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年05月08日「安息日の主 안식일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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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息日の主 안식일의 주인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2章23節~28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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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2:23ある安息日に、イエスが麦畑を通って行かれると、弟子たちは歩きながら麦の穂を摘み始めた。
2:24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イエスに、「御覧なさい。なぜ、彼らは安息日にしてはならないことをするのか」と言った。
2:25イエスは言われた。「ダビデが、自分も供の者たちも、食べ物がなくて空腹だったときに何をしたか、一度も読んだことがないのか。
2:26アビアタルが大祭司であったとき、ダビデは神の家に入り、祭司のほかにはだれも食べてはならない供えのパンを食べ、一緒にいた者たちにも与えたではないか。」
2:27そして更に言われた。「安息日は、人のために定められた。人が安息日のためにあるのではない。
2:28だから、人の子は安息日の主でもあ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2章23節~28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人は、自分の行いによって義を得ようといたします。「自分はまじめに規則を守ったから」「自分がきちんと責任を果たしたから」「自分は本日やるべきタスクを行ったから」このように自分の行いによって自己義認をし、安心や安全を得ようと致します。それは決して間違ったことではないと思います。間違っ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が、それによって得られる安心とか、安全と、主イエスが与えて下さる安息の差は、私たちが想像する以上に大きいようです。信仰の道に入れられ、主イエスが与えてくださる安息が、いかに恵み深く、いかに豊かなものであるのか、その大きさに気づかされた時に初めて、私たちは本当の意味で主の日の礼拝の意味を味わう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本日は、イスラエルの民が七日目にすべての働きをやめて聖別した安息日というものが、イスラエルの民にとってどのような意味を持っていたのかについて、学んでいきたいと思います。

【1】. 安息日に麦の穂を摘む弟子たち

 ある安息日に、イエスが麦畑を通って行かれると、弟子たちは歩きながら麦の穂を摘み始めました。マタイによる福音書の平行記事を見ますと、「弟子たちは空腹になったので」(マタ12:1)と書かれています。それを見た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イエスに、「御覧なさい、なぜ、あなたの弟子たちは安息日にしてはならないことをするのか」と質問しました。

「安息日にしてはならないこと」とは、これは十戒に、「安息日を聖別し、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と書かれているのに、イエス様の弟子たちは麦の穂を収穫(或いは脱穀)しているという事を指摘しているようです。そもそも、イスラエルの民にとって安息日とは何であったのかと申しますと、それは、イスラエルの民に与えられた主なる神との「契約の印」であり、モーセを通して与えられたものです。契約の印というのは、契約を思い起こさせるものであり、新約時代で言うところの礼典のことです。新約時代の礼典には洗礼と聖餐式の二つだけですが、旧約時代には、虹、割礼、安息日の遵守、過越し祭などいろいろとありました。申命記5:15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

“あなたはかつてエジプトの国で奴隷であったが、あなたの神、主が力ある御手と御腕を伸ばしてあなたを導き出されたことを思い起こさねばならない。そのために、あなたの神、主は安息日を守るよう命じられたのである。”

従いまして、安息日は割礼と共に大切なものと見なされ、特にバビロン捕囚以降、この日に人々は会堂に集まって礼拝を捧げながら大切に守りました。安息日はイスラエルの民の、一つ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なったと言ってもいいでしょう。イエス様の時代において、ユダヤ人の生活は、この安息日を中心に繰り返されたと言っても言い過ぎではないと思います。すべてのユダヤ人はこの安息日をどのように守るべきか関心を持ち、それを正確に知ろうとしました。十戒によれば、この日を聖別するために、大人も子ども男女の奴隷も家畜も寄留者に至るまで、その日、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と規定されていますが、実際、彼らがこの日を、働かずに休んで過ごすという事は非常に難しかったと言われています。なぜなら、働かなかったことを証明することが大変難しかったからです。「いかなる仕事もしなかったこと」を証明するために、彼らはタルムードと呼ばれている、口で伝える「口伝律法」を作成しました。タルムードの中には教え(ミシュナ)の部分と、さらに教えについての補足説明(ゲマラ)の部分に分かれていまして、教え(ミシュナ)の部分には、何と613個の規定が定められていると言われています。そして、この613個の中に、特に安息日に関する規定だけを取り上げると39個の規定がありました。例えば、収穫してはならない、脱穀してはならない、一定の距離を歩いてはならないというような感じで書かれています。驚くことにこれらの規定は、今日においてもユダヤ教で食物規定と同じように厳格に守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イスラエルに行きますと安息日用のエレベーターというのがあるようですが、このエレベーターはボタンを押す必要がなく、自動で、すべての階に停車してくれるエレベーターだそうです。ボタンを押すことが仕事としたと見なされるために、このようなエレベーターが発明されたのです。

