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年12月13日「盲人バルティマイの癒し 맹인 바디매오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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盲人バルティマイの癒し 맹인 바디매오의 치유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0章46節~52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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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10:46一行はエリコに来た。イエスが弟子たちや大勢の群衆と一緒に、エリコを出られると、ティマイの子で、バルティマイという盲人が道端に座って物乞いをしていた。
10:47ナザレのイエスだと聞くと、「ダビデの子イエスよ、私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叫び始めた。
10:48多くの人々が叱りつけて黙らせようとしたが、彼はますます、「ダビデの子よ、私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叫び続けた。
10:49イエスは立ち止まって、「あの人を呼んで来なさい」と言われた。人々は盲人を呼んで言った。「安心しなさい。立ちなさい。お呼びだ。」
10:50盲人は上着を脱ぎ捨て、躍り上がってイエスのところに来た。
10:51イエスは、「何をしてほしいのか」と言われた。盲人は、「先生、また見えるようになることです」と言った。
10:52イエスは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盲人はすぐ見えるようになり、なお道を進まれるイエスに従っ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0章46節~52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本日の箇所は、マルコ福音書に書かれている最後の癒しの奇跡となります。神様の癒しの奇跡というのはただ、病にある者を癒すことだけを目的と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奇跡には神様からの啓示という側面もございまして、つまり、神様とは、一体どのようなお方なのか(神知識と言いますが)、それを私たちに教えるための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マルコの福音書において盲人の癒しの奇跡が出てくるのは、実は、今回で二度目でございます。一度目は、どこだったかと言いますと、マルコ8章22節に記されています。ちょっと聖書を開いてみましょう。小見出しには「ベトサイダで盲人を癒す」と書かれていますね。この一度目の癒しでは、イエス様が盲人の目にペッと唾をされ、手を盲人の目に触れてくださいました。「何か見えるか」とイエス様がお尋ねになると、盲人は「人が見えます。木のようですが、歩いているのが分かります。」と答えました。イエス様はもう一度、盲人の目に触れてくださいます。すると、盲人はようやく、はっきり見えるように癒されたという内容です。この記事において、盲人というのは、実は弟子たちの霊的状態を象徴しているのですが、弟子たちは、数々の奇跡を経て、ようやく目が開かれていったということを表しています。8:17には、イエス様の「まだ、分からないのか。まだ、悟らないのか。まだ、心がかたくなになっているのか。」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どうだ、まだ分からないか?と、何度も何度も聞いているのです。そして盲人の奇跡の後に、ようやく弟子たちを代表してペトロによる信仰告白が8:27からなされるのです。それでは、本日の奇跡とは、どのような象徴的な意味が含まれているのかということですが、やはり盲人バルティマイは弟子たちの霊的状態を象徴しています。この奇跡の背景となったのが、弟子たち全員に教えられた「弟子の道」の教えでありました。先々週学んだマルコ10:42~45をご覧ください。

“そこで、イエスは一同を呼び寄せて言われた。「あなたがたも知っているように、異邦人の間では、支配者と見なされている人々が民を支配し、偉い人たちが権力を振るっている。しかし、あなたがたの間では、そうではない。あなたがたの中で偉くなりたい者は、皆に仕える者になり、いちばん上になりたい者は、すべての人の僕になりなさい。人の子は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仕えるために、また、多くの人の身代金として自分の命を献げるために来たのである。」”

イエス様がこの御言葉を語られた時、心から「アーメン、ハレルヤ。」と応答した弟子は、おそらく一人もいなかったことでしょう。少なくともこの時点で、キリストの十字架に見習って、それぞれの十字架を負いながら従って行こうと思った弟子は、誰一人い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ような中で本日の奇跡が起こりました。

