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年02月05日「高く上げられたキリスト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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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く上げられたキリスト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 2章9節~11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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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2:9このため、神はキリストを高く上げ、あらゆる名にまさる名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2:10こうして、天上のもの、地上のもの、地下のものがすべて、イエスの御名にひざまずき、
2:11すべての舌が、「イエス・キリストは主である」と公に宣べて、父である神をたたえるので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 2章9節~11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旧約聖書には「主の僕」という不思議な言葉があります。特にイザヤ書の中では、「主の僕」は「その姿は損なわれ」、「見るべき麗しさも輝きもなく、望ましい容姿もない」と記述され、さらに言えば、彼は「人々に見捨てられ、痛みの人で、病を知っていた。人々から顔を背けられるほど軽蔑され、私たちも彼を尊ばなかった」と記述されています。この「主の僕」とは、一体誰なのでしょうか。それは私たちの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でございます。それではなぜ、主の僕は、このように徹底的に低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本日の箇所は、そのような疑問に光を当ててくれる箇所だと思います。本日もフィリピ書から御言葉の恵みに与りたいと思います。

【1】. 神のオセロゲーム

 先週に引き続き、キリスト讃歌の続きでございます。6~11節までは、当時の教会の讃美歌の歌詞であったと考えられています。ですからフィリピの教会の人々にとってもこの讃歌は大変馴染みのあるものであったことでしょう。私たちは、この讃歌が何を伝えようとしているのかということよりも、これを引用したパウロが、フィリピの人々に何を伝えようとしたのかを考え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前回見てまいりました、1~8節までは、フィリピの教会の中にある、葛藤、分派の問題について、パウロは一致するようにと励ましを与えていました。そしてフィリピの教会が主にあって一致することができる理由は、主イエスが誰よりも低くへりくだってくださったから、という点でありました。低くへりくだる時に一致が生まれるのであります。本日の箇所は、僕として、奴隷として、人々よりさらに低い身分に、落とされたお方が、どのようにして回復されたのか、どのようにして高められたのか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この讃歌全体を見ますと、6節~8節は主語が「キリスト」でありましたが、ところが9節~11節までは主語が「神」に変わっています。これは、キリストがご自分で高く昇ったのではなく、神がキリストを高く上げられたということを暗示しています。もう一度、本日の与えられた聖書箇所9~11節を、短いですのでお読み致します。

“このため、神はキリストを高く上げ、あらゆる名にまさる名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こうして、天上のもの、地上のもの、地下のものがすべて、イエスの御名にひざまずき、すべての舌が、「イエス・キリストは主である」と公に宣べて、父である神をたたえるのです。”

9節の冒頭に「このため」とあります。「この理由のため、この原因のため」という意味ですが、何のためかと申しますと、もちろん、これは6節~8節までの、僕のように、奴隷のように低くなられたことを指しています。へりくだって、死に至る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至るまで御父の御心に従い通され、低くなられたため、神は、キリストを高く上げられたというのです。低められたのは、神によって高められるための唯一の手段であっ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そのことは聖書の他の箇所からも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いくつか聖句を挙げさせていただきますが、例えば、マタイによる福音書23:12をご覧ください。

“だれでも高ぶる者は低くされ、へりくだる者は高められる。”

続いて、ルカによる福音書24:26

“メシアはこういう苦しみを受けて、栄光に入るはずだったのではないか。”

続いて、ヘブライ人の手紙2:10

“というのは、多くの子らを栄光へと導くために、彼らの救いの創始者を数々の苦しみを通して完全な者とされたのは、万物の目標であり源である方に、ふさわしいことであったからです。”

従いまして、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において起こった一連の出来事は、神様による反転、神様によるオセロの逆転勝利が起こった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人となられ、弱さを持ち、腐敗する体、死に至る体を持ちました。そればかりでなく、罪のないお方が十字架刑に処せられました。因みにこの十字架刑とは、激痛の中、時間をかけて死に至らせる極刑です。ローマ市民権を持っている人には適用されてはならない死刑法であります。イエス様は十字架にかけられ、裸にされ、見せしめにされ、人々からののしられ、唾を吐きかけられました。ところがです。オセロゲームの色が一つ一つ反転するかのように、神は正反対の属性をキリストにお与えになったのです。つまり、十字架に死刑されたはずですが、復活により死が撃ち破られました。腐敗していく体は、朽ちない体に蘇りました。裸にされ、見せしめにされ、ひどい羞をお受けになりましたが、神はキリストにあらゆる名にまさる名をお与えになり、栄光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人々は、十字架上で見せしめにされたイエスをののしり、ある人は顔を背けましたが、キリストがやがて再臨される時には、天上のもの、地上のもの、地下のものがすべて、イエスの御名にひざまずき、すべての舌が、「イエス・キリストは主である」と公に宣べて、父である神をたたえるようにされたのであります。この反転は、このオセロゲームの逆転勝利は、一体何を意味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

