の箇所で矛盾するような言い方をしていることを指摘させていただきます。12節で「完全な者となっている訳ではない」と断言しつつ、15節において「私たちの中で完全な者は」と語っています。或いは、13節で「既に捕らえたとは思っていない」と断言しつつ、12節でイエスには「捕らえられている」と語っています。果たして完全な者とされているのかされていないのか、イエス様を捕えたのか捕らえていないのか?これはフィリピの信徒たちを始め、我々読者を、決して茶化している訳ではありません。「すでに」と「いまだ」の教理がここに示されているのです。3:12節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は、既にそれを得たというわけではなく、既に完全な者となっているわけでもありません。何とかして捕らえようと努めているのです。自分がキリスト・イエスに捕ら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

パウロは、自分のことを「既にそれを得たというわけではなく、既に完全な者となっているわけでもありません」と話しています。「得た」という動詞に注目すると、時制は、過去のある時点を指し、完全な者とされた、それをゲットしたという過去の出来事を語っています。私たちの中で恐らく、「自分は完全な者になった」と誇る人は、誰一人いないでしょう。それではなぜ、パウロはこんなことを言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考えられるのは、フィリピの教会の中に、自分は「完全」に達したと、うそぶく人がいたからということでしょう。そのように断言する一部の人々がいたと考えられるのです。それでは「すでに完全な者となった」という主張が、当時、明らかにおかしな主張だったのでしょうか。ところが、どうやらそうではないように思われます。なぜなら、主イエスは、「完全になる」という言葉の形容詞(テレイオス)を使って、次のようなことを語っているからです。マタイ5:48をご覧ください。

だから、あなたがたは、天の父が完全であられるように、完全な者となりなさい。

ここで確かに、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完全な父に倣って、あなた方も完全な者になれ!」と命じています。さらに言えば、イエス様が地上での働きを全て成し遂げ、十字架にかけられ、霊をお渡しになる直前に何と言われたでしょうか。「完了した:テテレスタイ」と言われました。このテテレスタイという言葉も、先ほどの「テレイオス:完全な」も、語源が同じ言葉だと考えられます。イエス様が働きを成就された時に「テテレスタイ」と言われ、このイエス様に結合されたキリスト者とは、イエス様が完全であるように、自分たちも完全な者だという理解がなされても何の不思議もなかったと考えられるのです。パウロは、そのような中で、あえて「既にそれを得たというわけでもなく、既に完全な者となっているわけでもありません」と語っているのです。そして、パウロは、今もなおキリストを知ることを、キリストの似姿になることを追及している、ひたすら努力していると告白するのです。このパウロの福音理解は、私たちにとって非常に重要だと思います。私たちは、イエス様の十字架によって罪赦され、そして、イエス様に結ばれて義とされました。また、私たちはイエス様に結ばれて聖徒とされ、イエス様に結ばれて神の子とされ、完全な者とされました。しかし、これらのことは全て法的な事柄でございます。まだ妊娠が宣告されたに過ぎず、その命は母親の胎内に隠されているように、私たちの法的な身分も、キリストの命の中に隠されているのです。コロサイ3:3~4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は死んだのであって、あなたがたの命は、キリストと共に神の内に隠されているのです。あなたがたの命である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と共に栄光に包まれて現れるでしょう。

神の内に隠された命が現れるために、私たちは聖化の道のりをたどって、最終的に神の栄光に至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実質的な復活の力を得るまで、産みの苦しみを経るかのように、私たちは、この世にあって、奮闘努力しながら戦い抜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フィリピの教会のある人々は、この点を勘違いしてしまったと思われます。「我々は既に完全な者とされた」、「もはや我々は罪とは関係のない次元で生きている」と、キリストの内に隠されている法的な命を、誤って理解した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法的にそのように宣告されても、依然として罪人にすぎません。神の聖なる光に照らされるなら、私たちは一日たりとも罪を犯さないで過ごす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フィリピの教会の勘違いは、現在においてもしばしば見られ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所謂、「反律法主義(無律法主義)」という考え方です。反律法主義(無律法主義)とは、律法主義の反対の概念で、律法主義を強く批判するあまり、言わば放縦主義に走ってしまう信仰の態度です。「キリストが律法を完全に成就され、私たちは律法の縛りから解放されたため、好き勝手に何でも自由にしてよい」とか、「新約に生きる私たちは、旧約の律法や掟をもはや守る必要はない」という考え方です。時には、教会でなされる奉仕さえも、そういったものは律法主義だと批判する声が起こってきます。確かに喜んで自発的に、奉仕をしないならば、それは奉仕ではなく、律法であると言え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律法主義という名によって、すべての奉仕が否定されるのは、行き過ぎだと言えるでしょう。私たちせんげん台教会の年報にも、一年間の教会の営みのその奉仕者の名前が一々事細かく記載されて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天において父なる神様に、一つ一つの尊い奉仕が覚えられているのです。そのことを覚えたいと思います。そして、「反律法主義」の考え方の特徴は、キリストの苦難に与ることも否定します。自分はイエス様を信じていると喜びながら、信仰というものが、イエス様が歩まれたように、細い道から、従順の道を通して完成されるということを、どうしても理解しようとはしません。私たちはパウロの主張する「すでに」「いまだ」という教理を正しく理解し、反律法主義に陥ることのないよう、気を付け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

