ユダの裏切り 유다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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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6章6節~25節
6さて、イエスがベタニアで重い皮膚病の人シモンの家におられたとき、
7一人の女が、極めて高価な香油の入った石膏の壺を持って近寄り、食事の席に着いておられるイエスの頭に香油を注ぎかけた。
8弟子たちはこれを見て、憤慨して言った。「なぜ、こんな無駄遣いをするのか。
9高く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すことができたのに。」
10イエスはこれを知って言われた。「なぜ、この人を困らせるのか。わたし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11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るが、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ない。
12この人はわたしの体に香油を注いで、わたしを葬る準備をしてくれた。
13はっきり言っておく。世界中どこでも、この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所では、この人のしたことも記念として語り伝えられるだろう。」
14そのとき、十二人の一人で、イスカリオテのユダという者が、祭司長たちのところへ行き、
15「あの男をあなたたちに引き渡せば、幾らくれますか」と言った。そこで、彼らは銀貨三十枚を支払うことにした。
16そのときから、ユダはイエスを引き渡そうと、良い機会をねらっていた。
17除酵祭の第一日に、弟子たちがイエスのところに来て、「どこに、過越の食事をなさる用意をいたしましょうか」と言った。
18イエスは言われた。「都のあの人のところに行ってこう言いなさい。『先生が、「わたしの時が近づいた。お宅で弟子たちと一緒に過越の食事をする」と言っています。』」
19弟子たちは、イエス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して、過越の食事を準備した。
20夕方になると、イエスは十二人と一緒に食事の席に着かれた。
21一同が食事をしているとき、イエスは言われ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が、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人がわたしを裏切ろうとしている。」
22弟子たちは非常に心を痛めて、「主よ、まさかわたしのことでは」と代わる代わる言い始めた。
23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わたしと一緒に手で鉢に食べ物を浸した者が、わたしを裏切る。
24人の子は、聖書に書いてあるとおりに、去って行く。だが、人の子を裏切るその者は不幸だ。生まれなかった方が、その者のためによかった。」
25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ユダが口をはさんで、「先生、まさかわたしのことでは」と言うと、イエスは言われた。「それはあなたの言ったことだ。」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6章6節~25節
유다의 배신
2019년 4월28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6장 6절~25절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하나하나의 사건에 대한 시간적인 순서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베다니에서의 향유 부음 이야기 역시, 요한복음 12장 1절에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라고 하여,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이 목요일 혹은 금요일부터 시작된다고 본다면, 그 엿새 전이므로 금요일이나 토요일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은 종려주일인 일요일인데, 그 전날 베다니에 머무르시던 때의 사건으로 이 일이 기록된 것입니다. 마태가 굳이 시간적 순서를 무시하고 이 향유 부음 사건을 유다의 배신 사건과 함께 묶어 놓은 것은, 이 두 사건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 우리가 가진 믿음은 예수님께 어떤 식으로 응답하고 있는가를 질문받게 됩니다. 베다니의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식의 응답인가, 아니면 가룟 유다식의 응답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식의 신앙인가, 유다식의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나는 마리아식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식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동시에 유다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오늘의 성경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여인이 지극히 값비싼 향유가 담긴 석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다가와 머리에 부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두 복음서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향유를 부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목까지 향유로 적셔졌다는 의미입니다. 이 값비싼 향유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보면 「나드 향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히말라야 지방 특산의 향유로, 삼백 데나리온 이상으로 평가되던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행동을 보고 분개하며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5절에는, 처음에 가룟 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하며 분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다만이 아니라 열두 제자 모두가 똑같이 그 여인을 비난했다고 기록합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검소한 삶의 모범을 보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 전에, 가난한 과부가 드린 렙톤 두 닢을 누구보다 값진 헌금으로 평가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삼백 데나리온이 넘는 향유의 「허비」를 옹호하시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여인을 옹호하신 이유는, 누구든 언제든 마리아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 속에서 마리아의 행동이 지니는 의미 때문에 이것을 옳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 준비를 의식적으로 한 것이라고까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께 헌신하고자 향유를 부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마리아가 행한 일을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보고 무조건 본받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 행위가 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겉으로만 흉내 내어, 가톨릭 교회처럼 분향을 하거나, 촛불과 화려한 장식 등에 엄청난 비용을 들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잘못」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고 장엄한, 매우 종교적으로 보이는 예배당을 짓거나 그런 예배를 연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 이 여자가 행한 일은, 바로 이때, 이 장소에서 예수님의 장례와 관련된 행위였다는 점에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언제든 누구나 할 수 있는 선행보다, 이제 잠시 후면 떠나가실 예수님을 섬기는 일, 곧 곧 속죄의 죽음을 이루시려는 주님을 생각하는 묵상과 기도가 더 「좋은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아무리 민감했다고 해도, 이때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분명히 예견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그 누구도 제대로 예측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절기 때는 안 된다고 생각하던 산헤드린 사람들에게도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완전히 불시에 닥친 사건이었습니다. 