先日、私は八王子までドライブするために車に乗っていて、オレンジ色の車線変更禁止区域で、車線変更をしてしまい、白バイに捕まり、交通違反のため一点減点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これまで長い間ゴールドの免許証を維持していましたので、大変がっかりしてしまいました。それ以降、運転する時にはいつ警察に呼び止められはしないだろうかと、恐怖感を抱きつつ縮こまりながら運転をしています。恐らく日本の交通規則より、さらに厳しい規定を、ユダヤ人は安息日に自分たちに課しながら、互いに目を光らせて監視していたと思われます。

【2】. 安息日の意味

 さて、ファリサイ派の質問に対してイエス様は次のように答えました。25~26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言われた。「ダビデが、自分も供の者たちも、食べ物がなくて空腹だったときに何をしたか、一度も読んだことがないのか。アビアタルが大祭司であったとき、ダビデは神の家に入り、祭司のほかにはだれも食べてはならない供えのパンを食べ、一緒にいた者たちにも与えたではないか。」”

これはサムエル記上21章に書かれているエピソードです。ダビデはこの時、まだ王になっておらず、サウル王に命を狙われている身でありました。その逃亡生活の中で、自分と共の者たちの食べ物がなく、空腹だった時に、神の家に入り、祭司の他には誰も食べてはならない供えのパンを共の者たちと食べたのであります。それは決して無理に押し入ってパンを奪ったということではなく、サムエル記を読めば分かるように、祭司がそのパンを与えてくれたのです。この行為によって、ダビデと共の者たちが罪として咎めら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聖書は、人の必要が儀式的な律法の規定よりも優先されるということを語っているのです。簡単に言えば、律法の細かい規定は、人の必要と照らし合わせた時に、例外もあるということです。より正確に言うと、律法を字句通りに守ったとしても、必ずしも真の意味で律法を守ったことに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律法の核となる部分は、愛であるからです。イエス様は、決して律法を否定したり、律法を率先して破り、罪を犯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むしろイエス様は律法を真の意味で完全に遵守されたのです。続いて27~28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して更に言われた。「安息日は、人のために定められた。人が安息日のためにあるのではない。だから、人の子は安息日の主でもある。」”

ここの28節では、イエス様がご自身のことを指して好んで使用される「人の子」という言葉が出てまいります。「人の子」これは、2:10においても出てきました。「人の子が地上で罪を赦す権威を持っていることを知らせよう。」という御言葉です。イエス様がこの言葉を使用される時、「私」と言い換えることもできますし、「メシア」と言い換えることもできます。つまり「メシアである私こそ安息日の主である」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その意味は、イエス様こそ罪人に安息をもたらしてくださる救い主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7」という数字は、イスラエルにおいて完全数として認識されていますが、主イエスが私たちに与えて下さる安息も、この「7」という数字によって、その完全さが象徴されています。主が私たちに与えて下さる安息とは何かと言えば、究極的には罪からの分離と、永遠の命の状態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確かにイエス様が2千年前に来られ、神の国が到来し、既に私たちは、罪の赦しと、永遠の命をいただいておりますが、しかし、私たちは依然として日々罪を犯してしまいます。依然として罪の残滓が残っているのです。しかし、やがて、完全な神の安息に至るなら、罪から完全に分離されることでしょう。やがて、復活の身体が与えられるなら、死も病もない永遠の命が与えられることでしょう。その豊かな祝福はイスラエルの民に対し、七日目の安息日を通して予表され、或いは先週学びましたように、七年目の負債の免除や、七年契約の奴隷の解放、さらに言えばヨベルの年の喜びと祝福において予表されているのです。従ってイエス様が27節において「安息日は人のために定められた」と言われるのは、この言葉は私たちにとってまさに福音の宣言であると捉え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この言葉の意味は決して、安息日が人のためにあるのだから、その日は好き勝手に放蕩三昧に過ごしていいという事ではありませんね。そういう意味ではなく、この27節の言葉は、神が罪人の私たちを、罪の状態にそのまま放置されるのではなく、きっと、罪の奴隷から解放してくださり、創造の秩序を回復させてくださり、きっと、私たちに神の安息を完全に享受する、その日が来るということを教えているのです。そのことを約束するかのように、イエス様は「安息日は罪人である、あなた方のために定められた」とおっしゃってくださるのです。マタイの福音書11:28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あります。イエス様のお言葉です。

“疲れた者、重荷を負う者は、だれでも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休ませてあげよう。”

