兄弟愛のわざ 형제에 대한 사랑의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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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5章31節~46節
31「人の子は、栄光に輝いて天使たちを皆従えて来るとき、その栄光の座に着く。
32そして、すべての国の民がその前に集められると、羊飼いが羊と山羊を分けるように、彼らをより分け、
33羊を右に、山羊を左に置く。
34そこで、王は右側にいる人たちに言う。『さあ、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天地創造の時からお前たち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国を受け継ぎなさい。
35お前たちは、わたしが飢えていたときに食べさせ、のどが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旅をしていたときに宿を貸し、
36裸のときに着せ、病気のときに見舞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たからだ。』
37すると、正しい人たちが王に答える。『主よ、いつわたしたちは、飢えておられるのを見て食べ物を差し上げ、のどが渇いておられるのを見て飲み物を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38いつ、旅をしておられるのを見てお宿を貸し、裸でおられるのを見てお着せしたでしょうか。
39いつ、病気をなさっ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訪ねしたでしょうか。』
40そこで、王は答える。『はっきり言っておく。わたしの兄弟であるこの最も小さい者の一人にしたのは、わたしにしてくれたことなのである。』
41それから、王は左側にいる人たちにも言う。『呪われた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去り、悪魔とその手下のために用意してある永遠の火に入れ。
42お前たちは、わたしが飢えていたときに食べさせず、のどが渇いたときに飲ませず、
43旅をしていたときに宿を貸さず、裸のときに着せず、病気のとき、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なかったからだ。』
44すると、彼らも答える。『主よ、いつわたしたちは、あなたが飢えたり、渇いたり、旅をしたり、裸であったり、病気であっ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でしょうか。』
45そこで、王は答える。『はっきり言っておく。この最も小さい者の一人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てくれなかったことなのである。』
46こうして、この者どもは永遠の罰を受け、正しい人たちは永遠の命にあずかるのであ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5章31節~46節
형제에 대한 사랑의 행위
2019년 4월7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을 맞이함에 있어 계속해서 교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마지막 날, 심판의 날이 올 것임을 성경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된 자로서, 그 날을 대비하여 고난을 인내하며 거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31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왕의 칭호를 받으신다는 뜻이지만, 이는 머지않아 하늘나라가 완전히 완성될 때 드러날, 위엄의 현현이 얼마나 뚜렷할지에 대한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의 속죄를 이루시고 부활하신 후,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그곳에서 왕으로서 절대적인 주권으로 천지를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필요에 따라 이 세상의 마귀의 활동을 견제하거나, 교회에 보호를 베풀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상에 남겨진 우리에게는 죄가 남아 있어, 이 세상에서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죄와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현재 우리가 믿음으로만 맛볼 수 있는 하늘나라와 그 영광과 위엄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되면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때까지 본 적 없는, 훨씬 더 밝은 빛을 발하며 영광의 보좌가 높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처럼 엄숙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제자들이 구원에 대해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복」을 바라보게 하려는 예수님의 뜻 때문입니다. 즉, 구원이라는 것은, 당시 제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넌 후, 즉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평안하고 편안한 삶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훈련이라는 과정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 인내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고백했을 때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약속된 유업, 즉 하늘나라의 상속자로 인도되기까지는 역시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거기에는 교회 생활이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제자들이 이 땅의 혼란 속에서, 고통과 박해 가운데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사랑의 섬김의 중요성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구원이 순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우리 구원의 근거가, 나열된 사랑의 봉사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가톨릭 수도사들은 35~36절에 기록된 자비로운 행위를 6가지로 구체적으로 열거하여, 즉 ① 굶주렸을 때 먹여 주는 것, ② 목마를 때 마시게 하는 것, ③ 여행자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 ④ 벌거벗었을 때 입혀 주는 것, ⑤ 병들었을 때 문병하는 것, ⑥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찾아가는 것, 이 6가지 선행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 열심히 힘썼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들이 현재 저지르고 있는 죄, 즉 간음이나 불성실, 거짓말 등의 죄는 상대적으로 경시되어, 이러한 죄에 대해 무감각해져 갔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행위를 권면하시면서, 결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배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즉, 모세에게 주어진 십계명의 두 돌판에 기록된 대로, 첫째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며,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행위가 강조되는 것은, 사랑의 행위야말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의 거룩한 삶의 열매라는 점을 경고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의 행위는 결코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다는 증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읽어 나가고자 합니다.
