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年07月11日「祈りの手本 기도의 모범」

問い合わせ

日本キリスト改革派 千間台教会のホームページへ戻る

祈りの手本 기도의 모범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6章7節~15節

音声ファイルのアイコン音声ファイル

礼拝説教を録音した音声ファイルを公開しています。

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6:7また、あなたがたが祈るときは、異邦人のようにくどくどと述べてはならない。異邦人は、言葉数が多ければ、聞き入れられると思い込んでいる。
6:8彼らのまねを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がたの父は、願う前から、あなたがたに必要なものをご存じなのだ。
6:9だから、こう祈りなさい。『天におられるわたしたちの父よ、/御名が崇められますように。
6:10御国が来ますように。御心が行われますように、/天におけるように地の上にも。
6:11わたしたちに必要な糧を今日与えてください。
6:12わたしたちの負い目を赦してください、/わたしたちも自分に負い目のある人を/赦しましたように。
6:13わたしたちを誘惑に遭わせず、/悪い者から救ってください。』
6:14もし人の過ちを赦すなら、あなたがたの天の父もあなたがたの過ちをお赦しになる。
6:15しかし、もし人を赦さないなら、あなたがたの父もあなたがたの過ちをお赦しにならない。」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6章7節~15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教会では、祈りといえば神様との会話であり、神様との交わりであると教えられます。本日のマタイによる福音書6:9~13に記されている祈りを特に「主の祈り」と言いますが、これはイエス様が、弟子たちに、祈る時にはこう祈りなさいと、教えてくださった祈りでございます。ルカによる福音書11章にも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祈りを教えておられますが、イエス様はいろいろな場所で、何度も繰り返して「主の祈り」を教えられていたと思われます。本日の箇所において、イエス様は、その教えの背景として、異邦人の祈りを例に出しながら教えてくださいました。7節にありますように、当時の、異邦人の祈りの特徴は、「くどくど述べて、口数が多ければ、祈りが聞き遂げられる」と思っていたようです。言い換えれば、異邦人にとって、祈りとは自分たちの願いをかなえてもらう一種のまじないのようであり、したがって、祈りを自分の目的のために神を利用する手段になっている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す。それではキリスト者の祈りとは何なのか。キリスト者の祈りとは、異邦人の祈りとは正反対であります。神様を父親として、そして天地の王としてお認めし、神様の御前に全てを放棄し、自分が持っていた主権を神様に明け渡し、御心に従順に従う為の祈り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頭を垂れた悔い改めの祈りに、ほぼ等しい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神様の御前に無から始めようとする貧しい心から、主の祈りが告白されるのです。主に全てを委ねてみようとする覚悟から、主の祈りが告白されるのです。

この主の祈りの全体の構造を見ますと、最初に天の父なる神様という呼びかけがあります。つまり、この祈りはイエス様の十字架と復活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神の子とされ、「父よ」と呼びかける特権を与えられた信者たちの祈り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続いて神様に対する祈りが三回続きます。「あなたの御名があがめられるように」、「あなたの御国が来ますように」「あなたの御心が天におけるように地にもなるように」その次に、私たちの祈りが三回続きます。「私たちに必要な糧を与えてください」「私たちの負い目を赦してください」「私たちを誘惑に合わせず、悪い者から救ってください」です。ここから第一に教えられるのは、祈るべき事柄は、まず自分たちのこと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まず何よりも先に、また、祈りの半分を費やしながら、神の御名、神の御国、神の御心のために祈るということです。第二に教えられるのは、私の必要な糧のために、私の負い目の赦しのために、私の救いの為にではなく、「私たちの」という点に注目したいと思います。つまり、主の祈りとは、共同体の祈りであり、神の救いも、私たちの神様に対する応答も共同体を通してなされるという点であります。それでは祈りの前半部分である6:9~10節をご覧ください。前半部分は神様の驚くべき美しい経綸に参与させる招きであります。

【1】. 神様の驚くべき美しい経綸に参与させる招き

“だから、こう祈りなさい。『天におられるわたしたちの父よ、/御名が崇められますように。御国が来ますように。御心が行われますように、/天におけるように地の上にも。”

