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しい人を着せられて 새 사람을 입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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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コロサイの信徒への手紙 3章5節~11節
3:5だから、地上的なもの、すなわち、みだらな行い、不潔な行い、情欲、悪い欲望、および貪欲を捨て去りなさい。貪欲は偶像礼拝にほかならない。
3:6これらのことのゆえに、神の怒りは不従順な者たちに下ります。
3:7あなたがたも、以前このようなことの中にいたときには、それに従って歩んでいました。
3:8今は、そのすべてを、すなわち、怒り、憤り、悪意、そしり、口から出る恥ずべき言葉を捨てなさい。
3:9互いにうそをついてはなりません。古い人をその行いと共に脱ぎ捨て、
3:10造り主の姿に倣う新しい人を身に着け、日々新たにされて、真の知識に達するのです。
3:11そこには、もはや、ギリシア人とユダヤ人、割礼を受けた者と受けていない者、未開人、スキタイ人、奴隷、自由な身分の者の区別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がすべてであり、すべてのもののうちにおられるので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コロサイの信徒への手紙 3章5節~11節
새 사람을 입었으니
2021년 8월1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골로새서 3장 5~11절
서론
오늘 본문은 새 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행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종종「새 사람을 입었으니」혹은 「그리스도를 입었으니」라는 말을 사용하며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지금도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바울이 살았던 시대, 특히 구약 시대에도 옷차림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새 사람을 입었다,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말은 신분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옛 사람은 죄를 섬기는 노예였지만, 이제 구원받아 새롭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가족, 왕족으로 신분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1) 바울은 영육 이원론을 설파하는가?
5절 첫머리에「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네요. 이는 3장 1~4절을 이어받아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1~4절에는 어떤 내용이 쓰여져 있느냐하면,「위엣 것을 구하라, 너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이요, 본향인 하늘의 도성을 구하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코 불확실한 것도 애매모호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소망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죽었듯이, 우리의 채무증서도 그 십자가 위에서 찢겨져 버렸다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소망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에 함께 참여한 것처럼 우리도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새롭게 태어났다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소망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가 하늘 보좌에 앉은 것처럼 우리도 하늘 보좌에 앉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왕족이 되었다는 그런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인들도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실한 소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5절 첫머리의「그러므로」라는 말로 바울의 권면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그 신분에 걸맞게 날마다 새로워지라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인 골로새 교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믿기 전의 옛 사람은 도대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면, 5절과 8절, 두 차례에 걸쳐 죄의 목록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목록인 3:5~6를 보시기 바랍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5절에는 죄의 목록으로 ①음란 ②부정 ③사욕 ④악한 정욕, 그리고 ⑤탐심이라는 다섯 가지 성적인 죄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음란」은 헬라어로 「포르네이아」라는 단어로, 「포르노」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사욕(헬라어에서는 성욕을 의미합니다)」은 지나친 성적 욕망을 가리킵니다. 다섯 번째「탐심」에 대해서는 우상숭배 그 자체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오직 한 주인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돈이나 일이나 취미가 우상이 되어 그것들을 숭배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이 5절에 열거된 죄에 대한 계명은, 구약의 율법에서도 흔계되고 있으며, 보통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이교도들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이 금욕주의를 부정하고 있지만, 율법의 가르침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방종주의라든지, 반율법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 안에서 가끔 듣는 말 중에 “그건 율법주의지 않습니까?”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반대한다고 하는 나머지 반율법주의나 방종주의가 되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해야 합니다. 율법주의도 좋지 않지만 반율법주의도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5절에는 이 다섯 가지 죄 앞에「땅에 있는 지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땅에 있는 지체」라는 말을 들으면 역시 바울도 영적인 것이 우수하고 육적인 것이 더럽다는 영육이원론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상의 육체도 하나님의 창조물인 한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다만 육체는 연약하고, 죄에 빠지기 쉬운 성질이 있어서 육체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이 육체가 죄를 짓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혹은 선을 행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죽이라」는 명령문은 헬라어로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죄의 지배를 받던 옛 사람은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영육 이원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와「아직」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와「아직」의 관계에 있는 믿음의 이원론이라고 말하면 좋을까요? 하나님 나라는 도래했고, 우리는 이미 영적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구원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육체도 온전히 구원받아 구원이 완성되고 몸도 영원히 살 수 있는 부활의 몸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전의 죄의 지배를 받던 여러분의 몸은 이미 죽었으니, 믿음으로 몸을 예수님께 드리고 헌신하여 의의 그릇으로 쓰임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7~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새 사람을 입었으니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여기서는 두 번째 죄의 목록으로 다섯 가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①분함 ②노여움 ③악의 ④비방 ⑤입의 부끄러운 말입니다. 