ゲツセマネの祈り 겟세마네의 기도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6章30節~46節
30一同は賛美の歌をうたってから、オリーブ山へ出かけた。
31そのとき、イエスは弟子たちに言われた。「今夜、あなたがたは皆わたしにつまずく。『わたしは羊飼いを打つ。すると、羊の群れは散ってしまう』/と書いてあるからだ。
32しかし、わたしは復活した後、あなたがたより先にガリラヤへ行く。」
33するとペトロが、「たとえ、みんな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わたし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と言った。
34イエスは言われ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あなたは今夜、鶏が鳴く前に、三度わたしのことを知らないと言うだろう。」
35ペトロは、「たとえ、御一緒に死なねばならなくなっても、あなたのこと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と言った。弟子たちも皆、同じように言った。
36それから、イエスは弟子たちと一緒にゲツセマネという所に来て、「わたしが向こうへ行って祈っている間、ここに座っていなさい」と言われた。
37ペトロおよびゼベダイの子二人を伴われたが、そのとき、悲しみもだえ始められた。
38そして、彼らに言われた。「わたしは死ぬばかりに悲しい。ここを離れず、わたしと共に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39少し進んで行って、うつ伏せになり、祈って言われた。「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どおりではなく、御心のままに。」
40それから、弟子たちのところへ戻って御覧になると、彼らは眠っていたので、ペトロ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このように、わずか一時もわたしと共に目を覚ましていられなかったのか。
41誘惑に陥らぬよう、目を覚まして祈っていなさい。心は燃えても、肉体は弱い。」
42更に、二度目に向こうへ行って祈られた。「父よ、わたしが飲まないかぎりこの杯が過ぎ去らないのでしたら、あなたの御心が行われますように。」
43再び戻って御覧になると、弟子たちは眠っていた。ひどく眠かったのである。
44そこで、彼らを離れ、また向こうへ行って、三度目も同じ言葉で祈られた。
45それから、弟子たちのところに戻って来て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まだ眠っている。休んでいる。時が近づいた。人の子は罪人たちの手に引き渡される。
46立て、行こう。見よ、わたしを裏切る者が来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6章30節~46節
겟세마네의 기도
2019년 6월2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6장 30절~46절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에서 십자가까지의 수난 이야기나, 그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음악과 그림을 영어로 「The Passion(패션)」이라고 부릅니다.「Passion」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수난, 고난」이라는 뜻도 있지만, 우선은 「정열」 또는 「열정」, 「욕망」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 격렬한 열정의 이야기 속에서도, 가장 흥분되고 격렬한 장면이라 할 만한 것이, 바로 겟세마네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일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동산에서 벌어지는 기도의 싸움은, 에덴 동산에서 벌어진 싸움과 대비하여 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시조 아담은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못하고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공포 가운데 기도드리시며 순종을 배우셨고, 기꺼이 아버지의 뜻대로 자기 자신을 구속의 희생 제물로 드려 주실 수 있었습니다.「겟세마네」는 히브리어로 「기름을 짜는 곳」, 즉 「올리브 기름을 짜는 압착장」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당시 올리브 산의 완만한 경사면 한 곳에, 올리브기름을 짜는 시설이 있었고, 그 장소가「겟세마네」라고 불렸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 종종 제자들과 함께 기도를 하시기 위해 오셨고, 유월절 밤에도 예수님은 마지막 시간을 이곳에서 기도로 보내셨습니다. 그 기도는 바로 「몸과 마음을 짜내는 것과 같은」 기도였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배신하는 자가 유다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 모두가 나로 인해 넘어질 것(한국어 개역개정에는 「나를 버리리라」고 번역되어 있음)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넘어진다」는 이 말은 헬라어로 「스칸달리조」인데, 영어의 스캔들이라는 말의 어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넘어지다」라고 말할 때는, 「신앙이 후퇴한다」거나 「상처를 입는다」정도의 뜻으로 쓰지만, 원래는 그보다 훨씬 더 무겁고 심각한 의미에서, 「배반하다」, 「믿음에서 떠나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넘어짐은, 스가랴 13장 7절을 인용하여, 예언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스가랴 13:7절의 일부를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그대로 들어 주십시오.
