ノアは迫害時にも証しをした 핍박 가운데서도 간증 한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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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ペトロの手紙一 3章13節~22節
3:13もし、善いことに熱心であるなら、だれがあなたがたに害を加えるでしょう。
3:14しかし、義のために苦しみを受けるのであれば、幸いです。人々を恐れたり、心を乱したりしてはいけません。
3:15心の中でキリストを主とあがめなさい。あなたがたの抱いている希望について説明を要求する人には、いつでも弁明できるように備えていなさい。
3:16それも、穏やかに、敬意をもって、正しい良心で、弁明するようにしなさい。そうすれば、キリストに結ばれたあなたがたの善い生活をののしる者たちは、悪口を言ったことで恥じ入るようになるのです。
3:17神の御心によるのであれば、善を行って苦しむ方が、悪を行って苦しむよりはよい。
3:18キリストも、罪のためにただ一度苦しまれました。正しい方が、正しくない者たちのために苦しまれたのです。あなたがたを神のもとへ導くためです。キリストは、肉では死に渡されましたが、霊では生きる者とされたのです。
3:19そして、霊においてキリストは、捕らわれていた霊たちのところへ行って宣教されました。
3:20この霊たちは、ノアの時代に箱舟が作られていた間、神が忍耐して待っておられたのに従わなかった者です。この箱舟に乗り込んだ数人、すなわち八人だけが水の中を通って救われました。
3:21この水で前もって表された洗礼は、今やイエス・キリストの復活によってあなたがたをも救うのです。洗礼は、肉の汚れを取り除くことではなくて、神に正しい良心を願い求めることです。
3:22キリストは、天に上って神の右におられます。天使、また権威や勢力は、キリストの支配に服しているので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ペトロの手紙一 3章13節~22節
핍박 가운데서도 간증 한 노아
2021년 3월 28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베드로전서 3장 13~22절
서론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고난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라면 우리가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실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 아니시거나 능력이 없으시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바로 기독교가 거짓이라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신 분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이 닥치지 않도록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냐, 전능하신 분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칠 고난을 미연에 방지하셔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고난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고난이란 정말 나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초대교회의 선교는 바로 박해를 받으면서, 고난을 받으면서 흩어지고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주 예수의 이름을 세상에 담대히 증거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원하지 않은 것, 싫어하는 것일 뿐, 사실은 세상에 빛을 가리키는 것, 구원의 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적의를 받았다면, 악의를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적의에 적의로 갚아서도 안되며, 악의에 악의로 갚아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당하기만 해야 하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악한 자들, 교활한 자들만 결국 이득을 보는 것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는 본문에서 그 답을 분명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믿는자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이유는,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본을 따르기 위함이며, 더 나아가 믿는자를 그리스도께 굳게 묶어 하늘에 있는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은,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아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1)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하여
3:14~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소망의 근거라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며, 반드시 성취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의로운 일을 하다가 부당한 고난을 당했을 때, 당황하거나 동요하거나 사람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핍박을 받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걸음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감독자이신 예수님께서 반드시 영광의 목적지로 인도해 주실 것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선한 일에 힘쓰고 악에 대하여 선으로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고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당신의 소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는 「잘 물어봐 주셨어요!」라고 말하며 우리의 소망의 근거를 잘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둡시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당시의 로마 황제도, 총독도, 핍박하는 유대인도 아닌 하나님이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15절 후반과16절을 보시겠습니다.
