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ける望み 산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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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聖書 ペトロの手紙一 1章3節~12節
1:3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豊かな憐れみにより、わたしたちを新たに生まれさせ、死者の中からのイエス・キリストの復活によって、生き生きとした希望を与え、
1:4また、あなたがたのために天に蓄えられている、朽ちず、汚れず、しぼまない財産を受け継ぐ者としてくださいました。
1:5あなたがたは、終わりの時に現されるように準備されている救いを受けるために、神の力により、信仰によって守られています。
1:6それゆえ、あなたがたは、心から喜んでいるのです。今しばらくの間、いろいろな試練に悩まねばなら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
1:7あなたがたの信仰は、その試練によって本物と証明され、火で精錬されながらも朽ちるほかない金よりはるかに尊くて、イエス・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には、称賛と光栄と誉れとをもたらすのです。
1:8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を見たことがないのに愛し、今見なくても信じており、言葉では言い尽くせないすばらしい喜びに満ちあふれています。
1:9それは、あなたがたが信仰の実りとして魂の救いを受けているからです。
1:10この救いについては、あなたがたに与えられる恵みのことをあらかじめ語った預言者たちも、探求し、注意深く調べました。
1:11預言者たちは、自分たちの内におられるキリストの霊が、キリストの苦難とそれに続く栄光についてあらかじめ証しされた際、それがだれを、あるいは、どの時期を指すのか調べたのです。
1:12彼らは、それらのことが、自分たちのため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ためであるとの啓示を受けました。それらのことは、天から遣わされた聖霊に導かれて福音をあなたがたに告げ知らせた人たちが、今、あなたがたに告げ知らせており、天使たちも見て確かめたいと願っているものなので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ペトロの手紙一 1章3節~12節
산 소망
2021년1월 3일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베드로전서 1장 3~12절
서론
오늘은 베드로전서 말슴을 통해 소망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한마디로 고난 속에서도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프랑스 남부 세벤느 산맥에「광야 박물관」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종교개혁 당시 박해를 받았던 프랑스의 종교개혁자들, 이른바 「위그노」라고 불리던 사람들의 순교를 기념하는 박물관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로마 가톨릭만 인정되었기 대문에 이 위그노들은 체포되어 갤리선(프랑스 칼뱅파 신교도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노를 젓던 노예선)으로 보내졌습니다. 노예가 되어, 의자에 쇠사슬로 묶여, 죽을 때까지 노를 저어 배를 젓도록 강요당했습니다. 박물관에는 갤리선의 노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노의 모형아래에는 「나를 묶는 사슬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슬이다」라는 위그노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예전에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보신 분 계신가요? 그 영화에서, 음악대는 침몰하는 배 안에서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라는 곡을, 침몰하는 배 안에서 흔들림 없이 연주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크리스쳔의 차이점은 바로 고난 속에서도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가진 희망(일반적인 기대와 바람을 포함하며,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감)과 그리스도인이 가진 소망(좀 더 강한 확신과 믿음을 바탕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마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친 파도에 표류하는 인생이라는 배의 닻을 어디에 내렸는가, 그 차이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닻을 내릴 것입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젊었을 때는 기쁨이나 희망 같은 것도 있었는데, 나이가 드니, 그런 것이 없어진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몸이 건강할 때는 좋았지만, 나이가 들면, ‘아, 그때는 좋았지’라는 기억으로만 살게 되고, 나이가 든 지금의 삶에는 기쁨도 희망도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닻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들어도 소망이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보면, 거듭났을 때 산 소망이 주어지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살아 있는 소망이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인 1:3~4절을 보시겠습니다.