ギリシア語の文法を見ますと9節の「あなたの御名が崇められますように」という祈りと、10節の「あなたの御心が行われますように」という祈りは受け身になっています。受け身であるということは、主体が誰なのかを考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誰が神の名を高く上げて聖なるものとするのか、誰が神の御心を行うの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でしょうか、神様でしょうか。もう聖書にずいぶん詳しい方であればお分かりの事と思いますが、聖書で受け身になっていて、その主体が省略されている場合は、神様が主体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神の名を高く上げて聖なるものとすることも、神の御心を行うことも、全て神様によってな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こう言いますと、当然ですが、一つ、私たちの心に思い浮かぶ質問が一つ出てくるかもしれません。その質問とは、8節の「あなたがたの父は、願う前から、あなたがたに必要なものをご存じなのだ。」という御言葉とも関連していますが、つまり、「どうせ、私たちの必要を神様が全てご存じで、神様がすべての事をされるのに、一体、私たちに何を祈れと言うのだろうか。何もかもお一人でされればいいでしょう。」ということです。一体なぜでしょうか。そこには私たちの理解を超えた神様の隠された御心があるように思われます。フィリピの手紙2:13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ございます。

“あなたがたの内に働いて、御心のままに望ませ、行わせておられるのは神であるからです。”

全能の神様は、ご自身の御心を完全に成就され、この世に直接介入することもできますが、多くの場合、キリスト者の心に働いて、彼らに御心に適うことを望ませ、キリスト者を通してご自身の御心を成就させていくという方法を取られます。それでは神様は一体なぜこのような方法を取られるのでしょうか。

例えば、旅行をしていて大変美しい景色を見たとしますよ。或いは旅先でとっても美味しいものを食べたとします。今までに体験したことのない、本当に素晴らしい体験をしたとします。ここで常識的な人ならば、一番最初に何を考えるでしょうか。「あ、こんなにおいしいものは誰にも教えないように隠しておかないと」とか、「この風景は誰にも教えないようにしておこう」などと考える人はいませんね。逆に「あ~、こんなにおいしいのを一人で食べるのはもったいない、誰かと一緒に食べることができたら、どんなに良かったか」とか、「自分の最も愛する人と一緒に、この場所に来れたらどんなに良かったか」と考えることでしょう。これが常識的な考え方ですね。神様は実際、すべての事を、ご自身がお一人で、パーフェクトにすることができます。それにも拘わらず、なぜ教会をして、御心を行わせるのかと言えば、天の神秘的な驚異に、私たち教会をも共に参与させたいという神様の御心があるからです。それほど神様は私たち教会を愛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将来成就する神の摂理と神の経綸があまりにも美しいために、何とかそこに、ご自身の民を神様と共に関与させたいと思われるのです。信じられるでしょうか。私たちが神様の隠されたご計画を知るにはあまりにも罪深く、あまりにも盲目的です。だからこそ、教会を祈りの場に導き、神様との交わりを通して、御心に適う思いが与えられ、望みが与えられ、神の御心を少しずつ知るようにされ、神様と共に歩んでいくように招かれているのです。

【2】. 悔い改めと明け渡す祈り

続きまして後半部分は、私たちの祈りが三回出てきます。ここには、悔い改めと神様に全て依存し委ねる告白がなされています。最初に11節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たちに必要な糧を今日与えてください。”

ここで、今日一日のパンを祈るように教えられています。もしかしたら、「神様、私はまだ日用のパンを祈るほど落ちぶれてはいません」と思われる方もいるかもしれませんが、箴言30章7~9節御言葉に次のような祈りが記されています。ご覧ください。

“二つのことをあなたに願います。わたしが死ぬまで、それを拒まないでください。むなしいもの、偽りの言葉を/わたしから遠ざけてください。貧しくもせず、金持ちにもせず/わたしのために定められたパンで/わたしを養ってください。飽き足りれば、裏切り/主など何者か、と言うおそれがあります。貧しければ、盗みを働き/わたしの神の御名を汚しかねません。”