15 ..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온유」란 겸손하라는 뜻입니다. 「두려움으로」는 경외심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종말론적인 뉘앙스가 있어서 구약성경의 시편 등을 보면 「부끄러워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시편 31:17절, 시편 35:4절, 예레미야 17: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31편
17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시편 35편
4 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부끄러워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들이 물러가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
예레미야 17장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즉,「수치를 당한다,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은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선한 삶에 열심인 그리스도인에게 욕을 하거나 비방하거나 해를 끼친다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그 보응으로 마지막 날에 하늘에서 부끄러움과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해 변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2)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고난의 길은 예수님도 똑같이 걸으셨습니다. 옳은 자가 옳지 못한 자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라고 했는데, 이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 사역은, 단 한 번, 영원히, 그리고 전역사적으로, 전우주적으로 효력이 있는 것으로 바쳐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뉼의 모든 역사를 뒤덮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의한 자」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의롭지 못한 자이지만,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인해 은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면서, 혹시 세상으로부터, 기억에도 없는, 부당한 고난을 받더라도 참고 견디며 바른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 영혼이라도 더 많은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언젠가 삶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문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님이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도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하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핍박 가운데서도 간증한 노아
계속해서 19~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사후에도 영혼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거기서 회개하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른바「세컨드 챤스」라는 가르침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사후에 영혼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내용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그 중 한 가지 해석을 소개하겠습니다. 첫째로 「선포하시니라」라는 동사의 시제를 보면, 이것은 과거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거의 어느 시점에 한 번 발생했다는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포로로 잡혀있던 영들에게 회개로 인도하기 위해 계속 복음을 전했다기보다는, 한 번 「선포되었다」, 그리스도의 승리가 선포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높이 들림을 받으심으로 포로로 잡혀 있던 영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 선언이 선포되어 그들의 패배가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냐고 하면, 바로 다음 구절에 설명이 나와 있는데, 이미 죽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바로 방주가 만들어지던 기간 동안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수로 인해 죽게 되고 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가 엄숙하게 선포되었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 순간 그들에게 결정적이 심판이 내려져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노아의 방주라는 것은, 굉장히 큰 배인데, 성경 뒤쪽에 도량형표가 있는데, 거기 보면 1엠마가 약 45cm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방주의 크기는 길이가 약 135 m, 폭이 약 22.5 m, 높이가 약 13.5 m의 크기입니다. 