34절부터는 양에 관한 부분과 염소에 관한 부분으로 나뉩니다. 34~40절이 양에 관한 내용이고, 41~45절이 염소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34절과 41절은 문체가 완전히 동일합니다. 34절의「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에 이어지는 뒷 부분의 「나아와」라는 말은, 41절의 「떠나」라는 말과 대응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40절과 45절도 완전히 같은 문체입니다. 따라서 이 두 단락은 대구(対句)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럼 34-36절을 보십시오.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우리가 이 구절을 읽고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천지창조 때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심오한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이 구절만으로도 구원이 우리의 선행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며, 그런 피상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우리에게 준비된 구원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의 행위의 본질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어떠한 대가도 기대할 수 없는, 순전히 베푸는 행위입니다. 즉, 배가 고파 먹을 것이 없는 자, 헐벗은 자, 나그네 된 자, 그리고 감옥에 갇힌 자, 이처럼 보답받을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행위」를 베풀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 마음속 동기에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닙니다. 이어서 37~40절을 보십시오.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의인들은 임금의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 놀라움의 크기는「어느 때에 그런 일을 했다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이 세 번이나 이어진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행위는 일절 대가를 기대할 수 없었지만,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제자들과 지극히 동등하게 대우하셨으며, 함께 계신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토록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주님을 따르는 자들 사이의 특별히 굳게 맺어진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세상에 대한 선교도 중요해집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제자들에게 친절하게 베푸는 것은, 예수님께 친절하게 베푸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독교 선교사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실에 용기를 얻어 우리는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지역 사람들이 우리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의 행위는, 특히 이방인보다 믿음의 가족을 향해 행해져야 합니다. 비신자들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모욕과 경멸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 자신의 몸의 일부 못지않게 소중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의 행위를 베푼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행위에 이자를 더해 늘려 주시고, 보답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데 있어, 만약 우리가 주저하는 마음이 있다면, 즉시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에 떠올리도록 합시다. 다음으로 염소들에 관한 구절로 넘어가겠습니다. 41~43절을 보십시오.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축복받은 자들에게는 천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저주받은 자들에게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마귀와 그의 부하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염소들의 대답을 살펴보겠습니다. 44절입니다.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 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 대답에서 염소인 사람들은 예수님을「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곧 그들이 지금까지 양과 같은 무리에 속해 있었고, 자신들도 구원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들이 놀라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의로운 사람들의 놀라움에 비하면 매우 담담합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하나 열거하신 일들은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들은 「주여,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 겁니다. 그리고 적어도 실제로 예수님께서 곤란해하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몸을 사리지 않을 정도의 기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기꺼이 희생하고 섬기면서도, 하찮은 자들, 보잘것없는 자들에게는 아까워하며 아끼는 점에서, 그들은 계산적이었고, 염소였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염소는 있습니다. 염소와 양은 최후의 심판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려지게 됩니다.
