血の畑 피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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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7章1節~10節
1夜が明けると、祭司長たちと民の長老たち一同は、イエスを殺そうと相談した。
2そして、イエスを縛って引いて行き、総督ピラトに渡した。
3そのころ、イエスを裏切ったユダは、イエスに有罪の判決が下ったのを知って後悔し、銀貨三十枚を祭司長たちや長老たちに返そうとして、
4「わたしは罪のない人の血を売り渡し、罪を犯しました」と言った。しかし彼らは、「我々の知ったことではない。お前の問題だ」と言った。
5そこで、ユダは銀貨を神殿に投げ込んで立ち去り、首をつって死んだ。
6祭司長たちは銀貨を拾い上げて、「これは血の代金だから、神殿の収入にするわけにはいかない」と言い、
7相談のうえ、その金で「陶器職人の畑」を買い、外国人の墓地にすることにした。
8このため、この畑は今日まで「血の畑」と言われている。
9こうして、預言者エレミヤを通して言われていたことが実現した。「彼らは銀貨三十枚を取った。それは、値踏みされた者、すなわち、イスラエルの子らが値踏みした者の価である。
10主がわたしにお命じになったように、彼らはこの金で陶器職人の畑を買い取っ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7章1節~10節
피밭
2019년 7월14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7장 1절~10절
지난 주에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예언 성취를 통해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며, 그제야 자신의 연약함, 죄 깊음,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자신이 온전한 죄인이며 자신 안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때의 깊은 슬픔은 나중에 베드로를 회개로 인도하게 되지만, 오늘 본문의 등장인물 유다의 경우는 베드로와 같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3절의 「뉘우쳤다」는 표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그리스어는 「회개(metanoein)」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였다」는 의미의 「metameleiteis(메타멜레테이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유다가 후회한 것이 대체 무엇이냐면 예수님의 종교재판에서 사형 판결이 나온 탓에 무죄한 사람의 피를 팔아넘긴 것에 대한 후회였습니다. 믿음이 주어지거나 랍비이신 예수에 대한 견해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4절을 보십시오.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신명기 27장 25절에는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고작 은 삼십이라 할지라도 뇌물을 받고 무죄한 이의 피를 흘리는, 죄를 범한 것에 대해 후회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 불쌍한 일을 한 것에 대한 동정심에 불과했고 율법의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의미에 사로잡힌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가정컨대 제사장장들이나 장로들이 그 은 삼십을 받아들였다면, 피를 팔아넘긴 죄는, 유대 당국자들에게 있는 것이 되어, 유다는 마음이 다소 편해져 자살까지는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사장장들과 장로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고 단호히 말하며, 은 삼십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린 것에 있어서는 유다와 공범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자신의 죄를 후회하고 스스로 자신의 죄에 책임을 지며 그 죄의 보상으로 자살해 버렸습니다. 결국 유다는 마지막까지 「나는 타고난 죄인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나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어쨌든 항복하고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본문에서 저자 마태는, 첫째로 베드로와 유다를 대조함으로써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려 했고, 둘째로 유다가 자살한 후 제사장장들과 장로들이 취한 행동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리스도는 대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둘째 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피밭」은 히브리어로 「아겔다마」라고 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잘 알려진 장소이자 잘 알려진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말 자체는 유명했지만 그 피가 누구의 피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는 그 피가 유다의 피라고 되어 있지만 오늘 마태 본문에서는, 그 피가 예수님의 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18-19절을 읽겠습니다. 그대로 들어 보십시오.
사도행전 1장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즉 사도행전에는 그것이 유다의 피라고 되어 있지만, 오늘 마태의 기록에 따라 보면 이 피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대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피밭」은 지금 현재에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생생히 외치며 증언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5~8절을 보십시오.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가룟 유다가 손에 든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자살했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은을 거두며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피 값이란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피 값입니다.