스가랴 13장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여기에서 분명히 만군의 주께서「양이 흩어지려니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흩어진 양들을 그대로 완전히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남아 있던 자들을 다시 모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육의 힘으로 붙들려고 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베드로는 성공할 때도, 실패할 때도 제자들 가운데서 리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 베드로의 말은, 그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결코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우쭐거리며 어리석은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단호하게 거부하시고, 그 속에 있는 자신의 약함을 돌아보게 하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서 돌이키기보다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치 단단히 선포하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굳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34~35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가 일방적으로 부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굳게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솔함과 무모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도 역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기도를 게을리해 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내면에 실제로는 없던 불굴의 용기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자신만만해져서 무모할 정도로 앞으로 나서 버린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우리 모두는 연약함을 가진「작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에 눈을 돌리지 말고, 분별 없고, 깨닫지 못한 채, 자기 분수를 넘어선 말을 하거나 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연약함을 기억하며, 성령의 도움에 의지해야 하며, 어떤 때라도 주의 뜻을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것 이상으로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악마의 유혹이나 시련과 싸울 때, 처음부터 승리를 확신하고 모든 두려움을 무시하며 기도하는 마음조차 갖지 않는데, 이는 술에 취해 전장에 나가는 전사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 도착하시자, 제자들에게 여기 앉아 있으라고 명하시고, 단지, 측근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사람만 데리고 더 깊이 들어가셨습니다. 이는 전투가 일어났을 때 위험한 전장에서 먼저 아내와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과 같아서, 예수님도 여기서 제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시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를 요청하기 위해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보고 있는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37~39절을 보십시오.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의 내면에서 갑자기 감정이 거침없이 넘쳐흘러 나오며, 순식간에 격렬한 감정으로 고조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슬퍼하시며 고민하시기 시작하시고,「내 마음이 내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슬퍼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마가복음에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라고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정상적으로 격렬한 감정은 제자들에게 놀라움과 의심을 불러일으킬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떨림, 슬픔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엎드러지신 것은 슬픔과 고민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 기도의 간절함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구절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상하다, 이것은 무슨 오류가 아닌가 생각하는 신학자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진 이 모습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만약 예수님이 두려움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구속도 사라져 버리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감정을 담당하지 않으셨다면, 죄인을 구속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두려움은 성육이 가짜가 아니라 진정으로 성육하신 것임을 보여줍니다.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분이 아니라, 온몸으로 그 고통을 경험하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는 우리 같은 하찮은 감정은 없을 것이다」라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즐거움을 거부하시고, 오히려 연약함을 가진 육신을 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기서 두려워하시는 대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분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의 법정에 서서 자신 앞에 놓인 하나님의 진노를 보시고, 동시에 죽음의 깊은 구렁을 보시며 공포에 움츠러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한꺼번에 예수님 자신에게 쏟아지려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잔은 죽음의 요소를 상징하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으로 상당히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51:17절, 예레미야25:15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대로 들어 주십시오.
이사야 51장
17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예레미야 25장
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이 두려운「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바로 예수님의 비정상적인 열정 속에 담긴, 떨며 두려워하신 비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기도를 멈추고 세 제자들에게 돌아가 보셨지만,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40~41절을 보십시오.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기도를 요청하셨습니다. 그것은 너무 슬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깐도 깨어 있을 수 없어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진정으로 외로움을 경험하신 것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함께 기도해 주었다면, 예수님의 슬픔이 조금이라도 완화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 슬픔과 고통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는 물질적인 몸과 우리의 정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은 약함을 가진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영을 비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의역하면 「영은 강하나 육신은 약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힘과 인내로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한 힘과 무기를 구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을 과신하고 육신에 의지하면 약해져서 곧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빠져 기도를 지속할 수 없게 됩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제자들도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위험과 슬픔을 느낄 때,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깨어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하나님을 잊게 하고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잠들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몸이 얼마나 위급한 기도의 과제에 무관심하고 둔감해지기 쉬운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사탄이 기도를 얼마나 싫어하고 두려워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함께 기도해 주지 않았지만, 누가복음에 따르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더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44절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22장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천사의 도움을 받으시고 성령에 충만하여 세 번의 기도 투쟁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배신자인 유다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의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하시며 마음을 굳게 하고 그들을 맞이하실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5장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여기에 기록된 것은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이라는 구원을 아버지 하나님께서부터 얻으신 것은 단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지위 때문이 아니라 기도함으로써 믿음의 순종을 갖추신 때문입니다. 우리 기도의 목적은 바로 이것에 있습니다. 믿음의 순종을 갖추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8~10절을 계속 읽습니다.