현대의 중형 유조선을 상상해 보시면 되는데, 마침 이 사진의 유조선이 전장 138 m, 폭 24 m이므로 크기적으로는 거의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노아의 방주의 전장과 폭의 비율이 현대 유조선의 비율과 거의 같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은 노아에게 거친 파도 속에서도 가장 안정된 방주의 크기를 지시하셨다는 뜻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렇게 거대한 3층짜리 방주를, 그것도 바다가 보이지 않는 육지에 지었습니다. 방주를 만들기 시작한 후 완성하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라는 말씀을 받은 후 약 100년 후에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 사람들은 노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곧「이 땅에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노아의 경고를 무시하면서 죄악된 삶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방주에 탑승해 구원을 받은 것은 노아의 가족, 단 8명뿐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바로 소아시아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똑같다고 베드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21~22절을 보시죠.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베드로는「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라고 노아의 홍수는 여러분들이 받은 세례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노아 시대에 방주에 탄 사람만이 물에서 구언 받았듯이, 이 시대도 방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람들만이 세례의 물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에는 동물들이 암컷과 수컷이 짝을 지어 들어갔지만, 정결한 짐승만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부정한 짐승도 함께 들어갔습니다. 창세기 7:8~9절을 보세요.
창세기 7장
8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9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즉, 여기에 기록된 대로 구원은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받은 세례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죄와 더러움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방주에 들어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의롭다 함을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아 선한 일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22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높이 들림을 받았는지에 대한 찬송적인 내용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우편이란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위임받으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우편에서 천사들(앙겔로스의 복수형)과, 또 권세들(엑수시아의 복수형)과, 그리고 능력들(뒤나미스의 복수형)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인 교회도 어떤 존재가 된다는 것일까요?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육신에 있어 고난을 당하며, 경외와 겸손으로 행하고 있지만, 하늘에서는 높이 들림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주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여전히 고난과 박해가 끊이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하고도 적대감과 악의를 받아 억울한 고난을 당할 때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핍박을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늘에서 받은 상을 너희도 함께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구약시대 노아는, 사람들의 조롱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오랜 세월을 들여 거대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는 늘 소수자이지만, 믿음으로 행하여 핍바과 어려움 속에서도 선한 삶과 주를 경외하는 태도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序】
ある人は、この世に苦難が存在すること自体、神が存在しないことの証拠であると言います。世界を統治される神様が全能なるお方であり、善なるお方であるなら、私たちが苦難にあうことがないようにされるはずだ、そして神様は、私たちが苦難に合わないように願われるはずだ。従って、私たちの生活の中に苦難があるということは、神様が善なるお方ではないか、或いは、能力のない証拠だと言うのであります。この世に苦難があるということは、まさにキリスト教が嘘である証拠であると言うのです。神様が善なるお方で、全能なるお方であるなら、神の民に苦難が襲って来ないように、統治されるのではないか、全能なる方なら、神の民に降りかかる苦難を未然に防がれ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でしょう。
