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の羊の群れ 하나님의 양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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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聖書 ペトロの手紙一 5章1節~5節
5:1さて、わたしは長老の一人として、また、キリストの受難の証人、やがて現れる栄光にあずかる者として、あなたがたのうちの長老たちに勧めます。
5:2あなたがたにゆだねられている、神の羊の群れを牧しなさい。強制されてではなく、神に従って、自ら進んで世話をしなさい。卑しい利得のためにではなく献身的にしなさい。
5:3ゆだねられている人々に対して、権威を振り回してもいけません。むしろ、群れの模範になりなさい。
5:4そうすれば、大牧者がお見えになるとき、あなたがたはしぼむことのない栄冠を受けることになります。
5:5同じように、若い人たち、長老に従いなさい。皆互いに謙遜を身に着けなさい。なぜなら、/「神は、高慢な者を敵とし、/謙遜な者には恵みをお与えになる」からで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ペトロの手紙一 5章1節~5節
하나님의 양무리
2021년 5월 9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베드로전서 5장 1~5절
서론
오늘부터 베드로전서 5장에 들어갑니다. 드디어 베드로전서도 다음 주에 한 번을 남겨두고 마무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서신의 특징은 고난 속에서 영광을 기다린다는 것으로,「고난」과 「소망」과「영광」이 핵심 키워드라고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약속된, 장차 받게 될 영광과 현재 교회가 처한 상황을 비교해 보면, 그 간격이 너무 컸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강력한 국가였고, 황제는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고, 최강의 로마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교회는 군대도 없고, 무기도 없고, 조직도 없고, 카타콤이라는 지하 묘지에 숨어들어 겨우 목숨만 부지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재산을 버리고, 오직 생명만 유지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마음속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오지 않았을까요? 오늘은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을 첫째로「나는 함께 장로 된 자」, 둘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언뜻 보면 두 단어 모두 베드로의 자기 소개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저자가 자신을 장로 중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서신의 진짜 저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로마교회의 한 장로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1:1절에서는 대담하게 「사도 베드로」는 이라고 쓰기 시작했지만, 실수로 붓을 미끄러뜨려 진짜 정체를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장로란 「연장자」라는 뜻이지만, 넓은 의미로 공동체 안에서 양을 치는 사람을 당시에는 보통 「장로」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예로부터 이스라엘에서 백발이 성성한 장로를 존경하고, 장로의 지혜와 경험으로 인해 공동체를 다스리는 책임이 장로들에게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베드로로서는 자신의 정체성이 사도라기보다는 장로이자 양들의 목자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자자가 베드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로, 베드로가 자신을「부활의 증인」이라고 했다면, 확실히 맞는 것 같고, 또 「변모산에서 예수님의 위엄의 증인」이라고 했다면,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본 목격자가 아니라, 그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간 인물입니다. 베드로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가장 고통스러운 에피소드였고, 말하자면 흑역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는 감히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하는 것일가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실제 증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자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은 베드로만 죽이면 교회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베드로를 표적을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가는 곳마다 자신이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을 감히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하면서 지금 바로 고난 속에 놓여 있는 소아시아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의 「양 무리를 치되」라는 말씀은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들은, 부활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 후 갈릴리 호수에서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특히, 회복되지 못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베드로가 대답하자「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질문과 대답이 세 번이나 반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흑역사를 완전히 지워주셨습니다. 이렇게 베드로에게 용서와 회복이 주어졌고, 동시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로 그 후의 행보가 변화되어 갔습니다. 이어서 3절을 보시죠.
(2) 하나님의 양 무리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양은 무리를 지어 행동하고, 먹이에 대한 욕심이 많으며, 무리에게 이탈하면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성격은 소심하고 청력은 좋지만 시력이 약하고 길을 잃기 쉬우며 방향 감각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목자가 정기적으로 양털을 깍아주지 않으면 털이 계속 자라서 움직이지 못하고 병에 걸리기 쉽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은 반드시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나약한 동물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절에「맡은 자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새번역 성경공회 공동번역(일본어 성경)에서는 「맡겨진 사람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헬라어를 보면 클레로스κλῆρος 라는 단어인데,「할당된」혹은 「추첨에 의해 배분된」이라는 뜻입니다. 마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 가나안 원주민들을 멸망시킨 후 각 지파에게 제비를 뽑아 상속할 땅을 할당했는데, 그때 쓰인 단어입니다. 여호수아 14:2~3a를 보시겠습니다.