원래 우리 신자들에게는 바로 이 예수님의 피 값으로 말미암아 깨끗해지고 죄가 속량되며 구원받는다는 믿음이 있지만, 산헤드린 의원들, 유대 당국자들에게는 그것이 살인에 대한 대가이자 더러운 것으로 비쳤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자세히 생각해 보면 매우 모순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성전고에서 거룩한 은 삼십을 유다에게 주고, 그 대가로 예수를 자신들에게 인도하게 했습니다. 그 목적은, 처음부터 예수를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원래 성전의 은전을 사용해 살인을 모의한 것이 바로 그들 자신입니다. 그런데 피의 대가인, 은 삼십이 돌아와 성전 금고에 넣어지는 것에는 그들이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들 안에서 나온 살인이라는 죄의 결과임에도 자신들은 깨끗하고 의로우며 죄가 전혀 없는 듯 행동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 더러운 돈을, 적당한 용도로 나그네의 묘지를 사는 데 사용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장사되지 않는 시체를 위해, 나그네의 묘지를 만들어 준다고 자랑하듯이, 자신들은 경건한 일을 한다며 자족했을 것입니다.
그 후, 이 나그네의 묘지는 「피밭, 히브리어로 아겔다마」라고 불리며 유명해졌습니다. 왜 유명해졌느냐면, 에레미야 예언의 성취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매수된 그 장소는, 예루살렘 성벽 남서쪽~남쪽으로 펼쳐진 「벤 힌놈 골짜기」 한 구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벤」은 「유아, 아이」라는 뜻이고 「힌놈 골짜기」는 「게헨놈」으로 「게헨나」의 어원입니다. 벤 힌놈 골짜기가 어떤 곳이냐면, 그 골짜기 한 부분에 소각로가 있어서 그 불은 항상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왜 거기에 소각로가 생겼느냐면 이전에 그 장소에 우상의 신을 위한 제단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몰렉 신을 위한 제단이었고 에레미야 시대에는, 바알 숭배를 위한 제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제단에 자기의 아들, 딸을 타는 불 속에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른바 「인신 공양」이라고 불린 의식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고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내어 경고하셨습니다. 그 경고의 방식은, 에레미야를 통해 실제 퍼포먼스를 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먼저 에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냅니다. 토기장이의 집에서 예레미야가 본 것은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었다가 부수고 마음에 드는 것이 나올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주께서 더 나아가 19장에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을 데리고 하시드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중략)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오지병을 깨뜨리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곳과 그 중 거민에게 이같이 행하여 이 성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 곧 그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이렇게 예레미야가 항아리를 깨뜨리는 것으로 이스라엘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나타냈습니다. 마침내 피밭 아겔다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이 성취됩니다. 그 심판이란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백성이 구약의 이스라엘에서 신약의 그리스도인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그것은 스가랴 11장에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이야기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같습니다.
스가랴 11장에는 하나님의 계시로 예언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곧 예수님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목자 스가랴는 양 중, 고난받는 자들을 위해 좋은 목자가 되어 두 개의 지팡이를 들고 양을 치기로 했습니다. 두 막대기란 「은총의 막대기」와 「연락의 막대기」입니다. 좋은 목자는 나쁜 양치기 셋을 한 달 만에 물리치고 열심히 목회를 했습니다. 나쁜 양치기란 거짓 예언자와 유대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양들의 태도에 참다못해 마침내 첫 번째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습니다. 어느 날 목자는, 양들의 본심을 시험하기 위해 「너희가 좋게 여기면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하니 양들은 이 훌륭한 메시아적 목자에게 고작 은 삼십밖에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은 삼십이란 노예의 값이었습니다. 스가랴 11장 12~14절을 보십시오.