このような考えの根底には、苦難とは無条件に悪いものであるという考え方があるのだと思います。受難週が始まる今日、皆さんと一緒に考えてみたいことは、苦難とは本当に悪いものなのだろうかということです。苦難について深く考えてみるなら、初代教会の宣教は、まさに迫害を受けながら、苦難を受けながら、散らされて拡大していきました。キリスト者が義のために苦しみを受けるなら、そのことはまさに主イエスの御名をこの世に大胆に証しし、この世に対して本当に恐れるべきお方を証ししてい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苦難とはただ、私たちが望まないもの、嫌いなものだけであって、実はそれは、この世に光を指し示すこと、救いの道を指し示すことだとも言えるのです。従いまして、もし、キリスト者がこの世から敵意を受けたなら、悪意を受けたなら、どうするべきでしょうか。既にお分かりのことと思われますが、敵意に対し敵意をもって返してはならない、悪意に対し悪意をもって返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れでは、キリスト者はいつでもやられっ放しでは?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悪い者たち, ずるい者たちだけが結局、得をするのでは?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ペトロは本日の箇所において、その答えをはっきりと準備しています。信者がこの世において苦難を受ける理由とは、信者がキリストの弟子として、まさにキリストの歩まれた模範に従うということであり、さらに言えば、信者をキリストに固く結び合わせて、天に上げられた栄光の御座へと導くため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悪い者たちは、最終的に裁かれ、恥じ入るようになるため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1】. 私たちが持っている希望について
3:14~15節をご覧ください。
“しかし、義のために苦しみを受けるのであれば、幸いです。人々を恐れたり、心を乱したりしてはいけません。心の中でキリストを主とあがめなさい。あなたがたの抱いている希望について説明を要求する人には、いつでも弁明できるように備えていなさい。”
キリスト者に与えられている希望の根拠というものは、何か漠然としたものではなく、御言葉の約束に基づいたものであり、確実に成就される事柄であります。ですから、もし、キリスト者が義しいことをしていて、不当な苦しみを受けた時に、取り乱し、動揺し、そして人々を恐れてはなりません。むしろ迫害を受けたことを幸いだと考えるべきです。私たちの歩みは私たちの羊飼いであり、監督者であるイエス様によって必ず栄光の目的地に導かれることが約束されているため、私たちは苦難の中にあっても、善き業に励み続け、悪に対し善をもって応え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もしかしたら世の人々は、そのような私たちの姿を見て不思議に思い、奇妙に感じるかもしれません。そして、「あなたの希望の根拠とは何ですか?」と尋ねてくるかもしれません。そのような時には「よくぞ聞いてくださいました!」と言って、私たちの希望の根拠を弁明できるように備えているようにいたしましょう。私たちが本当に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は、時のローマ皇帝でも、総督でもなく、迫害してくるユダヤ人でもなく、神様であることを証しするべきです。16節をご覧ください。
“それも、穏やかに、敬意をもって、正しい良心で、弁明するようにしなさい。そうすれば、キリストに結ばれたあなたがたの善い生活をののしる者たちは、悪口を言ったことで恥じ入るようになるのです。”
「穏やかに」とは、謙遜になってという意味です。「敬意をもって」とは、畏敬の念をもってという意味です。「悪口を言ったことで恥じ入るようになる」という言葉がございますが、この言葉は終末論的な響きを帯びていまして、旧約聖書の詩編などを見ると「恥じ入るようになる」という言葉がたくさん用いられていることに気づきます。少し例を挙げますと、詩編31:18、詩編35:4と、エレミヤ書17:13をご覧ください。
詩31:18
“主よ、あなたを呼びます。わたしを恥に落とすことなく/神に逆らう者をこそ恥に落とし/陰府に落とし、黙らせてください。”
詩35:4
“わたしの命を奪おうとする者は/恥に落とされ、嘲りを受けますように。わたしに災いを謀る者は/辱めを受けて退きますように。”
エレ17:13
“イスラエルの希望である主よ。あなたを捨てる者は皆、辱めを受ける。あなたを離れ去る者は/地下に行く者として記される。生ける水の源である主を捨てたからだ。”
つまり、「恥じ入る」とは、終わりの日に裁きに定められることです。善き生活に熱心なキリスト者に対し、悪口を言ったり、ののしったり、危害を加えるのなら、彼らが悔い改めない限り、神は一切のことを覚えておられ、報いとして、終わりの日に、天から、恥と裁きをもたらすのです。これほど恐ろしいこと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世の人々の救いのために、私たちはいつでも私たちの持っている希望について弁明できるように備え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何より、彼らのためにとりなし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2】. 神のもとへ導くため
苦難の道は、イエス様も同じように歩まれました。正しい方が正しくない者たちのために苦しれたのです。18節をご覧ください。
“キリストも、罪のためにただ一度苦しまれました。正しい方が、正しくない者たちのために苦しまれたのです。あなたがたを神のもとへ導くためです。キリストは、肉では死に渡されましたが、霊では生きる者とされたのです。”
「キリストも、罪のためにただ一度苦しまれ」とありますが、これは、十字架の苦しみ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イエス様の十字架による贖罪の御業は、ただ一度だけ、永遠に、そして全歴史的に、全宇宙的に、効力のあるものとして捧げられたという意味です。イエス様の十字架の事件は、人類の全ての歴史を覆うような事件でありました。そして、「正しくない者を神のもとへ導くため」と書かれていますが、この「正しくない者」というのは、まさに私たちの事であります。私たちはイエス様の贖いの御業の故に、正しくない者でありながら、恵みによって神の御許へ導かれ、義しい者とされたのです。であるなら、私たちもまだイエス様のことを知らない世の人々のために、とりなしつつ、もし、この世から身に覚えのない不当な苦しみを受けたとしても、それを耐え忍び、正しい良心を持つべきであります。そのようにして一人でも多くの魂がキリストに導かれるようにするためです。この世において、やがて私たちは生を全うし、死を迎えることになりますけれども、死はもはや、私たちにとって罪に対する刑罰ではございません。私たちにとって死とは、永遠の命の入り口となったのです。なぜなら、十字架と復活の主イエスが、肉では死に渡されましたが、霊では生きる者とされたのとまったく同じように、キリストに結ばれた私たちも、肉では死に渡されますが、霊においては生きる者とされるからです。
【3】. ノアは迫害時にも証しをした
続いて19~20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して、霊においてキリストは、捕らわれていた霊たちのところへ行って宣教されました。この霊たちは、ノアの時代に箱舟が作られていた間、神が忍耐して待っておられたのに従わなかった者です。この箱舟に乗り込んだ数人、すなわち八人だけが水の中を通って救われました。”