여호수아 14장
2 여호와게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
3 이는 두 지파와 반 지파의 기업은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주었음이요…
이후 각 지파에게 제비 뽑기에 의해 할당되었다는 것이 여러 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5:1절입니다.「또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남쪽으로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어 16:1절입니다.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은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어 17:1절입니다. 「므낫세 지파를 위하여 제비 뽑은 것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어 18:11절입니다. 「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을 뽑았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후에도 소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제비 뽑기를 통해 영지가 할당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똑같이 하나님의 소유요, 주님의 유산인 하나님의 양 무리가 장로들에게 제비 뽑기로 배정되었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목회의 사역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이 말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베드로는 자신에게 배당된 양은 결코 자신의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며, 그것을 추첨으로 배정받은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할 때, 우리가 목사를 선택하고 우리가 교회에 청빙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양들이, 제비 뽑기에 의해 장로에게 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청빙된 교사는 비록 작은 양 무리를 맡았다고 해도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큰 양 무리를 맡았다고 해서 자신의 설교가 훌륭해서 청빙된 것이라고 교만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추첨으로 나눠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센겐다이교회에 청빙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이 교회에 파송되어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목회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센겐다이교회에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여러분이 이 교회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비 뽑기에 의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센겐다이교회의 회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있는 것은 스스로가 결정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그 섭리 가운데 인도하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는 저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교회이고, 복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 무리를 목양하는 사역을 매우 중요한 사역으로 생각한 것인데, 이 목양 사역은 단순히 강단에 올라가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돌보는 것, 개인적으로 말씀이 실천되고 말씀이 적용되는 것을 포함합니다. 즉, 목회의 사역이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를 「상호목회」라고도 하고 「목양」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에 의해 파송된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이 마을, 저 마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교회가 세워졌다고 해도 그것은 즉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양떼처럼 연약한 양 무리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양육되어야 했습니다. 교회는 안으로는 이단 문제가 있엇고, 밖으로는 핍박을 받으면서 죄와 거짓의 모든 공격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인도를 받아야 하고, 항상 양육과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연약한 양떼와 같은 존재입니다. 항상 잡초를 뽑아야 하는 밭이며, 항상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 나무입니다. 