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年09月13日「塩としてのキリスト者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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塩としてのキリスト者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9章38節~50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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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9:38ヨハネがイエスに言った。「先生、お名前を使って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者を見ましたが、わたしたちに従わないので、やめさせようとしました。」
9:39イエスは言われた。「やめさせてはならない。わたしの名を使って奇跡を行い、そのすぐ後で、わたしの悪口は言えまい。
9:40わたしたちに逆らわない者は、わたしたちの味方なのである。
9:41はっきり言っておく。キリストの弟子だという理由で、あなたがたに一杯の水を飲ませてくれる者は、必ずその報いを受ける。」
9:42「わたしを信じるこれらの小さな者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者は、大きな石臼を首に懸けられて、海に投げ込まれてしまう方がはるかによい。
9:43もし片方の手があなたをつまずかせるなら、切り捨ててしまいなさい。両手がそろったまま地獄の消えない火の中に落ちるよりは、片手になっても命にあずかる方がよい。
9:45もし片方の足があなたをつまずかせるなら、切り捨ててしまいなさい。両足がそろったままで地獄に投げ込まれるよりは、片足になっても命にあずかる方がよい。
9:47もし片方の目があなたをつまずかせるなら、えぐり出しなさい。両方の目がそろったまま地獄に投げ込まれるよりは、一つの目になっても神の国に入る方がよい。
9:48地獄では蛆が尽きることも、火が消えることもない。
9:49人は皆、火で塩味を付けられる。
9:50塩は良いものである。だが、塩に塩気がなくなれば、あなたがたは何によって塩に味を付けるのか。自分自身の内に塩を持ちなさい。そして、互いに平和に過ごしなさい。」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9章38節~50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本日お読みした箇所には、三つのお話が書かれています。第一のお話しは、38節~41節までで、弟子たちに見られる最初の問題です。それは彼らの内に生じた「階級意識」とか「資格」とか「差別意識」についてです。第二のお話しは、42~48節までで、弟子たちに見られる第二の問題ですが、それは、共同体の中で信者を躓かせるという問題です。そして最後に、第三のお話しですが、二つの問題の平和的な解決法について、即ち「塩気を持つ」ということが49~50節に書かれています。ところで、なぜ、イエス様の側近である弟子たちは、このような醜態を演じ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弟子たちにおいて信仰というのがまだ完全には理解されていなかったからだと思われます。信仰というのは何でしょうか。これは天国に入るための入場券ではありません。それをタンスの引き出しに大事にしまっておいて、いざ、この肉体の寿命が尽きた時に入場券を持って天国に入ろう、というのではありません。信仰とは、チケットではなく、プロセスであります。人柄から滲み出るものであります。この時はまだ、イエス様の十字架と復活の出来事の後、ペンテコステの日の聖霊がまだ、注がれる前の出来事でしたので、弟子たちにおいても、そのところの理解が、乏しかったのは無理もありませんでした。

【1】. 塩気を持つこと

さて、塩気を持つことがいかに大切なことか、について書かれているのですが、それでは、一体塩気を持つとはどういう意味なのでしょうか。塩がなければ人間は生きられないため、昔から、塩というのは大変貴重なものであったようです。そして、塩には腐敗を防ぐ働きがありますから、今日においても野菜を塩漬けにしたり、魚を塩漬けにしたりいたします。塩は浄めるために用いられるのです。旧約聖書を見ますと神様に献げる供え物を聖別するために、供え物に対して塩が一振り掛けられています。旧約のレビ記2:13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ございます。ご覧いただけますでしょうか。

“穀物の献げ物にはすべて塩をかける。あなたの神との契約の塩を献げ物から絶やすな。献げ物にはすべて塩をかけてささげよ。”

腐るという現象は、特にこの暑さの中では、私たちの生活においてありふれた現象ですが、神さまの目から見た時に、腐るというのは罪と関係しています。つまり、本来神さまが創造された被造物はそれ自体で美しく、それ自体で良かったのですが、アダムとエバを通して罪が入ってきたために、神の被造物が腐敗させられるという事態が発生してしまいました。そこで神さまは、特に罪によって汚されたご自身の民を、贖い、元の状態に回復させるために、御子イエス・キリストをこの世に送ってくださり、救いの御業を起こしてくださいました。ですから、イエス様こそ、罪に陥った人々を聖別する塩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イエス様こそ、私たち信者の信仰の歩みにおいて、腐敗を防止するための「塩」であると言うことが出来るのです。

