このことのためにあなた方は召されたのです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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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聖書 ペトロの手紙一 3章8節~12節
3:8終わりに、皆心を一つに、同情し合い、兄弟を愛し、憐れみ深く、謙虚になりなさい。
3:9悪をもって悪に、侮辱をもって侮辱に報いてはなりません。かえって祝福を祈りなさい。祝福を受け継ぐためにあなたがたは召されたのです。
3:10「命を愛し、/幸せな日々を過ごしたい人は、/舌を制して、悪を言わず、/唇を閉じて、偽りを語らず、
3:11悪から遠ざかり、善を行い、/平和を願って、これを追い求めよ。
3:12主の目は正しい者に注がれ、/主の耳は彼らの祈りに傾けられる。主の顔は悪事を働く者に対して向けられ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ペトロの手紙一 3章8節~12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2021년 3월 21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베드로전서 3장 8~12절
서론
베드로는 이 서신 5장에서,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벨론이라는 곳은 이 시대에는, 이미 폐허가 된 도시인데, 왜 바벨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요한계시록에서도 역시 로마를 바벨론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억압과 박해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벨론이라는 단어를 통해, 복음을 반대하는 악한 세상의 중심 세력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황제든 총독이든 세워진 권위에 복종하라, 오히려 복을 빌라고 할 때, 그것은 로마의 지배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 뭐야, 세상이라는 것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로마가 저지르고 있는 큰 죄에 대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감추인 것까지 다 보시고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의인의 기도와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계시기 때문에,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박해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오히려 복을 빌어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제사장의 직무로서의 축복
3:8절에는「마지막으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편지의 결론이 아니라, 2:11절부터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은, 국가 권력자에 대한 복종, 그리고 종과 주인의 관계, 그리고 신자인 아내와 불신자인 남편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원칙을 여기에 정리하고 있습니다. 3:8~9절 전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당시 그리스・로마에서는, 가정의 규약이나 그 집안의 가훈을 가르칠 때, 덕목 하나 하나를 열거하면서 도덕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베드로도 이를 따라 덕목을 하나 하나 세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겸손」이라는 덕목은 그리스・로마의 가치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덕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비굴한 것, 용맹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9절의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한 미덕은 예수님과 제자들 외에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던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44~45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5장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그러나 이런 식으로 들으면 악에 대해 무조건 “무저항하라”거나, 악에 “함께 가담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혹은 “결국은, 나쁜 자, 교활한 자만이 이득을 보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벧전 3:9절로 돌아가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했는데, 「복을 빌다」라는 동사는 헬라어로 「율로게오εὐλογέω」라는 단어입니다.「축복」이라는 명사는 「율로기아」라는 단어입니다. 모두 「로고스(말)」와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는 「좋은 말을 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축복하는 것은 구약에서 제사장의 특별한 권한이었습니다. 축복하는 것, 「선한 말을 하는 것」에 관해서는 바로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몸소 모범을 보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고스이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소중히 사용하셨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젠장! ,뭐야, 이 야만인아!”, “젠장, 뭐야, 이 자식아!”