【2】. 高められたキリストの目的

 神と人の仲保者として、人となって来られたお方が一度、低められ、そしてその後、高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は、私たち罪人の救い、私たち罪人の回復と、実は大いに関係がございます。イエス・キリストは、そのご生涯を通して僕のように、奴隷のように低められたのは、決して偶然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し、十字架の死を遂げたのも、やはり偶然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神のご計画の中でそれらは必然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れでは、そう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目的は何なのか、神は一体何をご計画されたのかについて、考えてまいりますが、それについては、歴史的に神学論争の中で大いに議論されて来ました。

まず、誤解を招いた言葉が、9節の「あらゆる名にまさる名をここにおいて初めて与えられた」という言葉です。この言葉をそのまま受け取ろうとするなら、それまではキリストは神ではなかったのだろうか?キリストが人としてこの地に来られた時は、完全な神ではなかったのだろうか?というイエス様の神性と人性について疑問が出てまいります。キリストが地上を歩まれた時は、完全な神ではなく、肉体を取られ、人間と合わさったので、半分神であり、半分人間になったのではないか。いや、一時、神から分離して、人間となって地上を歩まれ、その後、十字架で死んだ後、再び神に戻られたのではないか、などという様々な憶測が飛び交いました。これに対してカルケドン信条という古代信条が採択され、これらの議論に終止符が打たれます。その信条告白とは、キリストの神性と人性は『融合せず、変化せず、分割せず、分離せず』という告白です。何を言っているのかと言いますと、イエス・キリストは地上を歩まれた時、確かに肉体を取られ、人となられましたが、これは、人性をお取りになった時に、完全なる神ではなくなった訳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全き神でありながらも、同時に仲保者の働きを担うために、肉体をお取りになったという告白です。イエス様は、全き神であり、同時に全き人であるということが、カルケドン信条において告白されたのでした。確かに福音書を見ますと、イエス様は弟子たちから礼拝さ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が、しかし、その時「人間である私を礼拝するとは、何たる偶像礼拝!すぐに止めなさい」とは言われませんでしたね。イエス様は弟子たちのご自分に対する礼拝を受け入れられています。イエス様は人間でありながら、神でもあったということを伺い知ることが出来るのであります。従って、十字架に架かられた時も、神であるお方が十字架に架かられ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さらに言えば、神であるお方が一時、死を体験され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十字架に架かられる前も、死んだ時も、そして、復活され、天に昇られた後も、変わらずに神であ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そうであるなら、なぜ9節で改めて、神はキリストに「あらゆる名にまさる名をお与えなった」と言うのでしょうか。これは、三位一体の第二位格である神の子が、仲保者として、人間の身体をお取りになり、この人間の身体として、あらゆる名にまさる名を神から与えられ、獲得したという意味です。そして、仲保者として、全き人として、天に上げられ、神の右に着座させられたという意味であります。もう一度言いますと、イエス様は、復活された身体で、全き人として、天に上げられ、神の右に着座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このことに私たちは驚きを隠せ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第一に神であられるお方が僕の身分になられたことが驚きでありました。第二に、僕である方が、全き人である方が、神の身分に高められ、天の右の座に着座されたことが驚きなのです。イエス様が全き人間として律法を成就され、栄光を獲得された、その目的は、堕落した人間を仲保者であるご自身と結び合わせて、罪の奴隷から救い出し、神のかたちに回復させるためであったのです。

人間は本来、神のかたちに創造されました。私たちが現在の自分自身の姿を見て、到底そのことを受け入れられ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そのことを理解できてもできなくても、聖書には、天使ではなく、人が、神のかたちに創造さ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ですから神の救いの計画は、天使に与えられているのではなく、神のかたちに創造された人間に与えられています。天使の場合であれば、堕落したその瞬間に、サタンとなり悪霊となって彼らに贖いの余地はありませんでしたが、人間に対しては堕落して、神との関係が断絶された後でも、なお、仲保者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贖いの道が確保されているのであります。人が三位一体の神のかたちに似せて造られた、神の似姿に、神の似像に造られた、この信じられない聖書の主張は、仲保者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が全き人として、高められた時に、私たち罪人の回復された姿として担保されたのであります。キリストの高められた姿は、将来、私たちの救いの完成を映し出している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ように肉体を取られ、僕のように、奴隷のように低くなられ、私たちと一つとなってくださり、神によって高く上げられました。キリストに結び合された私たちも、同じようにキリストによって贖われ、天上のかたち(1コリ15:49)に、主と同じかたち(2コリ3:18、1ヨハネ3:2、フィリ3:21)に、造り主のかたちに(コロ3:10)、回復されるのです。言い換えるなら、創造された当初の目的のように、神のかたちに回復されるのです。

