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年06月05日「聖霊を受けよ 성령을 받으라」

問い合わせ

日本キリスト改革派 千間台教会のホームページへ戻る

聖霊を受けよ 성령을 받으라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ヨハネによる福音書 20章19節~23節

音声ファイルのアイコン音声ファイル

礼拝説教を録音した音声ファイルを公開しています。

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20:19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はユダヤ人を恐れて、自分たちのいる家の戸に鍵をかけていた。そこへ、イエスが来て真ん中に立ち、「あなたがたに平和が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20:20そう言って、手とわき腹とをお見せになった。弟子たちは、主を見て喜んだ。
20:21イエスは重ねて言われた。「あなたがたに平和があるように。父がわたしをお遣わしになっ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遣わす。」
20:22そう言ってから、彼らに息を吹きかけて言われた。「聖霊を受けなさい。
20:23だれの罪でも、あなたがたが赦せば、その罪は赦される。だれの罪でも、あなたがたが赦さなければ、赦されないまま残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ヨハネによる福音書 20章19節~23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本日は、ペンテコステ、五旬節礼拝です。五旬節とは、過越し祭から数えて50日目の祭りという意味で、この日、ユダヤ人は伝統行事として小麦の収穫が始まったことをお祝いしました。この日、エルサレムのある家に集まって祈っていた弟子たちに、天から聖霊が下り、新しい命と、力と、賜物が与えられ、イエス・キリストを世に宣べ伝える教会が誕生しました。

しかし、本日の記事は、イエス様が復活されて地上で過ごした40日間の一部分であります。つまり、この時点では、まだイエス様は天に上げられていない訳です。ですから本日の個所を、普通「ペンテコステの聖霊降臨事件」とは、呼ばないでしょう。しかし、この箇所にはペンテコステの出来事が暗示されている、或いはヨハネによれば、まさに聖霊降臨事件を記している、と解釈する学者も何人かいるようです。その理由として、イエス様ご自身が天に上げられることについては、以前、弟子たちに予告されていますけれど(7:33、20:17)、実際の昇天については、ルカによる二つの書物(福音書と使徒言行録)を通してでしか、確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であります。マタイによる福音書にもヨハネによる福音書にも昇天記事は書かれていません。マルコ福音書には書かれている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人もいるかもしれませんが、マルコの昇天記事は、後世の人々による追加文であると言われていて、マルコ自身が書いたものではないとされています。

ヨハネ福音書によると、ルカの使徒言行録に描かれた五旬節の聖霊降臨が、実は既に復活の日の夜に起こっていたと主張しているかのようです。ですから、あの五旬節の日曜日に起こった衝撃的な事件の前に、既に教会の新しい命は息づいていて、確かに胎動していたということを、ヨハネは伝えようと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読み取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今日はこの箇所を通して、イエス様が復活した、週の初めの日の夕方に、弟子たちが聖霊を注がれて、その時に味わった喜びと平安を、皆さまと共に味わうことが出来ればと考えております。

【1】. 弟子たちの恐れ

 週の初めの日の夕方、つまり日曜日の朝早くに、マリアに復活のお姿を現された主イエスは、夕方には弟子たちにもお姿を現されました。弟子たちはこの時、何をしていたのかと言うと、自分たちのいる家の戸に鍵をかけて、恐れながら怯えていました。弟子たちが恐れるのも無理はありません。イエス様の十字架刑による死は、弟子たちにとって悪夢のような出来事であり、彼らはまだ、失意のどん底にあったからです。ナザレ人イエスを十字架刑に処するという、その目的を達成したユダヤの当局者たちが、さらに、イエスの弟子たちにも弾圧と迫害を強めるであろうことは、十分に予想されました。ところで、弟子たちは既に、女たちの証言を通してイエス様が復活されたという知らせを聞いていました。そして、ペトロとヨハネは、確かに墓の中にイエス様のご遺体がなかったことを、その目で確認していました。しかし、たとえイエス様の復活が事実であったとしても、その知らせは弟子たちにとって、何の意味もなかったようです。自分たちが生きるのか死ぬのかという瀬戸際において、果たして本当にイエス様が復活したのか、或いは、それがフェイクニュースだったのか、そんなことに構っている暇はないといった感じです。そのような時に、復活の主が現れて下さり、彼らの閉ざされていた信仰の目を開かせてくださったのです。その時、彼らの切実な恐れが相対化させられ、何ともちっぽけな問題であったかのように、吹き飛ばされてしまいました。それほど、聖霊が注がれる体験は、弟子たちにとって忘れることのできない事件だったのです。19~20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はユダヤ人を恐れて、自分たちのいる家の戸に鍵をかけていた。そこへ、イエスが来て真ん中に立ち、「あなたがたに平和が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そう言って、手とわき腹とをお見せになった。弟子たちは、主を見て喜んだ。”