오직 주님 한 분만이 홀로 그것을 작정하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슬픔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런 때에 마리아의 향유 부음이 예수님께 유일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 행위를 장례의 준비로 해석하시고, 그녀가 행한 일이 결과적으로는 십자가 죽음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향유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가르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천하에 아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정작 그 여인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기념하고자 하신 것은 베다니의 마리아라는 인물이 아니라, 「이 여자가 행한 일」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장례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리아식 믿음」이라기보다, 오히려 「장례를 위한 믿음」, 곧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성령이 임하신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뜻을 알게 된 이상, 이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십자가를 건너뛰어 구제에만 몰두하거나, 세상을 고치겠다는 운동에만 열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그 점에서, 인간의 이념 속에서 세상 개혁을 외치는 휴머니즘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죄와 죽음의 지배에 묶여 있던 옛 자아를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내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로서 주 예수께 헌신하고, 과거의 낡은 사고방식과 죄의 습관을 완전히 벗어 버리며, 성령께 지배를 받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로마서 6장 6–11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6장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게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복음의 전제에는 항상 이 십자가의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식 응답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옛 자아는 죽었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활의 생명을 얻은 자기 자신을 예수님께 헌신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유다식 응답을 살펴봅시다. 14–16절을 보십시오.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롯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유다식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자기 야망과 비전을 기독교 위에 투영하려는 신앙 형태입니다. 유다의 배신 동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단순히 돈에 눈이 어두워 예수를 비싸게 팔아 그 돈을 횡령하려 한 정도의 작은 동기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은 삼십세겔은, 노예 한 사람의 값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더 거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산헤드린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로마 타도에 한 걸음 나아가려 한 것이었습니다. 더 상상하자면, 결국 로마 제국까지 손에 넣어 예수가 로마 황제로 군림하고, 그분의 사역을 늘 가까이서 도왔던 열두 제자는 그 제국을 열두 나라로 나누어 다스린다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릅니다.
유다는,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 준비를 했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고 있을 때, 예수님이 여러 번 친히 말씀하셨던「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수난 예고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품어 온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크게 낙심했습니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왕으로 등극하여 다른 모든 세력을 제압하고 일어나셔야 할 때라고,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때라고 여겼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장사 지내어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은 주님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유월절이 마침내 시작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니산월 14일 해 질 무렵에 어린 양을 잡고 그 고기를 먹으며,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 동안 절기를 지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출애굽기에 기록된 율법을 유대인들은 지금도 가족 단위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4월 19일에 드린 고난주간 예배 이후의 일주일이 유대인들에게는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7절에 나오는 무교절 첫날이란, 니산월 14일 목요일을 가리키며, 이 날부터 「마짜」라고 부르는 무교병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져서 날이 바뀌어 15일 금요일이 되었을 때, 「유월절 식사」를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 사람에게 가서 그날 밤 식사할 장소를 물었고, 신기하게도 준비된 곳으로 인도받게 되었습니다.
