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年04月10日「花婿の到来 신랑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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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婿の到来 신랑의 도래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2章18節~22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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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2:18ヨハネの弟子たち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断食していた。そこで、人々はイエス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ヨハネの弟子たちとファリサイ派の弟子たちは断食しているのに、なぜ、あなたの弟子たちは断食しないのですか。」
2:19イエスは言われた。「花婿が一緒にいるのに、婚礼の客は断食できるだろうか。花婿が一緒にいるかぎり、断食はできない。
2:20しかし、花婿が奪い取られる時が来る。その日には、彼らは断食することになる。
2:21だれも、織りたての布から布切れを取って、古い服に継ぎを当てたりはしない。そんなことをすれば、新しい布切れが古い服を引き裂き、破れはいっそうひどくなる。
2:22また、だれも、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革袋に入れたりはしない。そんなことをすれば、ぶどう酒は革袋を破り、ぶどう酒も革袋もだめになる。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革袋に入れるものだ。」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2章18節~22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皆さまの信仰生活の中で断食をされた方はいらっしゃいますでしょうか。私は若いころ、神さまの御心を探り求めながら一日断食を何度かしたことがあります。神学校の時も、一年に一度全校祈祷日という日がありまして、その日は朝から夕方まで断食したことを覚えています。旧約聖書の律法には、年に一度、第七月の十日の贖罪の日に「断食をしなさい」、「苦行をしなさい」と定められておりまして(レビ16:29)、断食は旧約聖書の物語の中にも、何度か登場いたします。時には哀悼のしるしとして、時には悔い改めとして、時には罪の告白と祈りのために断食がなされました。また、イエス様ご自身も断食をされています。イエス様の昇天後、初代教会の弟子たちもやはり断食を続けました。ですから新約の時代になって、断食そのものが否定されたということではないようです。

本日お読みした聖書個所は、前回のイエス様がレビの家で、罪人たちや徴税人たちの仲間に加わって食事をしたという事件の後に書かれています。当時、共に食事を取るということは、相当な親密な関係を示していました。恐らく「共に食べて共に飲む」というのは、「一つになる」という言葉に言い換えることが出来るような表現だったのかも知れません。律法の戒めに忠実であろうとした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断食を年に一度とか、年に三度などと言わずに、週に二度も、月曜日と木曜日に断食するように自らに課していました。彼らは、その敬虔さにおいて、異邦人や罪人たちから、ひたすら分離するように励んでいたのです。そして洗礼者ヨハネの弟子たちも、やはり熱心に断食をしながら祈っていました。ヨハネの弟子たちとファリサイ派の集団が断食をしている中で、イエス様は罪人や異邦人と食事を取ったり、週に二度の断食をしなかったり、あえてユダヤ教の伝統を破るような振る舞いをしていた訳です。これは人々に大変奇異に見えたに違いありませんでした。そこで、ある人々がイエス様に次のように尋ねたと書かれています。2:18~19をご覧ください。

【1】. ご自身を花婿と同一視されるイエス様

 “ヨハネの弟子たち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断食していた。そこで、人々はイエス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ヨハネの弟子たちとファリサイ派の弟子たちは断食しているのに、なぜ、あなたの弟子たちは断食しないのですか。」イエスは言われた。「花婿が一緒にいるのに、婚礼の客は断食できるだろうか。花婿が一緒にいるかぎり、断食はできない。”

イエス様はこの質問に対し、逆に質問でお返しになられました。19節のイエス様の返事には、「花婿」という言葉が実は三回も出てきます。二回は確認できますが、もう一回は「婚礼の客」という言葉の中に隠されていて、直訳しますと、「花婿の部屋の客」となります。ですから、ここでイエス様の返事というのは、質問形式でありますが、その言わんとしていることは、「花婿が来ている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です。「花婿が来ているではないか!」イエス様の返事に中に暗示されたこの言葉は、聖書を読む私たちの中にも強烈に響いてまいります。ある資料によると、パレスチナでは結婚の祝宴は非常に重視されていて、ラビたちですら、この祝いに参加するため聖書の教育を中断するほどであったようです(NTD新訳聖書註解 マルコ)。つまり、それほど結婚の祝宴とは彼らにとって圧倒的な喜びの日であったというのです。それでは、聖書の中で語られている「花婿」とは、何を意味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これは、皆さまもよくご存じのように、旧約聖書では神とイスラエルの関係において、神様が花婿、イスラエルが花嫁として描写されています。代表的な御言葉として、イザヤ62:4-5をお読みさせていただきます。