恐れに震えている弟子たちの真ん中に、突然イエス様が立たれました。イエス様は、ただ肉体が蘇生したのではなく、復活の身体として蘇られました。戸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のに、一体どのようにして入って来られたのか?この質問に対しては、「今や、時間や空間に拘束されない永遠に生きる身体として復活されたため」、としか説明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それ以上は分からないからです。ただはっきりしていることは、私たちも、やがての日に、この輝かしい復活の身体に、永遠に生きる身体に蘇らせていただくということです。続いて、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平和(εἰρήνη)があるように」と言われました。ヘブライ語で「シャローム」と挨拶したと思われます。「シャローム」という挨拶は、イスラエルの民にとっては極当たり前の、普通の挨拶であります。しかし、この時、イエスさまが語った「シャローム」には格別な響きをもって弟子たちに受け止められました。なぜならその言葉は、弟子たちの極度の恐れを少しずつ溶かしていき、喜びに変えていくほどの力があったからです。以前、イエス様が弟子たちに語ってくださった、次のような言葉が思い起こされます。ヨハネ14:27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は、平和をあなたがたに残し、わたしの平和を与える。わたしはこれを、世が与えるように与えるのではない。心を騒がせるな。おびえるな。”

この言葉は、イエス様が過越しの日の告別説教の中で、弟子たちに語られた言葉です。主ご自身が与える「平和」は、世が与えるようなものではない、主ご自身しか、与えることのできない「平和」であると言っています。世が与える平和と言えば、例えば、戦争が止んで平和条約が結ばれることであったり、もっと身近な例で言えば、試験で高得点を取って先生に褒められたり、合否判定で合格に達することだと思います。私も大会の教師試験に合格するために大変苦労いたしました。合格したときには深い平安が訪れました。しかし、そのような平和、そのような平安ではないと言うのです。主ご自身しか与えることのできない「平和」が与えられる。そのことが今、まさに、復活の主によって成就されたと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それでは、その「主イエスの与える平和」とは一体どのようなものだったのでしょうか。その手がかりとなるのが、十字架の痕跡である、ご自身の手(おそらく手首と考えられますが)それと、わき腹を、弟子たちにお見せになられたことであります。十字架に架かられる前の日曜日、棕櫚の主日に、エルサレムの人々はロバの子に乗って入城されたイエス様を「ダビデの子にホサナ」と叫びながら、喜び迎えました。ところが、その後、ユダヤの当局者たちに扇動され、イエス様に対する態度を急変させて「十字架につけろ!十字架につけろ!」と叫び出し、ついには、イエス様をむち打ちにして、十字架につけてしまいました。この時、弟子たちのうちで誰一人、イエス様を助けるために立ち上がった者はい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イエス様の手首と脇腹の傷は、弟子たちがイエス様を見捨てて、従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弟子たちの弱さと、不信仰の結果でありました。それを見せられることによって、自分たちの罪深さを否応なく見つめさせられるのです。しかし、その傷を見せつつ、イエス様は重ねて「あなたがたに平和があるように」と言われました。