それでは、私たちが塩気を持つとはどういう意味なのかと言いますと、私たちも、イエス様の働きのように、世を浄め別ち、腐敗を防止するその働きを担うことであります。もっと言えば、私たちキリスト者の生活を通して、キリストの救いの御言葉が、キリストの恵みの御言葉が滲み出るようにさせるということです。別の言い方をすれば、私たちの信仰生活を通して、キリストの香りが放たれ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私たちがキリストとの交わりに入れられて、そして兄弟姉妹に愛を持って仕え合う時に、塩気を持つことが可能となるのです。

それでは、反対に私たちが塩気をなくすとは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それは、誰が一番偉いのかを、いつまでも議論しながら、自分の義を誇り、結局、私たちの歩みから、キリストへの信仰が滲み出てこないこと、イエス様の恵みの御言葉が醸し出されないことだと思います。ですから、私たちがキリストとの交わりに入れられて、この世に対しては、清めと、腐敗防止の働きを担っていくこと、これが私たちキリスト者の塩の務めであり、福音が宣言されることなのです。

【2】. 弟子たちの内に生じた階級意識

それでは、話を戻しまして、弟子たちの第一の問題を見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が、そもそも、問題の発端は、9:34節にありますように、弟子たちの中で誰が一番偉いのかを、論じあ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ありました。この延長線上に弟子たちの問題があるということを抑えながら9:38~40節をご覧いただけますでしょうか。

“ヨハネがイエスに言った。「先生、お名前を使って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者を見ましたが、わたしたちに従わないので、やめさせようとしました。」イエスは言われた。「やめさせてはならない。わたしの名を使って奇跡を行い、そのすぐ後で、わたしの悪口は言えまい。わたしたちに逆らわない者は、わたしたちの味方なのである。”

ここの箇所には、実は少し皮肉が込められています。というのは、以前、弟子たちは悪霊を追い出す権能をイエス様から授けられました。6:7です。プリントを御覧ください。

“そして、十二人を呼び寄せ、二人ずつ組にして遣わすことにされた。その際、汚れた霊に対する権能を授け、”

それにも拘らず、弟子たちは、つい最近のことですが、9:18において「悪霊追い出し」に失敗するのであります。ところがどっこい、どこの誰だか素性もわからない者が、イエス様のお名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現場に遭遇するわけです。これを見た時、弟子たちは妬ましい思いを持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直ちにそれを止めさせました。その理由は何かというと、38節を見ると「弟子たちに従わなかったから」と書かれています。弟子たちとしては、「キリストの御名」による、特権というか、「キリストの御名」を扱う資格を、まず第一に自分たちが独占して、きちんと版権みたいなものを秩序立てて、それを使うことができる階級のようなものを導入したかったのでしょう。ところが、イエス様のお答えは、“やめさせ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ます。さらに、「あなた方、弟子たちがキリストの者であるという「名」の故に、あなた方に水一杯でも飲ませてくれる者は、必ずその報いを受けることができ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キリストの御名によってなされた、信仰の業を何一つ制限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たのです。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集められた共同体の中には、男・女、奴隷、大人・子供などの差別は全くないということです。階級もなければ、差別もない、ですから、だれが一番偉いのかを論じたりして、自分の義を誇ったり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しょう。キリストの共同体とは、キリストの体であり、互いが互いに仕え、愛によって建て上げられる有機体であるからです。ですから私たちにおいても、もし、自分自身を誇る思いが出て来たり、階級意識、差別意識がぬくぬくと出て来たなら、そのような思いは、塩によって聖別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3】. 信者を躓かせる罪

次の主題に移ってまいりましょう。共同体の中で信者を躓かせるという問題です。「躓かせる」という言葉は、信仰を失わせるとか、信仰から脱落させるという意味になります。9:42を御覧ください。

“「わたしを信じるこれらの小さな者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者は、大きな石臼を首に懸けられて、海に投げ込まれてしまう方がはるかによい。”

ここには大変衝撃的な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イエス様が本当にこのような過激なことを言われたのかと、ただ、ただ驚かされるばかりです。大きな石臼とは、ロバに挽かせる、円い、大きな重たい石臼のことですが、イエス様はそれを首にかけてガリラヤ湖に沈めなさいと言っておられます。当時の人々にとっては、海というのは神に敵対する勢力が住んでいる、その住み家として恐れられていました(イザ27:1、51:9)。しかも、万一自分が死んだ時、ご遺体が葬られないということは、あってはならない最悪な死に方であったために、イエス様の言葉に衝撃と失望を受けたことに違いありません。もし、弟子たちの間に「誰が一番偉いのか」の議論がいつまでも続き、目に見えない差別や階級が生まれ、それによってイエス様を信じる小さな者の信仰を失わせたり、信仰から脱落させることになるなら、それなら、まだ、海に沈められる方がましだというのです。ここで、何と比べて、海に沈められる方がましなのか、はっきりとは書かれていませんが、次の43節と、45節と、47節の、「もし」という言葉から始まる三つの仮定の文章を読むなら、「地獄に投げ込まれる」より、海に沈められた方が良い、ということが推測されるのです。