스가랴 11장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이렇게 은 삼십, 곧 노예의 값밖에 주려 하지 않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랑을 끊으시고 스가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그리고 스가랴는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도 잘라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그들을 하나님의 양으로 삼으신 「은총」과 「연락」이 제거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 일이 유대 당국자들이 메시아를 멋대로 업신여기고 메시아의 피의 대가를 거절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피밭은 이스라엘 민족과의 언약의 막대기가 꺾인 후, 다시 주께서 참된 택하신 백성을 돌보시어 새로운 언약을 맺어 주실 보증이었습니다. 누구에 대한 보증이냐면 이방인들입니다. 곧 메시아의 피의 대가로, 나그네 묘지로 배정했지만 바로 이때 이방인들이 새로운 백성으로 일으켜지게 되었습니다. 메시아적 목자는, 구약의 택한 백성에게서 노예처럼 평가절하되어 버려지지만, 그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새로운 언약의 백성을 사신 것이며 사신 이방인들을 하늘 나라의 상속지, 상속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마태에 따르면 피밭이 생생히 증언하는 것은 바로 이전에 인신 공양이 바쳐졌던 그 장소에서, 예레미야가 항아리를 깨뜨린 그 장소에서, 이스라엘이 메시아의 피의 대가를 거절해 버린 것, 그것을 노예 값인, 은 삼십으로 평가한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피의 값으로 나그네 묘지가 매수된 것으로 이방인들이 새로운 백성으로 대신 일으켜졌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유대 당국자들 중 누가 피밭이 생생히 증언하는 내용을 자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피밭이 외치는 증언을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구약 예언자들에 의해 증언된, 오실 메시아이시며 자신의 피의 대가로 우리 죄인들을 사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분께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先週は、「鶏が鳴く前に三度、あなたは私を否定する」というイエス様の預言の成就を通して、ペトロは号泣し、その時になって初めて自分の弱さ、罪深さ、愚かさを痛感し、自分が全き罪人であって、自分の内には一切誇れるものはないことを自覚しました。この時の深い悲しみは、後にペトロを悔い改めに導くことになりますが、本日の登場人物であるユダの場合はペトロのようにはいきませんでした。ユダの態度を象徴的に表す言葉として3節の「後悔した」という言葉をあげることができます。このギリシャ語は、悔い改めを表す「メタノエイン」ではなく、悔いた、後悔したという意味の「メタメレテイス」が使われています。ユダが後悔したこととは一体、何かというと、イエス様の宗教裁判において死刑の判決が出たために、自分が罪のない人の血を売り渡し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に対して後悔したのです。信仰が与えられたり、ラビであるイエスに対する見方が変わったからでありません。4節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は罪のない人の血を売り渡し、罪を犯しました」と言った。しかし彼らは、「我々の知ったことではない。お前の問題だ」と言った。
申命記27:25には、「賄賂を取って、人を打ち殺して罪のない人の血を流す者は呪われる。」という御言葉があります。ですから、ユダは、たかだか銀貨30枚であっても、賄賂を受け取って罪のない方の血を流す罪を犯したということで後悔しているのです。それは、イエスに対しお気の毒なことをしてしまったという同情心に過ぎず、ただ律法の表面的で文字的意味にとらわれているに過ぎなかったと言うことです。ですから、仮定ですが、もし、祭司長たちや長老たちがその銀貨30枚を受け取ってくれたなら、血を売り渡した罪はユダヤの当局者たちにあるということになり、ユダは幾分、気持ちが楽になり、自殺にまでは至らなかったかもしれません。ところが、祭司長たちや長老たちは、「我々の知ったことではない。お前の問題だ」と言い放ち、銀貨30枚を受け取ろうとはしませんでした。彼らは罪のない人の血を流したということにおいては、ユダと共犯者でありながらです。