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年02月14日「イエスの洗礼 예수의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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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エスの洗礼 예수의 세례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章9節~13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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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そのころ、イエスはガリラヤのナザレから来て、ヨルダン川でヨハネから洗礼を受けられた。
1:10水の中から上がるとすぐ、天が裂けて“霊”が鳩のように御自分に降って来るのを、御覧になった。
1:11すると、「あなた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いう声が、天から聞こえた。
1:12それから、“霊”はイエスを荒れ野に送り出した。
1:13イエスは四十日間そこにとどまり、サタンから誘惑を受けられた。その間、野獣と一緒におられたが、天使たちが仕えてい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章9節~13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本日はイエス様が洗礼を受けられるという記事ですけれども、この洗礼を通して、どれだけ神さまが御子イエス様を愛しておられたのかを私たちに教えてくださっている箇所です。そして、それほどまでに愛しておられる方を、父なる神は世にお与えてくださいました。これがどういうことかなのか、本日はマルコ1:11節の御言葉を中心に考え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

【1】. イエスの洗礼は聖霊の油注ぎであった

そもそもイエス様が、洗礼者ヨハネから洗礼を受けられたという事件は、どのように解釈すればいいのか、古くから教会において問題となる箇所でありました。罪のないお方なのに、なぜ、あえて洗礼を受ける必要があったのでしょうか。考えられる理由としては、第一に、イエス様は罪が無いにも拘わらず、罪人のところにまでへりくだられるために、洗礼を受けられたということ、第二に、私たちが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模範を示すために洗礼を受け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通りだと思います。しかし、それらのことと併せて、マルコによる福音書において、さらに強調されている点は、イエス様の洗礼とは、まさにイエス様が公生涯を開始するに当たっての油注ぎであったという点です。「油注ぎ?」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が、油注ぎというのは、王や祭司が任職の時に受ける慣例的な儀式でございました。神に召され、神の働きを担っていくために、聖別されるという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アロンの血統の祭司が任職の際に油注がれました。サウル王が油注がれ、ダビデ王が油注がれました。同じようにイエスさまの洗礼は、1:11の天からの証言によって、それが任職の油注ぎであっ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のです。さらに言えば、イエス様が、どれだけ父に愛されていて、そして父の御心を成し遂げる従順な僕であるのかを知らされるのです。1:9~11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のころ、イエスはガリラヤのナザレから来て、ヨルダン川でヨハネから洗礼を受けられた。水の中から上がるとすぐ、天が裂けて“霊”が鳩のように御自分に降って来るのを、御覧になった。すると、「あなた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いう声が、天から聞こえた。”

この時イエス様はおよそ30歳くらいであったとルカによる福音書には書かれています。ガリラヤのナザレと言えば、今で言えば、受胎告知教会があり、今でこそ有名な観光スポットでありますが、当時は、ガリラヤとはイスラエルの僻地であり、ナザレという村はその名も知られていない、小さな小さな村でした。この田舎者の青年が洗礼者ヨハネから洗礼を受けるために、その行列に並んでいる訳です。そして、いざイエス様が洗礼を受けると、天が裂けて、聖霊が鳩のように舞い降りてきたと書かれています。天が「裂ける」という大胆な表現は、著者マルコにとって、そこにあたかも異次元空間でも現れたような、衝撃的な現象が起こったということを言わんとし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天が裂けて、聖霊が、鳩のように優しく、ゆっくりと、イエス様の上に注がれました。すると次に、天から声が聞こえてきました。“あなた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いうのです。この11節の語りかけの箇所をギリシア語を見ますと、三つのことが言われています。それは「あなたはわたしの独り子であり、愛される者であり、そして、わたしの心に適う者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この天からの語りかけは、前半部分は旧約聖書の詩編からの引用で、後半部分はイザヤ書からの引用であると言われていますので、11節の御言葉の理解をさらに深めるためにも旧約聖書に目を向けてみましょう。詩編2:6~7をご覧ください。

“聖なる山シオンで/わたしは自ら、王を即位させた。」主の定められたところに従ってわたしは述べよう。主はわたしに告げられた。「お前はわたしの子/今日、わたしはお前を生んだ。”