43~47節は、仮定の文章ですが、今度は、「小さな一人」ではなく、自分自身を躓かせるような「手」と「足」と「目」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もちろん、これは、イエス様が誇張によって語っているのであって、実際に手と足と目を切り捨ててしまいなさい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この「手」と「足」と「目」というのは、聖書の中において悪事を働く器官として表現されている箇所が多いのであります。例えば、聖書において、足とは悪事へと向かう働きをするものと表現されており(箴言1:16、6:18、イザ59:7)、手も同じようにその悪を実行する手段として表現されています(ヨブ8:20、詩篇28:4、71:4)。目とは心の欲望や野望に関連して語られています(民15:39、箴言6:13、6:17)。つまり、この世に、あまりにも執着してしまい、キリストに背を向けさせるような、そのような事態になってはならない。この世に対する行き過ぎた所有意識や、この世に対する行き過ぎた態度や、行き過ぎた行動を捨て去り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それらの為に「地獄に投げ込まれること」より、それらを捨て去った方がまだ、ましだからです。ここから、分かって来ますことは、キリストに対する献身と忠誠は、どのような損失を被ったとしても、価値あ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キリストに対する献身と忠誠は、決して無駄になるのではなく、天に宝を積むことであって、キリストの再臨の日に大いなる報いとして神さまからその報いに与るのです。それは、さておき、「手」と「足」と「目」が私たち自身を躓かせないためにも、やはりここでも腐敗を防止するための塩が必要となります。塩によって、「手」と「足」と「目」が浄められるなら、その人の手は、人々の足を洗ってあげる手となり、その人の足は福音を宣べ伝える足となり、その人の目には、光が与えられ、キラキラと主を仰ぎ見る目として変えられるのです。そして塩気を持った私たちの歩みを通して、キリストの御言葉が醸し出され、キリストの香りが放たれるのです。

【結論】

私たち信者にとって、イエス様に対する信仰とは、救いに至らせるものでありますが、これは天国への入場券のようなものではなく、むしろ塩気をもった営みであり、プロセスであって、信仰とはキリストとの交わりに入れ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信仰という言葉をそのまま「弟子の道」と言い換えることが出来るかもしれません。イエス・キリストの弟子の道とは、迫害と患難があり、決して平たんな道ではありませんが、しかし、羊飼いであられるイエス様によって導かれる道であり、終末において大変大きな報いが約束されている道です。またこの世に対しては、救いと平和をもたらす「塩」としての役割を担わせられている道なのです。ですから、もし、私たちが塩を持っているなら、決して、誰が偉いのか議論することなどあり得ないし、共同体の中の小さな一人を躓かせることも、自分の義を誇ることもありえないということです。弟子の道とは、それは、まさに救いと平和をもたらす道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このことを今日は覚えたい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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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같은 그리스도인

2020년 9월 13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마가복음 9장 38~50절

서론

오늘 읽은 부분에는 3가지의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38~41절까지로 제자들에게서 보여지는 첫 번째 문제입니다. 그것은 그들 안에 생긴 「계급의식」이라든가 「자격 」이라든가「차별의식」에 대해서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42~48절까지인데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만 그것은 공동체 가운데서 믿는자를 실족 시키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야기인데요, 두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법에 대해서 즉, 「소금의 짠맛을 가진다」라고 하는 것이 49,50절에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측근인 제자들이 이러한 추태를 부렸을까요? 그것은 제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권이 아닙니다. 그것을 장롱 서랍에 소중히 간직하고 막상 이 육체의 수명이 다했을 때 그 입장권을 가지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티켓이 아니고 프로세스입니다.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때는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이후 펜테코스트의 날에 성령이 아직 임하시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제자들도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1) 짠 맛을 잃은 소금

자, 소금이 짠 맛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쓰여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짠 맛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소금이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기 때문에 옛날부터 소금이란 매우 귀중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금에는 부패를 막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채소를 소금에 절이거나 생선을 소금에 절이기도 합니다. 소금은 정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성별하게 위해 제물에 소금을 한번 쳤습니다. 구약의 레위기2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보십시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썩는 현상은 특히 더운 날에는 우리 생활에서 흔한 현상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봤을 때 썩는다는 것은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그 자체로도 좋았지만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피조물이 부패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히 죄로 더럽혀진 자신의 백성을 속죄하고 원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시고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죄에 빠진 사람들을 성별하는 소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믿는자들의 믿음의 삶의 행보에 있어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소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짠 맛을 잃지 않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세상을 정화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그 일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더 말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말씀이 배어나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고 형제자매를 사랑으로 섬길 때 소금의 짠맛을 갖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우리가 짠 맛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누가 제일 잘났는가를 가지고 두고 두고 논의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결국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배어 나오지 않는 것, 예수님의 은혜의 말씀을 삶에서 보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정결함과 부패방지의 역할을 담당해 나가는 것,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금으로서의 의무이며 복음이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2) 제자들 가운데 생긴 계급의식