모두 말로 짓는 죄입니다. 이번 토쿄 올림픽에서도 SNS에서 선수들에 대한 비방이 이루어지면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말로 짓는 죄도 성적인 죄와 마찬가지로 끊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골로새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이미 새 사람을 입었으니, 새롭게 거듭났으니 오히려 그 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리스도인은 이미 옛 죄의 지배를 받던 옷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 사람은 10절에서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이 구절의 헬라어를 보면 창세기 1:27(70인역)을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7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즉 골로새서 3:10의「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라는 말씀은 창세기 1:27의 「하나님의 형상대로」와 같은 말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 가졌던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기 전에는 참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었고,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타락하고 참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이기적으로 우상숭배로 달려간 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한 그 죄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제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 가졌던 것은 이 지식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의와 거룩함도 가지고 있었다고 신학자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 구절로 에베소서 4:24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에베소서 4:24절은 골로새서 3:10과 함께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을 보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며, 그것은 의와 진리의 거룩한 삶을 살게 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앞서 말씀드린 골로새서 3:10의 「지식」과 더불어 「의」와「거룩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음으로 인해 인간은 지식과 의와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란 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인 「지식」과「의」와「거룩함」이 회복되는 것, 다시 말해 리모델링이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 사람을 입었다」라는 표현과 함께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표현도 자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3:14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고 명령하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3:27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아담이 입은 하나님의 형상보다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전적으로, 가장 정확한 하나님의 형상이시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5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하와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성장하여 완전한 지식과 의와 거룩함에 이른 상태,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된 「지식」과「의」와「거룩함」의 상태로 영적으로나마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마음의 할례를 받고, 옛 자아에 대해 죽고,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쁜 행실, 좋은 행실, 이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그리스도를 입었고
이전의 옛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직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새롭게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거듭나서 마음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거듭남으로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내주하시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지식」과 「의」와「거룩함」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생명은 여전히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고,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으며, 아직은 희미하지만 완전한 생명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지식」과「의」와「거룩함」은 실제적으로 땅에 있는 지체, 육체에도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옛 사람이 죽고, 육체의 죄를 떠나고, 말의 죄를 버리는 성화가 우리의 육체에서 조금씩이지만 진행되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는 완전히 성화될 수 없고 여전히 죄를 짓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이지만 예수님을 닮아가며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3:11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셔서 우리 마음속에 내주해주셨습니다. 더 이상 헬라인이나 유대인의 구별도 없고, 할례파와 무할례파의 구별도 없고,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과 자유인의 구별도 없습니다. 물론 영적인 의미에서 구분이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현실 사회에 눈을 돌리면 여전히 계급제도나 종과 자유인의 구분이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현실 사회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형제자매로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며 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왕의 가족, 로열패밀리로 거듭났지만, 이 땅에서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것처럼 종으로, 낮은 자로 살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 즉 「지식」과「의」와「거룩함」이 회복되고 갱신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제 행실과 우리들의 하는 말도 마찬가지로 날마다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이 성화의 걸음은 옛 자아와의 싸움이고, 좀비처럼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다시 살아나는 옛 자아와의 싸움이고, 죄와 유혹과의 싸움이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가 약속되어 있고, 승리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는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우리를 통해 「지식」과「의」와「거룩함」의 영향력을 이 세상에 미칠 수 있도록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도록 합시다.