교회는 날마다 말씀의 양식이 필요하고, 양 무리 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기도하고, 서로 권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약한 것은 성도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사들도 역시 양 무리의 일원이며, 교사들도 역시 항상 감독을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개혁파라면 당회, 노희, 총회의 단계적 회의제를 통해 교사가 감독을 받아야 하고, 만일 노회의 감독 역할이 없다면, 교회는 바로 목사 마음대로 다루어지고 목사의 도구로 전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단계적 회의제를 갖지 않는다면 교회는 반드시 감독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사 자체도 돌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외가 아닙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도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양들을 목양하라는 사명을 받았으니,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돌보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4~5절을 보시겠습니다.
(3) 목자장인 예수 그리스도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는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을「목자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먹이시고 인도하시는 진정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게 된 협력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양들을 그 이름으로 알고 계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시며 돌보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그 양 무리 가운데 단 한 명도 잃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양인 우리도 예수님의 본을 따라 양 무리를 치는 목자로 세우십니다. 즉, 하나님의 양을 먹이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이요, 선지자이며,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모세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름 받기 전 40년 동안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다윗도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 양치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예수님의 왕, 선지자, 제사장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라는 초대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는 양떼처럼 매우 연약해 보이지만, 각자가 목양이라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하여 충성스럽게 섬긴 자들은, 그 날에 영원한 칭찬과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이땅의 어떤 고통도 잊혀지고, 이렇게 지상에서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을까?」그 답은 첫째, 우리가 속한 교회에서 지금 하나님의 양 무리를 목양하는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양 무리는 매우 연약한 양떼이며, 항상 돌보아 주어야 하고, 항상 기도와 격력와 위로가 필요하며, 매우 어려운 사역입니다. 둘째, 어려움 가운데 있는 교회에게는 진정한 목자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마음에 품고, 사랑하고 양육하시는 목자장이 계시고, 우리는 그분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될까요? 이 목자께서 자신의 양 무리를 돌보시기에 교회는 반드시 시련을 통과하여 마지막 날에 시들지 않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序】
本日から、ペトロの手紙1の5章に入ります。いよいよ1ペトロも次週のあと一回を残して終了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この手紙の特徴は、苦難の中で栄光を待ち望むということで、「苦難」と「希望」と「栄光」がキーワードであると最初にお話し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しかし、教会に約束されている、やがて受けることになる栄光と、教会の現在置かれている状況を見比べるなら、そこにはあまりにも大きなギャップがありました。当時、ローマ帝国は強大な国家であり、皇帝は全ての権力をその手に収め、最強のローマ軍を所有していました。一方で、教会には軍隊もなく、武器もなく、組織もなく、そしてカタゴンベといわれる地下墓地に隠れながら、なんとか命だけを繋ぎ止めて生きていました。正常な生活を放棄して、財産を捨てて、ただ命だけを維持しながら、信仰を守っていたというのが彼らの現実でありました。恐らく、「我々教会がいかにして神の栄光でありうるのか?」という疑問が心の中から沸いて来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本日はその答えを探し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1-2節をご覧ください。
【1】. キリストの受難の証人