【1】. バルティマイの叫び

イエス様の一行は、エリコに到着しました。エリコという町はエルサレムから26キロほどの距離で、古代都市の中でも特に古い町ですが、ヘロデ大王によってリゾート地として再建されて、大変にぎやかな町でもありました。このにぎやかな町には、エルサレムに向かう巡礼者も大勢いましたので、物乞いをするには適した場所であると考えられます。もうまもなく、ダビデの子であるイエス様は、ダビデの町エルサレムに入られ、まさにその受難物語が始まろうとしている、その最中にあって、バルティマイという盲人の物乞いが「ダビデの子イエスよ、わたし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叫び始めました。この「バルティマイ」という名前ですけれども、アラム語の「バル」と「ティメオ」から成っていて、「バル」は子という意味です。「ティメオ」は、混沌(カオス)とか不潔・不浄という意味ですから、「カオスの子」、「不浄の子」という意味になります。このような名前を付ける親はいません。ですから、ある人は、これは名前ではなく、人々からそのように呼ばれていたと考える人もいます。バルティマイは、この騒々しい物音の原因が「ナザレのイエス」が近づいたためだということを聞くと、「ダビデの子イエスよ、わたし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叫び始めたのです。「ダビデの子」という呼称は、当時の状況から考えるなら、大変政治的響きが含まれています。つまり、ローマの支配を打倒し、イスラエルの民を解放するような王であり、今日で例えるなら一国の大統領のような政治的な響きをもっています。しかし、バルティマイが「ダビデの子イエスよ」と叫んだのは、そのような動機からではなかったようです。というのは、この後イエス様から「何をしてほしいのか」と質問された時に、彼は「お金がもっとほしいです」とか「土地を少し分けてもらえないでしょうか」とは言わず、「目が見えるようになりたいのです」と答えたからです。旧約のイザヤの預言を見ますと、メシアの到来に関する預言が生き生きと記されていますが、きっとバルティマイの叫びの中に旧約の預言を根拠とした叫びであったと思われるのです。もしかしたらバルティマイのお母さんが、バルティマイに「メシアが来たら、あんたの目は必ず癒されるよ」と聞かされて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イザヤ29:18と35:5-6をご覧ください。

(29:18)“その日には、耳の聞こえない者が/書物に書かれている言葉をすら聞き取り/盲人の目は暗黒と闇を解かれ、見えるようになる。”

(35:5-6)“そのとき、見えない人の目が開き/聞こえない人の耳が開く。そのとき/歩けなかった人が鹿のように躍り上がる。口の利けなかった人が喜び歌う。荒れ野に水が湧きいで/荒れ地に川が流れる。”

当然ですが、盲人バルティマイは、自分の目で見たことを根拠に反応したのではなく、聞いたことを根拠に反応したことが分かります。このように信仰とは聞くことから始まるのです。目が見えない人は普通の人より、直感が鋭くなったり、あるいは聴覚が敏感になると言われていますが、バルティマイは、この時を見逃さずイエス様に対し信仰をもって「ダビデの子イエスよ」と叫び続けました。因みに、旧約聖書に書かれている数多くの奇跡の中で、盲人が癒される奇跡というのは一度も出てきません。意外に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が、この事はつまり盲人が癒される奇跡とは、メシアの到来の時に見られる特別な奇跡として位置付け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2】. キリストに従ったバルティマイ

バルティマイが、「ダビデの子イエスよ、わたし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叫ぶと、多くの人々が彼を叱りつけて黙らせようとしました。マルコによる福音書は10章のここの箇所に至るまでに、この世に蔓延している偏見について戒め続けてきたと言えるかもしれません。夫婦の間の離婚において顕著に表れる女性への偏見について戒められ、無力な幼子への偏見について戒められ、金持ちに対する逆の意味での偏見を戒められました。神の国には、この世において当たり前と思われている偏見とか差別などはまったく通用しません。しかし、イエス様を取り巻いている多くの人々は、ここでも相変わらず、盲人の乞食に対して偏見を持ちながら、叱りつけて黙らせようとしました。ところがイエス様は立ち止まられ、バルティマイを呼んでくるように言われました。49~52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立ち止まって、「あの男を呼んで来なさい」と言われた。人々は盲人を呼んで言った。「安心しなさい。立ちなさい。お呼びだ。」盲人は上着を脱ぎ捨て、躍り上がってイエスのところに来た。イエスは、「何をしてほしいのか」と言われた。盲人は、「先生、目が見えるようになりたいのです」と言った。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盲人は、すぐ見えるようになり、なお道を進まれるイエスに従った。”

