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年01月29日「キリストのへりくだり 예수님의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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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2:1そこで、あなたがたに幾らかでも、キリストによる励まし、愛の慰め、“霊”による交わり、それに慈しみや憐れみの心があるなら、
2:2同じ思いとなり、同じ愛を抱き、心を合わせ、思いを一つにして、わたしの喜びを満たしてください。
2:3何事も利己心や虚栄心からするのではなく、へりくだって、互いに相手を自分よりも優れた者と考え、
2:4めいめい自分のことだけでなく、他人のことにも注意を払いなさい。
2:5互いにこのことを心がけなさい。それはキリスト・イエスにもみられるものです。
2:6キリストは、神の身分でありながら、神と等しい者であることに固執しようとは思わず、
2:7かえって自分を無にして、僕の身分になり、人間と同じ者になられました。人間の姿で現れ、
2:8へりくだって、死に至る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至るまで従順でした。
2:9このため、神はキリストを高く上げ、あらゆる名にまさる名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 2章1節~8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フィリピの教会はパウロと共に福音に参与する教会でありました。だからこそパウロにとって、フィリピの教会はパートナーであり、そしてパウロ自身の喜びでもありました。そんなフィリピ教会であっても、問題が何も無か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フィリピの教会にあった問題というのは、姉妹たちが大変用いられていた証拠であったと理解することもできますが、おそらく、教会指導者である姉妹たちにおいて、何らかの葛藤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理由は分かりませんが、一致できない問題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4:2で、「エボディアに勧め、シンティケに勧めます」と、名指しで指摘されていることから見て取れます。パウロはフィリピの教会に、「福音にふさわしい生活を送るように(1:27)」と励ましていますが、本日の箇所も、やはり、その延長線上から語られています。しかし、たとえフィリピの教会に何らかの問題があったとしても、たとえフィリピの教会が現在、福音にふさわしい生活へ向けて工事中であったとしても、「心配はない、あなた方に先立って歩まれるイエス・キリストこそ、最も低くへりくだられたのだから!」と、祝福の言葉によってパウロは励ましているのです。主イエスに結び合されて、私たちを先立って導いてくださる主イエスを常に心に抱きつつ、人生を歩ませていただけるという事は、いかに幸いなことでしょうか。本日は、パウロの勧めの言葉と、「キリスト讃歌」と呼ばれている詩を通して、御言葉の恵みに与りたいと思います。

【1】. 思いを一つにして

 1節には、「あなたがたに幾らかでも~があるならば」という文章が出て来ます。実はこの個所のギリシア語聖書を見るなら、「もし、~ならば」という構文が4回も出て来ます。「もし、あなたがたにキリストの励ましがあるならば」「もし、あなたがたに愛の慰めがあるなら」「もし、あなたがたに霊による交わりがあるならば」「もし、あなたがたに慈しみや憐みの心があるなら」ということです。大変くどい言い方でパウロは書いています。この「もし、~ならば」は、私たちが一般に考えるような、仮定法ではありません。つまり「今現在、実際にはないけれど、もし~があると仮定するなら」という意味ではなく、現在、実際に存在するものについて言及しています。ですから、この個所を日本語的に訳すなら、「あなたがたにキリストの励ましがあるので…」「あなたがたに愛の慰めがあるので…」「あなたがたに霊による交わりがあるので…」「あなたがたに慈しみや憐みの心があるので…」とした方が良く意味が通るわけです。4つの仮定ではなくて、四重の励ましということです。それゆえに、2節に書かれている四重の勧め・勧告がなされているのです。一つ目は、同じ思いとなること、二つ目は、同じ愛を抱くこと、三番目は心を併せること、四番目は思いを一つにすることです。この四重の勧めは、つまる所、一つになることの大切さ、一致することの大切さが、言われ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教会が一つになること、それこそパウロの喜びでありました。