식사 준비가 마쳐지고 저녁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가족과도 같은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시고, 함께 먹고 계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였습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하고 차례로 묻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23절에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게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이는, 사람마다 각자 자기 접시를 가지고 있고 그곳에 동시에 손을 넣어 범인을 특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국물 같은 것이 담긴 공동 그릇이 하나 있고, 그곳에 빵을 찍어 먹는 방식을 말합니다. 일본으로 말하자면, 식탁 가운데 놓인 냄비에서 함께 먹는 것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같은 냄비에서 먹는 가족 같은 자, 같은 밥을 나눈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유다의 배신이 예수님께 얼마나 큰 충격과 슬픔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시편 41편 9절
의 예언 성취이기도 합니다. 그대로 들어주십시오.
시편 41편
9 내가 신뢰하며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예수님을 배반하려는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유다의 질문은 다른 제자들의 질문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 표현이 다릅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여」라고 불렀지만, 그는 「스승님」, 곧 「랍비」라고 부르며 물었습니다. 이 아주 작은 차이 속에서도 유다가 가졌던 믿음과 다른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의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후 유다도 다른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른 제자들은 회복되었지만, 유다만은 배반한 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 차이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다시 말해 유다가 가진 신앙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유다의 신앙은, 앞서 말한 것처럼, 십자가의 죽음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신앙입니다. 복음의 전제인 십자가를 뛰어넘으려는 신앙입니다. 이는 유다 자신의 경우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한 번 완전히 죽어 새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원칙을 그는 무시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 육신의 욕망에서 나오는 꿈과 야망을 예수께 투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세상과 그리스도 사이를 오가는 이중생활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성경 말씀을 읽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전에도, 기독교를 이용해 휴머니즘 사상을 외치거나, 세상 개혁을 주장하고, 사회에 대한 발언권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머릿속에서 그려 내는 세상 개혁이나, 우리 생각에서 나오는 휴머니즘적 선행은, 하나님의 뜻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믿음, 아니, 십자가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완전히 죽고, 그 후에 부활에 참여하여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복음의 전제인 십자가를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면서 걸어가도록 합시다.