ですから、ユダは自分の罪を後悔し、自分で自分の犯した罪に責任を持ち、その罪の償いのために自殺してしまいました。結局、ユダは最後まで、「自分は生まれながら罪びとであって、全的に腐敗し、全的に堕落していて、自分には救い主が必要である。とにかくもう降参で神により頼む以外にない」という信仰に至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この箇所を通して著者マタイは第一に、ペトロとユダを対照的に置くことによって重要なメッセージを伝えようとしています。第二に、ユダが自殺した後、祭司長たちや長老たちがとった行動に焦点を当てることによって、「キリストとは一体、どのようなお方であるのか」について書かれているというふうにも解釈できると思われます。本日は第二の点について調べ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血の畑」はヘブル語で「アケルダマ」と言いますが、これは、ユダヤ人にとって大変よく知られた場所であり、また良く知られた言葉でもありました。しかし言葉自体は有名でしたが、その血が誰の血なのかについては、意見が分かれます。使徒言行録1章では、その血はユダの血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が、本日のマタイの本文を見るとその血はイエス様の血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使徒言行録1:18-19をお読みします。そのままお聞きください。
ところで、このユダは不正を働いて得た報酬で土地を買ったのですが、その地面にまっさかさまに落ちて、体が真ん中から裂け、はらわたがみな出てしまいました。
このことはエルサレムに住むすべての人に知れ渡り、その土地は彼らの言葉で『アケルダマ』、つまり、『血の土地』と呼ば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つまり、使徒言行録には、それはユダの血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が、本日のマタイに記述に沿って見てまいりますと、この血はキリストの命の代価であると言います。そして、「血の畑」は、今現在においても鮮やかにキリストの死の意味について叫び、証言してい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マタイ27章5~8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こで、ユダは銀貨を神殿に投げ込んで立ち去り、首をつって死んだ。
祭司長たちは銀貨を拾い上げて、「これは血の代金だから、神殿の収入にするわけにはいかない」と言い、
相談のうえ、その金で「陶器職人の畑」を買い、外国人の墓地にすることにした。
このため、この畑は今日まで「血の畑」と言われている。
イスカリオテのユダは、自分の手の中にある銀貨を神殿に投げ込んで自殺しました。祭司長たちはその銀貨30枚を拾い上げて、「これは血の代金だから、神殿の収入にするわけにはいかない」言いました。血の代価とは、先ほどから言っているようにイエス様の血に対する代価です。
そもそも私たち信者においては、まさにこのイエス様の血の代価によって清められ、罪が贖われ、救われるという信仰を持っていますが、サンヘドリンの議員たち、ユダヤの当局者たちにとって、それは、殺人の代価であり、汚れたものとして映っていました。ところでここの箇所は、よくよく考えると大変矛盾したことを言っています。というのは、最初、彼らは、神殿の金庫から聖なる銀貨30枚をユダに与えて、その引き換えとしてイエスを自分たちに引き渡すようにしました。その目的とは最初からイエスを殺すためでした。つまり、そもそも神殿の銀貨を用いて殺人を企てたのは彼ら自身であったのです。ところが、その血の代価である銀貨30枚が戻って来て神殿の金庫に入れられることについては、彼らは嫌がっているのです。自分たちの内側から出てきた殺人という罪の結果でありながら、自分自身においては清く正しく、罪が一切ないようにふるまっているのです。さらに言えば、彼らは、その汚れたお金を、それにふさわしい用途として異邦人を葬るための外人墓地の購入費にあてました。これは、誰にも埋葬されることのない亡き骸のために無縁墓地を作ってやったんだと言わんばかりで、自分たちはいかにも、敬虔なことをしていると自己満足していたことでしょう。
その後、この無縁墓地は、「血の畑、ヘブル語でアケルダマ」と呼ばれ有名になりました。なぜ有名になったのかと言えば、それはエレミヤ預言の成就であったからです。イエス様の血の代価として買い取られたその場所とは、エルサレムの城郭に南西~南に広がる「ベン・ヒノムの谷」の一か所に位置していました。ヘブル語でベンとは(幼児、子供)であり、ヒノムの谷はゲー ヒンノムでゲヘナの語源になっています。ベン・ヒノムの谷とは、どのような場所かと言いますと、その谷の一画に焼却炉がありまして、その火は常に燃えていました。なぜそこに焼却炉ができたのかと言うと、以前その場所に、偶像の神のための祭壇(トフェト)が築かれていたからです。古くはモレク神のための祭壇であり、エレミヤの頃はバアル崇拝のための祭壇でした。イスラエルの民は、この祭壇に自分たちの息子、娘を生贄として、燃える火の中に捧げました。いわゆる「人身御供」と呼ばれた儀式です。