渡り鳥が移動する時、一羽ではなく群れを成して飛んでいきますが、イギリスの王立獣医科大学の調査チームが明らかにしたところによりますと、渡り鳥のV字隊列には一定の法則があるようです。V字型の先頭でリーダー鳥が力強い羽ばたきをすると、そこに上昇気流が作られるため、斜め後ろの鳥たちが相対的に楽に飛行できるようです。飛行中にリーダー鳥の体力が落ちると、次の席に位置する鳥と席を交代します。この時、それぞれの渡り鳥がリーダーの席に立つ時間は同じだそうです。このようにして、V字型で助け合いながら移動するならば、一人で移動するより70%以上長い距離を飛行す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が分かって来ました。教会も同じように聖徒たちが、心と、思いと、愛の一致が与えられるなら、一人では越えて行くことのできない壁を、越えて行くことが出来るのです。

ですから健康な教会の指標とは、その教会に一致があるのかどうか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す。それでは、教会が一致することの大切さは分かりますが、そのために、一体何をすればいいのかについて3~4節に書かれています。ご覧ください。

何事も利己心や虚栄心からするのではなく、へりくだって、互いに相手を自分よりも優れた者と考え、めいめい自分のことだけでなく、他人のことにも注意を払いなさい。

「めいめい自分のことだけでなく、他人のことにも注意を払いなさい。」このような注意は、私たちが幼い時から、幼稚園の先生や学校の先生から、耳に痛い小言のように毎日聞かされ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めいめい自分のことだけでなく、他人のことにも注意を払いなさい!」これは、子どもでも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な内容ですが、いざ、生活の中で実行に移してみようとすると、神の御前に真実に実行することは、案外難しいということに気づかされます。表面的には、他人のためにしているように見えても、実は自分自身のためにしていることが多いからです。人の目をごまかすために、表面だけ上手く繕って、そこに心は伴っていないということは、私たちの心の中の良心が、良く知っているのであります。私たちは他人のことより、どうしても自分のことに関心があり、他人のことより、どうしても自分のことを優先的に考えてしまうものであります。キリスト者であっても、それは変わりありません。私自身、日々の営みを通して発せられる自己中心的な言葉や、自己中心的な行動を通して、果たして周りの人々に傷を与えていないだろうかと心配にならないではいられないほどです。3節に「虚栄心」という言葉が出て来ます。この言葉の意味は「空しい栄光」という意味です。真の栄光ではないという意味です。そもそも私たち人類の祖先であるアダムとエバは、「神のようになる」という空しい栄光に誘惑されて、罪を犯してしまいました。自分が神のようになれるという高慢の思いを、サタンによってその心に植え付けられてしまい、そして、その、栄光を奪い取るかのように、善悪の知る木の実を取って食べ、神の御言葉を破ってしまったのです。これが、私たち罪人全員が持っている原罪の由来でありました。ですから、この原罪のゆえに、私たちは、習慣的に高ぶってしまい、習慣的に空しい栄光に従ってしまう性質があり、神様の御言葉より、自分の関心事を優先するという、罪深い性質があるのです。へりくだって他人のために生きる人生とは、いかに私たちにとってハードルが高いことでしょうか。相手を自分よりも優れた者と考えることは、どれほど私たちにとって難しいことでしょうか。自分を利する思い、或いは、虚栄心によって、教会が一致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は、実は私たち罪人の、典型的な特徴であると言えるのです。

【2】. キリストのへりくだり

 しかし、パウロは神の恵みにより、今見て来た3~4節の勧めを行うことができると主張しているようです。そのことが5節に書かれているのですが、5節は、言ってみれば、キリスト讃歌に導く導入句でもあります。そして5節の鍵となる言葉は、「このことを心掛けなさい」という言葉だと思います。直訳しますと、「このことを心に抱きなさい」という意味ですが、この「心に抱く」という動詞は、実は2:2節にも二度出て来ています。「同じ思いを抱くこと」「一つの思いを抱くこと」です。「同じ思いを抱くこと」「一つの思いを抱くこと」これは、キリストの励ましによってできるんだ!愛の慰め、聖霊の交わりによってできるん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なぜなら、イエス・キリストが実際にその模範を示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続いて6~8節をご覧ください。いよいよキリスト讃歌と呼ばれる箇所の前半部分です。来週、後半部分を扱いたいと思います。この讃美はフィリピの兄弟姉妹、皆がよく知っている讃美だったのでしょう。この讃美の中にイエス様のご降誕される前の、イエス様の身分と、そして、この世に来てくださった後のイエス様の身分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それは「王子と乞食」の物語を彷彿させるような内容でありました。