(1) 산 소망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3절에 나오는「산 소망」, 이 「산 소망」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인데, 이 소망은 생명이 있고, 조금씩 자라나는 소망입니다. 즉, 세월이 지날수록 믿음과 함께 커지는 그런 소망입니다. 그래서 어떤 복권 당첨 같은 행운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전혀 근거 없는 허황된 희망을 품는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를 둔 확실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4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하늘에 쌓아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상속받는 자로 여겨지는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업」이라는 단어는 다른 성경에서는 「유산」이나 「재산」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이미 하늘에 쌓여 있다는 뜻입니다. 헬라어(τετηρημένην)를 보면, 여기가 완료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쌓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쌓아두셨다는 뜻입니다. 재산가인 사람이라면 아마 자신의 재산을 증권의 형태로 가지고 있거나 땅의 형태로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주식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중국이나 버블경제 이전의 일본의 경우, 주식보다는 토지로 보유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중국은 부동산 투기가 심해서 유령도시 등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주식이든 땅이든(중국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개인의 소유의 땅이 아니라 상물에 대한 권리, 토지 사용권입니다만), 이것들이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앞으로 하락 할 일이 드물고, 반드시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투기 대상으로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투기처로 적합하고 안전하다고 해도 리스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이, 이미 우리의 하늘에 쌓여 있는데, 이것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곳,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 쌓여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4:2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참고로 이 1:4의 「유업」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는 「기업」이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기업이라고 하면, 가나안 땅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을 방랑할 때, 젖과 꿀이 흐르는 기업의 땅을 주신다는 약속으로 인해, 광야라는 혹독한 환경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하늘의 기업에 대한 확실한 권리증서를 소유한 채, 디아스포라로서 순례의 여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확실한 곳에 준비된 유업을 반드시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5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에게 위로로 다가오는 것은, 반드시 준비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반드시 하늘에 쌓아둔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이란, 위에서 강제로,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내면으로부터 변화시켜서, 그 사람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게 하고,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믿음조차도, 결국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리스도인의 산 소망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공로는 전혀 필요 없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산 소망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6~8절을 보시겠습니다.
(2) 넘치는 기쁨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여기서는「」「너희가...크게 기뻐하는도다」 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6절에서는 「기뻐하는도다」라는 동사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서 반복적으로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군요~」라는 표현으로 되어 있고 8절에서도 마찬가지로「기뻐하니」라는 동사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서 반복적으로 기뻐하고 있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더 나아가 기쁨을 나태내는 단어가 겹쳐져 있고 (rejoice with joy), 일본어 새번역 성경에서는 「기쁨으로 춤추고 있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당신들은 기쁨으로 춤을 주고 있군요~」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폭팔적인 기쁨의 이유로, 특히 7절에 주목해 보면, 놀라운 내용이 나오는데, 7절에는 불로 연단된 믿음이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적혀 있나요?