【2】. 戦う教会

続いて、3:13~15節前半までをご覧ください。

兄弟たち、わたし自身は既に捕らえたとは思っていません。なすべきことはただ一つ、後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全身を向けつつ、神が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上へ召して、お与えになる賞を得る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ひたすら走ることです。だから、わたしたちの中で完全な者はだれでも、このように考えるべきです。

パウロは、私たちの信仰の歩みをスポーツ競技の競走に例えています。短距離か長距離かわかりませんが、ここでは短距離走として考えてみたいと思います。一般に短距離ランナーは、無呼吸で最後まで駆け抜けると言われていますが、パウロが言う「前のものに全身を向けつつ」とは、そのような全力疾走で走る姿を表し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また、当時、競走で勝利した人は、オリンピックで賞を得るように、表彰台の上に召され、棕櫚の枝で出来た冠をかぶせてもらいました。この賞を得るために、後ろのものを忘れ、目標を目指してひたすら走るのです。それでは、その「目標」とは一体何でしょうか。目標とは3章8節、10節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キリストを知ること、その復活の力を知ることであると思われます。もっと言えば、キリストの似姿に変えられることであります。「後ろのもの」とは、過去に自分が犯してきた罪や過ちであると思われます。パウロのような立派な人でも数多くの罪を犯して来ました。何といっても忘れることのできないのは、キリスト者を迫害した過去であり、そしてステファノに殺害にも一枚噛んでいた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も、自分の過去の過ちのゆえに、中々、罪を赦しの宣告を素直に受け取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しかし聖書は、あなたの罪は完全に赦された。あなたの現在の苦難は、決して過去の過ちや罪に対する刑罰ではない。キリストの苦難に共に参与しているのだと言われる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日々直面している苦難や困難の中でも、神の愛を信じつつ、粘り強く祈りながら、試練や苦難を乗り越えていくことが出来るのです。また、試練や苦難を通して、イエス様のことをさらに深く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私たちは、この地上における聖化のプロセスを経て、天に召された後、或いは、私たちが生きていて、イエス様が再臨される日に、その時、私たちは神の栄光に輝きます。まさにその時こそ、イエス・キリストを完全に知る時、キリストの似姿に変えられる時なのであります。やがての日に、私たちがキリストの似姿に変えられるということは、聖書のいたるところに書かれていますが、今日は二つの聖句だけ紹介させていただきます。ローマ8:29をご覧ください。

神は前もって知っておられた者たちを、御子の姿に似たものにしようとあらかじめ定められました。それは、御子が多くの兄弟の中で長子となられるためです。

また、1ヨハネ3:2をご覧ください。

愛する者たち、わたしたちは、今既に神の子ですが、自分がどのようになるかは、まだ示されていません。しかし、御子が現れるとき、御子に似た者となる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ます。なぜなら、そのとき御子をありのままに見るからです。