四つの福音書を見ますと、一つ一つの出来事に対する時間的な順番が正確には記述されていないということに気づきます。本日のベタニアにおける香油注ぎの物語も、ヨハネの福音書12:1では、「過越祭の六日前に、イエスはベタニアに行かれた」とあり、過越し祭の6日前の事件だと書かれています。過ぎ越しの祭が木曜日、或いは金曜日から始まるとして、その六日前ですから金曜日か土曜日のことです。ということは、イエス様が子ロバに乗られてエルサレムに入場するのが、棕櫚の日の日曜日ですが、その前日、ベタニアで宿営した日の出来事として書かれているのです。マタイがあえて、時間的順序を無視して、この香油注ぎの事件をユダの裏切りの事件とセットにしているのは、香油注ぎの事件とユダの裏切りの事件と、二つ並べることによって、読者に何かを訴えたかったからと言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ですから、私たちがこの箇所を読むとき、私たちの持っている信仰は、イエス様に対しどのような応答をするのか問われてくるのです。ベタニアのマルタの妹のマリア式の応答なのか、或いは、イスカリオテのユダ式の応答なのかと言うことです。マリア式の信仰なのか、ユダ式の信仰なのかと言うことです。もちろん、私たち全員が、「自分はマリア式です」と答えることでしょう。それでは、マリア式とは一体何を意味しているのか、同時にユダ式とは何を意味しているのか、本日の聖書箇所を通して見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一人の女が、極めて高価な香油の入った石膏の壺を持ってきて、イエス様に近づき頭から注ぎかけました。ヨハネの福音書には、マリアがイエス様の足に香油を注いだと書かれています。これは二つの福音書において矛盾しているわけではなく、香油をあまりにも多く注いだために、イエス様の足元まで香油で濡ら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この高価な香油とは、マルコの福音書とヨハネの福音書を見ますと「ナルドの香油」と書かれています。それは、ヒマラヤ地方特産の香油であり、三百デナリ以上すると見積もられていました。
弟子たちはこの行いを見て、憤慨し「なぜ、こんな無駄遣いをするのか。高く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すことができたのに。」と言いました。ヨハネの福音書には(12:5)、最初に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何という無駄使いだ、と憤慨したと書かれています。マタイ福音書ではユダだけではなく12弟子全員が同じく、女を非難したと書かれています。弟子たちがそのように言うのは無理もありません。いつも、質素な生活の模範を、イエス様は見せてこられたからです。また、以前、貧しいやもめが献金したレプトン銅貨二枚を、何よりも高価な献金として評価されたこともありました。ですから、今回、イエス様が三百デナリ以上の香油の無駄遣いを、擁護されるとはまったく想定外のことだったのです。
イエス様がこのように女を擁護された理由とは、誰でもいつでも、マリアと同じような形によって行動することを期待されているのではなく、今のこの状況において、マリアの行動に含まれている意味の故に、このことを正しいとされたのであります。この時マリアが、イエス様の葬りの準備をしたとまでは言いませんが、少なくとも聖霊の感動を受けて、聖霊に導かれて、イエス様に献身しようと、香油を注いだということに対し、私たちは誰も疑いをもつことはできないでしょう。
ですから、イエス様はマリアがしたことを表面的に無条件に、私たちに見習え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はなく、この行いがなぜ神さまをお喜ばせすることになったのかを私たちに悟りを与えてくれるのです。
これを表面的に真似て、カトリック教会のように、焼香をたてたり、ろうそくの明かりと、派手な装飾などを通して、神を礼拝することに途方もない費用を投じようとする「誤り」に陥ってはなりません。神さまのためという理由によって、贅沢で華麗で荘厳ないかにも宗教的な礼拝堂を建てたり、そのような礼拝を演出すべだ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はなく、この女の行いは、この時、この場所において、イエス様の葬りと関連した行いだったという意味においてのみ、神さまをお喜ばせしたのです。11~13節をご覧ください。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るが、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ない。
この人はわたしの体に香油を注いで、わたしを葬る準備をしてくれた。
はっきり言っておく。世界中どこでも、この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所では、この人のしたことも記念として語り伝えられるだろう。」