ここで、私たちはバルティマイの大きな信仰について、三点に注目し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第一に、50節を見ますと、「盲人は上着を脱ぎ捨て、躍り上がってイエスのところに来た」とあります。「上着」というのは、英語の聖書(RSV)では、マントと訳されています。これは、毎日物乞いをするために半分をお尻の下に敷いて、残りの半分を道端に広げて、施しを受けるための風呂敷として用いていたと考えられます。夜になれば、上着は布団の役割を果たしました。したがって、バルティマイにとって、この上着は、この世で持っている彼の唯一の財産でありました。それを捨て去り、躍り上がって、イエス様の前に出て来ました。この場面は、金持ちの青年の取った態度が思い起こされます。金持ちの青年は永遠の命より、自分の財産を惜しみました。バルティマイは自分の財産を捨てて、イエス様の招きに応答す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第二に、51節を見ますと、イエス様は「何をしてほしいのか」と尋ねています。この質問も、やはり、少し前にイエス様が、ヤコブとヨハネにした質問と同じ質問であることに気づかされます。ヤコブとヨハネは、イエス様の右と左の座を要求しましたが、バルティマイは「目が見えるように」なることを要求しました。イエス様は、ヤコブとヨハネの願いを聞き入れてくれませんでしたが、バルティマイの願いは、聞き入れてくださいました。御心に適う祈りだったからです。しかし、イエス様は間違った願いを持った弟子たちを叱るのではなく、弟子たちに最後まで寄り添いながら、彼らの願いが少しずつ変えられるように最後まで導いてくださるのです。このような理由から、私たちは神様に対してどんな願いでも、どんな祈りでも捧げていいのです。御心に適う祈りなら、すぐに祈りの答えが与えられるでしょうし、たとえ御心に適わなかったとしても、私たちの願いの答えとして、必ず「主の導き」が与えられるからです。神様はいつでも私たちの祈りを心待ちにしておられるのです。第三に、イエス様の癒しの方法に注目すると、直接按手してくれたわけでもありません。ただ、「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という癒しの御言葉をおっしゃられました。バルティマイは目が見えるようになり自由に自分の道を進むことが出来るようになると、なんと主イエスの進まれる道に従って行ったという事です。マルコの福音書において、これまで奇跡を癒された者たちがイエス様の行かれる道にお供するのを許された者は、一人もいませんでしたが、バルティマイは、主イエスの十字架に向かわれる、「その道」に従って行く事を許されたのです。たとえ、この後、イエス様に付き従った者たちが、イエス様の十字架によって全員散らされることになるかもしれませんが、バルティマイの癒しと、彼がその後にイエス様の行かれるその「道」に従ったという事実は、大変意味深いものでありました。盲人バルティマイの上に起こった奇跡とは、まさに弟子たちにこれから起こることを象徴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使徒言行録をみるならば、この後、弟子たちは聖霊によって強められ、キリストが歩まれた道を模範にしながら、キリストに従って、きっと「弟子の道」を全うするであろうことを予告するような奇跡となったのです。