라고 말하지 않으셨죠. 대신「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향해 선한 말을 하셨습니다. 즉, 「복을 빌다」, 「선한 말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는 것, 다시 말해 세상에 「좋은 소식」인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2)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9절 전체를 직역하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조금 세세한 논의이지만, 「이를 위하여」라는 말이, 앞의 일을 가리키는지 뒤의 일을 가리키는지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한 부분입니다. 즉 부르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앞부분인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 주기 위해서」부르신 것인지, 아니면 뒷부분인 「복을 이어받게 하려」 부르신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일본어 신공동역 성경, 신개역성경의 경우도, 「이를 위하여」라는 단어가, 뒷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여 「복을 이어받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은 같은 형태로 2:21절에도 나옵니다. 한 페이지 돌아가서 벧전 2: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서「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를 위하여」의 「이를 위하여」는 분명히 앞부분의 「선을 행하여 고난을 받고 그것을 견디는 것」을 가리키는 것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과 마찬가지로 3:9절에서도 「이를 위하여」라는 단어는, 앞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3:9절은 의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악으로 악을, 욕으로 욕을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기 위해 여러분은(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에 풍성한 보물을 쌓게 되고) 축복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기 위해, 고난을 견디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그들이 택한 백성으로, 왕의 계보를 잇는 제사장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무슨 지혜가 많아서도 아니고, 능력이 있거나 가문에 위대한 사람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원래 그들은, 나그네, 임시 거주자로서 로마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 고난과 억압을 당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은, 부름을 받은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삶의 방향이 180도 전환되어 예수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서 예수니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자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에 정치적 왕국이 회복되어, 이 땅에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겪으셨던 고난을, 제자들도 똑같이 겪게 될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24~25절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블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는 스승처럼, 종은 주인처럼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 점에 있어서야말로, 제자들이 장차 받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한 소망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후에, 높이 들림을 받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그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 않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며, 이 땅에서 영원한 도성을 가지려 하지 않고, 장차 올 하늘의 예루살렘을 추구하게 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믿음으로, 이 땅에서 허무에 빠진 피조물 전체와 함께 신음하고 함께 산고의 고통을 맛보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나타남을 기다리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 전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인내하도록 변화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5:11~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5장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선지자들은 모두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받는 자는 하늘에서 큰 상급이 약속되어 있기에,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며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3) 선한 삶의 경이로움