キリストは、神の身分でありながら、神と等しい者であることに固執しようとは思わず、かえって自分を無にして、僕の身分になり、人間と同じ者になられました。人間の姿で現れ、へりくだって、死に至る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至るまで従順でした。

ここに書かれている内容は、少し不思議に感じるかもしれませんが、イエス様がこの世に来られる前の身分について語られているからです。イエス様は二千年前に初めて生を受けたのではなく、実はご降誕される前から神の身分として、神の子、ロゴスとして、その働きを既に担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様は、実に万物が創造される前から既におられ、天地の創造に携わった方でもあります。そのことが聖書に時々、チラッチラッと書かれていますが、例えばヨハネの福音書17:4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

父よ、今、御前でわたしに栄光を与えてください。世界が造られる前に、わたしがみもとで持っていたあの栄光を。

イエス・キリストは、神の身分、神のかたちであり、万物の創造主、万物の王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そのようなお方がご自身の身分や、ご自身の権利を一旦留保され、ご自分を無にされて、人間の身体を取って、この世に来られました。それが、今から二千年前の乙女マリアからお生まれになった出来事です。この時、イエス様は、神であられながら、人となってこの世に来た訳ですが、6節を見ると「神と等しい者であることに固執しようとは思わず」とあります。「固執しようとは思わず」と翻訳されたギリシア語は、直訳すると、「奪い取ることをせず」であります。この言葉は創世記3章のアダムとエバが神のようになることを、自分の力によって奪い取ろうとしたことと比較す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神のかたちに創造されたアダムとエバは、蛇にそそのかされて、自分の力で王権を奪い取り、神のようになろうとしました。まさに利己的な思い、高慢な思いから出た罪であります。しかしイエス・キリストは神のかたちであり、神の身分でありながらも、その権利を行使して、自ら奪い取ろうとはせず、時至り、御父からそれが与えられるまで、完全に委ねられたのであります。かえって自分を無にされ、僕の身分になられました。因みに「僕」という言葉は、英語のサーヴァントを思い浮かべるかもしれませんが、「奴隷」(スレイブ)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ます。神の子であるお方が、誰よりも低く、奴隷の身分として、この世に来られ、低くへりくだりました。そして十字架の死に至るまで御父の御心に従順であり続けました。十字架の死とは、やむを得ず遂げることになった不慮の死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様がご自身で、自ら進み行かれた道であります。それは、罪のない神の子羊の生贄によって、ご自身の民を救い出すためでありました。イエス様は、御父の救いのご計画に、最後の最後まで従順に歩まれたのです。最後の「杯」まで一滴残らず飲み干されたのです。このイエス様の成し遂げてくださった従順は、アダムが成し遂げ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従順でありました。神の戒めを全て従順に歩まれて、律法を成就してくださったイエス様が、私たちと共におられ、私たちの救い主であられるので、このイエス・キリストに結ばれている者たちは、互いに一致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あります。再び2:1節をご覧ください。救いを成就して下さったイエス様が私たちの傍に、私たちと共におられるので、聖霊が私たちに注がれていて、私たちの心の中に内住しておられるので、このイエス様からの励ましがあり、愛の慰めがあり、聖霊による交わりがあり、慈しみや憐みの心を与えてくださるので、教会は一致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イエス様がご自身の民、教会を救ってくださったその目的は、一致することであったと言っても、言い過ぎでは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適用】

 年齢も異なり、価値観が異なり、場合によっては人種も異なり、様々な人々が集まる教会の中で、どのように一致していくことができるのか、それは、イエス・キリストを頭とすることによって、聖霊が注がれ、新しく生まれ変わることによって、一致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上からの励ましがあり、上からの慰めがあり、上からの霊の交わりによって一致することが可能となるのです。この霊の一致は、私たちの自己中心的な思いから、へりくだり者へと日々私たちを造り変えてくださることでしょう。この霊の一致は、私たちを肉の行いから、愛の行いへと日々私たちを造り変えて下さることでしょう。まさに1:6のパウロの確信の通りです。