詩人アグルは、一時も神様から離れず、ひたすら神様にしがみつくために、貧しくもせず、金持ちにもしないように祈っています。もし、私たちが豊かになりすぎるなら、神の恵みを忘れ、忘恩の罪を犯すかもしれません。もし、貧しくなりすぎるなら、世を恨んだり、盗みを働いて御名を汚すかもしれません。主の祈りの11節も、この箴言の御言葉のように、私たちの生活のなくてはならない最低限の所まで、自分の力ではなく、ただ神によって支え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を認め、告白する祈り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神様は空の鳥さえ、その日、食べるものを養ってくださるように、私たちの日々の糧を養っていてくださるのです。続いてマタイの福音書6章12~13節の御言葉です。

“わたしたちの負い目を赦してください、/わたしたちも自分に負い目のある人を/赦しましたように。わたしたちを誘惑に遭わせず、/悪い者から救ってください。』”

この12節で、罪の赦しの祈りが出てくるのは、私たちが信じて救われた後も、依然として罪人であるという現状を言い表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たとえイエス様を信じたとしても、この世に生きる限り、私たちは死ぬときまで罪に傾きやすく、また欠けが多く、弱い存在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人が罪を犯す時に罪責が発生しますが、ユダヤ人はこの罪責を神様に対する「負い目、借金」として理解していました。この「負い目とか借金」と言う言葉が12節では複数形になっています。生涯を通して、その積まれていく借金の大きさは、私たちの想像を絶するような金額でありましょう。決して努力して、時間をかけて何とか返済できるような金額ではありません。人間の社会では、普通、負債というのは必ず返済されたり、償わ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ね。時効が成立したからと言って、都合よく水に流すことなどできません。ところが神様に対する借金は、イエス様の命が生贄として捧げられたために、私たちの全生涯の負債が全て償われ、完全に赦されたのです。信じた後も依然として犯してしまう様々な罪も、教会の頭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にあって憐れみを受け、赦しが与えられるのです。神様のこの恵みにしっかり立つならば、私たちも自分に負い目のある人をいつの間にか赦す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赦すということは決して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従いまして、第三者が被害者に対して軽々しく「赦してあげなさい」とは、中々言えないことだと思います。しかし、祈りに導かれ、神様が恵みを注いで下さり、自分自身が神様から頂いているその恵みの大きさに目が開かれる時に、共同体に対する愛と慈しみが湧き出るようになります。教会は赦された者たちの集いですから、自然と赦しの共同体が形成されていくのです。

13節に移りますと、誘惑という言葉がでてきます。この言葉は試練と同じ言葉でありまして、否定的な意味では「誘惑」と訳され、肯定的な意味では「試練」と訳されます。本来、試練というものは、その人を成熟へと導く良いものですが、サタンはあらゆる機会を用いて試練を誘惑として用い、私たちに罪を犯すようにさせて、イエス様から引き離すように働きかけてき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決して「試練よ、いくらでも私にかかって来なさい!」などと、祈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イエス様は十字架に渡される夜、ゲツセマネの園で苦しみ悶えながら祈られました。その時「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あなたの御心の通りにしてください」と祈られましたが、その前に「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私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とも祈られました。イエス様でさえこのように祈られたのですから、弱い私たちも当然、イエス様のように「できることなら、これを取り除けてください」、「この試練を小さなものにして下さい」、「私たちを誘惑に合わせず、悪から救い出してください」と祈るべきなのです。私たちはこのように自分自身、非常に弱い者であることを覚えるべきです。

以上、後半部分の私たちの祈りを見てまいりましたが、その内容とは、「自分の力でその日のパンも稼ぐことのできない無能力な者であることを告白すること」、「罪に傾きやすく、神様に負債ばかり与えている欠けの多い者であることをお詫びすること」、「試練につぶされてしまう弱い者であることを白状すること」でありました。ですから私たちの告白は、生活のあらゆる瞬間を全面的に神様に明け渡し、委ねること、神様の一方的な憐みと赦しに感謝すること、無事に地上の歩みを全うできるのは、神様が試みを減らしてくださるからであると感謝することへ導かれるのです。まことに私たちは自分自身について祈ることを許されたとしても、そこでは結局、頭を垂れた悔い改め、神を仰ぎ賛美すること、そして、前面的に神様に委ね、明け渡すこと以外、語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ですから、マタイの福音書には記されていませんが、主の祈りの最後は、「国と力と栄とは限りなく、なんじのものなればなり」という言葉で締めくくられます。この言葉はイエス様がそのように言いなさいと教えた訳ではありませんが、主の祈りを繰り返すうちに、弟子たちは自然に、この頌栄を叫ばずにはおれなくなったのでしょう。いつしか、この頌栄を主の祈りの結びとして付け加えられたのであります。