3:10~12절은 괄호 안에 괄호로 묶여(일본어 성경) 시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34편에서 인용한 것인데, 베드로는 시편 34편을 지금까지 자신이 논한 내용을 증명하는 구절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3:10~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구약성경에서, 비록 당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이 넘치는 복된 날을 믿음의눈으로 바로보며, 혀를 제어하고, 악을 말하지 않고, 평화를 소망하며 추구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으시고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생명으로 충만한 복된 날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걸아갔다면,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더더욱 그것을 바라보며 갈어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행보는 아마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그 기이한 행보, 이상한 행보야말로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의 일생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집요하게 쫓기다가 결국 적국인 블레셋으로 망명할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그 사이 두 번이나, 사울 왕을 처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났지만, 번번이 놓아주었습니다. 찻 번째는 엔게디 광야의 동굴에서 사울이 마침 용변을 보려고 동굴에 들어왔을 때입니다. 그때 부하들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라고 은밀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부하들의 목소리를 제압하고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고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만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두 번째 기회는 십 광야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침 사울의 진영에 깊은 잠을 내리셨을 때, 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아비새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라고 말했지만, 다윗은 이 말을 막고,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고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져갔습니다. 다윗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악에게 악으로 갚지 않고 사울 왕에게 충성을 다하며, 사울 왕을 축복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리 멀지 않아 사울을 치실 것, 즉 때가 되어 죽거나, 전쟁에 나가서 죽임을 당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복수를 주님 손에 맡긴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이시며, 복수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결코 악으로 악을 갚지 않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이상한 삶을 통해, 세상에 복음이 선포되고, 또, 동시에 불신자의 머리 위에 불타는 숯불을 쌓는다는 것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목적, 그것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고, 모욕에 대해 복을 빌어줌으로 갚고, 원수를 사랑하고, 화평을 원하고, 혀를 다스려 간구 하는 것,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이상하고, 매우 기이하며,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기이함이야말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증거하는 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역을 위해 인내하며, 말씀으로 양육받고 성장하도록 권면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에 풍성한 보화를 쌓게 되고, 복을 기업으로 물려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序】