“あなたは再び「捨てられた女」と呼ばれることなく/あなたの土地は再び「荒廃」と呼ばれることはない。あなたは「望まれるもの」と呼ばれ/あなたの土地は「夫を持つもの」と呼ばれる。主があなたを望まれ/あなたの土地は夫を得るからである。若者がおとめをめとるように/あなたを再建される方があなたをめとり/花婿が花嫁を喜びとするように/あなたの神はあなたを喜びとされる。”

ここでは明確に、主ヤハウェが、花婿が花嫁を喜びとするように、イスラエルを望まれ、イスラエルを喜びとされると書かれています。新約聖書を見ますと、これも皆さまがご存じのように、花婿とは具体的に御子イエス・キリストのことを指し、花嫁とは教会を指すように語られています。ヨハネ福音書3:29-30を見ると洗礼者ヨハネが主イエスを花婿と証言しています。

“花嫁を迎えるのは花婿だ。花婿の介添え人はそばに立って耳を傾け、花婿の声が聞こえると大いに喜ぶ。だから、わたしは喜びで満たされている。あの方は栄え、わたしは衰えねばならない。」”

洗礼者ヨハネは花婿の声を聞いて喜びに満たされていると言っている訳です。さらに、新約聖書の他の個所を見ると、花婿と花嫁の結婚の祝宴は、「救い」そのものとして描かれています。黙示録19:7-9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たちは喜び、大いに喜び、/神の栄光をたたえよう。小羊の婚礼の日が来て、/花嫁は用意を整えた。花嫁は、輝く清い麻の衣を着せられた。この麻の衣とは、/聖なる者たちの正しい行いである。」それから天使はわたしに、「書き記せ。小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言い、また、「これは、神の真実の言葉である」とも言った。”

このように聖書では、花婿とは神であり、具体的には来るべき救い主メシアを指しているのです。そしてイエス様は、まさにご自身を指して、「花婿が到来した。」「来るべきメシアが来られ、神の祝宴が始まった。」「福音を信じ、救いに与りなさ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神の救いの御業がまさに、イエス様のご人格と、働きにおいて始まっていると主張しているのです。神はイエス様のご人格と働きを通じて、悲しむ者、失われた者、打ちひしがれている者、罪人や徴税人を起こされ、罪の赦しを宣告し、神の家族として受け入れてくださいます。なぜなら、主イエスが、自ら彼ら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るからです。2:20節には「花婿が奪い取られる時が来る」とありますが、これは、イエス様が十字架に掛かられる受難を意味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そうすると、イエス様はご自身が受難を受けることになる、そのことこそ、ご自身が父から遣わされたメシアである証拠である!と言わんとしているようです。イエス様が罪を取り除く、救い主であられるのは、まさに罪のないお方が私たちの身代わりに十字架の死に渡されるからであります。「花婿が来た」、「来るべきメシアが到来した」、イエス様はこのように大胆にご自身のことを証しされたのです。そのお方のご人格と働きを通じて現れた神の国の新しさには、断食というこれまでの敬虔な伝統さえも揺るがすような「力」をそこに秘めていたのです。

【2】. 神の国の喜びとファリサイ派への警告

 さて、この神の国の新しさが、内側に秘めている力についてですが、それは、古い伝統の中にとても閉じ込めることができない、閉じ込めるにはあまりにも躍動力が強すぎるものでありました。21、22節には、二つの譬えを用いて、そのことが表現されています。21節をご覧ください。

“だれも、織りたての布から布切れを取って、古い服に継ぎを当てたりはしない。そんなことをすれば、新しい布切れが古い服を引き裂き、破れはいっそうひどくなる。”

