議会の前に立つキリスト 공회 앞에 서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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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6章57節~68節
57人々はイエスを捕らえると、大祭司カイアファのところへ連れて行った。そこには、律法学者たちや長老たちが集まっていた。
58ペトロは遠く離れてイエスに従い、大祭司の屋敷の中庭まで行き、事の成り行きを見ようと、中に入って、下役たちと一緒に座っていた。
59さて、祭司長たちと最高法院の全員は、死刑にしようとしてイエスにとって不利な偽証を求めた。
60偽証人は何人も現れたが、証拠は得られなかった。最後に二人の者が来て、
61「この男は、『神の神殿を打ち倒し、三日あれば建てることができる』と言いました」と告げた。
62そこで、大祭司は立ち上がり、イエスに言った。「何も答えないのか、この者たちがお前に不利な証言をしているが、どうなのか。」
63イエスは黙り続けておられた。大祭司は言った。「生ける神に誓って我々に答えよ。お前は神の子、メシアなのか。」
64イエスは言われた。「それは、あなたが言ったことです。しかし、わたしは言っておく。あなたたちはやがて、/人の子が全能の神の右に座り、/天の雲に乗って来るのを見る。」
65そこで、大祭司は服を引き裂きながら言った。「神を冒涜した。これでもまだ証人が必要だろうか。諸君は今、冒涜の言葉を聞いた。
66どう思うか。」人々は、「死刑にすべきだ」と答えた。
67そして、イエスの顔に唾を吐きかけ、こぶしで殴り、ある者は平手で打ちながら、
68「メシア、お前を殴ったのはだれか。言い当ててみろ」と言っ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6章57節~68節
공회 앞에 서신 그리스도
2019년 6월30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6장 57절~68절
유월절 식사를 마친 밤,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님께서는 유대 당국자들에게 붙잡히셔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 목적은 나사렛 예수를 사형에 처하기 위해 최고 법원, 즉 산헤드린 의회에서 재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붙잡히시고, 죄수처럼 결박되어, 때리고 침 뱉음을 당하시는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아무것으로 여기지 않고 비우심으로써 그 결과 우리에게 얻어진 유익에 눈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묶고 있는 죄와 죄악의 흉악한 사슬을 끊어내시기 위해 기꺼이 붙잡히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해 완전히 뒤틀려 거의 사라져 버린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 침을 맞고 주먹으로 때리는 것을 참아 견디셨습니다.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가져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6장 57~59절을 보십시오.
57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일반적으로 대제사장의 개인 집에서 산헤드린 의회가 열리는 일은 드물었으므로, 이 의회는 갑작스럽게 소집된 임시적인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59절에「온 공회가」라고 되어 있지만, 71명의 전원 의원이 모인 것이 아니라 71명 중 1/3만 모여도 정족수로 인정되어 의회가 열릴 수 있었으므로, 아마 정족수를 채운 참석 전원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 한 의미입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고 사법권이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재판을 하고 율법대로 극악인을 멋대로 돌로 치어 처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재판의 판결은, 그 후의 로마 재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압력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종교재판으로서의 유대인의 재판과 국가권력인 총독 빌라도의 재판, 이 두 가지 재판을 다루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예수님은 먼저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기 전에 전 대제사장이며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의 집에 끌려가, 그 다음 마태에 기록된 가야바의 집에서, 그리고 이른 아침에 산헤드린 의회의 공식 법정에 회부되어 그 후 로마에 인도되어 처음에는 빌라도의 재판, 다음 헤롯의 재판, 그리고 다시 빌라도의 재판으로 총 여섯 차례에 걸쳐 떠넘겨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유대인의 종교재판과 로마의 국가권력 재판, 이 두 가지로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 서기관과 장로들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 의회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 유대인의 재판은 처음부터 정의를 구하는 재판이 아니라 미리 사형을 하기로 공모하고 거짓 증언을 구하여 무죄한 이를 사형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거짓 증언을 구해도 거짓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두 사람이 와서 증언했습니다. 율법대로 두 사람의 일치한 증언이 없으면 결코 사형을 정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는 그 두 사람의 증언까지 거짓 증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이 산헤드린 의원들에 의해 거짓 증언하도록 매수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마태는 그 두 사람의 증거를 참된 것으로 간주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60~61절을 보십시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예수님의 그동안의 언행을 생각해 보면, 두 증인이 말한 대로 표면적으로 그렇게 이해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3장 38절에서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라고 하셨고, 또 마태복음 24장 2절에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로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요한복음 2장 21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사흘 만에 부활하실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성전에 관한 말씀은 매우 위험하고 듣지 못할 위협으로 들렸습니다. 제사장 가문인 사두개파는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는 특권 계급이었고 그들 중에서 대제사장을 배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대한 증언만으로는 사형을 정하는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대제사장은 일어나서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라고 책망합니다. 그런데 스가랴 6장 12절에는 메시아적인 새순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대로 들어 보십시오.