この箇所は聖書の中で最も解釈が難しい箇所の一つとされています。この聖書箇所をもって、死後の魂にも福音が語られ、そこで悔い改めに導かれて、救いの可能性があるとする、いわゆる「セカンドチャンス」という教えが出てきました。しかし、聖書全体を見ますと、死後の魂に福音が語られるという内容は一切語られておりません。それでは、本日のこの箇所をどのように解釈するかということですが、いろいろな解釈がございまして、その中の一つの解釈を紹介させていただきます。第一に「宣教されました」という動詞の時制を見ますと、これは過去において継続的になされたという意味ではなく、過去のある時点において、一度発生したという時制になっています。ですから、捕らわれていた霊たちに対しては、悔い改めに導くために福音を語り続けたというより、一度「宣言された」、キリストの勝利が宣言されたという意味になります。イエス様が復活された後、高く挙げられることによって、捕らわれていた霊たちに対し、キリストの勝利宣言が宣告され、彼らの敗北が決定づけられたという事です。この「捕らわれていた霊たち」とは、誰かと言いますと、次の節に説明が書かれていますが、既に死んでいるノアの時代の人々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ノアの時代、ちょうど箱舟が作られていた期間、神様は長く忍耐して、人々が悔い改め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した。しかし彼らは従わなかったために洪水によって死んでしまい、獄に捕らわれていて、その彼らに対しキリストの勝利が厳粛に宣言されたという意味だと思います。その瞬間、彼らに決定的な裁きが下り、恥じ入るように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
このノアの箱舟というのは大変大きな船でありまして、聖書の後ろに度量衡の表がありますから、そこを見ますと1アンマが約45cmとあります。従ってこの箱舟の大きさはというのは、長さが約135m、幅が約22.5m、高さが、約13.5mという大きさになります。現代の中型のタンカーを想像していただければと思いますが、ちょうどこの写真のタンカーが全長138m、幅が24mですので、大きさ的にはほぼ同じになります。ここで大変興味深いことは、ノアの箱舟の全長と、幅の比率が、現代のタンカーの比率とほぼ同じ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神様は荒波の中でも最も安定する箱舟の大きさを、ノアに指図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ノアは神様の御言葉に従って、このように巨大な三階建ての箱舟を、しかも海の見えない陸地に作りました。作り始めてから完成するまでに大変長い歳月がかかりました。ノアが箱舟を作るようにと御言葉が与えられてから、約100年後に洪水が起こっています。その間、人々はノアのおかしな様子を見ながら、そして間もなく「この地に裁きが訪れるという」というノアの警告を無視しながら、罪深い生活を悔い改めることはしませんでした。最終的にこの箱舟に乗り込んで救われたのは、ノアの家族だけで、たったの8人だけ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このような状況は、まさに小アジアの人々が直面している状況と同じですよ、とペトロは語りかけています。続く21~22節をご覧ください。
“この水で前もって表された洗礼は、今やイエス・キリストの復活によってあなたがたをも救うのです。洗礼は、肉の汚れを取り除くことではなくて、神に正しい良心を願い求めることです。キリストは、天に上って神の右におられます。天使、また権威や勢力は、キリストの支配に服しているのです。”
ペトロは「ノアの洪水とは、あなた方が受けた洗礼とも一緒なんですよ」と語りかけます。つまりノアの時代、箱舟に乗った者だけが水の中から救われたように、今の時代も箱舟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に結ばれた人々だけが、洗礼の水を通して、救われ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ノアの箱舟には動物が雄と雌とつがいで入れられましたが、清い動物だけが入れ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ね。汚れた動物も共に入れられました。創世記7:8-9をご覧ください。
“清い動物も清くない動物も、鳥も地を這うものもすべて、二つずつ箱舟のノアのもとに来た。それは神がノア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雄と雌であった。”
つまり、ここに書かれていますように、救いとは箱舟に入れられることであり、これはキリストに結ばれる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そして、キリスト者が受けた洗礼とは、決してキリスト者の罪や汚れを完全に取り除くことはできませんが、箱舟に入れられたが故に、イエス・キリストの贖いの故に、義しいとされたことを神様に要求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よ、と言っているのです。私たちキリスト者はこの世にあって依然として罪深い者ですが、キリストに結ばれて、キリストの恵みの中で、義とされ、善き業を神様に捧げ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最後の22節はイエス・キリストがどのように高く挙げられたのか、頌栄的な内容になっています。キリストは天に上り、神の右におられます。神の右とは、御父から全ての権能を預か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しょう。その神の右において、天使と(アンゲロスの複数形)、また権威と(エクスーシアの複数形)、そして力が(デュナミスの複数形)、キリストの支配に服していると言うのです。ということは、キリストを頭とする、身体なる教会も、どういうことになる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天においてキリストと共に支配するよう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ね。私たちはこの世においては、肉にあって、苦難に与り、畏れと、謙遜によって歩ませていただいておりますが、天において高く挙げられ、キリストと共に支配するようになるのです。
【結論】
私たちが主イエスを信じたにも関わらず、この世においては依然として苦難や迫害は絶えることはありません。善を行っていても、なお敵意や悪意を受けて、不当な苦しみに遭う時には、幸いであるとペトロはいいます。なぜなら、同じように迫害を受けた旧約の預言者たちが、天で受けた報いに、あなた方も一緒に与ることになるからですとペトロは言います。旧約時代のノアは人々から嘲られ、迫害を受けても、長い歳月をかけて巨大な箱舟を建造しました。現代に生きる私たちもキリスト者も、この世にあっては常にマイノリティの存在かもしれませんが、信仰によって歩ませていただき、迫害や困難の中にあっても、善き生活と主を畏れる態度を通して、主イエス・キリストを証しする者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