【結論】

弟子たちの間では、これまで、イエス様の教えられる「弟子の道」について、人に仕え、最も低い僕のように皆にへりくだるという道について、誰もが真剣に考えることなく、アーメンできなくて、自分たちの考えから除外しようとしてきましたが、聖霊を受けた後の弟子たちの歩みというのは、まさに盲人バルティマイが体験した奇跡のような抜本的に変えられた歩みでした。つまり目からうろこが落ちて、根本から価値観が変えられ、弟子たちはキリストの道に従って、人々に仕え、僕のようにへりくだり、自分の十字架を負う人生へと変えられたのです。私たちの歩みも、バルティマイのようにイエス様の歩まれた道に従っていくべきであります。この世にあって、御言葉を届けるために具体的にチラシを配ったり、福音をわかりやすく教えてあげたりして、人々に仕えていきましょう。その道はキリストの受けられた苦難の道に共にあずかる道でありますけれども、天においてキリストと共に高く引き上げられ、大きな報いに与らせていただく道でもあります。そして、本日の箇所からもう一点、覚えたいことは、盲人バルティマイの奇跡がなぜこのようなタイミングで起こったのかということです。これはまさに盲目であった弟子たちの霊の目を完全に開かせて、御言葉のみに信頼する者と変えられるようにという主の願いがそこに含まれていたのではと思います。この点はいつも講壇からお話しさせていただいていますが、神さまは不思議な摂理を通して、歴史をもご自身の啓示の一部分としてお用いにな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歴史を支配しておられるのは神様であ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ね。Historyとはまさに彼の物語です。この神さまに、私たちは絶対の信頼を寄せて、平安の内に歩ま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맹인 바디매오의 치유

2020년 12월 13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마가복음 10장 46~52절

서론

오늘의 본문은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마지막 치유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기적이란 그저 병든 자를 치유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에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측면도 있는데 즉 하나님이 대체 어떤 분이신지(神知識 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맹인 치유의 기적이 나오는 것은 사실 이번이 두 번째 입니다. 첫 번째는 어디였나면 마가복음 8장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좀 펼쳐 봅시다. 소제목에는 「벳새다에서 맹인을 치유하시다」라고 쓰여져 있네요. 이 첫 번째 치유에서는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시고는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자 맹인은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십니다. 그러자 맹인은 비로소 명확하게 보이도록 치유를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사에서 맹인이라는 것은 사실 제자들의 영적상태를 상징하는데 제자들은 수많은 기적을 거쳐 비로서 눈이 떠졌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8장 17절에는 예수님의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떠니? 아직도 모르겠니?”라며 몇 번이나 계속해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맹인의 기적 이후에야 비로소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8절 27절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기적은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인데, 역시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의 배경이 된 것이 제자들 모두에게 가르치신 「제자의 길」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지지난주에 배운 마가복음 10장 42~45절을 보시겠습니다.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마음으로부터 「아멘, 할레루야」라고 응답한 제자는 아마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아 각각의 십자가를 지면서 따라가려고 생각한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 바디매오의 외치는 소리

예수님 일행은 여리고에 도착했습니다. 여리고라는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2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로 고대 도시 중에서도 특히 오래된 마을이지만 헤롯 대왕에 의해 휴양지로 재건되어 매우 번화한 마을이기도 했습니다. 이 번화한 마을에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구걸하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윗의 자손 예수님은 다윗의 마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바로 그 수난의 이야기가 시작하려고 하는 있는 그 와중에 바디매오라고하는 맹인 거지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바디매오」라는 이름인데 아람어의 「바」와 「디매오」로 이루어져 있고 「바」는 아이라는 뜻입니다. 「디매오」는 혼돈(카오스)라든가 불결, 부정이라는 뜻입니다. 「카오스의 아이」 「부정한 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런 이름을 붙이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이름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불려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이 시끄러운 소리의 원인인 「나사렛 예수가」가 다가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듣자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매우 정치적인 울림이 담겨 있습니다. 즉 로마의 지배를 타도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왕이며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한 나라의 대통령과 같은 정치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친 것은 그런 동기에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돈이 더 필요합니다”라거나 “땅을 좀 나눠주실 수 없을까요?”라고 말하지 않고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사야의 예언을 보면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예언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분명 바디매오의 외침 가운데는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한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디매오는 어머니로부터 「메시야가 오면 네 눈은 반드시 치유될거야」라고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사야 29장 18절과 35장 5,6절을 참조 하십시오.