この最初の譬えですが、まず織りたての新しい布切れが出てきます。新しい布切れというのは、洗濯すると縮んでしまいますね。ですからこの、織りたての新しい布切れをもって、古い服に継ぎを当てることはできない、そんなことをすれば、破れが一層ひどくなってしまうと言っています。つまり新しい布と古い布を並べてみた時に、いかに両者が交じり合わないのか、互いに相反するのかが語られています。続いて二番目の譬えを見てまいりましょう。22節をご覧ください。

“また、だれも、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革袋に入れたりはしない。そんなことをすれば、ぶどう酒は革袋を破り、ぶどう酒も革袋もだめになる。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革袋に入れるものだ。」”

ここでも、まず、新しいぶどう酒が出てきます。当時ガラス瓶などありませんでしたから、ヤギの革袋にぶどう酒を入れました。この新しい革袋は伸縮性があり、ぶどう酒の発酵に合わせて伸びるようになっていました。しかし古い革袋は、もう十分に伸びてしまっていて、これ以上伸びないため、そこにもし新しいぶどう酒を入れてしまうと革袋を破ってしまうのです。この譬えでもやはり、新しい革袋と古い革袋を並べてみて、いかに両者が交じり合わないのか、互いに相反するのかが語られています。つまり二つの譬えは、新しいものと古いものの間の、非両立性が語られている訳です。新しい秩序と古い秩序の非両立性と言ってもいいでしょう。新しい秩序とは、初代教会に代表されるキリスト教と言い換えることが出来ます。古い秩序とは、イスラエルに代表されるユダヤ教と言い換えることが出来ます。新約の教会と旧約のイスラエルは両立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言うのです。或いは、キリスト教とユダヤ教は、両立することができない、ユダヤ教のキリスト派というふうにユダヤ教の中の分派として融合しながら生き残っていくことができない、新しいものと古いものは、相反するものだと言うのです。もし融合させようとするなら、新しい布切れが古い服を引き裂き、新しいぶどう酒が古い革袋を破ることになってしまうでしょう。この新しさが内に秘めている力、これは一体何なのでしょうか。

教会とイスラエルの関係については、以前にもお話させていただいたことがあります。教会が実体であり、イスラエルが影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新しいものであるキリスト教は、古いものであるユダヤ教の完成であると説明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実体が現れれば、影は消え去るようになっているのです。建築現場を思い浮かべてみてください。足場で覆い隠された建築現場は、工事が完成して新築の建物が中から出てくると、足場が解体され、消え去りますね。或いは私はピーナツが好きなんですが、殻自体は本質ではなく、ピーナツの豆が本質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ピーナツの殻は、ピーナツの豆を内に身ごもっているのです。これと同じように、イスラエルとは教会をその体内に身ごもった足場であり、殻であると言うことが出来ます。そして内にあった教会が外に生まれ出れば、教会が誕生すれば、殻は消え去るようになっているのです。足場は解体されるのです。しかし、実際には、ユダヤ系のキリスト者の中には、この新しいものと古いものを、何とかして融合してやろうという誘惑に駆られてしまった人たちが出てきました。彼らが何をしたのかと言うと、イエス様を信じて救われた人々に対して、相変わらず割礼を施そうとしたり、あるいは、伝統的に守ってきた食物規定を相変わらず守ろうとしたのです。しかしそれは全く無駄でありました。福音の持つ新しさの故に、神の国の臨在の持つその躍動力の故に、古いものは過去へと押しやられてしまうのです。断食も、それ自体が否定され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旧約の預言の成就と律法の完成という文脈の中で、その意味は変化し、苦行という意味合いは失われ、祈り(或いは感謝)という意味合いだけが残ったと言うことが出来るのです。