스가랴 6
12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러므로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한 이자가 「자신을 메시아」로 공적으로 고백하게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하면, 말의 끝을 잡아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정할 수 있습니다. 63절을 보십시오.
63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제사장의 이 질문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우리에게 말하라」는 말로 매우 무게 있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계속 침묵하시는 예수님께 대해 이 질문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었는지 의견이 갈립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대제사장은 일부러 사람들에게 「메시아=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메시아라고 공언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언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도록 고의적으로 연결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자신을 직접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명백히 드러내신 적이 없습니다. 21장 33절의 「포도원과 농부의 비유」에 있는 것처럼 비유를 통해 암시하신 적은 있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은 항상 제자들 쪽에서 나온, 믿음에 의한 고백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이 일었을 때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어오시고 폭풍을 잠잠케 하시며 자연도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고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까지 침묵하셨던 예수님께서 마침내 입을 여시고 대제사장에게 대답하십니다. 64절을 보십시오.
64예수께서 가라사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네가 말하였느니라 (σὺ εἶπας) 」라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지만, 이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대답하신 말씀과 같은 표현입니다. 26:25절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26장
25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해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일단 긍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이어지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그 말씀의 의미를 수정하고 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권능의 우편에」라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되심을 처음으로 고백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에 의한 자기계시로서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이 말하는 메시아와 예수님께서 수정하고 한정하신 메시아는 어디가 다른 것일까요. 대제사장이 말하는 메시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사람들이 입맞춤할 만큼 높은 계급의 자이며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으로, 지금 나사렛 예수가 이렇게 모욕을 당할수록 이렇게 무력하고 가난하고 추한 자가 메시아일 리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장하시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은 시편 110:1에 예언된 메시아로, 지금은 자신을 아무것으로 여기지 않고 비워 놓으셨지만 「이제 후에」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올라가 적들을 그리스도의 발등상으로 삼으실 때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 온 땅을 다스리시는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시편 110:1을 보십시오. 그대로 들어 보십시오.
시편 110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아」란 다니엘서 7:13절에 예언된 대로 종말에 구름을 타고 재림하셔서 심판주로서 불경건한 자들을 하늘 법정에 세우시는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다니엘7:13-14절을 보십시오. 그대로 들어 보십시오.
다니엘 7장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하나님 되신 그리스도의 자기계시를 두고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하고 신성모독 현행범으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누군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말을 듣고 마음에 큰 분노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옷을 찢으며 그런 감정을 공적으로 드러냈다면 칭찬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사형을 하려는 생각으로 진리를 조사하지도 않고 위선적으로 옷을 찢으며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몰아 단죄한 것입니다. 다른 의원들도 똑같이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내려진 이 종교재판의 판결은 깊은 의미와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을 만나 희생 제물과 예배를 드리는 장소는 세상 어디를 찾아도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의 모델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더욱이 제사장, 백성의 장로, 서기관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의회의 71명은 하나님의 교회,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백성의 장로로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그들은 모두 결탁하여 구원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 공모했습니다. 따라서 이 판결이 상징하는 것은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지는 돌이신 예수님께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구약의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지며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입니다. 두 군데 읽겠습니다. 먼저 시편 118장 22~23절을 읽습니다.
시편 118장
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다음으로 이사야 8장 14~15절을 읽겠습니다. 보십시오.