그러면 이야기가 다시 돌아가서 제자들의 첫 번째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만, 원래 문제의 발단은 9장 34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제자들 중에서 누가 제일 잘났는지를 논쟁하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이 연장선상에 제자들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9장 38~40절을 보시겠습니다.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이 부분에는 사실 조금 아이러니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예수님으로 부터 부여 받았습니다. 6장 7절을 봐 주세요.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그런데도 제자들은 최근의 일이지만 9장 18절에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사는 누구인지, 이름도 모르는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현장을 만나게 된 셈입니다. 이걸 봤을 때 제자들은 질투심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즉시 그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38절에 보면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라고 적혀 있습니다. 제자들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한 특권이라고나 할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다루는 자격을 먼저 제일 첫 번째로 자신들이 독점하고 제대로 판권같은 것을 질서 있게 해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계급 같은 것을 도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금하지 말라」였습니다. 게다가 「너희가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을 무엇 하나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아진 공동체 안에는 남자・여자, 노예, 어른, 어린이 등의 차별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계급도 없고 차별도 없는 그러니까 누가 제일 잘났는지를 논하거나 자신의 의를 자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란 그리스도의 몸이며, 서로가 서로 섬기고 사랑에 의해 세워지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만약에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나오거나, 계급의식, 차별의식이 불끈 불끈 나온다면 그런 생각은 소금을 쳐서 성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믿는 자를 실족하게 하는 죄

다음 주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믿는 자를 실족하게 하는 문제입니다. 「실족하게 하다」라는 말은 믿음을 잃게 하거나 믿음에서 탈락 시킨다는 뜻이 됩니다. 9장 4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여기에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이런 과격한 말씀을 하셨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큰 맷돌은 당나귀에 걸 수 있는 동그랗고 무거운 맷돌인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목에 걸고 갈릴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다를 하나님께 적대하는 세력이 살고 있는 터전으로서 생각해서 두려워했습니다(이사야 27장 1절, 51장 9절). 더구나 만일 자신이 죽었을 때 시신이 매장될 수 없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최악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충격과 실망을 받았을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 사이에 “누가 제일 잘났는가”하는 논란이 계속되어 보이지 않는 차별이나 계급이 생기고 그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의 믿음이 실족하게 된다면 차라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과 비교해서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나은지 명확하게 적혀 있지는 않지만 다음 43절과 45절과 47절의 「만일」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세 가지 가정의 글을 읽는다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43~47절은 가정의 문장인데요. 이번에는 「작은 자들 중 하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실족시키는 「손」과 「발」과 「눈」에 대해서 쓰여져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이 과장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실제로 손과 발과 눈을 잘라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손」과 「발」과 「눈」은 성경에서 나쁜 짓을 하는 기관으로 많이 표현 됩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발은 악으로 달려가게 하는 기관으로 표현되고 있으며(잠언 1장 16절, 6장 15절, 이사야 59장 7절), 손도 마찬가지로 그 악을 실행하는 수단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욥 8장 20절, 시편 28편 4절 71편 4절). 눈이란 마음의 욕망이나 야망과 관련되어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민수기 15장 39절, 잠언 6장 13절, 6장 17절). 즉 이 세상에 너무 집착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은 상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 세상에 대하여 지나친 소유욕이나 이 세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한 행동을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 때문에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그것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충성은 어떠한 손실을 입는다 하더라도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충성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큰 보답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그 보답을 받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다하고 「손」과 「발」과 「눈」이 우리들 자신을 실족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역시 여기서도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소금이 필요합니다. 소금에 의해 「손」과 「발」과 「눈」이 정화된다면 그 사람의 손은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손이 되고, 그 사람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발이 되며, 그 사람의 눈에는 빛이 비추어져 반짝반짝 거리며 주님을 앙망하는 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짠맛을 잃지 않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러 나오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이는 천국의 입장권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짠 맛을 잃지 않는 삶이며 프로세스이며 믿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말을 그대로 「제자의 길」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이란 박해와 환난이 있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지만 그러나 목자되신 예수님에 의해 인도되는 길이며 종말의 때에 매우 큰 보답이 약속된 길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대해서는 구원과 화평을 가져다주는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들이 소금으로서의 짠맛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누가 잘났는가 논의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공동체 안의 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시킬 일도,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이라는 것은 그것은 바로 구원과 화평을 가져오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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