【結論】

 ヨハネの弟子たち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にとって、イエス様が、あえてユダヤ教の伝統を破るような振る舞いをしていると映ってしまったのは、彼らの目に、イエス・キリストを通じて現れた神の国の新しさを理解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からと思われます。彼らがそこに目を留めても留めなくとも、神の国の新しさは、イエス・キリストのご人格とお働きを通じて現れ、目の見えない人は見えるようになり、足の不自由な人は歩けるようになり、重い皮膚病を患っている人は清められ、耳の聞こえない人は聞こえるようになり、死人が生き返り、貧しい人に福音が宣言されているのです。この新しさとは、主イエスが私たちと共にいて下さるが故の新しさであり、それは聖霊を通して世の終わりまで続く新しさであります。決して色あせてしまう新しさではありません。いつまでも命に溢れていて、いつまでも変わることのなく、新しいのです。主が共にいてくださるからです。神の国に入れられて、その恵みに与った私たちは、この神の国の新しさを、そして、その新しさが持っている躍動力を、一人でも多くの人々に宣べ伝えていく者とさせていただきたいと思います。「花婿が到来した。」「来るべきメシアが来られ、神の祝宴が始まった。」「福音を信じ、救いに与りなさい」とイエス様が招いてくださったように、私たちもこの招きの言葉を多くの人々に宣べ伝えていく者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신랑의 도래

2022년 4월 10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마가복음 2장 18~22절

서론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금식을 해 보신 분이 계실까요? 저는 젊었을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루 하는 금식을 몇 번 한 적이 있습니다. 신학교 때도 일년에 한 번 전교생 기도일이라는 날이 있었는데 그날 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금식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구약성경 율법에는 1년에 한 번씩 제 7월 10일 속죄의 날에「스스로 괴롭게 하라(금식을 하라)」라고 규정되어 있고 (레위기 16장 29절) 금식은 구약성경 이야기 속에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때로는 애도의 표시로 때로는 회개로서, 때로는 죄의 고백과 기도를 위해 금식을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금식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초대 교회 제자들 역시 금식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와서 금식 자체가 부정되었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구절은 지난 번 예수님이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세리와 함께 어울리어 식사를 했다는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마도 「함께 먹고 함께 마신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그런 표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율법의 훈계에 충실하려고 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을 1년에 한 번이라든지, 1년에 세 번이라든지 할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이나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도록 스스로에게 강요했습니다. 그들을 그 경건함에 있어서 이방인과 죄인들로부터 오로지 분리되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역시 열심히 금식을 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집단이 금식을 하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은 죄인이나 이방인과 식사를 하거나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지 않거나 굳이 유대교 전통을 깨는듯 한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매우 기이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2장 18,19절을 참조하십시오.

(1) 자신을 신랑과 동일시하시는 예수님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반대로 질문하시는 형식으로 대답하셨습니다. 19절 예수님의 대답에는 「신랑」이라는 말이 사실 세 번이나 나옵니다. 두 번은 확인할 수 있지만, 또 한 번은 「혼인 집 손님들」이라는 말 속에 숨겨져 있고 직역하면 「신랑 방 손님」이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의 대답이라고 하는 것은 질문 형식이지만 그 말씀 하려는 것은 「신랑이 이미 와 있지 않은가! 」라는 것입니다. 「신랑이 이미 와 있지 않은가! 」이 예수님의 대답 속에 암시된 이 말씀은 성경을 읽는 우리 안에도 강렬하게 울려 퍼집니다. 한 자료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에서 결혼 잔치는 매우 중시되어 랍비들조차 이 축하 연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성경교육을 중단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NTD신역성경주해 마가복음). 즉, 그만큼 결혼 잔치란 그들에게 압도적인 기쁨의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신랑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신랑, 이스라엘이 신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으로 이사야 62장 4,5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4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여기서는 분명히 주 여호와께서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이스라엘을 원하시며 이스라엘을 기뻐하신다고 적혀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이것도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신랑은 구체적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신부는 교회를 가리키듯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9,30절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주 예수를 신랑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자 요한은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쁨에 차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신약성경의 다른 곳을 보면 신랑과 신부의 결혼 축하연은 구원 그 자체로 그려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이처럼 성경에서 신랑은 하나님이며 구체적으로 오실 구원자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자신을 가리키며 「신랑이 왔다」 「올 메시아가 오고 하나님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바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애통해하는 자, 잃어버린 자, 억눌린 자, 죄인이나 세리를 일으켜 죄 사함을 선언하시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주십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께서 스스로 그들의 죄를 그 몸에 짊어지시기 때문입니다. 2장 20절에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수난을 의미한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수난을 당하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메시아라는 증거이다! 라고 말씀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구원자이신 것은 바로 무고한 분이 우리 대신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졌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왔다」 「올 메시아가 왔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담하게 자신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새로움에는 금식이라는 그 동안의 경건한 전통마저 뒤흔들 수 있는 「힘」을 거기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바리새파에 대한 경고