ペトロはこの手紙の5章において、ローマのことをバビロンと呼んでいます。バビロンというのはこの時代には、もう既に廃墟となってしまった都市ですが、なぜバビロンという言葉を使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ヨハネの黙示録においても、やはりローマをバビロンという言葉に言い換えています。この言葉遣いは、当時のキリスト者に対する抑圧と迫害が、どれだけ厳しかったのかという事を物語っています。おそらくバビロンという言葉によって、福音に反対する悪の世界の中心的な勢力という事を言わんとし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従いまして、ペトロが、皇帝であろうと、総督であろうと、立てられている権威に服従しなさい、かえって祝福を祈りなさい、と言う時に、それは、ローマによる支配というものが、我々キリスト者にとって「まあ、何だ、大きく見れば、まんざら捨てたものでもない」という事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ペトロは明らかにローマの犯している大きな罪に対し、神の厳しい裁きが下されるであろうという事を確信していました。神は生きておられ、すべて覆い隠されたものまでご覧になられ公正に裁かれるお方だからです。神が生きておられるので、神が義人の祈りと、叫びに耳を傾けて下さるので, ペトロは本日の箇所で、迫害の中に生きるキリスト者に対し、悪をもって悪に報いるのではなく、むしろ祝福しなさいと励ましているのです。
【1】. 祭司の務めとしての祝福
3:8節には、「終わりに」という言葉がございます。これは、この手紙の結論という事ではなく、2:11から、具体的に語られてきた内容のまとめ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これまで具体的に語ってきた内容とは、国家為政者に対して服従すること、また、僕と主人の関係について、そして信者の妻と未信者の夫の関係について語ってきました。そして最後に、どのような人々にも当てはまる一般的な原則をここにまとめているのです。3:8~9節前半をご覧ください。
“終わりに、皆心を一つに、同情し合い、兄弟を愛し、憐れみ深く、謙虚になりなさい。悪をもって悪に、侮辱をもって侮辱に報いてはなりません。”
当時ギリシア・ローマにおいて、家庭の規約やその家の家訓が教えられる時に、一つ一つの美徳を数え上げながら、道徳教育がなされていたようです。ここでは、ペトロもそれに倣って一つ一つ美徳を数え上げていると思われますが、「謙虚」という美徳はギリシア・ローマの価値観には見られない美徳でした。なぜなら、謙虚というのは、卑屈なこと、勇猛果敢ではないこととして捉えられていたからです。さらに言えば、9節の「悪をもって悪に、侮辱をもって侮辱に報いてはならない、かえって祝福を祈りなさい」。このような美徳は、まさにイエス様とその弟子たち以外には、誰も教えなかった内容であったでしょう。マタイによる福音書5:44~45をご覧ください。
“しかし、わたしは言っておく。敵を愛し、自分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あなたがたの天の父の子となるためである。父は悪人にも善人にも太陽を昇らせ、正しい者にも正しくない者にも雨を降らせてくださるからである。”
しかし、こういうふうに言われると、悪に対してとにかく「無抵抗であれ」とか、悪に「一緒になって加担しなさい」と言われているように錯覚するかもしれません。或いは、結局、悪い者, ずるい者だけが、得をするのではないか?と思ってしまうかもしれませんが、そう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45節に「あなたがたの天の父の子となるためである」とありますように、私たちがキリストに似るように、御霊によって愛の実が豊かに結ばれるようにと勧めているのです。ペトロの手紙の9節に戻りまして、“悪をもって悪に、侮辱をもって侮辱に報いてはなりません。かえって祝福を祈りなさい” とありますが、「祝福する」という動詞はギリシア語で、ユーロゲオーεὐλογέωという言葉です、「祝福」とうい名詞はユーロギアという言葉です。いずれもロゴス(言葉)と関係があります。元々は「善い言葉を語る」という意味を持っていました。ところで、祝福することは、旧約において祭司長の特別な権能でありました。祝福すること、「善い言葉を語ること」に関して言えば、まさに大祭司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様が、みずから進んで模範を見せてくださったと言う事ができるでしょう。ロゴスであられるイエス様が、言葉を大切に使われたことは言うまでもありません。イエス様は「ののしられてもののしり返さず、苦しめられても人を脅」しませんでした。十字架に架けられた時にも、どうでしょう、「畜生!」とか「なんだ、この野郎!」とは言いませんでしたね。その代わりに「父よ、彼らをお赦しください。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知らないのです」と、自分を十字架に架けた人々に対して、善い言葉を語られたのです。つまり、「祝福する」、「善い言葉を語る」ということは、イエス様の模範に学ぶこと、ひいて言えば、世に「良き知らせ」である福音を宣べ伝えるという事になるのです。
【2】. このためにあなた方は召された
9節全体を直訳しますと、「悪をもって悪に、侮辱をもって侮辱を返したりせず、逆に祝福しなさい。このためにあなた方は召されたのです、つまり祝福を受け継ぐようになるためです。」となります。ここで、「このためにあなた方は召されたのです」というフレーズが出てきますが、少し細かい議論ですが、「このために」という言葉が、前の事柄を指すのか、後ろの事柄を指すのか学者ごとに意見が分かれる所です。つまり召された理由が一体何なのか、前の部分である「悪をもって悪に、侮辱をもって侮辱を返したりせず、逆に祝福する」ために召されたのか、或いは後ろの部分である「祝福を受け継ぐ」ために召されたのかということです。新共同訳聖書の場合(新改訳聖書もそうですが)、「このために」という言葉が、後ろの事柄を指していると解釈して、「祝福を受け継ぐために召されたのです」と訳しています。ただ、このフレーズは同じ形によって2:21にも出てまいります。1ページ戻りまして、1ペトロの手紙2:21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が召されたのはこのためです。というのは、キリストもあなたがたのために苦しみを受け、その足跡に続くようにと、模範を残されたからです。”
ここでは、「あなたがたが召されたのはこのためです」の「このため」というのは明らかに前の部分の「善を行って苦しみを受け、それを耐え忍ぶこと」を指している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ですから、これと同じように3:9も「このために」という言葉は、前の部分を指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従って、3:9は、意訳しますと、