パウロが言う目標とは、まさに御子に似た者に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では神様がお与えになる賞とは具体的に何なのか、ということですが、はっきりと書かれていませんので分かりませんが、とにかく、勝者のランナーが表彰台の上に召され、冠をかぶせてもらうように、その日、私たちの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が与えられ(マタイ16:27)、神様から様々な誉れが(1コリ4:5)与えられる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す。ところで、注目すべきことは、15節において「完全な者はだれでも」という言葉があることです。ここにも最初に指摘させいていただいた「テレイオス:完全な」という言葉が出て来ています。矛盾しているように聞こえるかもしれませんが、法的に完全にされた者は、まだ自分が不完全であるかのように目標を目指して走りなさいとパウロは言っているのです。矛盾しているように聞こえるかもしれませんが、イエス様に捕らえられた者は、イエス様を捕らえ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走りなさいとパウロは言っているのです。私たち地上の教会は、いまだ、救いの完成には至っていません。いまだ、勝利した教会ではなく、この世において、「戦う教会」として召されているのです。やがての日に、御子をありのままの姿を見て、私たちの隠されていた命があらわにされ、キリストの似姿に変えられるまで、後ろのものを忘れ、目標を目指してひたすら走るのであります。

【結論】

自分のことを罪人の頭であると告白したパウロは、誰よりも多くイエス様を愛し、誰よりも熱心に目標にむかって走りぬけました。このパウロの原動力はどこにあったのかと言うと、「すでに」「いまだ」という教理の中にあった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パウロは過去において大きすぎるほどの失敗を犯しました。キリストの身体である教会を迫害し、ステファノの殺害に関与したことです。忘れようと思っても忘れられ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このような取り返しのつかない過ちを引きずりながら、後悔をしつつ人生を歩む他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イエス様の贖いによって、完全な赦しを法的に与えられたということをパウロは信じたのであります。以前ファリサイ派として律法を順守することによってどうしても得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義が、キリストの義によって、法的に与えられたということを信じたのであります。自分は既に死んでおり、復活の命が、まだ目には見えませんが、キリストの中にすでに息づいているということを信じたのであります。そのことにより、パウロは、過去に縛られることなく、前を向いて走り抜くことが出来たのです。「すでに」法的に成就されたことを信じ、「未だ」見ていない救いの完成に向かって、全力疾走することが出来たのです。私たちも、この世にある限り、戦う教会としての使命に生きる者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이미 그러나 아직

빌립보서 3장 12-15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 서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하는 중요한 교리가 있습니다. 아기의 출생의 과정을 상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처음에 병원에서 “임신했다”라는 선고를 듣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작은 생명이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뱃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아기의 얼굴 형태나 체형의 상태는 볼 수가 없습니다. 10개월을 채우고 어머니가 출산의 고통을 치르고나서야 처음으로 그 아기는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아기의 탄생은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교리와 아주 닮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해 있고, 우리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하며 거기에다 아무것도 첨가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성화라는 과정을 거쳐 처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화라는 과정을 거쳐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서 영광스럽게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빌립보서의 말씀으로부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2) 완전한 사람

먼저 바울은 오늘의 구절에서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단언하면서 15절에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라고 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13절에서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단언하면서도 12절에는 “예수께 잡힌 바”되었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완전히 이룬 자라는 건지 이루지 못한 자라는 건지, 예수님을 잡았다는 말인지 잡지 못했다는 말인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빌립보 성도들을 시작으로 독자인 우리들에게 농담처럼 얼버무리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의 교리가 여기에 나와있는 것입니다. 12절을 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바울은 자신을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얻었다”라고 하는 동사에 주목해보면, 시제는 과거의 어떤 시점을 가리키며 “완전히 이루었다”, “완전한 자로 여겨진 그것을 얻었다”는 과거의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마도 “나는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자랑할 수 잇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빌립보 교회안에 자신이 “완전히 이루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언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주장이 당시에 이상한 주장이었을까요? 그건 또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께서는 “완전하게 된다”라는 말의 형용사 「텔레이오스」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을 참조해 주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에서 분명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더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영을 하나님께 의탁하시기 직전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테텔레스타이」라고 하는 단어도 방금전의 「텔레이오스」와 어원이 같은 말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치시면서 말씀하신 「테텔레스타이」처럼 예수님께 결합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자신도 완전하다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되어집니다. 바울은 그런 가운데 굳이 “이미 그것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금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추구하며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복음 이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죄 사함을 받았으며 예수님께 결합되어 의롭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 결합되어 성도가 되었고 예수님께 결합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법적인 것입니다. 아직 임신이 선고되었을뿐 그 생명은 어머니의 태안에 숨겨져 있는 것처럼 우리의 법적인 신분도 그리스도의 생명 속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3,4절을 참조하십시오.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하나님 안에 숨겨진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 우리는 성화의 길을 따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실질적인 부활의 생명을 얻을 때까지 해산하는 고통을 겪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분투하며 노력하며 전투해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착각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완전한 자로 여겨졌다” “우리는 이미 죄와는 관계가 없는 차원에서 살게 됐다”라고 그리스도의 안에 숨겨져 있는 법적인 생명을 오해해 버린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법적으로 죄 용서함을 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죄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서는 우리들은 하루도 죄를 짓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착각은 지금도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소위 「반율법주의」라는 생각입니다. 「반율법주의」란 「율법주의」의 반대의 개념으로 「율법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만큼, 말하자면 「방종주의」로 달려가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율법의 억매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있다”라든지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구약의 율법이나 규율을 더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때때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봉사조차도 그러한 것은 「율법주의」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확실히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봉사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봉사가 아니고 「율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율법주의」라고 하는 이름으로 모든 봉사가 부인되는 것은 지나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센겐다이 교회의 년보에도 1년간의 교회의 봉사자의 이름이 일일이 세세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도 우리가 행하는 하나 하나의 봉사가 하나님께 소중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율법주의」의 사고방식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도 부정합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기뻐하면서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것처럼 좁은 길, 순종의 길을 통해서 완성 되어진다는 것을 절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주장하는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교리를 옳바르게 이해하고 「반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3) 전투하는 교회