この詩編2:6~7は、神の永遠の聖定における、御子の王として任職式と言われています。ここでは王として任職される日に、神は「お前はわたしの子、今日、わたしはお前を生んだ」と言っています。つまり御子のお生まれになった日が、王として任職された日であると言っています。皆さん、赤ちゃんが生まれた時のことを想像してみてください。どれほど両親の愛を受けて生まれて来るでしょう。しかも、そのご誕生は、同時に王として任職された誕生でもありました。そのような大きな愛を受けてイエス様は生まれて来られたのです。ところで、水を差すようなことかもしれませんが、父なる神様が、御子を生んだのは、時間の中で発生し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御子は時間が創造される前に、御父から直接生まれて来られたお方だからです。中々想像するのが難しいかもしれませんが、時間というのは神の被造物でありまして、御子は被造物ではなく、むしろ万物の創造に際して、ロゴスとして関与しておられるお方ですから、御子は時間の中で生まれたのではなく、永遠において生まれた、神の独り子であるという事です。ちょっと不思議ですね。とにかく父なる神は、独り子である御子を心から愛しておられました。神は愛なるお方であり、三位一体の神様の中で、この愛は十全に満たされていて、何の不足もなかったということも事実でございます。従いまして、余談になりますけれども、神様が人間を救われたのは、決して、神様の愛する対象がいなくて、神様が寂しくて仕方なかったから、愛の対象としての人間を救済されたという事ではありません。神は愛する御子を通して、私たち人間を愛されるのです。そしてイエス様こそ、父の独り子であり、父なる神様から愛を受ける対象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御子の誕生において神様のあふれんばかりの愛がここに表現されているのです。

【2】. わたしの心に適う者

次にイザヤ書42:1をご覧ください。

“見よ、わたしの僕、わたしが支える者を。わたしが選び、喜び迎える者を。彼の上にわたしの霊は置かれ/彼は国々の裁きを導き出す。”

ここに「喜び迎える者」という言葉がございますが、この言葉が、マルコ1:11の「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同じ表現であります。この箇所は、イザヤ42章の小見出しにもありますように、イエス様が父なる神様の僕として選ばれたという記事でございます。それでは、イエス様は何のために選ばれたというのでしょうか。それは、罪人の救いという大切な働きのために選ばれ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大切な働きとは一体何でしょうか。そうです。僕として神と人との仲介人となることでありまして、もっと具体的に言えば、罪人の代わりに神の掟に従順に歩まれ、そして、十字架の死に至るまで最後まで従順に歩まれるということです。父なる神様は、ご自身の愛してやまない独り子を、お与えになるほどに世を愛され、救いの御業を成し遂げようとされました。従いまして、このイザヤ書42:1は、御子イエス様こそ、父に選ばれた僕であって、「父の喜びの対象である」という事が書かれているわけです。なぜなら、父なる神が、望まれ、ご計画されたことを、ことごとく御子、イエス様が成就されるからであります。イエス様の素直さ、誘惑されても決して罪を犯すことがないその従順な姿、イエス様の信仰の歩み、これらの故に、父なる神はお喜びになられるのです。以上の旧約聖書の二つの証言から、イエス様の洗礼とは、そのメシアとしての公的な働きを始めるにあたっての、聖別のための油注ぎであったと解釈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3】. 荒れ野での試み

聖霊の油注ぎを受けて、いよいよ公生涯が始まると、その一番最初の働きというのは、荒れ野においてサタンから誘惑を受けられることでありました。マルコ1:12~13節をご覧ください。

“それから、“霊”はイエスを荒れ野に送り出した。イエスは四十日間そこにとどまり、サタンから誘惑を受けられた。その間、野獣と一緒におられたが、天使たちが仕えていた。”