「悪をもって悪に、侮辱をもって侮辱を返したりせず、逆に祝福するために、あなた方は(神の僕として)召されたのです。そのようにして(天に豊かな宝を積むことになり)、祝福を嗣業として受け継ぐことになるのです。」ということです。「なんだって、キリスト者は苦しみを受けるため、それを耐え忍ぶために召されただって?そんなことがあっていいものだろうか!」と驚かれ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そもそも彼らが選ばれた民として、王の系統を引く祭司として、聖なる国民として、神の子として召された理由とは、彼らが何か、知恵のある者が多かったからでもなく、能力のある者や、家柄のよい者が多かったからでもありません。もともと彼らは、寄留人であり、旅人であり、仮住まいの者であり、ローマが支配するこの地において苦難と抑圧を受けること以外に、それ以外に何も期待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そのような状況は、召された以降においても何も変わらなかったことでしょう。それにもかかわらず召された者たちは、180度人生の方向が転換させられ、イエス様を見たことがないのに、イエス様を愛し、言葉では言い尽くせない喜びに満ち溢れ、イエス様のためなら全てのものを捨てて、従う者へと変えられていったのです。一体なぜでしょうか。イエス様はご自身の弟子たちに、イスラエルに政治的な王国が復興され、この地であなた方は栄光に満ちた未来を享受することになるとは予告されませんでした。その代わりに、主ご自身が経験された苦しみを、弟子たちも同じように経験することになるだろうと予告されたのです。マタイによる福音書10:24~25をご覧ください。
“弟子は師にまさるものではなく、僕は主人にまさるものではない。弟子は師のように、僕は主人のようになれば、それで十分である。家の主人がベルゼブルと言われるのなら、その家族の者はもっとひどく言われることだろう。”
弟子は師に優るものではなく、僕は主人に優るものではない、弟子は師のように、僕は主人のようになれば、それで十分だと言われましたが、まさに、この点においてこそ、弟子たちが、やがての日に受けることになる称賛と光栄と誉れの希望の根拠がある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が低くされた後に、高く挙げられたように、弟子たちも同じ道を通ることになります。召された者たちの市民権は天にあって、彼らはもはや、見えるものに目を留めることをせず、上にあるものを思い、この地で永遠の都を持とうとするのではなく、将来、来るであろう天のエルサレムを追求するようになります。召された者たちは、信仰によって、この地にあって虚無に服している被造物全体と共に呻き、共に産みの苦しみを味わいながら、キリストの再臨と神の子供たちの栄光の現れを待ちこがれ、現在の苦難は、将来与えられる栄光とまったく比較することができないだろうという約束を信じ、耐え忍ぶように変えられるのです。マタイ福音書5:11-12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のためにののしられ、迫害され、身に覚えのないことであらゆる悪口を浴びせられるとき、あなたがたは幸いである。喜びなさい。大いに喜びなさい。天には大きな報いがある。あなたがたより前の預言者たちも、同じように迫害されたのである。”
預言者たちは皆迫害されました。キリストの故に迫害されるものは、天において大きな報いが約束されているが故に、迫害された時、喜び踊るのであります。
【3】. 善良な生き方の不思議さ
3:10~12節は、カッコで括られていて、詩のようになっています。これは詩編34編からの引用ですが、ペトロはこれまで自分が論じてきたことの証拠聖句として詩編34編を引いています。3:10~12をご覧ください。
“「命を愛し、/幸せな日々を過ごしたい人は、/舌を制して、悪を言わず、/唇を閉じて、偽りを語らず、悪から遠ざかり、善を行い、/平和を願って、これを追い求めよ。主の目は正しい者に注がれ、/主の耳は彼らの祈りに傾けられる。主の顔は悪事を働く者に対して向けられる。」”
旧約聖書の中で、たとえ当時、自分たちの置かれている状況が厳しい中にあったとしても、それでも神様の支配と統治を信じました。彼らは、命にあふれた幸いの日々を信仰の目で眺め、舌を制して、悪を言わず、平和を願って追い求めたと証ししています。神様はこのように信仰によって生きる義人の叫びと祈りに耳を傾けてくださり、顧みてくださるのです。彼らがこのように、命にあふれた幸いの日々を、信仰の目で眺めつつ歩んだのなら、新約に生きる私たちはなおさら、それを眺めて歩んで行きましょうと言っているのです。このような歩みは、おそらく神様を信じない人が見る時、奇妙なものとして目に移ることでしょう。しかし、聖徒たちのその奇妙な歩み、不思議な歩みこそ、主を証しすることであり、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なのです。例えば、ダビデの生涯を振り返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サウル王に執拗に追い回され、最終的には敵国であるペリシテに亡命するほどにまで、追いつめられました。その間に二回も、サウルをその手で仕留めることができる絶好のチャンスに遭遇いたしましたが、みすみすそれらを逃してしまいました。一度目は、エンゲディの荒れ野にある洞窟の中で、サウルがちょうど大便をしようと洞窟に入って来た時です。その時、部下たちは喜びに満ちた声で言いました。「主があなたに、『私は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手に渡す。あなたは思いのままにするがよい』と言われたのは、この時のことではありませんか」。ひそひそ話で言いました。ところが、ダビデは部下たちの声を制し、サウルに手を掛けることをせず、サウルの上着の端だけを切り取って行きました。二度目のチャンスは、ジフの荒れ野においてです。神様がちょうどサウルの陣営に深い眠りを送られて、その機会が訪れました。その時、アビシャイはダビデに「神は、今日、敵をあなたの手に渡されました。さあ、わたしに槍の一突きで彼を刺し殺させてください。一度でしとめます」と言いましたが、ダビデはこの言葉を制し、サウルに手を掛けることをせず、ただ、サウルの槍と水差しだけを取って行きました。ダビデは最後の最後まで、悪に悪をもって報いることをせず、サウル王に対し忠誠を尽くし、サウル王を祝福したのです。なぜなら、主がそれほど遠からずサウルを打たれること、つまり時が来て死ぬか、戦に出て殺されるであろうことを確信していたからです。復讐を主の手にお委ねしたのです。神様だけが善なるお方であり、復讐は神様がなさいます。ダビデは、決して悪をもって悪に報いず、悪口をもって悪口に報いなかったのです。キリスト者のこの奇妙な生き方を通して、不思議な生き方を通して、世に福音が宣べ伝えられ、また、同時に、不信者の頭の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ことになるということがここに暗示されているのです。
【結論】
私たちが神様に召された目的、それは、祭司の務めを果たすことであります。悪に対し善をもって報いること、侮辱に対し祝福によって報いること、敵を愛し、平和を願い、舌を制して、とりなす事、このようなキリスト者の善良な生き方は、世の人々から見ると大変奇妙であり、大変不思議であり、理解に苦しむのです。しかし、まさにこの不思議さこそが、私たちを召してくださった神の力ある御業を証しすることであり、即ち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になるのです。私たちはこの務めのために忍耐しながら、御言葉によって養われ、成長するようにと勧められています。そうすることによって天に豊かな宝を積むことになり、祝福を嗣業として受け継ぐことになるから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