계속해서 3장 13-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바울은 우리들의 신앙의 걸음을 스포츠 경기의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단거리 경기인지 장거리 경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단거리 경기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단거리 경주자는 무호흡으로 끝까지 달려간다고 합니다만 바울이 말하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은, 그러한 전력질주로 달리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당시 경기에 승리한 사람에게는 올림픽에서처럼 이름이 불리워지고 상을 받기 위해서 시상대 위로 올라갔고 월계관이 씌워졌습니다. 이 상을 얻기 위해서 뒤의 것을 잊고 푯대를 향해서 오로지 달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푯대」란 무엇입니까? 「푯대」는 3장 8절, 10절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것, 부활의 힘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뒤의 것」이란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죄나 실수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과 같이 훌륭한 사람이라도 수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과거였고 스테판의 살해에도 가담했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자신의 과거의 실수로 인해서 죄의 용서를 선고 받았지만 그 죄책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당신의 죄는 완전히 용서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현재의 고난은 결코 과거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직면하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끈기있게 기도하면서 시련과 고난을 극복해 나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시련과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성화의 과정을 거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또는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그 날 그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날 것입니다. 바로 그 때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뀌어지는 날인 것입니다. 드디어 그 날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뀐다는 것은 성경 곳곳에 쓰여져 있습니다만 오늘은 두 개의 성구만 소개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을 참조해주세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였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계속해서 요한일서 3장 2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바울이 말하는 「푯대」는 바로 “독생자를 닮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만 분명히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주의 승자가 시상대 위로 불리움을 받고 승리의 관이 쓰여지는 것처럼 그 날 우리들의 각각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고 (마태복음 16장 27절) 하나님께 여러가지 칭찬을 받는다는 것 (고린도전서 4장 5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15절에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처음에 지적한대로 「텔레이오스 : 완전하다」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법적으로 완전한 자는 아직 자신이 불완전한 것처럼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순된 것처럼 들리겠지만 예수님께 잡힌 바 된 자는 예수님을 잡을 수 있도록 달려가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들 지상의 교회는 아직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아직 승리한 교회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전투하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윽고 그 날에 독생자의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우리들의 숨겨져 있는 생명이 드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뀔 때까지 뒤에 것을 잊고 푯대를 향해 오로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4) 결론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바울은 누구보다 많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더 열심을 내어서 「푯대」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이런 바울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하는 교리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울은 과거에 너무 큰 실패를 저질러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박해하고 스테판의 살인에 관여한 과거가 있습니니다.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붙잡고 후회를 하면서 인생을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속으로 완전한 용서를 법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바울은 믿었습니다. 이전의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준수함으로써는 아무리 애를 써도 얻을 수 없었던 의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법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죽었고 부활의 생명이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안에 이미 숨을 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로인해 바울은 과거에 묶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법적으로 성취된 것을 믿고 아직 보지 못한 구원의 완성을 향해 전력 질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있는 한,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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