「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가져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귀속되어야 할 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귀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께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생각의 실마리로, 상속의 의미에 대한 내용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우리가 물려받을 산업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6:5를 보십시오.
시편 16편
5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가난한 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그는 사람이 되셔서, 순종을 배우시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얻은 모든 유익을 가지고, 즉 모든 공로의 보화를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도대체 왜, 그리스도는 한 번 낮아지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 후에 부활하셔서 높아지셨을까요?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을 구속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 왔습니다. 예수님이 획득하신 여러 가지 유익은, 예수님의 인격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가 상속을 받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예수님이 획득하신 모든 유익을 받는 것이며, 예수님이 획득하신 그 보화를 함께 소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백성들에게도 돌아가는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희생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 사함이 주어졌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정결하게 씻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주어짐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기도할 수 있는 양자의 영이 주여졌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마지막 날 부활과 영광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이것이 디아스포라 순례자의 최종 종착점이자 목표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잠시 동안, 여러 가지 환난을 겪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고난을 받으셨고 그 후에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연단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로마서 8:17과 고후 4:17을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4장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베드로가 말하는 크게 기뻐하는 폭발적인 기쁨이란, 고난 뒤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예상치 못한 시련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우리가 이 믿음에 서 있다면, 우리는 죄 사함,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 하늘의 유업을 결코 의심하지 않고, 또한 이 세상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환난도 하나님의 형벌 등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 훈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항상 믿음으로 충만하게 걸어 가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죄를 짓게 된다면, 그리고 그 죄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소망은 커녕, 슬픔과 후회와 자책감에 사로잡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평안을 잃고 신앙의 담대함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고, 누구나 어느 정도 신앙의 기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매일 회개의 기도와 죄의 고백을 드려야 하는 죄인임을 인정하지만, 이 때 우리는 의심과 절망 속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도를 드리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이 드린 기도에 스스로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닻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내려져 있고, 단단히 묶여 있어 누구도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유업에 대한 「산 소망」이 주어진 자이며, 그 확실성은 일생을 통해 점점 더 커져갑니다. 왜냐하면 그 소망의 근거는, 2천 년 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만큼이나 확실하고, 또 확실하게 성취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여, 날마다 죄를 범하고 믿음이 흔들리기 쉬운 자들이지만, 고난 가운데 걷는 우리의 믿음의 걸음을,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기에, 우리는 날마다 회개와 감사를 새롭게 하여 항상 기쁨으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라는 목표를 향해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序】