この言葉は弟子たちにとって信じられない言葉であり、恵みに満ち溢れた言葉でありました。もし皆さんが弟子たちの立場だったら、復活されたイエス様と最初にお会いした時に、イエス様の口から、一体どのようなお言葉をかけられると想像しますでしょうか。恐らく叱責の言葉ではないでしょうか。「お前たちはよくも、あんなことができたな。これまで、私がお前たちにどれほど良くしてやったのか考えて見ろ、なのに、私が一番大変で、一番辛かった時、お前たちは私を捨てて逃げてしまった…」。先生であるイエス様は、十分にこのような叱責を語ることが出来たはずです。しかし弟子たちの過ちについては一切触れませんでした。その代わりに、「あなたがたに平和が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のです。この言葉が弟子たちの心に深く響いたのであります。復活の主が与えて下さる平和とは、第一に、罪の全き赦しであると言うことが出来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イエス様の十字架の事件を通して、弟子たちの罪は全て覆われてしまいました。きれいさっぱり、取り除かれたのです。過去において罪人であり、神の敵であった私たちが、神様と和解されたという事でありましょう。神様は、もう弟子たちの罪を、一切記憶することはございません。イエス様の復活を通して、弟子たちは、もはや、鍵を閉めて隠れる必要はなくなりました。罪の赦しの確信が与えられ、弟子たちの内側から少しずつ恐れが消え、喜びに変えられたのであります。

【2】. 弟子たちの派遣

 第二に、復活の主が与えて下さる平和とは、私たちと神様を隔てていた罪の壁が取り崩され、イエス様の義を与えられ、光り輝く神様の御前に義人として立つことができるようにされ、神様との豊かな交わりを享受でき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交わりの目的は一つになることですね。交わりが回復されることで、御父と御子が一つであるように、イエス様と教会が一つとなったのです、御子を通して御父の御業が成就されたように、教会を通してイエス様の御心が成就されていくように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21~23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重ねて言われた。「あなたがたに平和があるように。父がわたしをお遣わしになっ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遣わす。」そう言ってから、彼らに息を吹きかけて言われた。「聖霊を受けなさい。だれの罪でも、あなたがたが赦せば、その罪は赦される。だれの罪でも、あなたがたが赦さなければ、赦されないまま残る。」”

23節において、少し気になる内容が出てきます。それは「主イエスによって遣わされた者は、人の罪を赦したり、赦さなかったりすることができる」と書かれていることです。「私たちが、自分の判断で、この人を赦すとか、あの人は赦さないとか、そんな恣意的なことがあって良いのだろうか?」と思いますね。これは勿論、そういう権限が私たちにあ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主イエスがここで言わんとしていることは、「私たちが聖霊によって新しく生かされ、人々のもとへ遣わされるのは、神にしかすることができない罪の赦しが、そこに起こされるようにするため」という事だと思います。

弟子たちは、イエス様によって聖霊を吹きかけられ、そして世に派遣されました。ここでは特定の弟子たちに限られていたかも知れませんが、後ほど五旬節の日に、全く同じ聖霊の注ぎが、不特定多数の弟子たちにおいて起こります。その時、教会が誕生し、福音を十分に伝えることができる力と賜物が与えられ、教会全体が世に派遣されるのです。このイエス様による教会の派遣、これは、21節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御父による御子の派遣がその基礎とな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父がわたしをお遣わしになっ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遣わす。」つまり、世に遣わされたキリスト者の宣教の働きとは、御子の宣教の働きの継承である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イエス様の全権大使として派遣されるのです。私たち教会は、人間的に見るなら、信仰が弱く、全く欠けの多い者たちでありますが、キリストの与えて下さる平和によって、罪赦され、交わりが回復され、このような栄光に満ちた使命を与えられ、実際にその働きに与らせていただいているのです。

今や、教会の宣教の働きに、主イエスが伴ってくださり、教会に関わる一切の業を、主イエスが導かれるのです。それは私たちにとってどれだけ大きな慰めとなるでしょうか。私たちの群れも小さいながら、月に一度伝道礼拝を捧げていますね。ラルゴによる奏楽や、合唱の奉仕は、まさに宣教の働きとして主イエスがそこに伴っていてくださり、導い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或いは皆様のお一人お一人の隠れた奉仕が、イエス様ご自身の宣教の働きとして、主が伴っていてくださり、導い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だからこそ私たちは、もはや恐れて引きこもるのではなく、大胆に世に出て行き、主イエスを証ししていくことが出来るのです。