キリストが低い所に来られ、反転させた目的とは、キリストがオセロゲームで逆転勝利された目的とは、キリストに結び合された人々を、同じように反転させて、罪の奴隷から神の子へ、死から命へ、恥から栄光へ、朽ちるものから朽ちないものへ、回復させるためでありました。そのようにして神の栄光が褒め称えられるのです。

【結論】

 神の御子イエス・キリストがこの世に来られ、神の国が到来致しました。私たちは、この救い主イエス様を心に受け入れ、イエス様に結ばれて、神の国に入れられます。神の国における第一の勧めは、神の国を何よりも優先すべき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イエス・キリストを受け入れる人は誰であれ、イエス様に従い行くために全てのものを放棄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くない。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も、わたしにふさわしくない。 また、自分の十字架を担ってわたしに従わ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くない。 自分の命を得ようとする者は、それを失い、わたしのために命を失う者は、かえってそれを得るのである。」(マタ10:37-39)とイエス様はおっしゃいました。私たちは神の国を何より優先し、イエス・キリストを、畑の中に隠された宝のように大切にし、優先すべきであります。その際、私たちはどうしても自らの十字架を背負っていく歩みをす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その際、狭い入り口から入り、自己否定をする道を歩むことになるでしょう。その時、苦難を体験したり、低くされる道を歩まざるを得ない状況も起こ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その道とは、イエス様のために捨てた全てのものを、再び神から受ける道なのであります。最後にマタイ19:29をお開きください。

“わたしの名のために、家、兄弟、姉妹、父、母、子供、畑を捨てた者は皆、その百倍もの報いを受け、永遠の命を受け継ぐ。”

高く上げられた仲保者イエス様は、偉大なる反転によって、オセロゲームのたとえによって、まさにこのことを私たちに約束して下さっているのです。神様の方法は、最初に私たちを低め、従順を学ばせます。そして、神様の時が来て、神様によって高められるのです。ですから、私自身、人生を長く経験した訳ではありませんが、もし、皆さまのそれぞれの人生の中で、神様はなぜ、私の祈りに応えてくださらず、このように放っておかれるのか、神様はなぜ、私を片隅にうずも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神様はなぜ、私がこんなに神様に仕えているのに、私の家族はイエス様を信じないのだろうかと、心配される方もおられ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心配しないでください。夜が深いほど、夜明けが近いように、神様の荒れ野の従順訓練は、そろそろ終わるに違いないと予想するのは、概ね間違っていないと思われます。高く上げられた仲保者イエス様は、神の祝福が反転であること、オセロゲームの逆転勝利であることを教えてくれていますから、私たちは何よりも神の国を優先し、イエス様を心から慕い求め、高く上げられたイエス・キリストに希望を置く者たちとして、日々の営みを歩ま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

빌립보서 2장 9-11절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구약성경에는 「주의 종」이라는 독특한 단어가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서에는 「주의 종」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덧붙여 말한다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아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주의 종」은 도대체 누구 일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의 종」은 이렇게 철저하게 낮아질 수 밖에 없었을까요? 오늘의 구절은 그러한 의문에 빛을 비춰주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빌립보의 말씀에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오델로

저번주에 이어서 그리스도 찬송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3-11절까지는 당시의 교회의 찬송가의 가사였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이 찬송가는 몹시 친숙한 것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 찬송가가 무엇을 전할려고 했는가 보다는 이를 인용한 바울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전에 살펴 본 2장 1-8절까지는 빌립보 교회 안에 있는 갈등, 분파의 문제에 대해 바울은 일치하도록 권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가 주안에서 일치할 수 있는 이유는 주 예수님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낮출 때 일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구절은 종으로서 노예로서 사람들보다도 더 낮은 신분으로 떨어진 분이 어떻게 해서 회복되었는지, 어떻게 높임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쓰여져 있습니다. 이 찬송가 전체를 보면 6-8절은 주어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데 9-11절까지의 주어는 「하나님」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스스로가 자신을 높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 올리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주어진 성경 구절 9-11절을 보아 주십시요.