本日は1ペトロの手紙から希望についてお話しさせていただきます。クリスチャンの特徴とは、一言で苦難の中にあっても希望に満ちてい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南フランスのセヴェンヌ山脈に、「荒れ野博物館」というのがございます。そこは、宗教改革の時に迫害を受けたフランスの宗教改革者たち、いわゆる「ユグノー」と呼ばれていた人々の殉教を記念する博物館となっています。当時、フランスではローマカトリックしか認められていなかったため、ユグノーたちは捕らえられガレー船に送り込まれました。奴隷として、長椅子に鎖で縛られて、死ぬまでオールで船を漕がされました。博物館にはガレー船のオールの模型が展示されているようですが、そのオールの模型の下に “私を縛る鎖はキリストの愛の鎖である。”というユグノーの言葉が刻まれているようです。彼らは死を目前にしながら、キリストにある確かな希望をもっていました。また、昔、タイタニックという映画がありましたけれども、ご覧になった方はいらっしゃるでしょうか。その映画の中で、音楽隊は讃美歌320番の「主よ、御下に近づかん」という曲を、沈みゆく船の中で動揺せず演奏していました。世の人々とクリスチャンとの違いとはまさに、苦難の中にあっても希望に満ちている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す。それでは世の人々の持っている希望と、キリスト者が持っている希望の違いとは一体何なのでしょうか。それは荒波に漂流する人生の船の錨をどこに降ろしているのか、その違いであるというふうに言われたりします。自分を信じる人は自分自身に錨を降すことでしょう。すると、一般的には「若い時には喜びとか、希望のようなものもあったけれど、いかんせん年をとるとそういったものがなくなる」という事になってしまうと思います。若いうちは、身体の利く時は、いいけれど、年を取ると「ああ、あの時はよかった」という記憶で生きるだけで、年を取った今の生活には、喜びも希望もなくなってしまうのです。ところが、キリスト者はそうではない。キリスト者はイエス・キリストに錨を降しているからです。キリスト者は年をとってもなお、希望が日々新しくされる。その理由とは、聖書を見るなら、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時に生ける望みが与えられているから、生命を持った、生き生きとした希望が与えられているからだと書かれています。本日の御言葉の1:3~4節をご覧いただけますでしょうか。
【1】. 生ける望み
“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豊かな憐れみにより、わたしたちを新たに生まれさせ、死者の中からのイエス・キリストの復活によって、生き生きとした希望を与え、また、あなたがたのために天に蓄えられている、朽ちず、汚れず、しぼまない財産を受け継ぐ者としてくださいました。”
3節にある「生き生きとした希望」、「生ける望み」というのが一体何なのかということですが、この希望は命をもっていて、少しずつ育まれていくという事です。つまり、年を重ねるごとに、信仰と共に大きくなるような希望であります。ですから、何か宝くじのような幸運を望むことではなく、全く根拠のない、はかない望みを抱くことでもなく、イエス・キリストの復活に根拠を置いた確かな希望であるという事です。具体的には4節に書かれてありますように、天に蓄えられている、朽ちず、汚れず、しぼまない「財産」を受け継ぐ者とされている希望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財産」という言葉は、他の聖書では「遺産」とか「資産」と訳されたりしています。これが天にすでに蓄え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ギリシア語(τετηρημένην)を見ると、ここは完了形になっていますから、これから蓄えられるのではなく、父なる神様は私たちのためにすでに蓄え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財産家の人であれば、おそらく自分の財産を証券という形で持ったり、土地という形で持ったりします。アメリカの場合、株で持つ人が多いようです。中国やバブル前の日本の場合ですと、株より、土地で持つ人が多いようです。特に中国は不動産投資が激しいためにゴーストタウンなどが現れてしまいます。このような現象は、株式であれ、土地であれ(中国の場合正式には土地ではなく、上物に対する権利、土地の使用権ですが)、これらが人々の考えの中で、将来下がることが稀であり、必ず値上がりしていくだろうと考え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投機先として適当であるという事です。しかし、いくら投機先として適当であり、安全だと言っても、リスクが全くないわけではありませんね。つまり朽ちず、汚れず、しぼまない財産が、すでに私たちの天に蓄えられていますが、これは、これ以上ない最も確かな場所、最も安全な場所に保管され蓄えられているという事です。ヨハネ14:2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ございます。
“私の父の家には住まいがたくさんある。もしなければ、私はそう言っておいたであろう。あなたがたのために場所を用意しに行くのだ。”
因みにこの1:4の「財産」という言葉は、旧約聖書の中では「嗣業」という言葉によって出てまいります。嗣業と言えば、カナンの地を思い浮かべられると思います。イスラエルの民は荒れ野を放浪する時、乳と蜜の流れる嗣業の地が与えられるというその約束によって、荒れ野という厳しい環境を生き抜くことが出来ました。新約の聖徒たちも天の嗣業に対する確かな権利証書を所有しながら、ディアスポラとして、巡礼の旅を歩ませていただいているのです。そして、さらに言えば、その確かなところに準備された財産を必ず受け取れるように、神様は私たちを導いてくださるのです。5節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は、終わりの時に現されるように準備されている救いを受けるために、神の力により、信仰によって守られています。”
この箇所で私たちに慰めとして迫ってくるのは、必ず準備されている救いを受けられるように、必ず天に蓄えられている財産を相続できるように、神の力によって守り導かれるという事です。ただし、一つ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信仰によって」という言葉が付け加えられていることでありましょう。つまり、神の救いというのは、上から強制的に、人をあたかも機械のように扱って救いに至らせるのでもなく、その人を内側から変えて、その人自身の信仰によって救いを成就させ、天の嗣業を相続させる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実はその信仰というのも、結局は神様の賜物であり、キリスト者の生ける望みも、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キリスト者だけに与えられる神様の賜物なのです。私たちの功労は一切必要なく、ただ、神の力によって成し遂げられるということが言えるのです。すごいですね。ですからキリスト者は日々、生ける望みによって、喜んでいると言うのです。続いて6~8節をご覧ください。