【結論】

私たちの神様は、慈しみ深い、父なる神様であり、同時に天地の主権者、王として統治しておられます。「主の祈り」とは、この神様の御前に全てを放棄し、自分が持っていた主権を明け渡し、御心に従順に従う為の祈りであります。日々頭を垂れ、貧しい心から悔い改めの祈りを捧げ、主に全てを明け渡し、委ねてみようとするその覚悟から、主の祈りが告白されるのです。というのは、神の主権は、人間の愚かさの中でご自身の知恵を現わしてくださり、人間の弱さの中でご自身の力を現わしてくださり、人間の罪の中でご自身の正義と恵みを光り輝くように現わ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기도의 모범

2021년 7월 11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6장 7~15절

서론

교회에서는, 기도라고 하면 하나님과의 대화이고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마태복음 6:9~13에 기록된 기도를 특별히「주기도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는데,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주기도문」을 가르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그 가르침의 배경으로 이방인의 기도를 예로 들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7절에 나와 있듯이 당시 이방인의 기도의 특징은 「중언부언하고 말이 많으면 기도를 들어주신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에게 기도란,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종의 주술인 것 같고, 따라서 기도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신을 이용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기도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와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천지의 왕으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개를 숙인 회개의 기도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 앞에 무에서 시작하려는 가난한 심령에서 주님의 기도가 고백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하는 각오에서, 주기도문이 고백되는 것입니다.

이 주기문의 전체 구조를 보면 가장 먼저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라는 부름이 있습니다. 즉, 이 기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지며「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고 호소하는 특권을 부여받은 신자들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어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나라가 임하시오며」,「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세 번 이어집니다. 그 다음에 우리를 위한 기도가 세 번 이어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입니다. 여기서 제일 먼저 배울 수 있는 것은 기도해야 할 일은, 먼저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무엇보다 먼저, 또 기도의 절반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배울 수 있는 것은, 나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나의 죄 사함을 위해, 나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우리의」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즉 주님의 기도란, 공동체의 기도이고 하나님의 구원도,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응답도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제 기도의 전반부인 6:9~10절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앞부분은 하나님의 놀랍고 아름다운 경륜에 참여시키는 초대입니다.

(1) 하나님의 놀랍고 아름다운 경륜에 참여시키는 초대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헬라어 문법을 보면 9절의「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와 10절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수동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동적이라는 것은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올려 거룩하게 만드느냐, 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일까요, 하나님일까요? 이제 성경을 꽤 잘 아시는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성경에서 수동적으로 다루어져 있고 그 주체가 생략되어 있는 경우는 하나님이 주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도,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당연한 한 가지,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질문은, 8절의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는 말씀과도 관련되어 있는데, 즉 「어차피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이 다 아시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시는데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기도하라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혼자서 하시면 되지 않나요?」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거기에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빌 2:13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2장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이 세상에 직접 개입하실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일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인을 통해 자신의 뜻을 성취시켜 나가시는 방법을 취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런 방법을 취하시는 걸까요?

예를 들어, 여행을 하면서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봤다고 합시다. 혹은 여행지에서 아주 맛있는 것을 먹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정말 멋진 체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 이렇게 맛있는 것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도록 숨겨 둬야지」라든가, 「이 풍경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도록 해 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반대로 「아, 이렇게 맛있는 걸 혼자 먹기 아깝다, 누군가와 함께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든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 장소에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게 상식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사실 모든 일을 자신이 혼자서 완벽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에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냐면, 하늘의 신비로운 경이로움에 우리 교회도 함께 참여시키고 싶은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장차 성취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경륜이 너무나 아름다우시기에 어떻게든 거기에 자신의 백성을 하나님과 함께 관여시키고 싶습니다. 믿으실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을 알기에는 너무 죄가 많고 너무 맹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기도의 장소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알게 되어,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2) 회개와 내어드리는 기도

이어서 후반부에는 우리의 기도가 세 번 나옵니다. 여기에는 회개와 하나님께 모두 의존하고 맡기는 고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11절을 보시겠습니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여기서 오늘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쩌면「하나님, 저는 아직 일용할 양식을 기도할 만큼 낙심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잠언 30장 7~9절 말씀에 다음과 같은 기도가 적혀 있습니다. 보세요.