ご自身の十字架と復活によって、真の安息をもたらしてくださるイエス様こそ、私たちが本当の意味で安心できる場所であり、休める場所となるのです。安息とは完全な状態であり、究極的には罪からの分離と、永遠の命を意味しているからです。そして、反対に、人間が聖なる安息日のために何かできることなど何一つないということも言えるでしょう。だからその日は、天の祝福をただで受けなさい。天の祝福を自分の働きの代価として考えるのではなく、専ら神の恵みとして、ただで祝福を受けなさい、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るのです。

結論

 ユダヤ人は安息日の律法を、これを守ることによって安心し、自己義認の手段として捉え、またこれを守らない人々に対して、目を光らせながら監視するまでに至りました。ところが主イエスが現れた時、宗教指導者が作り出したタルムードは揺るがされました。そして彼らの持つ権威も脅か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果たしてユダヤの宗教指導者がしてきたことというのは、安息日を、本来の喜びの日ではなく、窮屈に抑圧された日、大変難しい日にしていたということが暴露されてしまったのです。そして、人は決して、自らの行いによっては、まことの安息に至ることが出来ないということが明らかにされてしまったのです。主イエスこそ安息日の主であり、主イエスこそ、人にまことの安息を与えることのできるお方であります。人間は、このお方の前にひれ伏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はファリサイ派の宗教指導者たちも決して例外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彼らも、悔い改めて、御前にひれ伏し、イエス様こそ、主、メシアであることを告白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安息日の主であられるイエス様が到来した今日も、なお「安息日は人のために定められた」という福音の宣言は語られています。まだ、イエス様を受け入れていない方は、どうぞイエス・キリストを心に受け入れ、信仰の告白を神さまに捧げ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そして、私たちの共に捧げる礼拝に参加し、神さまの豊かな祝福を、ただで享受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お祈りいたします。私たちが捧げている礼拝は、七日目の安息日ではなく、週の初めの日、主イエスが復活された日に捧げておりますけれども、神の安息の完成を待ち望むという意味においては、全く同じです。新約時代の私たちは、主イエスが復活の初穂となられたことをお祝いし、そして、信仰によって私たちも安息に入れられたこと、私たちも復活も与っていることを覚えて、週の初めの日に礼拝を捧げているのです。しかし、究極の安息の祝福は、まだ完成されていません。私たちはまだ、見ない安息の祝福を眺めながら、信仰によってその前味を味わいつつ、週の初めの日に礼拝を捧げているのです。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안식일의 주인

2022년 5월 8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마가복음 2장 23~28절

서론

사람은, 자신의 행함으로 의를 얻고자 합니다. “나는 성실하게 규칙을 지켰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책임을 다했으니까”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의 행함으로 자기를 의인으로 여기고 안심과 안전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건 결코 잘못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안심이라든가, 안전과 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의 차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큰 것 같습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가 주 예수께서 주시는 안식이 얼마나 은혜롭고 얼마나 풍요로운지 그 크기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로 주님의 날, 예배의 의미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곱째 되는 날에 모든 일을 그만두고 성별한 안식일 이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안식일에 보리 이삭을 따는 제자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보리밭을 지나가시자 제자들은 걸으면서 보리 이삭을 따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의 평행기사를 보면 「제자들이 시장하여」(마태복음 12장 1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파인들이 예수님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란 것은 십계명에 안식일을 성별하고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리 이삭을 수확(혹은 탈곡)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애초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이란 무엇이었냐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주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시」이며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언약의 표시라고 하는 것은 언약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신약시대에서 말하는 성례를 말합니다. 신약시대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의 두개뿐입니다만, 구약시대에는 무지개, 할례, 안식일의 엄수, 유월절등 여러가지 있었습니다. 신명기 5장 15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따라서 안식일은 할례와 함께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고 특히 바빌론 포로 이후 이 날, 사람들은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소중하게 지켰습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의 정체성이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의 생활은 이 안식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정확히 알려고 했습니다. 십계명에 의하면, 이 날을 성별하기 위해서 어른도 아이도 남종과 여종도 가축도 나그네에 이르기까지 그날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만 실제, 그들이 이 날을 일하지 않고 쉬면서 보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탈무드라고 불리는 입으로 전하는 「구전율법」을 만들었습니다. 탈무드 안에는 가르침 (미쉬나) 부분과 가르침에 대한 보충 설명 (게마라)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가르침 (미슈나) 부분에는 무려 613내긔 규정이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613개 중에 특히 안식일에 관한 규정만 다루면 39개의 규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확해서는 안 된다. 탈곡해서는 안 된다. 일정한 거리를 걸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이런 느낌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규정들은 오늘날에도 유대교에서 음식 규정과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안식일용 엘리베이터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 엘리베이터는 버튼을 누를 필요없이 자동으로 모든 층에 정차해 주는 엘리베이터라고 합니다. 버튼을 누르는 것도 일도 일로 간주해서 이러한 엘리베이터가 발명된 것입니다.