【序】
本日の箇所は、新しい人を着せられたキリスト者の歩み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パウロはよく「新しい人を着せられたのだから」とか、「キリストを着せられたのだから」という言葉を用いて聖徒たちを励ましています。今もそうかもしれませんが、パウロが生きていた時代、そして特に旧約時代においても、服装というのは基本的にその人の身分を現わしていました。従って新しい人を着せられた、キリストを着せられたという言葉は、身分が変えられたことを意味します。つまり、私たちの古い人は罪に仕える奴隷でありましたが、今や救われて、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人は、イエス様に仕える神の僕に代えられて、神の家族、ロイヤルファミリーとして身分が変え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
【1】. パウロは霊肉二元論を説いているのか
5節の冒頭には、「だから」という言葉で始まっていますね。これは3章1~4節を受けて、「だから」という言葉で始まっています。1~4節では、何が書かれていたのかと言うと、「上にあるものを求めなさい、あなた方の帰るべき故郷であり、本来の国籍である天の都を求めなさい」ということでありました。この希望は、キリスト者にとっては、決して不確かなものでも、あいまいなものでもありません。なぜなら、この希望とは、わたしたちが十字架においてキリストに結ばれて共に死んだように、私たちの債務証書も、あの十字架上に打ち付けられ、破り捨てられたという希望だからです。また、この希望とは、わたしたちがキリストに結ばれて復活に共に与ったように、私たちも義とされて、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という希望だからです。また、この希望とは、私たちがキリストに結ばれて天の王座に着座したように、私たちも天の王座に着座し、神の子であり、ロイヤルファミリーとされたというそのような希望だからです。コロサイの人々も、このキリストにある、確かな希望に生かされているので、「だから」という5節の冒頭の言葉によってパウロの勧めが始まっています。古い自分に死んで、新しい人を着たのだから、その身分に相応しく日々新たにされなさいとパウロは勧めているのです。それでは、異邦人であるコロサイ人にとって、イエス様を信じる前の、古い自分とは、一体どのような特徴を持っていたのかと言いますと、5節と8節において二回に渡って罪のリストが列挙されています。まず最初に一回目のリスト3:5~6節をご覧ください。
“だから、地上的なもの、すなわち、みだらな行い、不潔な行い、情欲、悪い欲望、および貪欲を捨て去りなさい。貪欲は偶像礼拝にほかならない。これらのことのゆえに、神の怒りは不従順な者たちに下ります。”
5節には、罪のリストとして、①みだらな行い、②不潔な行い、③情欲、④悪い欲望、および⑤貪欲という性的な罪が、五つ列挙されています。一番目の「みだらな行い」とはギリシア語で「ポルネイア」という言葉でありまして、これはポルノの語源となっています。また、三番目の「情欲」というのもやはり、行き過ぎた性的な欲望を指しています。五番目の「貪欲」に関しては、偶像礼拝そのものであると厳しく戒めています。人は一人の主人にしか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イエス様に仕えるのか、或いはお金や仕事や趣味が偶像となってしまい、それらを崇拝するのか、二つに一つであります。
この5節に列挙されている罪に関する戒めは、旧約の律法の中でも戒められており、通常ユダヤ人が嫌悪した異教徒たちの罪であったと言えるでしょう。ということは、パウロは確かに禁欲主義を否定してはいますが、律法の教えを完全に否定しながら、放縦主義だとか、反律法主義を唱えてい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現在、私たちの教会の中で、時々耳にする言葉として、「それは律法主義でしょ」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しかし律法主義に反対するあまりに、反律法主義や放縦主義にならないように十分に気を付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律法主義もよくありませんが、反律法主義もよくないということです。
また、5節には、これらの五つの罪の前に「地上的なもの」という言葉が修飾されています。この箇所を新しい聖書協会共同訳を見ると、「地上の体に属するもの」というふうに訳が変更されています。実は、こちらの新しい訳がギリシア語聖書の直訳に近いものですが、この「地上の体に属するもの」という言葉を聞くと、やはり、パウロも霊的なものが優れていて、肉的なものが汚れているという霊肉二元論を説い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勘違いしてしまいそうになりますが、そう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地上の肉体も神の創造物である限り、それ自体、善いものであります。ただ、肉は、もろく、脆弱で、罪に傾きやすいという性質がありまして、肉体そのものは善いものですが、この肉体が罪を犯してしまう道具にもなり、或いは善を行う道具にもなるということです。