このようなイスラエルの民の偶像崇拝に対して、神様はお怒りになられ、預言者エレミヤを送って警告を与えました。その警告の仕方ですが、エレミヤを通して実際にパフォーマンスをさせる方法でした。まずエレミヤを陶工の家に送ります。陶工の家でエレミヤ目にしたものとは、陶工が粘土で器を作っては壊し、気に入るのが出来上がるまで、それを繰り返していました。その時、突然、主の言葉がエレミヤに臨みます(18:6)。「イスラエルの家よ、この陶工がしたように、わたしもお前たちに対してなしえないと思っているのか、と主は言われる。見よ、粘土が陶工の手の中にあるように、イスラエルの家よ、お前たちはわたしの手の中にある。」
主はさらにエレミヤに言われました。「行って、陶器師の壺を買い、民の長老と、長老格の祭司を幾人か連れて、陶片の門を出たところにある、ベン・ヒノムの谷へ出て行きなさい。…(中略)人々の見ているところで、その壺を砕き、彼らに言うがよい。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陶工の作った物は、一度砕いたなら元に戻すことができない。それほどに、わたしはこの民とこの都を砕く。人々は葬る場所がないのでトフェトに葬る。わたしはこのようにこのところとその住民とに対して行う、と主は言われる。そしてこの都をトフェトのようにする。エルサレムの家々、ユダの王たちの家々は、トフェトのように汚れたものとなる。これらの家はすべて、屋上で人々が天の万象に香をたき、他の神々にぶどう酒の献げ物をささげた家だ。」
このように、エレミヤが壺を砕くことによって、イスラエルに下される神の裁きを象徴的に表しました。やがて、血の畑、アケルダマにおいてイスラエルの民に対し裁きが、成就されるのです。その裁きとは、神の顧みられる民が旧約のイスラエルから新約のキリスト者へ移行したということです。
そのことは、ゼカリヤ書11章にさらに詳しく書かれています。エレミヤ書と全く違う話ですが、話の中で言わんとしていることは同じです。
ゼカリヤ書11章には、神の御告げによって、預言者ゼカリヤが、イスラエルの牧者として、つまりイエス様の役割を演じています。牧者ゼカリヤは、羊のうちの悩める者たちのために良い牧者となり、二本の杖を持って羊を養うことにしました。二本の杖とは「慈しみ」の杖と「一致」の杖です。良い牧者は悪い羊飼いたちを一月に三人も退けて、一生懸命牧会しました。悪い羊飼いとは、偽預言者やユダヤの指導たちです。しかし羊たちの態度に我慢しきれなくなり、ついに一本目の「慈しみ」の杖を折ってしまいました。ある日、牧者は羊たちの本心を試みるために「あなたがたがもし、よいと思うならば、わたしに賃金を払いなさい。そうでなければ、払わなくてもよい」と言うと、羊たちはこの素晴らしいメシア的牧者に対しわずか、銀30シェケルしか払おうとしませんでした。銀30シェケルとは奴隷の価だったのです。ゼカリヤ11章12~14節をご覧ください。(旧約p1,491)
わたしは彼らに言った。「もし、お前たちの目に良しとするなら、わたしに賃金を支払え。そうでなければ、支払わなくてもよい。」彼らは銀三十シェケルを量り、わたしに賃金としてくれた。
主はわたしに言われた。「それを鋳物師に投げ与えよ。わたしが彼らによって値をつけられた見事な金額を。」わたしはその銀三十シェケルを取って、主の神殿で鋳物師に投げ与えた。
わたしは「一致」というわたしのもうひとつの杖を折り、ユダとイスラエルの兄弟の契りを無効にした。
このように銀30シェケルつまり、奴隷の価しか払おうとしなかった民に対し、神はとうとう愛想をつかしてしまい、ゼカリヤに言われました。「その見事な価を陶器師に投げるがよい。」そしてゼカリヤは、二本目の「一致」の杖も折られたのでした。ですから、今まで彼らを神の羊としてきた「慈しみ」と「一致」とは取り去られるだろうという預言だったのです。そのことが、ユダヤ当局者たちが、メシアを自分勝手に侮り、メシアの血の代価を拒絶したときに起こったのです。
しかし同時に、血の畑は、イスラエル民族との契約の杖がおられた後に、再び主がまことの選民を顧みられて、新しい契約を結んでくださる保証でもありました。誰に対する保証なのかと言えば外国人です。つまり、メシアの血の代価を外国人の無縁墓地として割り当てましたが、実にこの時、異邦人が新しい民として起こされたのです。メシア的牧者は、旧約の選びの民から、奴隷のごとくに値踏みされ、捨てられますが、そのイエス様がご自身の血を持って新しい契約の民を買い取り、買い取られた異邦人たちを天の御国の相続地の世継ぎと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このようにマタイによれば血の畑が生き生きと証言していることとは、まさに以前、人身御供が捧げられたその場所において、エレミヤが壺を砕いたその場所において、イスラエルがメシアの血の代価を拒絶してしまったこと、それを奴隷の価である銀30枚で値踏みしたことを証言しているのです。そして、同時に、その血の価によって外国人墓地が購入されたことによって、異邦人が新しい民として代わりに起こされたということを証言してるのです。
ユダヤの当局者たちの一体誰が、血の畑が生き生きと証言している内容を自覚することができたでしょうか。しかし、今日、私たち異邦人キリスト者は、血の畑が叫んでいる証言を、感謝をもって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十字架に架けられたイエス様は、まさに旧約の預言者によって証しされた、来るべきメシアであり、ご自身の血の代価によって私たち罪びとを買い取ってくださったお方です。わたしたちはこの方に礼拝を捧げるのです。お祈りいたしましょう。