이사야 8장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걸려 넘어지는 돌은 이스라엘에게는 연약하고 가난하고 한심한 걸림돌이 되었지만, 부활하신 주님과 영원히 결합된 자들에게는 비록 이방인인 우리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過越しの食事を済ませた夜、ユダの裏切りによってイエス様はユダヤ当局者たちによって捕らえられ、大祭司カイアファの屋敷に連れていかれました。その目的は、ナザレのイエスを死刑にしようと最高法院、つまりサンヘドリン議会において裁くためでした。肉の目で見るなら神の子が捕らえられ、囚人のように縛られて、殴られ、唾を吐かれることはみっともないことです。しかしキリストがご自分を無にし、空にされることによって、その結果私たちが得ることになった有益に目を留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キリストは私たちを縛っている罪と咎の凶悪な鎖をはがされるために、ご自身を喜んで捕えられました。キリストは、私たちが罪によって完全に歪んでほとんど消されてしまった、あの神の形を再び回復させるために、唾をかけられ、げんこつで殴られることを堪え忍ばれたのです。つまずきとなるキリストの十字架は、私たちに驚くべき恩寵をもたらすためのものだったのです。26章57~59をご覧ください。
人々はイエスを捕らえると、大祭司カイアファのところへ連れて行った。そこには、律法学者たちや長老たちが集まっていた。
ペトロは遠く離れてイエスに従い、大祭司の屋敷の中庭まで行き、事の成り行きを見ようと、中に入って、下役たちと一緒に座っていた。
さて、祭司長たちと最高法院の全員は、死刑にしようとしてイエスにとって不利な偽証を求めた。
普通、大祭司個人の家で、サンヘドリン議会が持たれることはあまりなかったので、この議会が突然、召集された臨時的なものであったと思われます。59節には、最高法院の全員と書かれていますが、71名の全議員が集まったわけではなく、71名の内、1/3が集まれば定足数と認められ議会が開くことができましたので、恐らく定足を満たした出席者の全員がイエス様を死刑にしようとしたという意味です。
当時、ユダヤはローマの支配下にありまして、司法権は与えられていませんでした。つまり、ユダヤ人が裁判をして、律法に定められているように、極悪人を勝手に石打ちによって処刑に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しかし、ユダヤの裁判の判決は、その後のローマの裁判に大きな影響を及ぼし圧力をかけることができました。ですから、マタイによる福音書には、宗教裁判としてのユダヤ人による裁判と、国家権力による総督ピラトによる裁判と二つの裁判を取り上げて記録されています。しかし四つの福音書を総合して見ると、イエス様はまずカイアファの家に連れられる前に前大祭司であり、カイアファの舅であるアンナスのところに連れられて、その次にマタイに書かれているカイアファの屋敷にて、そして、早朝にサンヘドリン議会の公式法廷にかけられて、その後にローマに引き渡されて、最初にピラトによる裁判、次にヘロデによる裁判、そしてまた、ピラトによる裁判という形で、合計六回に渡り、たらい回しにされたと思われます。しかし大きく分けますと、二つの裁判、つまり、ユダヤ人による宗教裁判とローマによる国家権力による裁判よって裁かれたということです。
本日の箇所では、大祭司、長老、律法学者たち71人によって構成されたユダヤの最高議会であるサンヘドリン議会が、神の子イエス・キリストを前にして、どのような判決を下したのかということに焦点が当てられています。このユダヤ人による裁判は、最初から正義を求める裁判ではなく、あらかじめ死刑にしようと共謀し、偽証を求めて、無罪の人を死刑にするためのものでした。
しかし、懸命に偽証を求めても偽りの証拠を得ることはできません。そして最後になって二人の者が来て、証言しました。律法によれば、二人の一致した証言が得られなければ、決して死刑に定め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マタイは彼ら二人の証言までも、偽りの証人であるとは言っていません。たとえ彼らがサンヘドリンの議員によって偽証するよう買収された可能性があったにも関わらず、マタイは彼ら二人の証拠を真実なものと見做していると考えられます。60~61節をご覧ください。
偽証人は何人も現れたが、証拠は得られなかった。最後に二人の者が来て、
「この男は、『神の神殿を打ち倒し、三日あれば建てることができる』と言いました」と告げた。