히브리서 5장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멜 깁슨 감독 이야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겟세마네의 동산은, 예수님께서 순종을 얻으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이 독일군에게 결정타를 가한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겟세마네의 동산은 에덴동산을 역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영으로 기도하는 중요성과 기도를 사탄이 가장 방해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목적이 믿음의 순종을 갖추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오늘도 기도회가 있으니 꼭 참석해 주십시오.
キリストの最後の晩餐から十字架までの受難物語やそれを取材した曲や絵画をThe Passionと言います。英語でPassionと言いますと、「受難」という意味もありますが、第一に感情の「熱情」とか、「激情」という意味です。この激しい激情物語の中でも、最も荒れ狂う場面が、このゲッセマで髪を振り乱すイエスさま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でしょう。ゲッセマネの園における祈りの戦いと対照に置かれるのが、エデンの園における戦いであるといえます。というのは、エデンの園において、人類の始祖アダムはサタンの誘惑に負けてしまい、神の戒めに従順することができず、堕落してしまいました。しかしゲッセマネの園においてイエス様は、神の審きという恐怖の中で、祈りを捧げ、従順を学び、喜んで父の御心の通りに、ご自身を贖いの供え物として明け渡していくことができたのです。ゲッセマネとは、ヘブル語で「油の絞り場」という意味です。恐らく当時オリーブ山のなだらかな斜面の一画にあるこの場所に、オリーブ油を絞る場所があって、ゲッセマネと呼ばれていたのでしょう。イエス様はここに、たびたび弟子たちと共に、祈るために来られましたが、過ぎ越し祭の夜も、イエス様は最後の時間をこの場所で祈りました。その祈りは、まさに「絞り出すような」祈りだったのです。このゲッセマネの園へ向かう途中、イエス様は、背信するのはユダだけでなく、他の弟子たちも全員、わたしに躓くと預言されました。「躓く」という言葉は、ギリシャ語で「スカンダリゾー」で、英語のスキャンダルの原語です。私たちが普段使っている「躓く」という意味は、「信仰が後退する」とか、「傷を受けた」というような意味ですが、本当はもっと重く深刻な意味で、「離反する」とか、「信仰から離れる」という意味です。その躓きとは、ゼカリヤ書13:7引用して預言の成就であるといいます。ゼカリヤ書の13:7の一部をお読みしますので、そのままお聞きください。
“万軍の主は言われる。羊飼いを撃て、羊の群れは散らされるがよい。”
ここでは確かに、万軍の主が「羊の群れは散らされるがよい」と言っています。しかし、イエス様は散らされた羊をそのまま完全に見捨ててしまうの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様が復活した後、弟子たちに先立ってガリラヤに行くと言われました。これは、再び残りの者を召し集めるためでした。弟子たちが最初ガリラヤで人を獲る漁師としてイエス様に召されたように、再度召しを受けることになるのです。しかし、このような神の摂理を理解できなかったペトロは、肉の力によって食らいつきました。いつものようにペトロは成功においても失敗においても弟子たちのリーダーとしての役割をしています。
“たとえ、みんな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わたし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
このペトロの言葉というのは、彼なりにイエス様を愛していて、決して嘘を言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無意識のうちに自分の能力を過信し、どや顔で、愚かな自己満足に耽っていたのです。ですからイエス様から、頭ごなしに否定されて、ペトロ自身の中にある弱さに目を向けるようよう戒められたのですが、それを受け入れ、反省するどころか、かえって一歩出て、固く宣言するかのように、自分の考えを主張するのです。34~35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言われ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あなたは今夜、鶏が鳴く前に、三度わたしのことを知らないと言うだろう。」ペトロは、「たとえ、御一緒に死なねばならなくなっても、あなたのこと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と言った。弟子たちも皆、同じように言った。”