이사야 29장

18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이사야 35장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든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당연하지만 맹인 바디매오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근거로 반응한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근거로 반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듣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직감이 날카로워지거나 청각이 예민해진다고 하는데, 바디매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덧붙여서 구약 성경에 적혀 있는 수 많은 기적 중에서 맹인이 치유되는 기적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의외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이 일은 즉 맹인이 치유받는 기적이란 메시아가 도래할 때 볼 수 있는 특별한 기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따른 바디매오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고 입을 다물게 하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은 10장의 여기의 구절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만연한 편견에 대해 계속 훈계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부 사이의 이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편견에 대해 훈계 받았고, 무력한 어린 아이에 대한 편견에 대해 훈련 받았으며, 부자에 대한 반대의 의미에서의 편견을 훈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 세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편견이나 차별 같은 것은 전혀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둘러 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서도 여전히 맹인 거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꾸짖고 입 다물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머물러 서시고 바디매오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49~52절을 보시죠.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여기서 우리는 바디매오의 큰 믿음에 대해 세 가지를 주목해 보고 싶습니다. 첫째 50절을 보면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상의라는 것은 영어성경(RSV) 에서는 망토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일 구걸을 하기 위해 반을 엉덩이 밑에 깔고 나머지 반은 길가에 펼쳐 놓고 시주를 받기 위한 보자기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밤이 되면 겉옷은 이불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디매오에게 이 상의는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그의 유일한 재산이었습니다. 그것을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장면은 부자 청년의 취한 태도가 떠오릅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보다 자신의 재산을 아까워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재산을 버리고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51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 역시 얼마 전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셨던 질문과 같은 질문임을 깨닫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요구했지만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소원은 들어주지 않으셨지만 바디매오의 소원은 들어 주셨습니다. 마음에 합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된 소원을 가진 제자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끝까지 다가가면서 그들의 소원이 조금씩 바뀔 수 있도록 끝까지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소원이든, 어떤 기도든 드려도 좋습니다. 마음에 합한 기도라면 곧 기도의 답이 주어질 것이고, 설령 마음에 합한 기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소원의 답으로 반드시 「주님의 인도」가 주어지기 때무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셋째 예수님의 치유 방법에 주목해 보면 직접 안수해주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위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눈이 보이게 되고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자 무려 주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지금까지 기적으로 치유받은 자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모시고 가도록 허락받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바디매오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향하는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비록 이 후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모두 흩어지게 될지 모르지만 바디매오의 치유와 그가 그 후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따랐다는 사실은 매우 뜻깊은 것입니다. 맹인 바디매오게게 일어난 기적이란 바로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후 제자들은 성령에 의해 굳건해지고 그리스도가 걸으신 길을 본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따라 반드시 「제자의 길」을 완수할 것임을 예고하는 기적이 된 것입니다.

결론

제자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제자의 길」에 대하여 사람을 섬기고 가장 낮은 종처럼 모두에게 자신을 낮추는 길에 대해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멘할 수 없어 자신들의 생각에서 제외시키려고 했지만 성령을 받은 후 제자들의 걸음이라는 것은 바로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겪은 기적 같은 발본적으로 바뀐 걸음이 되었습니다. 즉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근본적으로 가치관이 바뀌었고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사람들을 섬기고 종처럼 자신을 낮추고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걸음도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전단지를 나눠주거나 복음을 알기 쉽게 가르쳐주며 사람들을 섬겨나갑시다. 그 길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의 길을 함께 받는 길이지만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높이 끌어올려 큰 상을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부분에서 또 한가지 기억하고 싶은 것은 맹인 바디매오의 기적이 왜 이런 타이밍에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으로 장님이었던 제자들의 영의 눈을 완전히 뜨게 하여 말씀에만 신뢰하는 자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바람이 거기에 담겨 있지는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점은 항상 강단에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섭리를 통해서 역사조차도 자신의 계시의 한 부분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지배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History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하나님께 우리는 절대적인 신뢰를 하면서 평안 가운데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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