イエス様のこれまでの言動を考えるなら、二人の証人が言うように、表面的にこのように理解されても不思議はありません。例えば、マタイ23:38では、「見よ、お前たちの家は見捨てられて荒れ果てる。」と言っていますし、また、マタイ24:2では、「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これらすべての物を見ないのか。はっきり言っておく。一つの石もここで崩されずに他の石の上に残ることはない。』」と言っています。ヨハネ2:19では、「イエスは答えて言われた。『この神殿を壊してみよ。三日で建て直してみせる。』」と言っています。しかしその意味するところは、ヨハネ2:21節にあるように、イエスの言われる神殿とは、三日目に復活される御自分の体のことでした。
しかし、サドカイ派の人々にとって、イエス様の神殿に関する言葉は、大変危険で、聞捨てならない脅しとなって響きました。祭司の家系であるサドカイ派は、神殿で奉仕できる特権階級であり、彼らの中から大祭司を輩出することが許されていたからです。だからと言って、神殿に対する証言だけでは、死刑に定める決定的なものにはなりえなか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大祭司は立ち上がって「何も答えないのか、この者たちがお前に不利な証言をしているが、どうなのか。」と責め立てます。
ところで、ゼカリヤ書6:12には、メシア的な若枝が主の神殿を立て直すという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そのままお聞きください。
宣言しなさい。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見よ、これが『若枝』という名の人である。その足もとから若枝が萌えいでる。彼は主の神殿を建て直す。
ですから、神殿を建て直すことができると言ったこの者が、「自分のことをメシア」として、公に告白するようにすれば、さらに言えば「自分のことを神の子」として告白するように、言葉尻を捕えることができれば、神聖冒涜罪とし死刑に定めることができます。63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黙り続けておられた。大祭司は言った。「生ける神に誓って我々に答えよ。お前は神の子、メシアなのか。」
大祭司のこの質問は、「生ける神に誓って我々に答えよ」という言葉によってとても重みのある質問となりました。引き続き沈黙しているイエス様に対し、この質問の意味するところは一体何だったのか意見が分かれるところです。というのは、当時ユダヤ人が待望していた救い主、メシアとは、彼が「神の子」であるとは、誰も思ってい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ここで、大祭司はわざと人々に「メシア=神の子」という先入観を持たせるようにしていると捉えることもできます。自分をメシアであると公言することが、「神の子」と公言することと同じ意味にさせるように、故意的に結び付け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ます。
イエス様は実際、ご自身のことを直接「神の子」と明かされたことはありません。21章:33節の「ぶどう園と農夫のたとえ」にあるように、比喩を通してほのめかされたことはございますが、むしろイエス様は、ご自身を「人の子」と呼びました。ですから「神の子」という言葉は、常に弟子たちの側においてなされた、信仰による告白だったのです。例えば、弟子たちはガリラヤの海が嵐になった時、イエス様が海を歩いて来られ、嵐を静め、自然をも治める権威が与えられていることを知った時、「本当に、あなたは神の子です」と言ってイエス様を拝みました。また、「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何者だと言いますか」というイエス様の質問に対しペトロは「あなたはメシア、生ける神の子です」と告白しました。これまで沈黙していたイエス様がとうとう口を開いて大祭司に答えます。64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言われた。「それは、あなたが言ったことです。しかし、わたしは言っておく。あなたたちはやがて、/人の子が全能の神の(なる方の)右に座り、/天の雲に乗って来るのを見る。」
「それは、あなたが言ったことです(σὺ εἶπας)」とは分かりづらい言葉ですが、これは、最後の晩餐の席でイエス様がユダに返事をした言葉と同じ言葉です。26:25をご覧ください。
「先生、まさかわたしのことでは」と言うと、イエスは言われた。「それはあなたの言ったことだ。」