ペトロが頭ごなしに否定されたのにも関わらず、他の弟子たちもペトロと同じように、イエス様に固く宣言して、自分たちの軽率さと無謀さを見せているのは、彼らもやはり、自分の弱さについて全く認識していなかったと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弟子たちは祈りを疎かにしてしまったため、彼らの内には実際なかった不屈の勇気が、あたかもあるように勘違いしてしまい、自信満々になって無謀なほどに前に出すぎてしまったのです。このことを通して私たちが学ぶことができるのは、第一に、私たちは誰でも弱さを持っている「小さき者」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自分の弱さには目を向けず、無分別で、弁えのない、分を超えたことを言ったり、行ってはなりません。私たちは常に自分の弱さを覚えて、聖霊の助けにより頼むべきであって、どんな時でも主の御心を求め、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主が約束されたこと以上に、自分の力によって何かしよう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よく、キリスト者は悪魔の誘惑や試練と戦う時に、最初から勝利を確信し、すべての恐れを無視して、祈る心さえ持たなかったりしますが、それは酒を飲んで酔っ払って戦地に赴くような戦士のようなものなのです。
イエス様はゲッセマネにお着きになると、弟子たちにここに座るようにお命じになり、ただ側近の弟子である、ペトロとヨハネとヤコブの三人だけを連れて、さらに奥に進みました。これは、戦闘が起こった時に、危険な戦場から、まず妻と子を安全な場所へ移動させますが、イエス様もここで、弟子たちを安全なところに移動させて、ペトロとヨハネとヤコブだけは、共に祈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祈りを要請するために連れて行きました。すると、ペトロとヨハネとヤコブが見ている前で、イエス様の様子に変化が現れました。37~39節をご覧ください。
“ペトロおよびゼベダイの子二人を伴われたが、そのとき、悲しみもだえ始められた。そして、彼らに言われた。「わたしは死ぬばかりに悲しい。ここを離れず、わたしと共に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少し進んで行って、うつ伏せになり、祈って言われた。「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どおりではなく、御心のままに。」”
イエス様の内側からは突如、感情がよどみなくあふれ出て、見る見るうちに激情さを増していったのです。この時、イエス様は悲しみもだえ始められ、そして“死ぬばかりに悲しい”と言われました。また、マルコによる福音書を見ると、「ひどく恐れてもだえ始め」と書かれています。ルカによると、血の汗を流さ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イエス様のこの異常なほどの激しい感情は、弟子たちにとって、驚き怪しむばかりのものでした。恐ろしく、震えと悲しみに完全に捕らえられていたのです。そして、うつ伏せになったというのは、悲しみと悩みがあまりにも大きかったために、その祈りがどれくらい切実なものだったのかを示しています。この箇所に関して、神の御子であられるお方がこのような態度をされるのはおかしい、これは何かの間違いではないかと考える神学者もいるほどです。神の栄光からかけ離れたこのお姿は、一体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もしイエス様が恐れと悲しみを経験されなかったなら、どうなるでしょうか。それは、私たちの贖いも消えてなくなることを意味するでしょう。というのは、もし、イエス様が私たちの感情を担われなかったならば、罪人を贖うことなどできなかったはずだからです。イエス様の悲しみと恐れは、受肉が真似事ではなく、本当に受肉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苦痛を感じることができないお方ではなく、全身でその苦痛を体験され、勝利なされたのです。もし、「私たちが神の子であるイエス様には、我々、下々の感情なんて持っていないだろう」などと想像するなら、それはイエス様が人となられたことを否定することなのです。イエス様は神の御子として永遠の楽しみを拒まれ、むしろ弱さを持った肉体をお取りになられたのです。そして、イエス様がここで恐れている対象は何かというなら、それは単なる死に対して恐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はなくて、彼が世の全ての罪を担われ、神の審判の法廷に立たされて、ご自分の前に置かれている神の怒りをご覧になられ、同時に、死の深い淵をご覧になられて、恐怖に縮こまったと考えられるのです。人類の罪に対する「神の怒りの杯」が一挙にイエス様ご自身に注がれようとしていました。イエス様は“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と祈りました。杯というのは、死の要素を表していて、旧約聖書の中では、「神の怒りの杯」として、かなり頻繁に出て来ます。例えばその内のイザヤ書51:17、エレミヤ書25:15をお読みします。そのままお聞き下さい。
“目覚めよ、目覚めよ/立ち上がれ、エルサレム。主の手から憤りの杯を飲み/よろめかす大杯を飲み干した都よ。”
“それゆえ、イスラエルの神、主はわたしにこう言われる。「わたしの手から怒りの酒の杯を取り、わたしがあなたを遣わすすべての国々にそれを飲ませよ。”
この恐ろしい「神の怒りの杯」にこそ、イエス様の異常なパッションの、その恐れおののく秘密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様は祈りを少し中断されて三人の弟子たちのところに戻ってみると弟子は寝ていました。40~41節をご覧ください。