あなたがたの中で善い業を始められた方が、キリスト・イエスの日までに、その業を成し遂げてくださると、わたしは確信しています。

私たちは、イエス様にとどまるなら自然に良い業が結ばれて行くのです。以前は自分が誰よりも神様から愛されていて、自分の賜物が一番優れていると考えていましたが、上からの恵みにより、相手に与えられている賜物を尊敬できるようになり、自分よりも優れたものだと考え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変えられるのです。神の恵みを多く受けた人ほど、教会の中では、最も小さい者として、感謝をもって人々に仕える者に変えられるのであります。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예수님의 겸손

빌립보서 2장 1-8절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함께 복음선교에 참여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는 파트너이면서 바울의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빌립보 교회였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에 있었던 문제라는 것은 자매들이 크게 쓰임 받았었다고도 이해 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교회 지도자였던 자매들에게 있어서 어떤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치할 수 없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4장 2절에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라고 이름을 부르며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빌립보서 1장 27절) 격려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의 본문도 역시 그 연장선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빌립보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고 빌립보 교회가 현재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공사중이라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보다 먼저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겸손히 자신을 낮추셨으니까!”라고 축복의 말씀으로 바울은 격려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 속해 우리를 앞으로 인도해 주시는 주 예수님을 항상 마음에 품으면서 인생을 걸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오늘은 바울의 권면의 말과 “그리스도를 높이는 찬송”이라고 불리는 시를 통해서 말씀의 은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마음을 같이 하여