いつでも誰でもできる善行より、今しばらくしかおられないイエス様への奉仕、つまり間もなく贖いの死をとげようとしておられる主を想う瞑想や祈りの方が、「良いこと」であると言うことを覚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しかし、マリアがいくら敏感だったからと言っても、この時すでに、イエス様の死と葬りの明確な予知を持っていたとはとても考えられません。イエス様の十字架の死を、誰一人正しく予想し、心備えた人はいなかったでしょう。祭りの時期はいけないと考えていたサンヘドリンの人々にとっても想定外の出来事として起こりました。弟子たちにとっても全く意表をつかれた出来事として起こりました。主ご自身だけが、ひとりでそれを定められ、それを成し遂げようと、悲しみの道を黙々と歩かれていたのです。そのような時、マリアの香油の注ぎが、唯一の慰めとなったのです。イエス様は彼女の意図とは別に、その行いを葬りの準備として解釈され、彼女のしたことが結果的には、十字架の死の用意となったと言ってくださったのです。ですから、この香油注ぎは、キリストの死について教える物語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イエス様が、「世界中どこでも、この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所では、この人のしたことも記念として語り伝えられるだろう」と言っているのに、肝心の女の名前を記していません。主が記念されようとしたのはベタニアのマリアという人物ではなく、「この女のしたこと」が結果的に見て、「イエスさまの葬りの準備」と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マリヤ式信仰というより、むしろ「葬りのための信仰」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弟子たちがイエス様の十字架の死の意味を悟ったのは、主の復活と昇天の後、聖霊が下った後のことではありますが、今や、私たちはそのことを悟った以上、この十字架を忘れて、十字架を飛び越して、施しに走ったり、世直しにやっきになるべき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教はその点において、人間の頭の中で世直しを訴えるヒューマニズムとは全く異なる立場に立っています。
私たちの信仰は、罪と死の支配に縛られている古い自分を、十字架によってキリストと一緒に葬り、神の子として復活することです。新しく生まれた者として主イエスに献身し、過去の古い考え方や罪の習慣を完全に脱ぎ捨て、聖霊に支配していただき、聖霊によって導かれる人生です。
ローマ6:6~11節をご覧ください。(p281)
わたしたちの古い自分が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は、罪に支配された体が滅ぼされ、もはや罪の奴隷にならないためであると知っています。
死んだ者は、罪から解放されています。
わたしたちは、キリストと共に死んだのなら、キリストと共に生きることにもなると信じます。
そして、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られたキリストはもはや死ぬことがない、と知っています。死は、もはやキリストを支配しません。
キリストが死なれたのは、ただ一度罪に対して死なれたのであり、生きておられるのは、神に対して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も自分は罪に対して死んでいるが、キリスト・イエスに結ばれて、神に対して生きているのだと考えなさい。
福音の前提には、常にこの十字架の死が、置か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マリア式の応答を私たちに適用するなら、私たちがイエス様と共に十字架に架けられて、既に古い自分は死んだということを深く瞑想することであります。もっと言えば、復活の命に与った自分自身をイエス様に献身し、聖霊によって導かれることです。一方、ユダ式の応答を見てみましょう。14~16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のとき、十二人の一人で、イスカリオテのユダという者が、祭司長たちのところへ行き、
「あの男をあなたたちに引き渡せば、幾らくれますか」と言った。そこで、彼らは銀貨三十枚を支払うことにした。
そのときから、ユダはイエスを引き渡そうと、良い機会をねらっていた。
ユダ式というのは、十字架の死をどうしても受け入れられない考え方であり、自分の野望やビジョンをキリスト教に投影しようとする信仰です。ユダの裏切りの動機について考えてみてください。彼はお金に目がつられてイエスを高値で売り、そのお金を横領しようとする、そのようなちっぽけな動機で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銀貨30シェケルとは奴隷一人の値段に過ぎないからです。実は、もっと壮大な計画を持っていました。今、この過ぎ越しの最中にエルサレムに上り、イエスがイスラエルの王であることを、サンヘドリンの人々に公に認めさせ、そして打倒ローマに向けて一歩前進することでした。さらに空想を膨らませるなら、やがてはローマ帝国をも手中に収め、イエスがローマ皇帝として君臨し、イエスの働きを常に支えてきた十二弟子は、その帝国を12の国に分割統治するという夢だったのでしょう。ユダは、今まさにマリアがご自分の葬りの用意をしたということで称賛を受けている時に、イエス様がご自身の口から何度も言われた、「わたしはエルサレムに行って長老、祭司長、律法学者たちから多くの苦しみを受けて、殺される」というあの受難告知を思い出しました。それは、他でもなく、彼の抱いていた夢が砕かれ、無残に散らされる宣言です。彼は落胆しました。このチャンスにおいて、今まさにキリストが王として、他を抑えて、のし上がらなければならない時に、そしてそれが可能でありながら「葬られる」と言っているからです。