「捨て去りなさい」という命令文は、ギリシア語では「地上の体を殺しなさい」となっていて、ここは「死んだものとして考えなさい」と解釈できます。つまり、パウロの言わんとしていることは、罪に支配された古い自分は、既に死んだものと考えなさいという意味だと思います。パウロは霊肉二元論を主張しているのではなく、「既に」と「未だ」を主張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既に」と「未だ」の関係にある、信仰の二元論とでも言ったらいいでしょうか。神の国は到来し、私たちは既に霊的な救いを頂いていますが、未だ救いは完成されていません。しかし、イエス様の再臨の時には、肉体も完全に救われて、救いが完成し体も永遠に生きるように復活の体として、完成されるのです。パウロは、以前の罪に支配されたあなた方の体は、既に死んでいるので、信仰によって体をイエス様に献げ、献身し、義の器として用いていただきなさいと言っていると思われます。続いて7~10節をご覧ください。
【2】. 新しい人を着せられて
“あなたがたも、以前このようなことの中にいたときには、それに従って歩んでいました。今は、そのすべてを、すなわち、怒り、憤り、悪意、そしり、口から出る恥ずべき言葉を捨てなさい。互いにうそをついてはなりません。古い人をその行いと共に脱ぎ捨て、造り主の姿に倣う新しい人を身に着け、日々新たにされて、真の知識に達するのです。”
ここでは、二回目の罪のリストとして、五つ列挙されています。①怒り、②憤り、③悪意、④そしり、⑤口から出る恥ずべき言葉、という、どれも言葉によって犯す罪です。今回の東京オリンピックにおいてもSNS上で、選手に対する誹謗中傷がされたりして、問題になっていました。こういった言葉によって犯す罪も、性的な罪と同じように断ち切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なぜなら、コロサイにいる兄弟姉妹は既に新しい人を身に着けたから、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のだから、むしろキリストの福音がその口から語られる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パウロは言います。服というのはその人の身分を現わしますが、キリスト者は既に古い罪に支配された服を脱ぎ捨てて、新しい人を身につけたのです。そして、その新しい人とは、10節で「造り主の姿に倣った」と修飾されています。この箇所のギリシア語を見ると、創世記1:27(70人訳聖書)の引用であることに気づかされます。創世記1:27(聖書協会共同訳)をご覧ください。
“神は人を自分のかたちに創造された。/神のかたちにこれを創造し/男と女に創造された。”
つまりコロサイ書3:10の「造り主の姿に倣う」という言葉は、創世記の1:27「神のかたちに」と同じ言葉であります。このことから教えられるのは、イエス様が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る救いというのは、アダムとエバが罪を犯す前に持っていた神様との関係の回復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アダムとエバは罪を犯す前は、真の神様の事をちゃんと知っていて、神様と自由に交わることが許されていました。従って、この世が堕落し、真の神様を見失い、自分勝手に偶像礼拝に走って行ったのは、アダムとエバの犯したその罪に起因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罪を犯す前は、ちゃんと神知識を持っていましたが、罪を犯したことによって、神様との交わりが絶たれ、神知識を失ってしまったのです。また、アダムとエバが罪を犯す前に持っていたのは、この知識だけにとどまりません。義と聖さも持っていたと神学者たちによって指摘されています。その証拠聖句としてエフェソの手紙4:24が挙げられます。このエフェソ4:24はコロサイ書3:10とセットにして、しばしば引用される聖句です。
“神にかたどって造られた新しい人を身に着け、真理に基づいた正しく清い生活を送るように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この御言葉を見ますと、聖霊によって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人とは、神のかたちを着た人のことであり、それは正しく、清い生活を送るようにされた人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ね。この聖句から神のかたちに造られた堕落前のアダムとエバは、先ほどのコロサイ3:10の「知識」に加えて、「義」と「聖さ」をも、持っていたと推測できるのです。ところが罪を犯したために、人間から知識と義と聖さが失われてしまいました。キリストにある救いとは、この失われた神のかたちである「知識」と「義」と「聖さ」が回復させること、リフォームドされることであると言うのであります。