자 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움이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힘에 대해서인데 그것은 낡은 전통 속에 도저히 가둘 수 없는, 가두기에는 너무 역동성이 강한 것이었습니다. 21,22절에는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하여 그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세요.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이 첫 번째 비유인데요. 먼저 갓 짠 생베 조각이 나옵니다. 생베 조각이라고 하는 것은 세탁을 하면 줄어들게 되죠. 그래서 이 갓 짠 생베 조각을 가지고 낡은 옷에 붙일 수 없다. 그렇게 하면 헤어짐이 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을 나란히 놓고 봤을 때 양쪽이 얼마나 섞일 수 없는지 서로 상반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22절을 보세요.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도 먼저 새 포도주가 나옵니다. 당시 유리병 등이 없었기 때문에 염소 가죽 부대에 포도주를 넣었습니다. 이 새 가죽 부대는 신축성이 있어서 포도주의 발효에 맞춰 늘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낡은 가죽 부대는 이미 충분히 늘어나서 더 이상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새로운 포도주를 넣어 버리면 가죽 부대는 찢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도 역시 새 가죽부대와 낡은 가죽 부대를 나란히 놓고서 얼마나 양자가 섞이지 않는지, 서로 상반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두 가지 비유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사이의 비양립성이 이야기되고 있는 셈입니다. 새로운 질서와 낡은 질서의 비양립성이라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질서란 초대교회로 대표되는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낡은 질서란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유대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교회와 구약의 이스라엘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기독교와 유대교는 양립할 수 없는, 유대교의 기독교파처럼 유대교 속의 분파로 융합하면서 살아남을 수 없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은 상반된다고 말합니다. 만약 융합시키려고 한다면 생베 조각이 낡은 옷을 찢고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 부대를 찢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움이 안에 품고 있는 힘,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실체이고 이스라엘이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인 기독교는 낡은 것인 유대교의 완성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실체가 나타나면 그림자는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건축 현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발판으로 가려진 건축 현장은 공사가 완성되고 신축 건물이 안에서 나오면 발판이 해체되고 사라지죠. 다른 예를 들어 본다면 저는 땅콩을 좋아하는데 껍질 자체는 본질이 아니라 땅콩이 본질이라 할 수 있겠죠. 땅콩 껍질은 땅콩을 안에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란 교회를 그 몸속에 간직한 발판이자 껍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에 있던 교회가 밖으로 태어나면, 교회가 탄생하면 껍질은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발판은 해체 되는 거죠. 그러나 실제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을 어떻게든 융합해 보려는 유혹에 사로잡혀 버린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냐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할례를 베풀려고 하거나 아니면 전통적으로 지켜온 음식 규정을 변함없이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소용이 없었습니다. 복음이 지닌 새로움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가진 그 역동성 때문에 낡은 것은 과거로 밀려나고 맙니다. 금식도 그 자체가 부정된 것은 아니지만 구약 예언의 성취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 의미는 변화하고 고행이라는 의미는 상실되고 기도(혹은 감사)라는 의미만 남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굳이 유대교의 전통을 깨는 듯한 행동을 하시는 것으로 비쳐진 것은 그들의 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새로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곳에 눈을 두든 말든 하나님 나라의 새로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나타나며, 눈먼 사람은 보게 되고,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걸을 수 있게 되며, 나병환자가 정결함을 받고 귀머거리는 듣게 되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새로움이란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통해 세상의 끝까지 이어지는 새로움입니다. 결코 퇴색되어 버리는 새로움이 아닙니다. 언제까지나 생명이 넘치고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새로운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은혜를 입은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움을 그리고 그 새로움이 가지고 있는 역동력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신랑이 왔다」 「올 메시아가 오시고 하나님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 초청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전하는 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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