“それから、弟子たちのところへ戻って御覧になると、彼らは眠っていたので、ペトロ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このように、わずか一時もわたしと共に目を覚ましていられなかったのか。
誘惑に陥らぬよう、目を覚まして祈っていなさい。心は燃えても、肉体は弱い。」”
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共に祈るよう、祈りを要請しました。それはあまりにも悲しかったからです。しかし弟子たちは一時も目を覚ますことができずに眠っていたのでした。イエス様は苦しみの中で、本当に孤独を体験されたと思います。もし彼らが共に祈ってくれたなら、イエス様の悲しみは少しでも和らげられたでしょう。イエス様はさらに悲しみと苦痛のどん底に突き落とされたのでした。そして弟子たちに“誘惑に陥らぬよう、目を覚まして祈っていなさい。心は燃えても、肉体は弱い。”と命じられました。“心は燃えても、肉体は弱い。”は物質的な身体と私たちの精神の比較ではなく、肉とは弱さを持った私たち自身と神の霊を比較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意訳するなら「霊は強い、しかし肉は弱い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対して自分たちの力と忍耐力によって粘り強く祈りなさいと要求されているのではなく、自分自身の弱さを悟り、神に祈るために必要な力と武器を求めなさい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私たちは聖霊の助けを受けて、聖霊によって祈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自分自身を過信し、肉に頼るなら、弱くなり、すぐにサタンの誘惑や試みにあって、祈り続けることができなくなるのです。ルカによると、弟子たちも「悲しみの果てに眠ってしま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私たちが危険と悲しみを感じるなら、どんなに緊急事態であって、目を覚まして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かかわらず、サタンは神を忘れさせて、私たちの感覚を麻痺させて、イエス様を眺めることを出来なくさせて眠らせるのです。ここから、私たちは、私たちの体というのが、どれほど緊急の祈りの課題に対して無関心で鈍感になりやすいのかを教えられるのです。そして、サタンが祈りをどれほど嫌がり、恐れているのかを悟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一方、イエス様は、弟子たちが共に祈ってく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が、ルカによる福音書によれば、天の助けを受けて祈り続けることができたと書かれています。ルカ22:42~44をご覧ください
“「父よ、御心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のけ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御心のままに行ってください。」〔すると、天使が天から現れて、イエスを力づけた。イエスは苦しみもだえ、いよいよ切に祈られた。汗が血の滴るように地面に落ちた。〕”
イエス様はこのようにして、天使の助けをいただき、聖霊に満たされて三度の祈りの格闘を通して、御父の御心を選択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そして、いよいよ裏切者であるユダと律法学者、祭司長たちが近づいてくる足跡の聞こえる中で、「立て、行こう。見よ、わたしを裏切る者が来た。」と言いながら心を決めて彼らを迎え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ヘブル人の手紙5:7をご覧ください。
“キリストは、肉において生きておられたとき、激しい叫び声をあげ、涙を流しながら、御自分を死から救う力のある方に、祈りと願いとをささげ、その畏れ敬う態度のゆえに聞き入れられました。”
ここに書かれているのは、ゲッセマネの祈りです。ですからキリストが復活という救いを父なる神から勝ち得たのは、単に神の独り子という身分の故ではなく、祈って信仰的従順を身に付けられたからでありました。私たちの祈りの目的とは、まさにこの点にあるのであって、信仰の従順を身に着けることです。ヘブル人の手紙5:8~10を続いてお読みします。
“キリストは御子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多くの苦しみによって従順を学ばれました。そして、完全な者となられたので、御自分に従順であるすべての人々に対して、永遠の救いの源となり、神からメルキゼデクと同じような大祭司と呼ばれたのです。”
(メル・ギブソン監督の話)ですからキリスト者にとってはゲッセマネの園とは、イエス様が従順を勝ち取った決定的瞬間であったと言えるのです。それはノルマンディ上陸作戦によって連合軍がドイツ軍に決定的な一打を与えたことにもたとえられるでしょう。したがってゲッセマネの園とはエデンの園を逆転したものだと言えるのです。私たちは弟子たちの姿から、霊によって祈ることの大切さと、そして祈りを何よりもサタンが妨げるということを学びました。また、イエス様の祈りを通して、祈りの目的、それは信仰の従順を身に着けることであるということを学びました。本日も祈り会がありますので、ぜひご参加くだ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