“さて、わたしは長老の一人として、また、キリストの受難の証人、やがて現れる栄光にあずかる者として、あなたがたのうちの長老たち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にゆだねられている、神の羊の群れを牧しなさい。強制されてではなく、神に従って、自ら進んで世話をしなさい。卑しい利得のためにではなく献身的にしなさい。”
ここでペトロは、自分のことを、第一に「長老の一人であり」、第二に「キリストの受難の証人」であると言っています。一見、二つの言葉はどちらもペトロの自己紹介としては、相応しくないもののように聞こえてきます。ですから、ある人は、筆者が自分のことを長老の一人として紹介しているために、この手紙の本当の著者は、ペトロではなく、ローマ教会の一長老であったと考えます。「1:1では大胆に『使徒ペトロから』と書き始めたものの、うっかり筆を滑らせて、本当の正体を暴露してしまった」と言うのです。しかし、これはそう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長老とは「年配者」という意味ですが、幅広い意味を持っていまして、共同体の中で羊を牧する者は、当時、普通に「長老」と呼ばれていました。これは昔からイスラエルにおいて白髪の年長者が尊ばれ、年長者の知恵と経験の故に、彼らに共同体を治める責任が任されていたという習わしを、キリスト教共同体もそのまま引き継いだと考えられています。共同体を治める責任が年長者に任されていまして、恐らくペトロとしては、自分自身のアイデンティティが使徒であるよりも、長老であり、羊の牧者であったという事だと思われます。
それから、もう一点、著者がペトロではないと主張する理由として、ペトロが、自分を「復活の証人」であると言ったなら、確かにその通りだと思われますし、また、もし、「変貌の山における、イエス様のご威光の目撃者である」と言ったなら、それはそうだと受け入れられるのですが、ここでは「キリストの受難の証人」と書かれています。実際、ペトロはイエス様が十字架に架かられた目撃者ではなく、その前にイエス様を三度否認し、一目散に逃げて行った人物でした。ペトロを取り巻く誰もが、そのことを容易に思い起こすことができたでしょう。それはペトロの最も苦痛に満ちたエピソードであり、言ってみれば黒歴史でありました。それでは何故ペトロは、あえて自分を「キリストの受難の証人」と言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キリストの十字架の実際の目撃者という意味ではなく、キリストの苦難に共に与っている者という意味だと思われます。ペトロは初代教会のリーダーとして、その役割を担っていました。教会を迫害する者たちは、ペトロさえ殺害できれば教会を滅ぼすことができると考え、ペトロはターゲットにされていたわけです。そのような訳で、行くところどこにおいても、自分が死と隣合わせであることを感じ取っていたに違いありません。だからこそ、ペトロは自分のことをあえて「キリストの受難の証人」と言いながら、今、まさに苦難の中に置かれている小アジアの人々を励ましているのです。
2節の「神の羊の群れを牧しなさい」という言葉は、ペトロがガリラヤ湖で復活の主から語られた言葉と同じ言葉です。ペトロはイエス様を三度否認しましたが、その後ガリラヤ湖において、復活の主が弟子たちに現れてくださり、特に立ち直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ペトロに対して「ヨハネの子シモン、私を愛しているか」と質問されました。「はい、主よ、わたしがあなたを愛してい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じです」とペトロが答えると「私の羊を牧しない」という御言葉が与えられました。この問答が三度も繰り返されたのです。イエス様はペトロの三度否認した、あの黒歴史を、完全に拭い取ってくださいました。このようにしてペトロに赦しと回復が与えられ、それと同時に「私の羊を牧しない」という新しい使命が与えられたのです。主を愛するペトロは、キリストの受けた受難に共に与る者としてその後の歩みが変えられて行ったのです。続いて3節をご覧ください。
【2】. 神の羊の群れ
“ゆだねられている人々に対して、権威を振り回してもいけません。むしろ、群れの模範になりなさい。”
聖書では、キリスト者が羊に例えられています。羊というのは、群れになって行動し、餌に対しては貪欲で、そして、もし群れからはぐれるなら、大きなストレスを受けてしまうそうです。性格は臆病で、聴力はいいのですが、視力が弱く、迷いやすく、方向感覚があまりないそうです。また、羊飼いによって定期的に羊毛を刈ってもらわないと、毛が伸び続けて動けなくなり、病気にかかってしまうそうです。ですから、羊とは必ず羊飼いによって導いてもらわないと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ない弱い動物なのです。まさに私たちキリスト者の姿を映し出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3節で「ゆだねられている人々」という言葉がございますが、新しい聖書協会共同訳では、「割り当てられた人々」と訳されています。このギリシア語を見ますと、クレロスκλῆροςという言葉でして、「割り当てられた」とか、「くじによって振り分けられた」という意味です。ちょうど、イスラエルがカナンに入植する際、カナンの原住民を滅ぼした後に、それぞれの部族に、くじによって嗣業の地が割り当てられましたが、その時に使われている言葉です。ヨシュア記14章2~3aをご覧ください。
“すなわち主がモーセを通して命じられたように、くじで九つ半の部族に嗣業の土地を割り当てた。モーセは既に他の二つ半の部族にはヨルダン川の東側に嗣業の土地を与えていた。”
この後にそれぞれの部族に、くじによって割り当てられたということが何度も強調されています。たとえば、15章1節です。“ユダの人々の部族が氏族ごとにくじで割り当てられた領土は…”とありますね。続いて16章1節です。“ヨセフの子孫がくじで割り当てられた領土は…”とあります。続いて17章1節です。“マナセ部族もくじで領地の割り当てを受けた。”とあります。続いて18章11節です。“ベニヤミンの人々の部族が氏族ごとにくじを引いた。”とあります。この後も小見出しを見ればわかりますように、くじによって領地が割り当てられたことが強調されています。これとまったく同じように、神の所有であり、主の嗣業である神の羊が、長老たちにくじで割り当てられているとペトロは言っているのです。