荒れ野という場所は、その字のごとく、寂しく、荒れ果てていて、耕作されることのない、呪われた場所というイメージがございますね。荒れ野とは楽園の喪失であり、サタンの勢力圏を意味しています。野獣が棲息し、悪霊たちの住処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聖霊は、イエス様がサタンから試みを受けるために、あえて、荒れ野という敵陣にイエス様を導いて行かれました。そして、40日間イエス様は荒れ野に留まられました。この「40」という数字にも注目したいと思います。「40」という数字は、聖書に至るところに出てきます。例えば、40日間、大雨が降り続けた大洪水(創7:17)、モーセがシナイ山に一人で昇った40日間(出24:18)、イスラエルの民が荒れ野を彷徨った40年間(申29:5)、ダビデがゴリアトと勝負する前にゴリアトからさんざん嘲られ、威嚇された40日間(サム上17:16)などです。これらの「40」という期間が意味するものとは、一言で言うなら、苦難と言えるでしょう。しかし、苦難は苦難でも、ただの苦難ではありません。「40」という数字は、私たちが苦難を通って、やがては救いに至るその道筋であり、罪人が過ちを記憶し、罪を悔い改め、赦しと和解へ導かれるそのプロセスを象徴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40」という数字は、神さまの導かれる、救いの歴史の全体を凝縮したような、そのプロセスを意味し、それは、苦難を通して栄光に導かれる私たちの信仰生活を意味していると言える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の地上の生活とは、まさに荒れ野における40日、40年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このことを覚えておきましょう。イエス様は、まず最初に、この40日間の試みに合われ、天使が傍で仕えてくれて、この世の君であり、強い者であるサタンに勝利しました。サタンを束縛し、神の国を到来させ、救いの時代を開始させられたのです。従いまして聖霊が、イエス様を最初に荒れ野に導かれた理由とは何だったのかと言えば、それはイエス様の王として、救いの仲保者としての油注ぎを、実際に証明するためであった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イエス様の洗礼よって、神さまの愛する独り子であり、救済の働きを成就される方として天から紹介され、荒れ野でサタンの統治をはねのけることによって、そのことを見事に証明されたのであります。

【結論】

本日の箇所は、イエス様の洗礼を通して、父なる神がどんなに独り子なるイエス様を愛しておられるのかを確認することが出来ました。その愛とは、神の子の誕生に注がれる愛であり、そして王の誕生において受けるにふさわしい愛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神さまの愛は御子を通して私たちに注がれるという事を、まず第一に覚えてまいりましょう。そして、それほどに愛してやまない御子を、神様はご自身の「救いのご計画」のために、仲保者として選び、世に与えることを決心されました。ここにどれだけの大きな犠牲が払われたことでしょうか。その大きさは決して知る由もありませんが、神のこの大きな犠牲によって、罪びとである私たちが、人を愛するということを知らなかった私たちが、初めて神の愛を知り、キリストに倣って愛に生きて行く者と作り変えられたのであります。このことを覚える時に、神を褒め称えざるをえません。第二に、私たちのこの世における信仰生活は荒れ野の歩みであるという事です。40に象徴される苦難の歩みでありますけれども、その果てに神の栄光が約束されている歩みであります。なぜなら、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が、真っ先に荒れ野の歩みを進み行かれ、勝利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お祈りいたし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예수의 세례