【結論】

 女たちの証言を通して、弟子たちはイエス様が復活されたという知らせを聞いていましたが、依然として恐れにとらわれていました。しかし復活の主が現れて下さり、聖霊が注がれ、喜びと共に、彼らの閉ざされていた信仰の目が開かれたのであります。復活の主が、弟子たちに、聖霊を注ぎ、平和を与えてくださったように、今日、皆様の上にも豊かに聖霊が注がれ、主の平和が与えられています。この平和は、決して罪の赦しだけにとどまりません。隔ての壁が取り除けられ、神様との交わりが回復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御父と御子が一つであるように、イエス様と教会が一つになるためです。御子を通して御父の業が成就されたように、教会を通してイエス様の御心が成就されていくためです。天から派遣された主イエス様が人の姿を取り、苦しまれ、その後に栄光に上げ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この世で大胆に復活の主を証しし、罪の赦しを宣べ伝え、苦難を通して、栄光に入れられる者とさ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성령을 받으라

2022년 6월 5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요한복음 20장 19~23절

서론

오늘은 펜테코스트, 오순절 예배입니다. 오순절이란 유월절부터 세어 50일째 되는 축제라는 의미로 이날 유대인들은 전통행사로서 밀 수확이 시작된 것을 축하했습니다. 이날 예루살렘의 한 집에 모여 기도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성령이 내려와 새로운 생명과 능력, 은사가 주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는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사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상에서 보낸 40일간의 한 부분입니다. 즉 이 시점에서 아직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신 셈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부분은 보통 「펜테코스트의 성령강림사건」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펜테코스트의 사건이 암시되어 있다거나 요한에 의하면 바로 성령강림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몇 명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서 예수님 자신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전에 제자들에게 예고된 바 있지만(7장 33절, 20장 17절) 실제 승천에 대해서는 누가의 두 책(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요한복음에도 승천기사는 적혀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적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마가의 승천 기사는 후세 사람들의 추가 글이라고 하지 마가 자신이 쓴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누가의 사도행전에 그려진 오순절 성령강림이 사실은 이미 부활의 날 밤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오순절 일요일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이전에 이미 교회의 새로운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었고 분명히 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요한은 전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대목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 초하루 저녁에 제자들이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그때 맛보았던 기쁨과 평강을 여러분과 함께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 제자들의 두려움

주의 첫날의 저녁, 즉 일요일 아침 일찍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드러내신 주 예수님은 저녁에는 제자들에게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제자들은 이때 무엇을 하고 있었냐면 자신들이 있는 집 문을 잠그고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가 이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으로 인한 죽음은 제자들에게 악몽 같은 일이었고, 그들은 아직 실의의 구렁텅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다는 그 목적을 달성한 유대의 당국자들이 나아가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탄압과 박해를 강화할 것임은 충분히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미 여자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 무덤 속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는 것을 그 눈으로 확인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 소식은 제자들에게 별 의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하는 벼랑 끝에 서 있는데 과연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는가, 아니면 그것이 가짜 뉴스였는가, 그런 것에 관여 할 틈이 없다는 느낌입니다. 그럴 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주셔서 그들의 닫혀 있던 믿음의 눈을 뜨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간절한 두려움이 상대화되면서 정말 작은 문제였던 것처럼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만큼 성령이 부어지는 체험은 제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19,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갑자기 예수님이 오시고 가운데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육체가 소생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으로 되살아나셨습니다. 문은 잠겨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들어오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제 시간이나 공간에 구속되지 않는 영원히 사는 몸으로 부활했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이상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도 머지않아, 이 찬란한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사는 몸으로 되살아 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인사하신 것 같아요. 「샬롬」이라는 인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평범한 인사입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샬롬」