ペトロが牧会の働きをどれほど大切にしていたのかということが、この言葉に滲み出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ペトロは自分に分け与えられている羊は、決して自分の羊ではなく、主の羊であり、それをくじで割り当てられているに過ぎな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このことを私たちに適用するなら、私たちが教会で、牧師を招聘する時に、自分たちが牧師を選び、自分たちが教会に招聘したと考えてしまいがちですが、しかし聖書によれば、くじ引きによって、神の摂理の中で、神の教会であり神の羊が長老に割り当てられ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ですから、実際招聘された教師はたとえ小さな群れを任されたとしても、いい加減にしてはなりませんし、大きな群れを任されたとしても、自分の説教が素晴らしかったから招聘されたのだと高慢になる理由もないのです。それは、神の摂理の中で、くじ引きによって分け与えられたからであります。私が、せんげん台教会に招聘されたのは、神のご計画の中で、神の摂理の中で遣わされました。この教会に遣わされて、力が及ばないところもあるかもしれませんが、全てを注いで牧会させていただいております。同じように皆さんも、せんげん台教会に会員として登録されていますが、これは皆さんがこの教会を選んだのではなく、神のくじ引きによって、神の摂理の中で、聖霊の導きによって、せんげん台教会の会員と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皆さんがこの教会にいるのは、自分で決めたようであっても、実は自分が決めたのではない、神のご計画の中で、その摂理の中で導かれたという事ができるでしょう。それゆえに、この教会は私にとって、ベストの教会であり、幸いな教会であるのです。
このように、ペトロはイエス様の羊を牧する働きを、大変重要な働きとして考えていたわけですが、この牧会の働きというのは、単に講壇に上って御言葉を宣言することだけを意味するのではありません。互いにケアされること、個人的に御言葉が実践され、御言葉が適用されることを含んでいます。つまり牧会の働きというのは、キリスト者すべてに命じ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これを「相互牧会」ですとか「牧羊」と名付けさせていただきます。イエス様によって、派遣された弟子たちは、イエス様の指示に従って、あの町、この町に行って福音を宣べ伝え、教会を設立していきました。しかし、いざ教会が設立されたといっても、直ちにそれは完全なものになるのではなく、羊の群れのように弱い群れであり、持続的に養育される必要がありました。教会は内側から異端の問題があり、そして外側からは迫害にさらされながら、罪と偽りのあらゆる攻撃の危機に曝されていたのです。従って、教会とは、常に導きを受けなければならず、常に養育とケア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弱い羊の群れなのです。常に雑草を抜いてやらなければならない畑であり、常に剪定をしてやらなければならない木なのです。教会は、日々御言葉の糧を必要とし、群れの中で、互いに慰められ、互いに励まされ、互いに祈られ、互いに勧めを受ける必要がありました。弱いのは信徒だけではありません。教師たちもやはり羊の群れの一員でありまして、教師たちもやはり常に監督を受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例えば私たち改革派であれば中会による段階的会議制を通して、教師が監督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万一、中会による監督の役割がなければ、教会は直ちに牧師の好き勝手なように扱われて、牧師の道具と化してしまうことでありましょう。ですから、もし、教会が段階的会議制をもたないのなら、教会は必ず、監督制を必要とするのです。そして教師自体もケア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例外ではありません。皆さんもお一人お一人も教会における兄弟姉妹の交わりを通して、神の羊を牧しなさいと、使命を与えられていますので、互いに励まし合い、互いに気を配り合い、慰め合い、祈り合っていきましょう。続いて4-5節をご覧下さい。
【3】. 大牧者イエス・キリスト
“そうすれば、大牧者がお見えになるとき、あなたがたはしぼむことのない栄冠を受けることになります。同じように、若い人たち、長老に従いなさい。皆互いに謙遜を身に着けなさい。なぜなら、/「神は、高慢な者を敵とし、/謙遜な者には恵みをお与えになる」からです。”
ペトロは、やがて再臨されるイエス様を「大牧者」として表現しています。このイエス様こそ神の羊の群れを養い、導いてくださっている真の大牧者です。私たちはそのことを改めて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私たちは単にイエス様の働きに共に参与させられている協力者に過ぎないという事です。真の大牧者であるイエス様は、ご自身のすべての羊たちをその名前によって知っておられ、お一人お一人を、名前で呼んでくださり、養ってくださいます。イエス様はその群れの中で、ただ一人も失うことはありません。そして、イエス様は、ペトロに対し「私の羊を飼いなさい」とおっしゃられたように、羊である私たちに、イエス様の模範に従うように、私たちをも群れの牧者として立ててくださるのです。つまり、神の羊を食べさせ、養育することです。この働きは、イエス・キリストの王であり、預言者であり、祭司としての働きとして言い換えることもできるでしょう。旧約聖書のモーセもイスラエルの指導者として召される前に40年間、羊飼いをしていました。ダビデもサムエルから油注ぎを受ける前に、やはり羊飼いをしていました。弟子たちに命じた「私の羊を飼いなさい」というのは、イエス様の王、預言者、祭司の働きに共に参与するように招か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教会はこの世においては羊の群れのように大変弱く見えますが、それぞれが牧羊というキリストの働きに参与させていただき、忠実に仕えた者たちには、この永遠に続く賞賛と、報いをかの日に頂くのです。その日、地上のどのような苦しみも忘れ去さられ、このように地上でイエス様と共に歩ませていただいたことは何という祝福であったのかと心から主に感謝し、讃美と栄光を主に帰すことになるでしょう。
【結論】
「我々教会がいかにして神の栄光でありうるのか?」その答えは、第一に私たちが所属している教会において、今、神の羊の牧羊の使命に与らせていただいているからです。その群れは大変弱い群れであり、常にケアされる必要があり、常に祈りと、励ましと、慰めが必要であり、非常に困難の伴う働きでございます。第二に困難のただ中にある教会にとって、真の大牧者が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教会を心にかけ、愛し、育んでくださっている大牧者がおられ、私たちはそのお方を仰ぐことができるというのは、何と大きな慰めと励ましでしょうか。この大牧者がご自身の群れを顧みてくださるために、教会は必ず試練をくぐり抜け、やがての日にしぼむことのない栄光に与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