2021년 2월 14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마가복음 1장 9~13절

서론

오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다는 기사인데 이 세례를 통해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들을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게 어떤 일인지 오늘은 마가복음 1장 11절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의 세례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애초에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옛날부터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굳이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첫째, 예수님은 죄가 없었는데도 죄인에게까지 내려가기 위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고 둘째,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이기 위해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마가복음에서 더욱 강조되는 점은 예수님의 세례란 바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데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기름 부음?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름 부음은 왕이나 제사장이 임직할 때 받는 관례적인 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맡아 나가기 위해 성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론 혈통의 제사장이 임직할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울이 기름 부음을 받았고 다윗왕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세례는 1장 11절의 하늘의 증언으로 그것이 임직의 기름 부음이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고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한 순종적인 종이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1장 9~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때 예수님은 약 30세 정도였다고 누가복음에는 적혀 있습니다. 갈릴리의 나사렛이라고 하면 수태고지교회가 있고 지금은 유명한 관광명소이지만 당시에는 길릴리란 이스라엘의 벽지였고 나사렛이라는 마을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이 시골 청년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기 위해 그 행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상 예수님이 세례를 받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늘이 「갈라진다」라는 대담한 표현은 저자 마가에게 마치 다른 차원의 공간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충격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부드럽게 천천히 내려오셨습니다. 그러자 다음으로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말입니다. 이 11절의 말문을 그리스어로 보면 세 가지가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내 독생자이며 내 사랑하는 자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것입니다. 이 하늘의 말은 전반부는 구약성경 시편에서 인용한 것이고 후반부는 이사야서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하니 11절 말씀에 대한 이해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라도 구약성경으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2편 6,7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시편 2편 6,7절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정에 있어서 아들로서 왕으로서 임직식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여기서는 왕으로 임직하시는 날에 하나님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아들로 태어난 날이 왕으로서 임직된 날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아기가 태어났을 때를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태어났을까요? 게다가 그 탄생은 동시에 왕으로 임직된 탄생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큰 사랑을 받고 예수님은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찬물을 끼엊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아들을 낳으신 것은 시간 속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간이 창조되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직접 태어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시간이란 창조주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피조물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을 창조하는 데 로고스로 관여하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입니다. 좀 신기합니다. 어쨌든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삼위일체의 하나님 가운데 이 사랑은 충분히 채워져 있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담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결코 하나님이 사랑 할 대상이 없고 하나님이 외로워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랑 할 대상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통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아버지의 독생자이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탄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2)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다음으로 이사야서 42장 1절을 참조하시겠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여기 「기뻐하는 자」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마가복음 1장 11절의 「너를 기뻐하노라」와 같은 표현입니다. 이 대목은 이사야 42장 소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예수님이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선택되셨다는 기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서 선택받으신 걸까요? 그것은 죄인의 구원이라는 중요한 사역을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사역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종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가 되는 것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인 대신 하나님의 규레에 순종하며, 그리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순종적으로 걸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사랑해 마지않는 독생자를 주실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이사야서 42장 1절은 아들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아버지에게 선택받은 종이며 「아버지의 기쁨의 대상」이라고 하는 내용이 적혀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모조리 아들되신 예수님이 성취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솔직함, 유혹을 받아도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시는 순종적인 모습, 예수님의 믿음의 행보,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 아버지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상의 구약성경의 두가지의 증언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그 메시아로서의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성별(聖別)을 위한 기름 부음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광야에서의 시험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공생애가 시작되자 그 첫 번째 사역은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2,13절을 참조하십시오.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광야라는 곳은 그 글자처럼 외롭고 황폐하며 경작되지 않은 저주받은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광야란 낙원의 상실이며 사탄의 세력권을 의미합니다. 들짐승이 서식하고 악령들의 거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광야라고 하는 적진으로 예수님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예수님은 광야에 머물렀습니다. 이 40이라는 숫자에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어 40일간 폭우가 쏟아진 대홍수(창세기 7장 17절),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을 머물렀고(출애굽기 24장 18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한 40년 (신명기 29장 5절), 다윗이 골리앗과 승부하기 전에 골리앗으로부터 이스라엘이 실컷 조롱받고 위협받은 40일 (사무엘상 17절 16절) 등입니다. 이 「40」이라는 기간이 의미하는 것은 한마디로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라고 해도 그저 단순한 고난이 아닙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고난을 거쳐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그 길이며 죄인이 잘못을 기억하고 죄를 회개하며 용서와 화해로 인도되는 그 과정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40」이라고 하는 숫자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구원의 역사 전체를 응축한 것과 같은 그 과정을 의미하며, 그것은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인도되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지상의 생활이란 바로 광야에서의 40일 40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 두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40일간의 시험가운데 천사의 수종을 받으시고 이세상의 권세요 강한 자인 사탄에게 승리하셨습니다. 사탄을 속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시켜 구원의 시대를 열으셨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맨 처음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구원의 중보자로서의 기름 부음을 실제로 증명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이시자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시는 분으로 하늘로부터 소개 되어지고 광야에서 사탄의 통치를 물리치심으로써 그 사실을 훌륭하게 증명하신 것입니다.

결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이 얼마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시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에 부어진 사랑이며, 그리고 왕의 탄생에 있어서 받으실 만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쏟아진다는 것을 먼저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아들을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의 계획을 위해 중보자로 선택하여 세상에 주기로 정하셨습니다. 여기에 얼마나 큰 희생이 치뤄졌을까요? 그 크기는 결코 알 방법이 없지만 하나님의 이 큰 희생으로 인하여 죄인인 우리들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우리가 비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를 닮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기억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의 이 세상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광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40으로 상징되는 고난의 걸음이지만 그 끝에 하나님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는 걸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먼저 광야의 걸음을 걸어가셔서 승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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