에스겔 34:17-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에스겔 34장
1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
18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을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19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
교회에 양과 염소가 함께 있는 한, 경건하고 신실한 양은, 같은 무리 속의 염소가 난폭하게 휘저어 놓은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고, 짓밟혀 납작해진 풀을 먹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염소의 뿔에 의해 양이 다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양과 염소의 구별을 굳이 미루시는 것은, 제자들이 즉각적으로 구원의 안식에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받아들여 출발선에 섰습니다. 그 뒤에 고난의 여정이 준비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훈련되어, 우리 무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지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의 도움으로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終わりの日を迎えるにあたって引き続いて教訓を語っておられます。私たちは、キリストが再臨されること、終わりの日、清算の日が来ることを聖書の御言葉を通して知らされている者として、その日に備え、苦難を耐え忍び、聖く、正直に生きなければなりません。
31節を見ますと、キリストが天使たちと共に再臨される時、栄光の座に着くと宣言しています。つまり、その時になって、ようやく、キリストは王の称号を受ける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が、これは、やがて天の御国が完全に完成される際に、放たれる威厳の現れの明瞭さについての御言葉と考えられます。というのは、神の国はすでに到来しており、イエス様は十字架上において罪の贖いを全うされ、復活した後、父の右に座して、そこで王として絶対的な主権によって天地を支配しておられるからです。必要によってはこの世の悪魔の働きをけん制したり、教会に保護を与えたりしています。しかし、相変わらず地上に残された私たちには罪が残っており、この世にあって無秩序と混乱の中で、罪との戦いは続いています。そのような中で、現在、私たちが信仰によってのみ、味わうことのできる天の御国とその栄光と威厳が、イエス様の再臨される時になれば、完全に現れること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が、それまでに見たことのないような、はるかに明るい輝きを放ちながら、栄光の御座が高く現れることになるという意味と思われます。
キリストの国をこのように厳かな姿によって描写する理由とは、弟子たちが救いについて、現在考えているのとは、まったく異なる次元の「幸い」を仰ぎ見るようにというイエス様のお考えからです。つまり、救いとは当時の弟子たちが考えていたように一瞬にして与えられ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聖霊によって導かれるプロセスがあります。モーセが出エジプトをして紅海を渡った後、直ちにイスラエルの民に、平安な心地よい生活が訪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40年の荒野における訓練というプロセスを聖霊によって導かれて、約束の地に入るまで、忍耐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同じく、私たちはイエス様の十字架を受け入れ告白したときに、救いがスタートしました。しかし、私たちが約束の嗣業、つまり天の御国の相続に導かれるまでには、やはり訓練を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こには教会生活というプロセスがあります。キリストの体に結ばれて、聖霊によって導かれて、神の神殿にたて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弟子たちがこの地上の混沌の中で、苦しみと迫害の中にあって最後まで忍耐し、聖く、信実に生きるように励まそうとしておられるのです。
本日お読みした箇所では、愛の奉仕の重要性が教えられています。救いとは一瞬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から、本日の箇所で私たちの救いの根拠というものが、リストアップされた愛の奉仕に置かれているのか、と言うとそうでもありません。
昔、カトリックの修道士たちは、35~36節において書かれている慈悲深い業を6種類、具体的に上げて、つまり、①飢えていた時に食べさせること、②渇いていた時に飲ませること、③旅人に宿を貸すこと、④裸の時に着せてあげること、⑤病の時に見舞いをすること、⑥牢に閉じ込められていた時に訪ねること、この6種類の善行に対し特に注意が注がれ一生懸命励みました。ところが一方で自分たちが現在遂行している罪、つまり、姦淫や不誠実や偽りなどの罪は比重的に軽んじられ、こういった罪に対して鈍感になっていきました。大変愚かなことです。
イエス様は愛の業を勧めるにあたって、決して神を礼拝することを排除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つまり、モーセに授けられた十戒の二枚の石板に書かれてあるように、第一に神を正しく知り、神に礼拝を捧げることが大切であり、第二に隣人を愛することが大切です。ですから、愛の業が強調されているのは、愛の業こそ、キリストに結合された信者の聖なる生活の実であるという点を警告しているに過ぎません。愛の業とは決して救いの根拠ではなく、すでに救われている証拠に過ぎ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の点を踏まえながら、御言葉を読んでいきたいと思います。
34節から、左右により分けられた羊についての段落とヤギについての段落に分けられます。34~40節までが羊であり、41~45節までがヤギです。そして、34節と41節が全く同じ文体です。新共同訳には翻訳されていませんが、原文を見ると、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の後に「来るがよい」という言葉が挿入されています。これは41節の「離れ去れ」という言葉に呼応しています。同じように40節と45節も全く同じ文体です。ですからこの二つの段落が対句のようになっています。それでは34節~36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こで、王は右側にいる人たちに言う。『さあ、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来るがよい!」天地創造の時からお前たち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国を受け継ぎなさい。
お前たちは、わたしが飢えていたときに食べさせ、のどが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旅をしていたときに宿を貸し、