【2】. 満ち溢れる喜び
“それゆえ、あなたがたは大いに喜んでいます。今しばらくの間、さまざまな試練に悩まなければなら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あなたがたの信仰の試練は、火で精錬されながらも朽ちるほかない金よりはるかに尊く、イエス・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に、称賛と栄光と誉れとをもたらすのです。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を見たことがないのに愛しており、今見てはいないのに信じており、言葉に尽くせないすばらしい喜びに溢れています。”
ここでは、「あなたがたは、喜んでいる」という言葉が目に留まります。6節では「喜ぶ」という動詞が現在形になっていますので、繰り返し「心から喜び続けていますね~」という表現になっています。8節も同じように「喜ぶ」という動詞が現在形になっていて、繰り返し喜んでいると表現されていますが、さらに喜びを表す言葉が重ねられていて(rejoice with joy)、新改訳聖書では「喜びにおどっている」と訳されています。つまり、「あなたがたは、喜びに踊り続けているんですね~!」とペトロ言っているのです。この爆発的な喜びの理由として、特に7節に注目する時に、すごい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7節には、火によって精錬された信仰によって、何がもたらされると書いてあるでしょうか。「称賛と栄光と誉れ」がもたらされると書いてあります。普通、「称賛と栄光と誉れ」が帰されるべきお方は、何よりも第一に、神様に帰されるべきものです。ところがこのような「称賛と栄光と誉れ」が神に帰されるだけでなくて、どうやら、信仰者にも、その信仰によってもたらされると聖書は言っているようです。これは一体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ことがどうして可能なのでしょうか。考え方の糸口として、嗣業の意味する内容として、イエス・キリストそのものが、私たちの受け継ぐ分であるという御言葉がございます。詩編16:5をご覧ください。
“主はわたしに与えられた分、わたしの杯。主はわたしの運命を支える方。”
王であられるイエス様が地上に来られた時、どのようなお姿で来られたでしょうか。彼は富める者でありましたが、ご自分を無にされて、僕の身分となり、貧しい者として来られました。しかし、キリストが復活され、天に昇られた時はどうだったでしょうか。彼は人となられ、従順を学ばれ、十字架の死に至るまで従順されたことによって獲得したその一切の有益を持って、つまり全ての功労の宝を持って、天に昇って行かれました。一体なぜ、キリストは一度低められ、苦難を身に負われ、十字架にまで架かられ、その後に復活して高められ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全てキリストに結ばれた者たちを贖うためにそうされたということを、私たちは学んでまいりました。イエス様が獲得された諸々の有益とは、イエス様のご人格の中に含まれているのですが、私たちが嗣業に与るというのは、言い換えるならば、イエス様との交わりを通して、イエス様が獲得された全ての有益に与ることであり、イエス様が獲得されたその宝を共に所有させていただくという意味でございます。ここに、「称賛と栄光と誉れ」が、神さまに帰されるだけでなく、キリストに属する民にも、もたらされる原因があったのです。つまりイエス様が犠牲の供え物になられたために、私たちに罪の赦しが与えられ、神と和解されました。罪のないお方が血を注がれたがゆえに、私たちの魂が洗い清められました。イエス様が律法を成就されたために、私たちは義とされました。キリストの霊が与えられたことによって「アバ父よ」と祈ることができる養子とされる霊があたえられました。そしてさらに多くの聖霊の賜物が与えられました。キリストが天の御座に着座されたがゆえに、私たちも神の御座に大胆に進み出ることが許され、キリストが死に打ち勝ち、復活されたために、私たちは世に打ち勝ち、死の恐怖から解放され、終わりの日の復活と、栄光の中で永遠の命を享受する者とされたのです。従いまして「称賛と栄光と誉れ」これはディアスポラである巡礼者の最終的な終着点でありゴールであるという事です。もし、そうであるなら、この世においてしばしの間、さまざまな試練に悩ま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当然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なぜなら、イエス様が最初に苦難を受けられ、その後に、栄光に挙げられたからです。私たちも同じように苦難を通して、私たちの信仰が精錬されるという過程を通るのです。ローマ8:17と2コリント4:17をご覧ください。
“もし子供であれば、相続人でもあります。神の相続人、しかもキリストと共同の相続人です。キリストと共に苦しむなら、共にその栄光をも受けるからです。”
“わたしたちの一時の軽い艱難は、比べものにならないほど重みのある永遠の栄光をもたらしてくれます。”
ペトロの言う爆発的な喜びとは、苦しみの後に待っている「称賛と栄光と誉れ」があるからだ、という事です。ですから、たとえ思いがけない試練や困難が訪れても、私たちがこの信仰に立っているなら、私たちは罪の赦し、神の子とされた身分、天の財産を決して疑うことなく、また、この世の人生の中で起こってくるいかなる災難をも、それは神の刑罰などではなく、父なる神様の愛の鞭、訓練として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しかし、そのように言われても、私たちは常に信仰に満たされて、歩んでいるとは限りません。もし罪を犯してしまうなら、そして、その罪をそのまま放置するなら、私たちは罪悪感に苛まれてしまうでしょう。希望どころか、悲嘆と後悔と自責の念に捕らわれ、次第に神様から遠ざかり、平安を失い、信仰の大胆さを失うこともあるかもしれません。これはもう、仕様がないことです。私たちは弱いものであり、誰でも、多かれ少なかれ信仰のアップダウンがあるからです。確かに、私たちキリスト者は自分自身の歩みを省みます時に、毎日、悔い改めの祈りと罪の告白を捧げなければならない汚れた者であることを認めますが、この時、私たちは疑いや絶望の中で祈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悔い改めを祈りますが、救いの確信をもって、子供のような信仰によって、天におられる私たちの父なる神に祈り、そして自分の捧げた祈りに自ら「アーメン」によって応えることが許されているのであります。それは、私たちの人生の錨が、すでにイエス・キリストに降ろされていて、固く結ばれており、これは何人も引き離す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あります。私たちの信仰と希望は復活のキリストにかか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結論】
私たちキリスト者は、天の嗣業に対する「生ける希望」が与えられている者であり、その確かさは生涯を通して徐々に大きくされていきます。なぜならその希望の根拠は、2千年前にキリストが復活されたことと同じくらい確かで確実に成就される事柄だからです。しかし、私たちは弱いものであり、日々罪を犯してしまい、信仰が揺らぎやすい者でありますが、苦難の中を歩む私たちの信仰の歩みを、神様が責任を持って守り導いてくださいますから、私たちは日々、悔い改めと感謝を新しくさせていただき、常に喜びをもって「称賛と栄光と誉れ」というゴールを目指して歩むことが許されてい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