除酵祭の第一日に、弟子たちは主に「どこに、過越しの食事をなさる用意をいたしましょうか」と尋ねました。つまり過ぎ越し祭がいよいよ始まったということです。出エジプト記12章を見ますと、ニサンの月の14日の日が暮れてから、羊を屠り、その肉を食べて15日~21日までの1週間、祭の期間を過ごす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余談ですが、この出エジプト記に書かれている律法を、ユダヤ人は今でも家族ごとで守っています。私たちが受難日礼拝を捧げた4/19からの一週間がユダヤ人にとって過ぎ越しの祭の期間でした。ですから、17節にある、除酵祭の第一日とは、ニサンの月の14日の木曜日を意味し、この日から「マッツァー」と呼ばれる種を入れないパンを食べ始めました。その日が暮れた時に、つまり日付が変わって15日の金曜日になった時に「過ぎ越しの祭の食事」をとるのです。弟子たちはイエス様が言われた通りに、一人の人に、今夜、祭の食事をとるための場所について尋ねると、不思議に備えられた場所へ導かれました。
食事の準備が整えられ、夕方になってイエス様は十二人の家族同様の弟子たちと食事の席に着かれ、一緒に食事をしている時にイエス様は言われまし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が、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人がわたしを裏切ろうとしている。」
この言葉を聞いて弟子たちは非常に心を痛めます。「主よ、まさかわたしのことでは…」と代わる代わる言い始めます。イエス様は23節で次のようにお答えになっています。23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わたしと一緒に手で鉢に食べ物を浸した者が、わたしを裏切る。
これは、一人ひとりあてがわれた皿があって、ちょうどそこに同時に手を浸した者であると犯人を特定しているのではなく、スープのようなものが入っている共通の鉢があって、そこにパンを浸した者という意味です。日本でいうなら、食卓の真中に置かれた鍋のような感じです。ですから、ここでイエス様は、同じ鍋から食べた家族のような者が、同じ釜の飯から食べた親しく近しい関係にある者が、私を裏切るということを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どれだけユダの裏切りがイエス様にとってショックな出来事であり、大きな悲しみだった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と同時にこの御言葉は詩編41:10の預言の成就でもあります。そのままお聞きください。
わたしの信頼していた仲間/わたしのパンを食べる者が/威張ってわたしを足げにします。
イエス様を裏切る張本人であるユダも、他の弟子たちと同じようにイエス様に訪ねました。25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ユダが口をはさんで、「先生、まさかわたしのことでは」と言うと、イエスは言われた。「それはあなたの言ったことだ。」
ユダの問いは、他の弟子たちと、同じようであり、実は少し異なっている言葉があります。それは、他の弟子たちは「主よ、」と尋ねましたが、「先生」つまり、ラビと言いながら尋ねている所です。このほんのわずかなところにもユダが持っていた信仰と、他の弟子たちが持っていた信仰の違いを垣間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この後、ユダも他の弟子たちも同じようにイエス様を裏切り、失敗するように私たちには見え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あとで、他の弟子たちは立ち直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ユダだけは裏切ったまま立ち直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この違いは何だったのでしょうか。つまり、ユダの持っていた信仰とは何かということです。ユダの信仰、それは、先ほども言いましたが、十字架の死をどうしても受け入れられない信仰です。福音の前提である十字架を飛び越そうとするのです。それは、ユダ自身においても当てはまります。自分が罪びとであって一度完全に死んで新しく生まれ変わら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原則を、彼は無視していました。むしろ彼は自分の肉の欲から出てくる、夢や野望をイエス様に投影していたのです。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死ぬということは、世とキリストの二足をわらじを履くことではなく、すべてをキリストに捧げると言うことです。日々聖書の御言葉を読み、聖霊の御声に耳を傾け、聖霊の導きに従順することです。
今も昔もキリスト教を利用しながら、ヒューマニズムの思想を訴えたり、世直しを訴える人、社会に対し発言力を持とうとする人は多くいます。しかし、私たちの頭の中で考えている世直しとか、私たちの頭の中から出てくるヒューマニズム的な善き行ないというのは、神の御心から、離れていることが往々にしてあるということを覚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私たちは神に全てを委ね、神の御心が成就されるよう、祈りつつ、自分自身を神に捧げる者なのです。それは、マリアの信仰、否、十字架の信仰です。一度完全にイエス様と共に十字架に死んだ上で、復活に与り、聖霊によって残りの人生を歩ませていただく信仰なのです。福音の前提である十字架を片時も忘れずに、ただ十字架のみを誇りとしながら、神の子とされたことを感謝しつつ、歩ま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