ここで大祭司の質問に対して「あなたの言う通りです」と一応は、肯定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わたしは言っておく、という続く言葉によって「神の子、メシア」というその言葉の意味するところを、修正し限定しているのです。イエス様は直接「神」という言葉を使いません。その代わりに「全能なる方の右に」という遠回しの言葉に言い換えていますが、しかし、ご自分が神であることを初めて告白していると理解することができます。この告白は、神による自己啓示としてイスラエルの代表者たちに与えられていると見ることもできるのです。
それでは、大祭司が言っているメシアと、イエス様が修正し、限定しているメシアとどこが違うのでしょうか。大祭司が言っているメシアとは、油注がれた王であり、人々が口づけするような高い階級の者であって、ローマの圧政からイスラエルを救い出してくださるはずであり、今、ナザレのイエスが侮辱されればされるほど、このように無力で、このように貧しく醜い者が、メシアであるはずがないということを証明していることになります。
しかし、イエス様の主張する「ご自身がメシアである」というのは、詩編110:1に預言されているメシアであり、今はご自分を無にし、空にしておられますが、「やがて」復活した後に天に昇り、敵をキリストの足台とするときまで、神の右に座られ、全地を治められるメシア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詩編110:1をご覧ください。聖書協会共同訳でお読みします。そのままお聞きください。
わが主に賜った主の御言葉。「わたしの右の座に就くがよい。わたしは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台とするときまで。」
さらにイエス様が言う「メシア」とは、ダニエル書7:13に預言されているように終末において雲に乗って、裁き主として再臨し、不敬虔の者たちを天の法廷に立たせるメシアであると言うことです。ダニエル書7:13-14をご覧ください。そのままお聞きください。
夜の幻をなお見ていると、/見よ、「人の子」のような者が天の雲に乗り/「日の老いたる者」の前に来て、そのもとに進み 権威、威光、王権を受けた。諸国、諸族、諸言語の民は皆、彼に仕え/彼の支配はとこしえに続き/その統治は滅びることがない。
神であるキリストの自己啓示を前にして、大祭司は、服を引き裂いて、「神を冒涜した。これでもまだ証人が必要だろうか。諸君は今、冒涜の言葉を聞いた。」と神聖冒涜の現行犯であると、判決を下しました。もし、大祭司が、誰かが神の名を辱めるような冒涜の言葉を聞いて、心の内に大きな怒りとこらえられない苦痛を感じ、服を引き裂きながらそのような感情を公に表したなら、彼は称賛を受けたかもしれませんが、しかし、初めから死刑にするつもりで、真実を調べることもせず、パフォーマンスのように偽善的に服を引き裂き、イエス様を神聖冒涜の罪に追い詰めて断罪したのです。他の議員たちも同じように「死刑にすべきだ」と答えました。
このようにして下されたこの宗教裁判の判決は意味深であり、象徴的な意味を持っていました。というのは、当時、神に面会し、神に犠牲の供え物と礼拝を捧げる場所は、世のどこを探しても、エルサレムの神殿と同じような場所は与えられていませんでした。また、特に大祭司とは神と人間の唯一なる仲保者の模型の役割をした人物でした。さらに言うと、祭司、民の長老、律法学者たちからなるサンヘドリン議会の71名は、神の教会、選民イスラエルを代表する者たちでした。民の長老として指導的な立場でした。彼らは全員がグルになって救いの唯一の希望であるイエス様を拒絶し、殺してしまおうと共謀しました。したがってこの判決の象徴するところは選民イスラエルが、つまずきの石であるイエス様に躓いたこということです。神殿が壊され、旧約のイスラエルがつまずき、キリストの体の復活によって新しいイスラエルが建てられると言うことです。それは旧約聖書に預言されたことでありました。二か所お読みします。最初に詩編118:22~23をお読みします。
家を建てる者の退けた石が/隅の親石となった。これは主の御業/わたしたちの目には驚くべきこと。
次にイザヤ8:14~15をお読みします。ご覧ください。
主は聖所にとっては、つまずきの石/イスラエルの両王国にとっては、妨げの岩/エルサレムの住民にとっては/仕掛け網となり、罠となられる。
多くの者がこれに妨げられ、倒れて打ち砕かれ/罠にかかって捕らえられる。
このように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る障害物の石はイスラエルにとっては、弱く、貧しく、みっともない、つまずきの石となりましたが、復活の主に永遠において結び合わされている者にとっては、たとえ異邦人である私たちであっても、信仰によって神の形を回復させてくれる、はかり知れない神の恩寵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