빌립보서 2장 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9절의 서두에 “이러므로”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원인 때문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만, 무엇을 위해서인가라고 말씀드리자면 물론, 이것은 6-8절까지의 종과 같이 노예와 같이 낮아진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낮추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기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낮아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높이 올리셨다는 것입니다. 낮아진 것은 하나님께서 높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성경 구절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3장 12절을 참조하십시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계속해서 누가복음 24장 26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히브리서 2장 10절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하나님에 의한 반전, 하나님에 의한 오델로의 역전 승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어 연약함을 가지고 부패하여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육체를 가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죄없는 분이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이 십자가형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극형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사형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벌거벗겨짐을 당하셨고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여겨지고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델로 게임의 색이 하나 하나 반전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정반대의 속성을 그리스도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즉, 십자가에 처형되었읍니다만 부활에 의해서 그 죽음이 패해버렸습니다. 부패해야 하는 육체가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 났습니다. 벌거벗김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었고 끔찍한 수치를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영광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구경거리로 전락한 예수님을 어리석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얼굴을 돌렸으나 그리스도가 이윽고 재림할 때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셨습니다.

(2)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으신 목적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로서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한번 낮아지고 그 후 높여져야 했던 것은 우리 죄인의 구원, 우리 죄인의 회복과 사실은 매우 큰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생애를 통해 종처럼 노예처럼 낮아지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고 십자가의 죽음도 역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예수님이 겪으신 일들은 필연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야 할 목적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계획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만, 그 점에 관해서는 역사적으로 신학 논쟁 가운데 많이 논의 되어 왔습니다.

우선 오해를 초래한 말이 9절의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그때까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가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말인가?”라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을 걸으셨을 때는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육신을 취하시고 인간과 합쳐진 절반은 하나님이고 절반은 인간이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한때,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인간이 되어 지상에 있으시면서 그 후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다양한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이에 대해 칼케돈 신조라는 고대 신조가 채택되어 이러한 논의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그 신조고백이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융합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분할하지 않고 분리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무엇을 말하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 계실 때 확실이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셨습니다만 이것은 인성을 취하셨을 때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중보자의 사역을 담당하시기 위해 육체를 입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것이 칼케돈 신조에서 고백되어졌습니다. 확실히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예배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 “인간인 나를 예배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이니 당장 그만두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자신에 대한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면서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도 하나님이신 분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이 됩니다. 더 말하자면 하나님이신 분이 한때 죽음을 체험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죽으셨을 때도 그리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도 변함없이 하나님 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9절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자로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고 그 육체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 획득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우리들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놀랄 수 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신 분이 종의 신분이 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종이신 분이, 완전한 인간이신 분이 하나님의 신분으로 높임을 받고 하늘의 오른쪽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율법을 성취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 목적은 타락한 인간을 중보자인 자신과 연합하여 죄의 노예로부터 구원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들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그 일을 받아 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없어도 성경에는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천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천사의 경우에는 타락한 순간에 사탄이되어 악령이 되어 그들에게 구속의 여지는 없습니다만, 인간에 대해서는 타락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후에도 중보자 예수님에 의해서 구속의 길이 확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았다는 이 믿기 어려운 성경의 주장은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사람으로서 높임을 받았을 때 우리들 죄인의 회복된 모습으로 담보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높아진 모습은 앞으로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처럼 육신을 취하시고 종과 같이 노예와 같이 낮아지시고 우리들과 하나가 되어 주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높이 들어올려졌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받고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고린도전서15장 49절)으로 그와 같은 형상 (고린도후서3장 18절, 요한일서 3장 2절, 빌립보서 3장 21절) 으로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따라(골로새서3장 10절) 회복되는 것입니다. 즉 창조된 당초의 목적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낮은 곳에 오셔서 반전시킨 목적은 그리스도가 「오델로 게임」에서 역전 승리하는 목적이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을 똑같이 반전시켜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끄러움」에서 「영광」으로 「썩을 것」에서 「썩지 않을 것」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찬양되어지는 것입니다.

(3) 결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구주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첫 번째 권면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보다 우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라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태복음 10장 37-39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보다 우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밭에 숨겨진 보화처럼 소중히 여기고 우선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서 스스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 자기 부인을 하는 길을 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고난을 체험하거나 낮아지는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9장 29절을 열어 보십시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높임을 받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반전을 통해 오델로 게임처럼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처음에는 우리들을 낮추시고 순종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오면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자신 인생을 그렇게 오랫동안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 여러분의 각각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은 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으셔서 이런식으로 나를 방치하시는 걸까?” “하나님은 왜 나는 한쪽 구석에 묻혀두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두시는 걸까?” “하나님은 왜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내 가족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하고 걱정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두움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듯이 하나님의 광야에서의 순종훈련은 이제 슬슬 끝날 것 같다”라고 예측 하는 것은 거의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높임을 받으신 중보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축복의 반전임을, 오델로 게임의 역전 승리임을 알 수 있기에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하고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모하고 높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희망을 두는 사람으로서 매일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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