ところで、パウロは聖書の中で、「造り主のかたちである新しい人を着せられた」という表現と併せて、「キリストを着せられた」という表現もしばしば用いています。例えばローマ書13:14では、「主イエス・キリストを身にまといなさい。」と命じていますし、ガラテヤ書3:27では、「洗礼を受けてキリストに結ばれたあなたがたは皆、キリストを着ているからです。」と言っています。つまり、イエス・キリストこそアダムにまして、神のかたち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キリストこそ、神の子として、神の御言葉として、全面的に、最も正確な神のかたち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コロサイ1:15には「御子は、見えない神の姿(かたち)であり、」と書かれている通りです。従って、私たちに与えられている救いとは、イエス・キリストに結ばれて、まだ罪を犯す前のアダムとエバの状態に回復されるというのではありません。アダムとエバが成長して完全な知識と義と聖さに至った状態に、つまり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完全に成就された「知識」と「義」と「聖さ」の状態に、霊的にではありますが、回復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て、心の割礼を受け、古い自分に死んで、新しく生まれ変わり、聖霊によって再生されました。悪い木は、悪い実を結び、良い木は、良い実を結びます。悪い行い、良い行い、これはどこから出てくるでしょうか。心からであります。心が聖霊によって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ということはどれほど大きな恵みでしょうか。このことに驚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3】. キリストを着せられて
以前の古い私たちが罪しか犯すことが出来なかったのは、心にまだ割礼を受けていなかったから、イエス様によって心が新しく生まれ変わっていなかったからです。しかし今や、私たちはイエス様を信じ、洗礼を受けて、新しく生まれ変わり、心の割礼を受けました。再生によって私たちの心の中に聖霊が内住されるようになり、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成就された「知識」と「義」と「聖さ」を着せ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この新しい命は、依然として神の中に隠されていて、鏡を通してでしか見ることが許されず、まだおぼろげではありますけれども、それは完全な命に違いはありません。時間をかけてではありますが、心の中の神のかたちである「知識」と「義」と「聖さ」は、実際的に肉の体にも拡大されていくことでしょう。ですから、私たちはこの世において、古い自分に死んで、地上的な罪を離れ、言葉の罪を捨てていく、その聖化が、私たちの肉の体において、少しづつではありますが進行されていくのです。確かにこの地上においては完全に聖化されることはなく、相変わらず私たちは罪を犯してしまいますが、それにも拘わらず少しずつでありますが、イエス様に似て行くようにされて聖化されるのです。続いて3:11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こには、もはや、ギリシア人とユダヤ人、割礼を受けた者と受けていない者、未開人、スキタイ人、奴隷、自由な身分の者の区別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がすべてであり、すべてのもののうちにおられるのです。”
救われた兄弟姉妹において、イエス・キリストが全てであり、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生命となられ、私たちの心の中に内住してくださいました。もはや、ギリシア人とユダヤ人の区別もなく、割礼と受けた者と受けていない者の区別もなく、未開人と、未開人よりさらに野蛮だと言われていたスキタイ人の区別もなく、奴隷と自由人の区別もありません。もちろん霊的な意味で区別がなくなったという意味です。当時の現実の社会に目をやるなら、依然として階級制度や奴隷と自由人の区別は残っているかもしれませんが、しかし、そのような現実社会を超えて、キリストにある霊的な兄弟姉妹として互いに愛し合い、互いに尊敬しあい、共同体を形成してい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王の家族、ロイヤルファミリーとして再生されましたが、この地上においてはイエス様が歩まれたように僕として、低く生きるように導かれるのです。
【結論】
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神のかたちを着せられました。心の中に神のかたちが、即ち、「知識」と「義」と「聖さ」が回復され、更新されました。ですから、私たちの実際の行いと私たちの実際の言葉も、同じように日々聖化され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聖化の歩みとは古い自分との闘いであり、このゾンビのように死んだのに拘わらず、すぐに立ち上がってくる古い自分との闘いであり、罪と誘惑との闘いでありますが、既にキリストにあって勝利が約束されていて、勝利の冠が準備されている闘いでもあります。そのことに感謝しつつ、私たちを通して「知識」と「義」と「聖さ」の影響力を、この世に及ぼしてい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一歩一歩、歩ま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