裸のときに着せ、病気のときに見舞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たからだ。』
私たちがこの箇所を読んで第一に驚かされることは、私たちの救いが天地創造の時からすでに用意さ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なんと深淵なる恵みでしょうか。ですからこの箇所だけでも救いとは私たちの善行に根拠が置かれているのではない、そのような薄っぺらい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救いは神からただで与えられる恵みです。世のどのような激しい移り変わりも、私たちに用意された救いを奪い去ることはできません。
次に、神様が喜ばれる愛の業の性質についてですが、それは一切見返りを期待できないただで捧げる業です。つまり、腹が減って食べるものを持ち合わせていない者、ボロを着た者、旅人、そして牢に閉じ込められた者、こういった返してもらえる見込みがない人々に対して「愛の業」を施しなさいと命じておられます。もし、私たちの心の動機に、見返りを求める気持ちが少しでもあれば、それは「愛の業」ではありません。続いて37~40節をご覧ください。
すると、正しい人たちが王に答える。『主よ、いつわたしたちは、飢えておられるのを見て食べ物を差し上げ、のどが渇いておられるのを見て飲み物を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いつ、旅をしておられるのを見てお宿を貸し、裸でおられるのを見てお着せしたでしょうか。
いつ、病気をなさっ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訪ねしたでしょうか。』
そこで、王は答える。『はっきり言っておく。わたしの兄弟であるこの最も小さい者の一人にしたのは、わたしにしてくれたことなのである。』
正しい人たちは王の言葉に驚きました。その驚きの大きさは、「いつ、そのようなことをしたというのでしょうか」という質問が三回に渡りされている所から伺うことができます。
愛の業は一切見返りを期待できませんでしたが、わたしの兄弟であるこの最も小さい者の一人にしたのは、わたしにしてくれたことなのである。と宣言されました。つまり、イエス様はご自身を弟子たちと極めて同等に取り扱われ、ともにおられるイエス様が、誰にも気づかれないほどに、それほどまでご自身を低く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ここにイエス様と主に従う者の特別に固く結びあわされた関係を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だからこそ私たちの世に対する宣教も重要になってきます。福音を伝えて、代弁しているキリストの弟子たちを親切に施してあげることは、イエス様に親切に施すことと同じだというのです。反対にキリスト教の宣教師の必要を満たすことができないことは、即ち、イエス様の必要を満たすことができないことと同じなのです。このことに勇気をもって私たちは世に出て行き、福音を伝え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もし地域の人々が私たちを拒絶するなら、イエス様を拒絶するのと同じことだからです。
この意味において愛の業は特に、異邦人より、信仰の家族に対してなされるべきです。ノンクリスチャンを無視しなさい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が、キリスト者が世で辱められ、侮辱を受けても、神の目には、ご自身の民がご自身の身体の一部に劣らないほど大切であるという意味からです。
さらに、もし私たちが信仰の兄弟姉妹に愛の業を施すなら、神様が私たちの小さな業に利子をつけて増し加えて、報いとして返して下さいます。かわいそうな人々を助けるに当たって、もし私たちが躊躇する心がある場合には、すぐにイエス様の姿を心に思い浮かべるようにしましょう。次にヤギたちの段落に移ります。41~43節をご覧ください。
それから、王は左側にいる人たちにも言う。『呪われた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去り、悪魔とその手下のために用意してある永遠の火に入れ。
お前たちは、わたしが飢えていたときに食べさせず、のどが渇いたときに飲ませず、
旅をしていたときに宿を貸さず、裸のときに着せず、病気のとき、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なかったからだ。』
祝福された人たちには、御国が天地創造の時から用意されていましたが、呪われた者たちには消えることのない永遠の火が、悪魔と手下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ます。それに対するヤギたちの返事を見てみましょう。44節です。
すると、彼らも答える。『主よ、いつわたしたちは、あなたが飢えたり、渇いたり、旅をしたり、裸であったり、病気であっ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でしょうか。』
この返事では、ヤギである人々がイエス様のことを「主よ、」と呼んでいます。これはつまり、彼らがこれまで羊と同じ群れに属していて、自分たちも救われて当然であると考え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
また、驚き方に注意してみますと、先ほどの正しい人たちの驚きに比べたら、とてもあっさりしています。もしかしたら彼らにとってイエス様が一つ一つ挙げられた業は、つまらないものに思われたからなのかもしれません。恐らく彼らは、「主よ、私たちはあなたの名によって預言を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奇蹟をたくさん行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言いたかったのでしょう。そして、少なくとも実際に、イエス様が困っているのを見たら、人肌脱ぐくらいの気概は持っていました。しかし、イエス様に対してなら払う犠牲や奉仕を、つまらない者たち、取るに足らない者たちに対しては出し惜しみするという点で、彼らは打算的であり、ヤギ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教会の中にもヤギはいます。ヤギと羊は最後の審判になって初めてより分けられるのです。
エゼキエル書34:17~20節をご覧ください(p1353)。
お前たち、わたしの群れよ。主なる神はこう言われる。わたしは羊と羊、雄羊と雄山羊との間を裁く。
お前たちは良い牧草地で養われていながら、牧草の残りを足で踏み荒らし、自分たちは澄んだ水を飲みながら、残りを足でかき回すことは、小さいことだろうか。
わたしの群れは、お前たちが足で踏み荒らした草を食べ、足でかき回した水を飲んでいる。
それゆえ、主なる神は彼らにこう言われる。わたし自身が、肥えた羊とやせた羊の間を裁く。
教会に羊とヤギが一緒にいる限り、敬虔で信実な羊は、同じの群れの中のヤギの乱暴によって荒らされた水を飲まざる得ないこともあれば、踏みならされてぺしゃんこになった草を食べなければならない時もある。そしてヤギの角によって羊がけがをすることもあるだろう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神様がこのように羊とヤギの区別をあえて先送りさせるのは、弟子たちが即刻的に救いの安寧に与るに違いないという考えを完全に捨てさせるためです。私たちはキリストの十字架を信じ受け入れて、スタート地点に立ちました。その後に苦難な旅路が備えられているのは、私たちがそのような中でも聖霊によって導かれ、訓練されて、私たちの群れがキリストの身体として聖なる神殿に建て上げられ、終わりの日に御国を相続させるためなのです。そのことを覚えつつ主の助けによって最後まで耐え忍ぶ者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