잠언 30장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시인 아굴은, 한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매달리기 위해 가난하지도 않고 부자가 되지도 않기를 기도합니다. 만약 우리가 너무 풍요로워진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죄를 범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너무 가난해진다면 세상을 원망하거나 도둑질을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기도 11절도 이 잠언의 말씀처럼 우리 생활의 없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부분까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새 조차, 그날의 먹을 것을 주시며 길러 주시듯이, 우리도 하루하루 양식을 공급하여 주시고 길러 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마태복음 6장 12~13절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장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12절에서, 죄 용서의 기도가 나오는 것은, 우리가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인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었지만, 이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로 기울기 쉽고, 또 허물이 많고,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죄책이 발생하는데, 유대인들은 이 죄책을 하나님에 대한 「부채, 빚」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채나 빚」이라는 말이 12절에서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평생 그 쌓여가는 빚의 크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일 것입니다. 결코 노력해서 시간을 들여 어떻게든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보통 부채라는 것은 반드시 갚거나 보상해야만 하죠. 시효가 성립했다고 해서, 적당히 없었던 일로 흘려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빚은 예수님의 생명이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에 우리 전 생애의 부채가 모두 죗값을 치르고 완전히 용서받은 것입니다. 믿고 난 뒤에도 여전히 저지르고 마는 여러 가지 죄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긍휼하심을 입어,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에 굳게 선다면 우리도 자신에게 빚진 사람을 어느새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제3자가 피해자에 대해 가볍게 「용서해 주시지요」라고는 좀처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이끌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주시는 그 은혜의 크기에 눈이 열릴 때,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긍휼함이 샘솟게 됩니다. 교회는 용서받은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용서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13절로 넘어가면, 시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시련과 같은 말인데, 부정적인 의미에서는「시험」이라고 번역되고,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시련」이라고 번역됩니다. 본래 시련이란 것은 그 사람을 성숙으로 이끄는 좋은 것이지만, 사탄은 모든 기회를 이용해, 시련을 시험으로 이용해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떼어놓으라고 압박해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시련이여, 얼마든지 내게 덤벼라!」 등의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받고 몸부림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지만, 그 전에 「하실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조차 이렇게 기도하셨으니 약한 우리도 당연히 예수님처럼「하실 수만 있거든 이것을 없애주세요」, 「이 시련을 작은 것으로 만들어주세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기 자신이 매우 약한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상 후반부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만, 그 내용이란, 「자신의 힘으로 그날의 일용할 양식도 벌 수 없는 무능력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 「죄에 기울기 쉽고, 하나님께 부채만 지고 있는 결함이 많은 자임을 회개하는 것」, 「시련에 짓눌려 버리는 약한 자임을 자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백은 생활의 모든 순간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맡기는 것,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과 용서에 감사하는 것, 무사히 지상에서의 걸음을 다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련을 줄여주시기 때문이라고 감사하는 것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기도하는 것을 허락받았더라도, 거기서는 결국 고개를 숙인 회개, 하나님을 우러러 찬양하는 것,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내어드리는 것 외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원래는 적혀 있지 않지만 주기도문의 마지막은「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기도를 반복하면서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이 송영을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고, 어느덧 이 송영을 주님의 기도의 연결고리로 덧붙인 것입니다.

결론

우리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천지의 주권자, 왕으로 통치하고 계십니다. 「주기도문」이란 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권을 내어 드리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하루하루 머리를 숙이고 가난한 심령에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드리고 맡겨드리려는 그 각오에서 주기도문이 고백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어리석음 속에서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 주시고, 인간의 약함 속에서 자신의 힘을 드러내 주시며, 인간의 죄 속에서 자신의 정의와 은혜를 빛나드시 드러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関連する説教を探す関連する説教を探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