은 남다른 울림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제자들의 극도의 두려움을 조금씩 녹여 나가며 기쁨으로 바꾸어 나갈 만큼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떠오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유월절 날 하신 고별 설교 중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 자신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주 자신밖에 줄 수 없는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라고 하면 예를 들면 전쟁이 그치고 평화조약이 맺어지는 것이거나 더 친근한 예를 들자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거나 합격 여부 판정으로 합격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교단 교사 시험에 합격하느라 고생 많이 했습니다. 합격했을 때에는 깊은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화, 그런 평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 자신밖에 줄 수 없는 평강이 주어지는데 그것이 지금 바로 부활의 주인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주 예수가 주시는 평강」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그 단서가 되는 것이 십자가의 흔적인 자신의 손(아마 손목이라고 생각 됩니다만) 그리고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일요일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당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호산나」라고 외치며 기뻐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유대 당국자들에게 선동당했고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를 급변시켜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고 외쳤고 마침내 예수님을 채찍질해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이때 제자들 중 누구도 예수님을 돕기 위해 일어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손목과 옆구리 상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따르지 못한 것, 제자들의 나약함과 불신의 결과였습니다.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의 죄의 깊이를 가차없이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를 보이시며 예수님은 거듭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믿을 수 없는 말이었고 은혜로 가득찬 말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자들의 입장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도대체 어떤 말씀으로 말을 걸어오실 것이라 상상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마 질책의 말씀이 아닐까요? 「너희들은 잘도 이런 일을 하는 구나. 지금까지 내가 너희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생각해 봐라. 그런데 내가 가장 어렵고, 가장 힘들 때 너희는 나를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이런 질책을 말씀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으셨어요. 그대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제자들의 마음에 깊이 와 닿았던 것입니다. 부활의 주인이 주시는 평강이란 첫째, 죄의 완전한 용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죄는 모두 덮혀버렸습니다. 깔끔하고 말끔하게 제거된 것입니다. 과거 죄인이자 하나님의 적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였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제 제자들의 죄를 일절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은 이제 문들 닫고 숨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고 제자들의 내면에서 조금씩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2) 제자들의 파송

둘째, 부활의 주께서 주시는 평강이란 우리와 하나님을 갈라놓았던 죄의 벽이 허물어지고 예수님의 의를 부여받으며 빛나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게 되어 하나님과의 풍요로운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제의 목적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교제가 회복됨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과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통해 아버지의 역사가 성취된 것처럼 교회를 통해 예수님의 마음이 성취되어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1~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3절에서 조금 궁금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주 예수님으로 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는 사람의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두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적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판단으로 이 사람을 용서한다든가, 그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다든가, 그런 자의적인 일을 해도 좋은 것일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물론 그런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성령에 의해 거듭나고 사람들에게 보내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의 용서가 거기에 일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사 성령을 받으라고 숨을 내쉬셨고 제자들은 세상에 파송되었습니다. 여기서는 특정 제자들에게 국한되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오순절 날에 똑같은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가 불특정 다수의 제자들에게 일어납니다. 그때 교회가 탄생하고 복음을 충분히 전할 수 있는 능력과 은사가 주어지며 교회 전체가 세상에 파송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에 의한 교회의 파송, 이것은 21절에 쓰여져 있듯이 아버지에 의한 아들의 파송이 그 기초가 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즉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선교의 사역은 아들의 선교의 사역을 계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권대사로 파송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인간적으로 본다면 믿음이 약하고 많은 결핍을 가진 자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으로 인해 죄 용서받고 교제가 회복되며 이러한 영광스러운 사명을 부여받아 실제로 그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 선교의 일에 주 예수께서 함께 해 주시고 교회에 관련된 일체의 사역을 주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요? 저희 무리도 작지만 한 달에 한 번 전도예배를 드리고 있네요. 앙상블 라르고에 의한 반주나 합창의 봉사는 바로 선교의 일환으로서 주 예수님께서 거기에 함께 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혹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숨은 봉사가 예수님 자신의 선교의 일로서 주님이 함께 해 주시고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에 움츠러들지 않고 담대하게 세상에 나가 주 예수님을 증명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제자들은 여자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 주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사 성령을 받으라고 숨을 내쉬셨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기쁨과 함께 그들의 닫혀있던 믿음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부활의 주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평강을 주신 것처럼 오늘날 여러분 위에도 풍성하게 성령의 부으심이 있고 주의 평강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평강은 결코 죄의 용서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과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역사가 성취 되었듯이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이 성취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파송된 주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을 취하여 고통받고 그 후 영광스럽게 올리움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부활의 주님을 증명하고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전하며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関連する説教を探す関連する説教を探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