1절에는 “ ~있거든”이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실은 이 구절의 헬라어 성경을 보면 “만약 ~라면”이라는 문장이 4번이나 나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 있거든” “만약 여러분에게 사랑의 무슨 위로가 있거든” “만약 여러분에게 성령의 무슨 교제가 있거든” “만약 여러분에게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 그렇습니다. 여러번 반복해서 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만약 ~있거든”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가정법이 아닙니다. 즉 “지금 실제로는 없지만, 만약~이 있다고 가정한다면”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 실제로 존재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권면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사랑의 위로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성령의 교제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긍휼과 자비가 있기 때문에…”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더 잘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4가지의 가정이 아니라 4번에 걸친 권면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을 같이 하는 것, 두 번째는 같은 사랑을 가지는 것, 세 번째는 뜻을 합하는 것, 네 번째는 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 4중의 권면은 결국은 하나가 되는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철새가 이동할 때, 한 마리가 아닌 무리를 지어어 날라갑니다만 이에 대한 인터넷 기사가 있었습니다. 영국 왕립 수의과 대학의 연구팀이 밝힌 바에 의하면 철새의 V자 대열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V자 형의 선두에서 리더 새가 강력한 날개짓을 하면 거기에 상승 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뒤에 있는 새들이 상대적으로 편하게 비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비행 중에 리더 새의 체력이 떨어지면 다음 자리에 위치한 새와 자리를 교체합니다. 이 때 각각의 철새가 리더의 자리에 서는 시간은 같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V자 형으로 서로 도우면서 이동한다면 혼자 이동하는 것보다 70% 이상 긴 거리를 비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마음과 생각과 사랑의 일치가 주어지면 혼자서는 넘어갈 수 없는 벽을 넘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의 지표란 그 교회에 일치가 있는지 어떤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일치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은 알겠지만 이를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3-4절에 적혀 있습니다. 참조 하십시오.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각자 자기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배려하세요”라는 말은 우리들이 어릴 때 부터 유치원의 선생님이나 학교 선생님들로 부터 귀가 아플 정도로 매일 들었던 말 아닐까요? 이 말은 어린 아이들도 이해 할 수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막상 생활 속에서 실행에 옮겨 보려고 하면, 형식적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실천해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은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표면적으로만 잘 포장해서 거기에는 마음이 들어있지 않는 것을 우리들의 양심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타인보다는 아무래도 자신에 대해 관심이 있고 타인보다는 아무래도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그렇습니다. 저 자신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표출되는 자기중심적인 발언이나 자기 중심적인 행동을 통해서 혹시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3절에 「허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헛된 영광」이라는 의미입니다. 진짜 영광이 아니라는 의미 입니다. 원래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처럼 된다”라는 헛된 영광에 유혹되어 죄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이 사탄에 의해서 그 마음에 심어지고 그리고 그 영광을 빼앗는 것 처럼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취하여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들 죄인 모두가 가진 「원죄의 기원」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죄 때문에 우리는 습관적으로 높아지려 하고 습관적으로 헛된 영광을 따르는 성질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관심사를 우선한다는 깊은 죄성이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남을 자신 보다도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어려운 일입니까? 자신의 유익을 구하거나 허영심에 의해서 교회가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들 죄인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예수님의 겸손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지금 본 3-4절의 권면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5절에 쓰여져 있는데 말하자면 5절은 그리스도를 높이는 찬송가로 이끄는 도입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5절의 열쇠가 되는 말은 “이 마음을 품으라”라는 말입니다만 이 마음에 품다라고 하는 동사는 실은 2장 2절에도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는 것” “한 마음을 품는 것”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한 마음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의 위로와 성령의 교제 안에서 우리는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6-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그리스도 찬송가라고 불리우는 구절의 전반부분 입니다. 다음 주 후반부분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이 찬송가는 빌립보의 형제 자매, 모두가 잘 아는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이 찬양 속에 예수님이 탄생되기 전의 예수님의 신분과 이 세상에 오신 후의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왕자와 거지」의 이야기를 방불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신을 내려 놓으시고 종의 신분이 되어 인간과 동등하게 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여기에 쓰여진 내용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신분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처음으로 탄생하신 것이 아니라 실은 탄생하시기 전부터 하나님의 신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로서 그 역사를 이미 맡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계셨고, 천지의 창조에 관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여러 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7장 4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의 창조주, 만물의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이 자신의 신분이나 자신의 권리를 일단 유보하시고 자신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육체를 취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지금부터 2천년 전에 처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신 일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 이시면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6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쓰여 있습니다.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라고 번역된 헬라어를 직역하면 “취하지 않고”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자신의 힘으로 취하려고 한 것과 비교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뱀의 꾀임에 넘어가서 자신의 힘으로 왕권을 취하여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기적인 생각 교만한 생각에서 나온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하나님의 신분이시면서도 그 권리를 행사하여 스스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때가 되어 아버지로부터 그것이 주어질 때까지 완전히 맡기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나타내지 아니하시고 종의 신분이 되셨습니다. 덧붙여서 설명하자면 「종」이라고 하는 단어는 영어의 「서번트」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노예 (스레이브)」라고 하는 단어가 사용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누구보다도 낮고, 노예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낮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마지 못하여 하는 수 없이 이루어진 뜻밖의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 나아가신 길입니다. 그것은 죄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제물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순종하며 걸어가셨습니다. 마지막 잔까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성취하신 순종은 아담이 성취하지 못한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순종하셔서 율법을 완성해 주신 예수님이 우리들과 함께 계시고 우리들의 구세주이심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서로 일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2장 1절을 참조하십시오. 구원을 성취해주신 예수님이 우리들 옆에 우리와 함께 계시니,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들의 마음 안에 내주해 계시기 때문에 이 예수님의 격려가 있고 사랑의 위로가 있고 성령에 의한 교제가 있고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주시기 때문에 교회는 일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 교회를 구해주신 그 목적은 일치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3) 적용

연령도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종도 다르며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치해 나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성령이 임하고 새롭게 거듭난다면 일치할 수가 있습니다. 위로부터의 격려가 있고 위로부터의 위로가 있고, 위로부터의 영의 교제에 의해 일치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 영의 일치는 우리를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부터 자기를 낮추는 자로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이 영의 일치는 우리들의 육적인 행위에서 사랑의 행위에로 날마다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빌립보서 1장 6절의 바울의 확신 그대로 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가 예수님께 머물러 있으면 저절로 좋은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이전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고 있고, 자신의 은사가 제일 뛰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위로부터의 은혜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를 존중할 수 있게 되어 자신 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바뀌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교회안에서는 가장 작은 자로서 감사를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는 자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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