얼마 전 저는 하치오우지까지 드라이브하기 위해 운전을 하다가 주황색 차선 변경 금지 구역에서 차선 변경을 해버려서 흰색 오토바이에 붙잡혀 교통 위반으로 1점 감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골드 면허증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실망해 버렸습니다. 그 이후 운전할 때는 또 교통 경찰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러들며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본의 교통 규칙보다 더 엄격한 규정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자신들에게 부과하면서 서로 눈을 번득이며 감시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2) 안식일의 의미

자, 바리새파인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25,26절을 보세요.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했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것은 사무엘상 21장에 적혀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다윗은 이때 아직 왕이 되지 않았고 목숨을 노리고 있는 사울왕으로부터 쫓기고 있던 몸이었습니다. 그 도망자 생활 속에서 자신과 함께 하는 자들의 먹을 것이 없고 배고플 때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먹으면 안되는 제물인 진설병을 먹은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억지로 밀고 들어가서 진설병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사무엘기를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제사장이 그 진설병을 준 것입니다. 이 행위로 인해 다윗과 함께하는 자들이 죄를 지었다고 비난 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필요가 의식적인 율법 규정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율법의 세부 교정은 사람의 필요와 대조했을 때 예외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율법을 문구대로 지켰다고 해서 반드시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을 지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이 되는 부분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율법을 부정하거나 율법을 앞장서서 어기고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을 진정한 의미로 완전히 준수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27,28절을 만나보시죠.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여기 2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즐겨 사용하시는 「인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인자」이 말은, 2장 10절에도 나왔습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사용하실 때 「나」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고 「메시아」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메시아인 나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예수님이야말로 죄인에게 안식을 가져다 주시는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7」 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에서 완전수로 인식되고 있는데,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도 이 「7」이라는 숫자에 의해서 그 완전함이 상징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이란 무엇인가 하면 궁극적으로는 죄로부터의 분리와 영원한 생명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분명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왔고 이미 우리는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날마다 죄를 짓고 맙니다. 여전히 죄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윽고 완전한 하나님의 안식에 이른다면 죄에서 완전히 분리될 것입니다. 이윽고 부활의 신체가 주어진다면 죽음도 병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 풍요로운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곱 번째 안식일을 통해 예견되거나 지난주에 배웠듯이 일곱 번째 해의 부채의 면제나 일곱 번째 해의 노예 해방, 나아가 에벨의 해의 기쁨과 축복으로 예고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27절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라고 말씀 하신 것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바로 복음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날은 하고 싶은 대로 방탕하게 지내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 27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죄의 상태로 그대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창조의 질서를 회복시켜 주시고, 분명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온전히 누리는 그날이 올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일을 약속하듯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죄인인 너희들을 위해서 정해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로 진정한 안식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안심할 수 있는 장소이자 쉴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이란 완전한 상태이며 궁극적으로는 죄로부터의 분리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이 거룩한 안식일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날은 하늘의 복을 거저 받으라! 하늘의 축복을 자신의 행위의 댓가로서 여길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복을 받을 받으라,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결론

유대인들은 안식일 율법을 지킴으로써 안심하고 자기를 의롭게 하는 수단으로 보고 또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눈을 번득이며 감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가 나타났을 때 종교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탈무드는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권위도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과연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해온 일이라는 것은 안식일을 본래의 기쁨의 날이 아니라 갑갑하게 억압된 날, 매우 힘든 날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폭로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결코 자신의 행함에 따라 진정한 안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주 예수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요, 주 예수야말로 사람에게 진정한 안식을 줄 수 있는 분입니다. 인간은 이분 앞에 엎드려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리새파 종교 지도자들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이야말로 주이시요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도래하신 오늘날에도 여전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라고 하는 복음의 선언은 선포되고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신 분들은 부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 들이고 신앙고백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에 참가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거저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일곱째 날 안식일이 아니라 주 초하루,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에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의 안식이 완성되기를 고대한다는 의미에서는 똑 같습니다. 신약시대의 우리는 주 예수님게서 부활의 첫 이삭이 되신 것을 축하하며 믿음으로 인해 우리도 안식에 들어가게 된 것, 우리도 부활이 있음을 기억하고 주의 첫째 날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안식의 축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한 안식의 축복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그 안식의 복을 미리 맛보며 주 첫째 날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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